2336. 인문 운동가의 인문 일지
(2023년 4월 25일)

오늘도 정문정의 책, <<무례한 사람에게 웃으며 대처하는 법>>을 읽고 있다. 자기표현의 근육을 키우는 법을 공유하는 중이다. 이를 위해 오늘 아침은 '자신의 감정을 믿어라'는 이야기부터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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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쾌하다'는 감정은 원래 주관적인 것이다. 다른 사람이 허락하고 말고 할 성질의 것이 아니다. 나를 불쾌하게 할 때는 웃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 흔히 우리는 그런 경우 머쓱하게 웃는다. 가해자는 일를 악용한다. 상대도 자신에게 호감이 있다고 생각했다 거나 적극적인 거부의 의사를 알리지 않았다는 증거로 쓰는 것이다. 더 미치는 것은 웃는 것을 보고, 자신이 재치가 있다고 착각하는 경우이다. SNS의 경우, 불편한 말에는 어설프게 대응하는 것보다는 아예 '읽씹(읽고 무시하기)'을 하는 것도 유용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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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의가 계속되면 사람들은 권리인 줄 안다. 무조건적인 사람을 받은 경험이 없는 사람들은 누가 자기를 좋아한다고 하면 금세 감격한다. 그러면서 그 상태를 오래 유지하기 위해서 대가를 치러야 한다고 생각한다. 자기 자신 자체로 사랑받아온 적이 없으니까, 자꾸 무리하게 확인 받으려다 망가진다. 자신이 희생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어느 순간 폭발한다. 대가를 바라지 않는 것처럼 행동하지만 사실을 누구보다 인정이나 배려를 갈구하기 때문이다. 그러니 누군 가에 선물을 할 때는 진심일 때만, 무리하지 않는 선에서 할 수 있는 것만 한다. 과한 호의는 주는 사람도 망가지게 하지만, 받는 사람도 망가진다. 호의가 계속되면 권리인 줄 알기 때문이다. 무리하지 않는 게 중요하다. 그래야 관계가 지속된다. 우리가 사람에 기준이 너무 높은 것은, 적은 경험으로 일부의 모습에만 집중하는 바람에 편견에 사로잡혀서 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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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처에 대해 용감해 져라. 다소 차이는 있을지라도, 우리는 교통사고를 당하듯 누구나 1인분씩의 불운을 만난다. 그런데 어떤 사람은 시간이 많이 지나도 상처에만 집중해 자신을 불쌍히 여기고 남을 미워하는 데서 헤어나지 못한다. 그러나 조금 더 여유를 가지고, 그 상처에 대해서는 조금 더 용감해질 필요가 있다. 상처에서 배우는 사람만이 더 나은 사람이 될 수 있다.
인생은 폭풍우 속에서 어떻게 살아남을 것인가가 아니라 빗 속에서 어떻게 춤을 추는가 하는 것이다. 류시화 시인에게 들은 말이다. 언젠가 책을 내게 되면, 이런 제목을 선택하려고 생각한다. <<나는 빗 속에서 춤을 추었다.(가제)>>가 될 것이다.
의미를 찾을 수 있는 고통은 추락이 아니라, 재탄생의 순간이고 새로운 여행의 시작이다. 류시화 시인에 의하면, 가톨릭에서는 이 고통을 펠릭스 쿨파(felix culpa), '행운의 추락'이라고 표현한다고 했다. 좌라는 것은 참 복된 것이라는 거다. 상처가 구원으로 인도하기 때문이다. 고통을 겪고 슬픔에 잠겨 있을 때 신과 가장 가까워진다. 아플 때 에고의 껍질이 부서지기 때문이다. 상처 받은 자에게 사람들은 기도를 부탁한다. 다른 누구보다도 그 사람의 기도가 신에게 가 닿을 만큼 절실하고 강력하기 때문이라고 본다.
삶이 우리를 밖으로부터 안으로 불러들이는 방법이 상처이다. 우리의 삶이 상처보다 크기 때문이다. 모든 상처에는 목적이 있다. 어쩌면 우리가 상처를 치료하는 것이 아니라, 상처가 우리를 치료하는지도 모른다. 내가 상처라고 생각하고 여긴 것은 진정한 나를 찾는 여정과 다르지 않을 때가 있다. 삶의 그물망 안에서 그 고통의 구간은 축복의 구간과 이어져 있을 수 있다. 축복이라는 영어 blessing은 프랑스어 blesser에서 왔다. 프랑스어 blesser는 '상처 입다'란 뜻이다. 어원이 같다. "축복을 셀 땐 상처를 빼고 세지 말아야 한다."(류시화) 멋진 문장이다.
공자 부모는 54살 차이가 났다. 공자가 태어날 당시 아버지의 나이가 일흔 살이었다. 그 아버지는 공자가 세 살 때 돌아가셨다. 그래 그는 어려서 부터 갖은 고생을 다하며 자랐다. 그러나 공자는 4대 성인 중 한 명이다. 그래 그는 이렇게 말한다. "나는 어려서 비천한 일에 대한 많은 능력이 생겼다." 그래도 살아 생전에, 그에게는 고진감래의 시간은 찾아오지 않았다. 그는 세상을 주유하다가 68에 고향으로 돌아 와, 굴하지 않고 인간이 가야 할 길을 이야기 했다. 공자에게 가장 큰 위로는 '배움'이었다.
그에게서 용기를 얻는 아침이다. 사업해 돈 많이 벌고, 출세하고, 유명해졌다고 해도, 정의와 자유, 평등, 사랑'을 건설하는 데 일익을 담당하는 삶을 살지 않았다면 결코 성공한 삶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러니 아이들에게 돈만 알려주는 '금수저'는 다음과 같이 4 가지를 갖지 못하게 된다.
(1) 영혼이 성숙될 기회를 갖지 못한다. 영적인 성숙은 피, 땀, 눈물이라는 3가지 액체를 많이 흘리지 않고는 어렵다. 그들의 인격은 빈곤해 진다. 돈이 좀 부족하면 주변 사람들에게 도움을 요청한다. 그런 상태가 되어야 자아를 덜어낼 수 있다. 그 순간 겸손해지고, 조금이라도 도움을 받으면 정말로 감사의 마음이 솟구친다. 이 비움과 감사를 훈련하는 게 바로 영성이다.
(2) 부모로부터 통제를 많이 받으면, 세상을 보는 자신만의 관점 독립을 갖지 못한다. 세상과 사람을 보는 나 만의 독립적인 관점을 가질 수가 없다는 이야기이다. 게다가 이들은 스스로를 증명할 수 없다는 약점도 갖는다. 인생을 실패해 봐야만 완전한 제로 베이스에서 인생 출발을 한다. 그래야 철저하게 자기 눈으로 세상을 보는 안목을 획득하게 된다. 주입된 관점에서는 창조를 못한다.
(3) 다른 이에 대한 믿음을 갖지 못한다. 사람들을 못 믿는다. 물질적, 신분적 풍요는 가식(假飾) 속에서 생활하기 쉽기 때문이다. 그래서 재산을 물려받은 2, 3세는 다른 사람을 의심하는 의심병도 많다. 가식을 많이 경험해봤기 때문이다. 부자들은 살면서 무척 경계심이 많다. 그래 사람들을 잘 믿지 않는다. 사실 좋은 출발 조건과 행복한 삶과는 관계가 크지 않다. 그 큰 유산을 가졌다면 걱정이 없을 것인데, 그렇지 않다. 그들은 상처받기 쉬운 내면을 갖고 있다. 그리고 돈을 뜯길까 봐, 의심이 그의 머리에 먹구름처럼 떠다닌다.
(4) 일을 하지 않아, 무균실 안의 '금수저'들은 다른 사람들과 격리되어 현실 세계와 단절된 채 살아가야 한다. 사실 일은 인생을 설계할 때 필수적인 역할을 한다. 우리는 일을 통해 자신이 사회에 공헌하고 있다는 느낌과 배움을 얻고, 도전에 맞서 성장하며, 사회적 지위를 획득하고, 자립하는 동시에 공동체에 속하는 특권을 누릴 수 있다. 인간은 자신이 쓸모 있고 생산적인 존재라고 느껴야 성숙해진다. 그래 우리는 일이 있어야 한다. 일이 있다면, 돈에만 집중하지 않고 삶에서 의미 있는 일에 공헌할 수 있다. 그리고 일은 가족으로부터 조금이나마 독립하기 위한 수단이기도 하다.
징소리는 제 몸의 상처가 깊을수록 가슴속에서 길어 올린 소리로 멀리 퍼져 나간다. 상처 없이 완성되는 삶이 어디 있으랴! 징채도 한 번 제대로 못 잡고, 그렇다고 목청껏 소리 내어 울지도 못하는 붉은 징 같은 삶이 곧 서민들의 삶 아닐까 싶다. 언젠가 가슴 한 복판에 명중하는 징소리를 꿈꾸며 오늘도 처마 밑에 쭈그려 앉는다
징/박정원
누가 나를 제대로 한방
먹여줬으면 좋겠다
피가 철철 흐르도록
퍼런 멍이 평생 지워지지 않도록
찡하게 맞았으면 좋겠다
상처가 깊을수록
은은한 소리를 낸다는데
멍울 진 가슴 한복판에 명중해야
멀리멀리 울려 퍼진다는데
오늘도 나는 처마 밑에 쭈그리고 앉아
서쪽 산 정수리로 망연히
붉은 징 하나를 넘기고야 만다
징채 한번 잡아보지 못하고
제대로 한번 울어보지도 못하고
모가지로 매달린 채
녹슨 밥을 먹으면서
오늘 아침 사진은 나의 채소밭 가는 길에 만난 거다. 땅의 중력을 이기고 올라온 완두콩의 싹이 아름답다. 난 거기서 인문 정신을 봤다. 인문 정신은 '아파도 당당하다.' 문제가 있다면, 대충 관념적으로 장난치지 말고 정면으로 맞서야 한다. 그래서 인문학의 길은 아프다. 아파야 살아있는 것이다. 안 아프면 죽은 것이다. 삶은 원래 아픈 것이다. 그러니까 살아 있다는 것은 모든 것이 다 힘든데도 버티며 사는 것이다.
삶이 그렇게 아픈 것은 자신이 원하는 삶을 살려고 자꾸 연어처럼 강물을 거슬러 올라가기 때문이다. 힘들다고 해서 힘들지 않은 방향을 선택하면 강물에 휩쓸려 내려간다. 그것은 살아도 죽은 것이다. 왜? 죽은 물고기만 내려가니까. 우리에게는 두 가지 현실이 있다. 극복해야만 하는 현실, 순응해야만 하는 현실. 그런데 순응해야 하는 현실은 죽은 것이다.
다른 글들은 나의 블로그 https://pakhanpyo.tistory.com 이나 https://pakhanpyo.blogspot.com 에 있다. 최근에는 우리마을대학 홈페이지 블로그에도 글을 올린다. https://www.wmcss.net 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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