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17. 인문 운동가의 인문 일지
(2023년 4월 6일)

최근에는 산불 소식을 많이 듣는다. 어제 내린 비가 산불들을 진화하는 데 큰 도움이 되었다 한다. 그러나 어찌 비가 내리기만 바랄 수 있겠는가? 산불은 예방이 최선이다. 산림 전문가들은 우리나라 산들이 그동안의 강력한 식목 정책으로 이제 어느 정도 푸르러진 만큼 앞으로는 간벌 등으로 산불과 산사태 예방 등 재난재해를 막고, 임업인들의 수익을 증대시킬 수 있는 산림자원 고도화 정책으로 변화해야 한다고 조언하고 있다. 우리 사회가 그동안 앞만 보고 달려왔기 때문이다. 산불을 막으려면, 여러 대책이 있다 한다.
제일 먼저, 비교적 불에 잘 타지 않아 산불 확산을 차단하는 내화(耐火)수림대의 구축이 요구된다. 우리 산림 중 40%가 소나무와 잣나무 등 침엽수림인데 침엽수에는 송진 등 기름 성분을 포함하고 있어 산불 발생 시 불쏘시개 역할을 하게 된다. 이와 달리 물푸레나무, 떡갈나무, 굴참나무, 느티나무, 은행나무 등은 나뭇잎에 수분을 많이 함유하고 있어 대표적인 '내화 수목'으로 불린다.
산불 하면, 작년에 있었던, 울진 산불이 피해가 심했다. 산불이 9일간 계속되면서 5500만평을 태웠는데, 서울 여의도 면적의 63배 크기였다. 규모에서 역대 최고였을 뿐 아니라 피해도 다른 산불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컸다. 울진산불 피해가 커진 원인은, 산불 현장에서 멀지 않은 곳에 금강송면이 있을 정도로 울진에는 좋은 소나무가 많있기 때문으로 본다. 이 소나무를 보호하고, 또 소나무에 기생하는 송이버섯을 더 많이 채취하기 위해 옆의 활엽수를 베었는데 이것이 산불 피해를 크게 한 원인이 되었다는 거다. 활엽수 잎은 수분을 머금고 있어 산불이 나면 자연스럽게 소방 역할을 한다. 이런 활엽수를 베었으니 자연이 담당하는 소방 기능을 인간 스스로 없앴던 것이다. 게다가 활엽수가 잘려나간 곳은 불의 통로가 돼 불이 번지는 데 한몫 했다. 자연의 이치를 외면한 인간 행동이 이런 예기치 않은 결과를 초래한 거다.
이 곳의 금강 송은 일반 소나무와 달리 송진이 유난히 많다. 금강 송은 송진이 줄기의 80%를 차지하는 데 반해, 일반 소나무는 10% 정도라 한다. 이런 송진이 큰 막을 형성해 금강송이 단단하다. 또 이 송진 막으로 금강송이 잘 휘지 않을 뿐더러 벌레가 나무 안으로 기어들지 못해 균열도 잘되지 않는다. 옛날에는 궁궐 같은 주요 건물 외에는 금강 송을 사용할 수 없어 함부로 베서는 안 될 '금송(禁松)'이었다.
울진산불 피해의 원인을 동아시아 전통적 학문관을 소홀히 한 데서도 찾았던 김정탁 노장사상가의 글을 읽은 적이 있다. 나도 그 의견에 동의한다. "동아시아 학문관은 자연의 이치인 '천도(天道)'에 따라 사람이 살아가는 '인도(人道)'와 사회가 나아가는 '치도(治道)'를 제시한다. 인도와 치도는 자연의 이치를 거스르지 않아야 한다"고 하면서, 그는 "자연의 이치를 소중히 여기는 동아시아 학문은 서구 학문의 엄격한 과학성과 비교된다"고 했다.
그러니까 '인도'에 해당하는 서구 인문과학과 '치도'에 해당하는 서구 사회과학은 물론이고, '천도'에 해당하는 서구 자연과학조차 자연의 이치를 소홀히 하는 경우가 있다는 주장이다. 마찬가지로 소나무 옆의 활엽수를 제거한 것도 자연의 이치를 소홀히 한 일에 속한다는 거다. 전문가들은 나름 ‘합리적’ 판단이라고 여겨서 활엽수를 제거했는지 모르지만, 산불이 나면서 이런 판단은 전혀 합리적이지 않은 것으로 드러났다는 말이다. "소나무가 사람의 사랑을 아무리 많이 받아도 활엽수와 동거하도록 놔두는 게 동아시아 학문이 말하는 지혜이다. 또 계절에는 사시사철이 있고 하루에는 밤낮이 있는 것처럼 산에는 온갖 나무가 있어야 하는 게 자연의 이치이다. 이런 동아시아적 지혜를 소홀히 하고 자연의 이치를 무시한 결과 울진산불 피해는 눈덩이처럼 불어났다"는 주장이다. 올해도 곳곳에서 산불이 일어나는 원인 중의 하나이다.
그렇다면 울진산불 피해가 커진 원인을 동아시아 전통적 학문관을 소홀히 한 데서도 찾을 수 있지 않을까. 동아시아 학문관은 자연의 이치인 천도(天道)에 따라 사람이 살아가는 인도(人道)와 사회가 나아가는 치도(治道)를 제시한다. 인도와 치도는 자연의 이치를 거스르지 않아야 한다. 이처럼 자연의 이치를 소중히 여기는 동아시아 학문은 서구 학문의 엄격한 과학성과 비교된다. 그래서 인도에 해당하는 서구 인문과학과 치도에 해당하는 서구 사회과학은 물론이고, 천도에 해당하는 서구 자연과학조차 자연의 이치를 소홀히 하는 경우가 있다. 김정탁 노장사상가의 주장을 계속 따라가 본다.
"산에는 온갖 종류의 나무가 있듯이 세상에도 온갖 사람이 있다. 이런 세상에서 좋은 사람만 있기를 기대하는 건 희망 사항일 뿐 서로가 공존하는 길을 모색하는 게 현실적으로 타당하다. 그런데도 서구 형이상학은 이런 희망이 세상에서 구현되기를 오랫동안 꿈꿔 왔다. 고대 그리스 플라톤 철학이 ‘이데아’를 도입하고, 중세철학이 ‘신’을 요청하고, 근대철학이 ‘이성’을 받든 건 이런 이유에서다. 그 결과 서구는 이데아, 신, 합리성에 의해서 인간세계에 선(善)의 세계가 도래하기를 바랐다. 이런 바람은 산에는 소나무만 있어야 하고 기업에는 유능한 사람만 있기를 기대하는 것과 같은 맥락"이라는 거다.
김정탁 노장사상가에 의하면, "20세기 후반 들어 이런 바람은 후기구조주의 철학자들에 의해 깨졌다. 프랑스를 대표하는 지성 데리다(J Derrida)가 이런 철학적 조류에 앞장섰는데 그는 2000년이란 오랜 역사를 지닌 서구 형이상학을 무너뜨렸다는 평가를 받는다. 그에 따르면 세상은 신과 같은 완벽한 존재가 쓴 ‘성선(性善)의 책’이 아니라, ‘선악(善惡)이 함께 써 내려간 텍스트’이다. 이런 텍스트는 선이라는 씨줄과 악이라는 날줄이 교차하면서 짠 직물과 같다. 이런 직물과 같은 세상에선 이데아, 신, 합리성과 같은 절대적 중심이 없는데도 조화와 평형을 기막히게 이룬다. 우리가 사는 세상도 이런 원리로 운영되어야 마땅한 게 아닌가? 자연계에선 어느 게 좋고 어느 게 나쁘지 않다. 소나무가 좋고 활엽수가 나쁘면 그건 인간의 관점이다. 마찬가지로 유능한 사람만 있기를 기대하는 건 경영인의 관점이다. 그러니 훌륭한 경영인이 되려면 구성원을 해고하기에 앞서 이들을 적재적소에 배치하는 데 관심을 쏟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자연계는 이렇게 운영되므로 전체로서 조화와 평형을 잘 유지한다. 장자는 자연계의 이런 소프트웨어를 가리켜서 "화리(和理)"라고 말한다. 늘 "합리"만 생각했지, "화리"라는 말은 처음 들었는데, 참 좋은 말이라고 생각된다. 김정탁 노장 사상가에 의하면, "'화리'는 자연스러운 알맞음과 적당함을 추구하므로 최선과 최고를 위해 시비와 우열을 인위적으로 가리는 합리(合理)보다 우선한다. 그렇다면 울진산불에서 배워야 할 교훈도 이런 화리의 소중함이지 않을까?" '합리'에서 '화리'로 건너가자는 주장이 내 박사 학위 논문 주제였다. 프랑스 18세기의 계몽주의('빛의 세기"에 팽배한 합리주의에 문제 제기를 한 디드로의 소설 작품들에 나타나는 "균형과 불균형'의 문제가 같은 주제였다. "화리"라는 말에 꽂혀 아침에 긴 글을 공유한다.
우리는 세상 모든 생명과 연결되어 보살핌을 받는 존재이다. 내 존재만 혼자서는 살 수 없다. 그건 좀 생각만 하면 그렇다. 이성의 동물이라는 우리가 그 이성을 하루에 몇 분이나 써가며 사는가? 다 기분과 감정에 따라 선택하고, 습관처럼 밀려드는 일상에 휩쓸려 하루를 보낸다. 우린 너무 많은 것을 알고 있지만, 매우 적게 느낀다. 그래 감각의 지평을 확장해야 한다. 듣고, 냄새 맡고, 만지고 하며, 느낄 수 있지만 정작 이렇게 느끼는 감각은 천천히 약해져 간다. 우리는 너무 많은 지식을 얻는다. 그만큼 느낌의 힘으로 균형을 이루어야 한다. 세상의 답은 하나만이 아니다. 결과의 답도 있지만, 과정의 답도 있다. 살면서, 과정을 느끼며 사는 것이 '균형 찾기'이다.
오늘 아침은 그 단비가 그쳤다. 조금 더 왔으면 좋았을 텐데. 전남 함평과 순천 등 전국 대부분의 산불은 자연 진화됐다고 한다. 소방관과 산림 공무원들도 숨 돌릴 여유가 생겼을 것이다. 도서 벽지 주민들의 목마름도 잠시 해소됐다고 한다. 그러나 완전 해갈까지는 멀었지만, 거북 등처럼 갈라진 남녘 저수지에도 물이 스며들었다고 한다.
비는 부자와 빈자를 가리지 않고 똑같이 적신다. 까만 농부의 얼굴에 오랜만에 희색이 돈다. 화마에 놀란 인왕산의 풀과 나무도 기지개를 켠다. 일찍 핀 꽃은 비바람에 지겠지만 이파리는 푸르름을 더할 것이다. 오늘 아침 사진 속의 옥잠화도 키가 크게 자랄 것이다. 극심한 가뭄에도 하루 수십 번씩 수세식 변기 물을 내리며 사는 도시인들은 단비의 정서와 의미를 알기 어렵다. 세속적인 셈법으로 경제 효과가 수천 억원이라고 하면 그제서야 고개를 끄덕인다.
옛사람들은 비를 거저 얻지 않았다. 비가 올 때까지 기우제를 지냈다. 흔히 ‘인디언 기우제'라고 하지만 동서를 막론하고 모든 기우제가 같은 방식이었다. 조선 시대에는 억울하게 누명 쓴 죄수가 있는지 살피고, 왕의 수라상 찬을 줄였다. 그리고 사람들은 단비 같은 존재가 되길 바라며 자손에게 ‘시우(時雨)’라는 이름을 붙였다. 중국 고전소설 <수호전>의 주인공 송강의 별명도 가뭄에 때맞추어 내리는 비라는 뜻의 ‘급시우(及時雨)’다. 단비는 괴로움 끝에 즐거움을 맞는 상황을 비유해 자주 쓰인다.
단비 같은 존재가 되자고 다짐하며, 또 하루를 감사하게 맞는다.
하루/이남일
눈을 뜨자 새벽은 또
하루치 시간을 밀어 놓고 간다.
늘상 해야 할 일과
불쑥 떠안아야 할 시간을
톱니 같은 일상을 떼어놓고
감칠 맛 나는 식사 시간은 길게
음악을 곁들인 티타임은 짧게
유리알 세듯 일감을 배분하고 나면
시간 보내기 하루는 숨이 가쁘다.
종일
일과 일 사이를 기다림으로 채우며
밀린 시간을 보내고 나면
지나온 나이에 노을 빛 하루가 보태지고
행복의 뒤에서 바쁜 하루는
시간이 왜 가는지도 모르면서
내일을 위해
또 다시 목마른 손을 내민다.
다른 글들은 나의 블로그 https://pakhanpyo.tistory.com 이나 https://pakhanpyo.blogspot.com 에 있다. 최근에는 우리마을대학 홈페이지 블로그에도 글을 올린다. https://www.wmcss.net 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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