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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운동가의 사진 하나, 시 하나

산다는 것은 '비틀기'라는 게 내 철학이다.

2311. 인문 운동가의 인문 일지
(2023년 3월 31일)
힘들었던 3월이 지나간다. 오늘이 그 마지막 날이다. 개인적으로는 긴 리폼의 시기"였기 때문이다. 이 치료도 마치고, 감상선 수술도 잘 마치었다. 이젠 4월이 시작되면 진짜 스프링(봄)의 시기가 시작된다. 그러나 세상은 아직 혼탁하다. 조금만 눈을 돌리면, 거짓의 탈을 쓴 후안무치들이 판을 친다. '돈에 매수된 듯'한 '기레기'들과 자극적인 뉴스로 장사치처럼 자신의 기사를 팔아먹기에 혈안이 된 거지 같은 기사와 한 자리 혹시 얻을까 흑심을 품은 일부 어용 지식인들의 '혹세무민(惑世誣民)'하는 양아치들이 득실거린다. 그러나 나는 세상에 모든 것은 극점에 이르면 반드시 돌아간다는 "극즉반(極即反)"만 믿는다. 정점에 도달하면 내려올 일 밖에 남지 않고, 반대로 최저점으로 추락하면 올라갈 일만 남게 된다. "물극필반(物極必反)이란 말도 있다. 어떤 일이든 극에 달해야 반전이 생긴다는 거다. 이런 생각을 하며, 그냥 차이로, 다름으로 받아들이기 난 쉽지 않다. 난 세상에 정의가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거짓은 유통기한이 있다. 정점에 달하면 스스로 드러난다고 믿지만, 세상이 그렇게 돌아가지 않는다. 그래 나는 어두움은 빛을 이기지 못하듯이, 거짓은 진실을 이기지 못한다고 믿고 기다릴 뿐이다.
 
그래도 봄은 보라고 봄이라는 말이 있다. 눈이 부시다. 오늘 아침 공유하는 시의 시인은 "'냉정하라"고 한다. "사랑을 고백하지 마라"고 한다. 사랑을 고백하는 것도 금기 사항이라 한다. 그런데, 금기는 깨라고 있는 거로 나는 알고 있다. 금기(禁忌)의 사전적 정의는 '일상생활이나 종교 의례에서 어떤 대상에 대한 접촉이나 언행을 제한하는 관습을 가리키는 종교용어'이다. 그러나 금기의 일반적 해석은 그것을 '신적 질서'의 발현으로 본다. 그 금기를 깨는 것은 인간의 나약함의 발현이고, 동시에 신적 질서가 얼마나 엄중한가를 말하는 것이다. 금기는 동시에 유혹이다. 욕망은 금지로부터 나오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금기가 욕망을 부른다. 욕망이란 금지된 것을 갖고 싶다는 뜻이다. 신은 안다. 유혹에 넘어가 금기를 깰 것이라는 것을. 이런 식으로 신은 자신의 영토에 인간이 접근하지 못하게 한다. 그러나 금기의 경계를 넘어서는 것은 신의 입장에서 보면 오만이지만, 인간의 눈으로 보면 용기이다. 인간은 한계를 지닌 존재이지만, 그 한계 속에 장엄하게 침몰하는 모습 그 자체에서 의의를 찾을 수 있다. 그래 삶은 '비틀기'이다.
 
산다는 것은 '비틀기'라는 게 내 철학이다. 우리 삶의 모든 시도들은 지금보다 더 나아지려는 율동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우주가 완벽한 원운동을 하는 것이 진실이라고 받아들였다. 그러나 케플러는 행성이 원운동을 하지 않고 타원운동을 한다고 말했다. 원은 기하학적 관념으로만 존재하는 조작된 진실일 뿐이다. 진실은 원이 아니라, 타원이다. 원에는 에너지가 없지만, 타원에는 힘이 있다. 평면적이고, 정지된 지성에게 힘이 포착되기 어려운 것과 같다. 어떤 존재에나 '동사적인 삶'으로 힘을 일으키면, 절대 균형이 깨지고 뒤틀림이 일어난다. 타원이 그렇다. 균형을 깨는 탄성(彈性, 체에 외부에서 힘을 가하면 부피와 모양이 변하였다가, 그 힘이 없어지면 본디대로 되돌아가려고 하는 성질)이 바로 힘이다. 그래 봄을 영어로 Spring(용수철)이라 하는가 보다. 동물들이 먹이감을 발견하면, 즉시 몸을 비틀어 자신의 절대 균형을 스스로 무너뜨리고, 탄성을 준비하는 것처럼, 봄들도 균형을 깨고 있다.
 
그리고 그 탄성이 적중(的中, 목표에 어김없이 들어맞음)이라는 최종적인 완성을 보장할 것이다. 적중은 몸을 비틀어 꼬임의 상태로 스스로를 몰고 가서 '동작'으로 생산되어야 만날 수 있는 최종 경지이다. 여기서 자신을 비틀어 꼬이게 하는 움직임은 불균형이고 동작이고 힘이다. 그래 시는 불균형이도 동작이고 힘이 된다.
 
좀 다른 이야기이지만, 이러한 움직임의 이유는 생존이다. 인간 활동 핵심 동인은 생존이다. 인간의 모든 활동은 생존 전략의 일환이다. 생존을 도모하는 최초의 활동을 우리는 '분류'로부터 시작한다. 효율적으로 생존하기 위해 우리는 분류한다. 그리고 이렇게 이루어진 구분에 지속성을 부여하여 전승하기도 한다. 이 '구분'을 통해, 우리는 경험을 통제하는 능력을 축적한다. 이를 우리는 '지적활동'이라고 한다. 지적이라는 말은 경험을 통제하는 일관된 형식이다. 인간의 성숙도 지적인 능력의 개발과 연관된다. 지적인 사람이 더 잘 생존할 수 있다. 이 지적인 활동 능력을 우리는 '지능(知能)'이라 한다.
 
그런데, 지적인 사람들 속에서도 상대적으로 더 강한 사람이 있다. 은유할 줄 아는 사람이다. 그리고 시를 읽는 사람이다. 지적인 활동 자체를 확장하여 분류의 틈 사이를 헤집고 다니며 훌쩍훌쩍 건너뛰는 것이다, 아무 관계도 없는 이질적인 것들을 서로 연결하여 소통시켜 버린다. 인간에게 의미의 확장은 통제 영역의 확장이다. 은유를 통해 세계를 넓혀 나가는 자 가 '위대한 개인'이다. 시인 네루다는 이를 '메타포라고 말한다. 그 메타포, 은유는 '비틀기'이다. 은유는 뒤틀린 틈새를 허용하고, 또 끼어들어 둘은 상대방을 의지하며 새로 태어난다. 둘이 꼬인 것이다. 우린 이렇게 꼬여가면서 영토를 확장해 나간다.
 
"이 세계는 힘이 작동하는 비틀기로 꼬여 있다"고 노자가 말하는 것을 이젠 잘 이해하겠다. 음과 양으로. 전혀 관계 없었던 무엇과 꼬이고 또 꼬이며 영토를 확장하고, 또 확장해 나갈 때, 우린 힘을 얻고, 힘찬 모습이 된다. 이를 노자는 "유무상생(有無相生)"이라고도 한다. 그래 봄에 "금기 사항"이 있는 거다.
 
 
봄의 금기 사항/신달자
 
봄에는 사랑을 고백하지 마라
그저 마음 깊은 그 사람과
나란히 봄들을 바라보아라
 
멀리는 산 벚꽃들 은근히
꿈꾸듯 졸음에서 깨어나고
들녘마다 풀꽃들 소근소근 속삭이며 피어나며
 
하늘 땅 햇살 바람이
서로서로 손잡고 도는 봄들에 두 발 내리면
어느새 사랑은 고백하지 않아도
꽃 향에 녹아
사랑은 그의 가슴속으로 스며들리라
 
사랑하면 봄보다 먼저 온몸에 꽃을 피워내면서
서로 끌어안지 않고는 못 배기는
꽃술로 얽히리니
봄에는 사랑을 고백하지 마라
 
무겁게 말문을 닫고
영혼 깊어지는 그 사람과 나란히 서서
출렁이는 생명의 출항
 
파도치는 봄의 들판을
고요히 바라보기만 하라
 
 
지난 3월 25일에 이어, 오늘은 "'오티움'이 가져다 주는 변화"에 대해 살펴본다. 원래 사람은 잘 변하지 않지만, 사랑을 하면 변화한다. 영화 <이보다 더 좋을 수 없다>의 대사처럼 말이다. "당신덕분에 난 더 좋은 사람이 되어 싶어 졌어요." 이 말을 한 주인공 멜빈 유달(잭 니콜슨)은 강박증 환자이다. 그는 바닥에 있는 보도 블록 금을 절대 밟지 않고 길거리에서 지나가는 사람과 부딪히지 않으려 안간힘을 쓰며 늘 같은 식당의 같은 자리에서, 본인이 가지고 온 포크와 나이프로만 식사하는 심각한 강박증 환자로 나온다. 강박증 환자들의 대다수는 완벽주의적, 편집증적 소유자인 경우가 많지만, 이외에 스트레스나 과로 누적 또는 어떠한 사건, 사고로 인한 자극을 통해 발생하기도 한다. 문제는 이런 한 강박증이 방치되었을 때다. 강박증 증상이 점점 심해지만 상당 수의 환자들이 우울증으로 발전한다. 우울증은 곧 대인기피증, 사회공포증으로 이어지면서 일상생활을 어렵게 만들기도 하고 알코올 중독이나 식이 장애 등 치료하기 힘들 질환으로 이어지는 경우도 있다. 그러므로 강박증 증상이 자신이 통제할 수 없을 정도로 심각 해진다면, 빠른 시일 안에 전문 상담을 통한 치료를 시작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런 그가 사랑을 하면서 바뀐다. 그것도 좋은 방향으로 말이다.
 
이처럼, 영혼에 기쁨을 가져다 주는 '오티움'을 만나도 변할 수 있다. 어떤 대상을 좋아하고 사랑하게 되면 그 대상을 사랑하는 나 또한 바뀌게 된다. 다음과 같은 것들이 달라진다고 한다.
  • 스스로를 대하는 태도
  • 기본적인 감정선
  • 충동이나 감정에 대한 조절 능력
  • 에너지 레벨
  • 성격
이를 통해, 다음과 같은 세 가지 내적 변화가 일어난다. 자신에게 집중하고, 삶에 균형과 활력을 주고, 자신에 대한 평가, 즉 자존감이 높아진다. 실제로 자신만의 '오티움'을 접한 사람은 에너지의 방향이 바뀐다는 이야기를 한다. 그전에는 외부로 향했던 에너지가 이제 내부로 향하는 것이다. 그에 따라 자신을 이해하는 안목 또한 높아지는 건 자연스러운 결과다.
 
그리고 '오티움'은 균형과 활력을 준다. 나만의 '오티움'으로 마음이 편안해 져야 한다. 그건 들뜬 마음이 차분해 지는 거다. 그러면 점점 충동과 감정을 조절할 수 있는 힘이 생긴다. 덩달아 의식의 확장 되는 경험을 할 수 있다. 나 아니면 안 된다는 마음을 줄이고, 내가 아닌 다른 사람도 존재한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다. 그러면서 자신의 변화를 느낄 수 있다. 외부를 향하던 에너지를 내부로 향하면, 우리는 함부로 말하지 않고, 몇 번 더 생각하고 이야기 한다. 그리고 주변의 풍경과 일상의 관계를 보다 깊이 관찰하게 된다.
 
아무 것도 하지 않고 쉬는 것은 생존을 위한 에너지는 충전될 수 있다. 하지만 활기와 평정심을 찾을 수는 없다. 삶의 활기를 위해서는 오히려 능동적인 여가 활동이 필요하다. 현대인들의 번-아웃(소진)은 '과로'가 원인이 아니라, '능동적 휴식의 부재'가 원인이다. 자기가 좋아서 하는 능동적 여가 활동의 시간은 일의 긴장과 스트레스를 해소하고 안정과 기쁨을 주는 리뉴얼의 시간이 된다. 이를 전문가들은 '이스케이프 밸브(escape valve, 탈출 밸브, 배기관)'라 한다. 실제 '오티움'은 많은 사람들에게 '이스케이프 밸브', 탈출구를 넘어 활력소가 된다.
 
그리고 '오티움'은 자신에 대한 평가, 즉 자존감을 높여준다. 보통 어른의 자존감은 '좋은 경험'이 필요하다. 좋은 경험을 계속하면 굳이 애쓰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자기 인식이 바뀌기 때문이다. 자존감이 커진다는 것은 자신을 보다 이해하게 되고, 자신의 잠재력을 향상시키게 되고, 자심의 감각과 감성이 풍부해지는 거다. 그리고 자신에게 맞는 '오티움'을 만나면서, 시간이 지나도 계속하는 자신의 모습을 보면서, '끈기'가 있는 사람이라는 자기 평가가 달라진다. 또한 '오티움'을 통해 자신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게 된다. 그러면서 '타인의 시선'이 아니라, '자기만'의 방식으로 일상을 꾸리게 된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자신을 좋게 생각하려고 애쓰는 억지스러움이 아니라, 자신에게 좋은 경험을 선사해주는 것이다.
 
다른 글들은 나의 블로그 https://pakhanpyo.tistory.com 이나 https://pakhanpyo.blogspot.com 에 있다. 최근에는 우리마을대학 홈페이지 블로그에도 글을 올린다. https://www.wmcss.net 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