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00. 인문 운동가의 인문 일지
(2023년 3월 20일)

질풍노도의 시기라고 불리는 '사춘기(思春期)'라는 말에 빗대어 '사추기(思秋期)'라는 말이 있다. 젊음으로 대표되는 도전, 성공, 기회 등이 사라지고 무언가 인생의 내리막길을 맞이한 것 같은 불안과 걱정 혹은 무력감 등을 겪는 중년의 위기를 뜻한다.
이러한 '사추기'는 우리 사회에 나타나는 보편적 현상이다. 이들은 가족을 위해 자신의 삶을 저당 잡히고 살아온 이들이다. 이들의 삶을 움직이는 동기는 기본적으로 의무와 책임이다. 이 땅의 많은 중년들에게 하고 싶은 일을 하며 산다는 것은 생각하기 힘들다. '사춘기'와 '사추기'의 공통점이 다음과 같이 두 가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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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체적 성숙에 맞지 않게 심리적 자아가 발달하지 못한 청소년이나 마음먹은 데로 따라주지 못하는 몸을 가진 중년 둘 다 신체와 정신의 불균형 상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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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시기 모두 정체성의 혼란을 특징으로 한다. '나는 누구인가?' "나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라는 핵심적인 고민을 피할 수 없다.
두 시기의 위기는 '삶의 변화'를 요구한다. 살아가는 방식이 바뀌어야 한다. 잘 알다시피, 청소년 시기의 사춘기는 이제 부모에게 의존하는 삶을 벗어나 스스로 삶을 살아가야 하는 연습이 필요하다. 반면 중년의 위기는 외부로 향했던 삶의 에너지를 자신의 내부로 되돌려야 한다. 누군가를 책임지거나 자신의 능력을 외부에 입증해 보여야 한다는 강박에서 벗어나 삶을 돌아보고, 지신에게 집중해야 한다는 거다. 사람들이 중년의 위기를 맞아 대응하는 방식을 보면 다음과 같이 크게 4가지 유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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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념: 희망을 놓아버린다. 그리고 허무함과 씁쓸함을 달래려고 중독이나 외도와 같은 순간적 쾌락이나 일탈로 빠져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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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정: 자신의 삶이 위기에 봉착(逢着)해 있다는 것을 부정한다. 그러다가 우울증이나 번-아웃(소진) 증후군처럼 심신의 건강에 큰 이상이 생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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확장: 주의를 내부로 기울여 현재의 삶에 새로움을 보탠다. 자신이 하고 싶은 것을 미루지 않고 지금 시작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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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편(再編): 지금까지 살아온 가치와 방식을 전복하고 새로운 삶을 살아간다. 삶을 자시 짜는 거다.
이 네 가지 중에 지금 당장 가능한 것은 '확장'이다. 그것은 일의 변화 라기보다 여가의 변화이기 때문이다. 여가가 달라지면 마음이 달라지고 삶도 달라진다. 그리고 중년의 위기를 극복하려면 외부로 향하던 에너지가 내면으로 향해야 한다. 미래로 향했던 초점이 오늘로 바뀌어야 한다. 그리고 중년 위기의 본질이 '기쁨의 상실'이라면, 중년 위기의 회복은 '기쁨의 복원'이다. 그리고 이를 가능하게 하는 현실적 대안이 바로 '오티움'(능동적 여가 활동)이다. 나의 ;오티움'을 찾으면 기존의 삶을 유지하되 새로움을 불러일으키며 삶을 더 한층 확장 시켜간다.
위기(危機)라는 말의 한자 어를 보면 '위험과 기회'가 공존하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중년의 위기는 꼭 부정적인 것만은 아니다. 삶의 불균형을 자각하고 삶의 균형을 되찾으려는 시도이기 때문이다. 그 핵심은 안과 밖의 균형을 말한다. 그래서 중년의 위기를 잘 넘어서는 이들은 삶의 외부를 꾸미는 것으로부터 벗어나 삶의 내부를 가꾸는 데 치중한다. 즉 '꾸밈'에서 '가꿈'으로 삶의 방식이 바뀌는 것이다. 여기서 '꾸미다'의 사전적 의미가 '모양이 나게 매만져 차리거나 손질하다' 혹은 '없는 것을 사실인 것처럼 지어내다'는 뜻이다. 안은 달라지지 않고 겉만 바꾸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어느 순간, 우리는 그러한 꾸밈이 부질없고 자신의 삶에 집중하는 게 중요하다는 자각이 피어난다. 즉 '꾸밈'에서 '가꿈'으로 삶의 방식이 바뀐다. '가꾸다'의 사전적 정의는 '좋은 상태로 만들려고 보살피고 꾸려가다'이다. 즉 안이 달라지는 것이다. 이건 중년만의 문제가 아니다. ㄱ인화 시대에 우리는 자신의 에너지를 외부가 아니라, 내부로 돌려야 한다. 자기 세계를 만들고 가꿔야 한다.
나의 오티움은, 산책하면서, 사진을 찍는 거다. 오늘 아침 사진은 주말 농장을 다녀오면서 석양을 찍은 거다. 이를 위해 셀카봉에 가장 최신 스마트폰을 지난 주에 샀다. 태양은 뜰 때보다 질 때 더 예쁘다. 오늘 아침 공유하는 시인은 나이를 먹을수록 해 넘어가는 속도도 빨라진다고 개탄한다. 어릴 적에는 그렇게 천천히 넘어가더니, 나이를 먹은 지금은 미끄러지듯 넘어가 버린다. 그리곤 눈 깜박할 사이에 어두워져 버린다. 누군가의 우울한 기분처럼. 그렇게 말이다.
오늘의 사랑/박주하
저 해는 매일
서산을 넘는 연습을 했던 모양이다
어릴 적 엄마를 기다릴 때는
걸음이 느리더니
이젠 미끄러지는 공처럼 빠르게
넘어간다
눈 깜박하는 사이에 또 해를 놓쳤다
붉디붉은 눈으로 어두워지는
오늘 저 석양은 누구의 기분일까
지금은 사람들의 관심이 돈이 되는 세상이다. 예를 들어 유튜브가 그렇다. 관심의 척도는 시간이다. 몇 사람이 구독하고 있고, 한 번 방문 할 때 얼마나 머무르며, 공고가 몇 번 노출되고, 얼마나 자주 재방문이 이루어지는지를 본다. 유튜버들은 이용료 대신 우리의 시간을 가져간다. 이를 위해 매혹적인 콘텐츠를 만들어 우리의 시간을 빼앗아 간 만큼의 돈을 받는다. 그들이 원하는 것은 우리의 시간이며, 그것이 바로 콘텐츠 경제이다. 그 민 낯을 잘 알아야 한다. 그렇게 보면 시간은 돈이다. 그런데 돈에 대한 태도와 시간에 대한 태도가 다르다. 돈은 아끼면서도 시간은 아무렇지도 않게 허비하는 경우가 많다. 특히 일하는 시간은 1분이라도 더 하지 않으려고 하면서, 일 이외의 여가 시간은 아무런 관심조차 두지 않는 사람들이 너무 많다. 가만히 보면 여가는 의미 없이 보내는 시간 투성이다.
물론 모든 시간을 생산적으로 보내야 한다는 것은 아니다. 아무 것도 하지 않고 가만히 쉬는 것 또한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다만 정도껏 이어야 한다. '여가'라는 말의 이미지가 '여유와 한가함'이다 보니, 우리는 '여가' 하면 '아무 것도 하지 않는 것'을 휴식 이라 여기고, '남는 시간'을 '여가'라고 생각한다. 여가는 '쉼과 함께 채움이 되어야 한다. 에너지를 쓰는 것이 아니라, 재충전이 되어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균형이 중요하다. 예를 들어, 평소 많이 쓰는 기관은 쉬게 하고, 잘 쓰지 않는 기관을 써야 제대로 된 휴식이다. 다음과 같은 균형을 찾을 때 삶은 활기를 되찾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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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자에 오래 앉아 머리를 썼다면 주말에는 머리를 쉬고 산책이나 운동을 하며 몸을 움직여야 한다. 반대로 너무 몸을 혹사한 사람이라면 주말에는 몸을 푹 쉬게끔 독서나 음악 감상 등을 통해 정신적 자극을 주어야 한다. 몸과 머리의 균형을 맞추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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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소 능동적으로 활동한 사람이라면 여가의 시간에는 가만히 쉬거나 수동적으로 참여하는 활동도 괜찮다. 그러나 평소 시키는 일만 수동적으로 한 사람이라면 여가는 스스로 계획하고 주도적으로 참여하는 게 필요하다. 자율과 타율의 균형을 맞추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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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속도 역시 마찬가지이다. 정신 없이 바쁘게 일했다면 좀 더 느린 속도의 여가가 필요하고, 여유가 있는 일이라면 좀 더 긴장감 있는 여가가 필요하다. 빠름과 느림의 균형을 맞추는 것이다.
그리고 가슴이 원하는 여가가 필요하다. 많은 사람들은 '내가 정말 원하는 게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두려워한다. 왜냐하면, '나는 대체 무엇을 위해서 살고 있는가'라는 걷잡을 수 없는 삶의 회의를 마주할 자신이 없기 때문이다. 최악의 삶은 아무 의미 없는 일을 억지로 하고, 일 이외의 시간까지 의미 없이 보내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하루의 시간을 다음 4가지로 나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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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속(拘束) 시간: 근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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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半)구속 시간: 출퇴근, 가사, 식사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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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시간: 오락, 휴식, 취미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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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면시간
통상적으로 건강한 삶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자유 시간과 수면 시간이 12시간가량 필요하다. 이 자유이 바로 여가 시가인다. 여기서 여가는 '남는 시간'이 아니라, '자유 시간'이다. 여기 '진짜' 자유는 하기 싫은 것을 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하고 싶은 걸 하는 것이다. 이를 위해서는 나만의 취향을 찾아야 한다. 톨스토이는 '취향이란 인간 그 자체다'라고 했다. 실제로 한 인간이 고유하다는 것은 그 사람이 가지는 취향이 고유하다는 의미 와도 닿아 있다. 그러니까 취향은 남과 같은 게 아니라, 남과 다른 그 무언 가가 나를 타인과 구분 짓게 만드는 것이다. 예컨대, 칠리소스는 약 1:4의 비율로 칠리와 토마토가 들어 있다. 이름은 칠리 소스이지만 매운 맛을 내는 붉은 고추인 칠리(chili)는 토마토보다 훨씬 적게 들어 있다. 그럼에도 우리는 이를 토마토소스라고 하지 않고, 칠리소스라고 부른다.
취향의 사전적 정의는 "하고 싶은 마음이 생기는 방향, 또는 그런 경향'을 말한다. 즉 '마음이 기울어지는 방향'을 뜻한다. 우리는 각자 유일한 사람이기에 각자의 취향도 모두 고유하다. 그런데 자꾸 취향을 다른 사람과 비교하고 평가를 하고 점수를 매긴다. 그러나 취향을 높낮이로 따질 수 없고, 기본적으로 맞고 틀리고 의 문제가 아니다. 취향이란 내가 좋아서 끌리는 것이지, 그것이 꼭 남보다 우월하기 때문에 끌리는 건 아니다. 취향은 내가 누구인지를 드러낸다. '오티움'도 마찬가지이다. '오티'움 활동이 우리에게 기쁨을 주지만, 그 기쁨의 색깔이 다 다를 뿐이다. 예를 들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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패러글라이딩을 하고, 암벽을 오르는 사람들의 기쁨은 '흥분'과 연관되어 있다. 이들은 가슴 떨리는 긴장을 즐기고 이를 넘어설 때 강한 쾌감을 느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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춤을 추는 사람들은 리듬감 있는 움직임과 사람 들과의 교감에서 기쁨을 느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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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방을 만들고 글을 쓰는 등 유무형의 창작을 즐기는 이들의 행복은 '창조'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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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상을 하는 이들의 행복은 '고요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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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원을 가꾸고 식물을 기르는 이들에게 행복은 다른 생명과의 '연결감'이다.
그리고 취향은 고정되어 있지 않고, 끊임없이 변화한다. 취향은 기본적으로 다른 환경과 사람 들과의 관계 안에서 교류하며 발달해 간다. 그러니까 취향은 계속되며 성장한다. 취향이 단단해 질수록 삶은 구체성을 띤다. 그것이야 말로 행복의 디테일을 채우는 방법이다. 그래 나는 봉구(Bon gout,-프랑스어로 '좋은 취향')를 주장한다. 앞에서도 말했던 것처럼, 그 사람의 취향이 그 사람이다. 특히 취향은 심미적 능력이 성장한다. 심미안(審美眼) 수업을 해야 한다. 그건 차이를 알아보는 능력이다. 그 차이를 통해 본질을 꿰뚫어 보는 일이다. 아름다움을 파악하고 경험하게 되면, 스스로의 인식과 판단의 범위가 다음 단계로 올라서게 된다. 사유의 시선이 높아지는 거다. 삶의 높이는 사유의 높이와 비례한다. 사유의 시선이란 세상을 보는 눈이다. 사유의 시선을 높이면, 우리는 삶을 운용하는 실력도 좋아진다. 지금 겪고 있는 일이나 싸움을 세계 전체로 받아들이는 사람은 시선이 낮은 사람이다. 세상은 생각보다 넓다. 새로운 풍경을 만들어야 한다. 예컨대, 거실에 TV를 없애면, TV를 중심으로 만들어졌던 권력 관계나 시간을 쓰는 내용도 함께 사라져서 새로운 가정, 새로운 풍경으로 바뀐다. 변화를 이런 식으로 인식하는 것을 '인문적 통찰'이라고 한다. 철학은 '믿는' 것이 아니라, '생각'하는 것이다. 그런 다음은 사유의 생산자가 되어야 한다.
좋은 취향(bon goût, 프랑스어 봉구)과 교양은 돈으로 사는 게 아니다. 관심과 경험으로 사는 거다. 돈보다 노력이 훨씬 중요하고 많은 시간이 필요하다. 이를 우리는 '문화자본'이라고 한다. 예컨대, 돈 있다고 갑자기 옷을 잘 입는 게 아니다. 옷을 잘 입는다는 것은 비싼 걸 입는 게 아니라, 자기 스타일과 의복에 대한 교양을 아는 거다. 멋진 차림새는 TPO, 즉 시간(Time), 장소(Place 그리고 상황(Occasion)에 맞게 옷을 입는 거다. 그리고 색의 조화를 잘 맞추어 입는다. 젊을 때 문화 자본을 쌓지 못하면, 부자가 돼도 촌스러움을 버리지 못한다.
과거 귀족들이 갑자기 부자가 된 사람들을 무시한 건 그들 특유의 계급 의식 때문만은 아니다. 졸부들에겐 문화자본이 없기 때문이다. 여행도 마찬가지이다. 돈이 많으면 여행을 쉽게 다닐 것 같지만, 여행은 늘 용기와 실행의 문제이다. 부자가 되었다고 원래 그런 게 없던 사람이 갑자기 생기는 게 아니다. 돈만 있으면 다 된다고 말하는 사람은 돈이 있어 본 적이 없는 경우가 많다. 돈으로 채울 수 없는 문화자본은 어릴 때부터 꾸준히 쌓아야 한다. 그렇게 하지 많으면, 돈이 주는 혜택을 제대로 누릴 수 없다.
삶에 있어서 중요한 것은 자기 인생을 살아가는 , 자기 지도(me map)를 만들어 가는 거다. 살아가면서 우리는 자신을 탐색하고 발견해 나가는 것뿐만 아니라, 그 가능성을 실현시켜 나가는 것이다. 취향 역시 마찬가지이다. 이러한 자기 이해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바로 취향에 대한 이해이다. '나는 무엇을 좋아하고, 무엇을 싫어하는가?' '왜 이것은 끌리고 저것은 싫은가? 이런 질문과 탐색을 하는 거다. 이 질문들은 전생애를 통해 이어져야 한다. 나는 변화하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소설가 백영옥은 "싫어하는 것을 선택하지 않을 자유"가 행복한 삶이라고 하면서, "만약 내가 누구인지 모르겠다면 ‘좋아하는 것’이 아닌 ‘내가 싫어하는 것의 리스트’를 먼저 파악하는 것이 도움이 된다"고 했다. 싫음은 본능적이라는 거다. 사실 '싫음'은 '좋음'보다 더 강렬하고 잔상은 더 오래 남는다. 백 개의 선플 중 단 하나의 악플만 있어도 사람의 마음은 쉽게 무너진다. 무엇보다 싫음을 잘 알아야 하는 구체적인 이유는 이것이 각자가 가지고 있는 ‘자기 경계’ 즉 ‘기준 선’을 드러내기 때문이다. 싫음은 ‘선 긋기’의 예비 단계다. 시간 약속을 잘 지키지 않는 사람은 참아도 사소하게라도 거짓말하는 사람은 참을 수 없다고 말하는 것처럼 무례함, 폭력, 위선 등 사람마다의 그 기준선은 천차만별이다. 선 긋기는 타인에게 내가 어떤 사람인지 가장 선명하게 알리는 기술이다. 내가 무엇을 참을 수 없고, 어떤 것들을 받아들일 수 없는지 보여주기 때문이다.
백영옥은 "사람은 왜 좋은 지, 어떻게 좋은 지보다 왜 싫은 지, 어떻게 싫은지를 더 쉽고 구체적으로 답할 수 있다"고 했다. 그건 싫어하는 것의 리스트를 채우고 나면 좋아하는 것의 리스트도 점차 알게 된다. 인정 욕구, 체면, 콤플렉스, 자기 왜곡 같은 불순물에 뿌옇게 가라앉아 있었던 진짜 나의 모습이 서서히 떠오르는 것이다. 이것이 싫어하는 것을 꼭 알아야 하는 이유다. 좋아하는 것만 하고 사는 행복한 인생이 과연 가능할까? 그래 그녀는 "행복한 삶이 무엇이냐고 만약 내게 묻는다면, 나는 ‘싫어하는 것을 최대한 선택하지 않을 자유’라고 말하고 싶다"고 했다. 나도 오늘 아침 산책하면서 내가 싫어하는 것이 무엇인가 찾아보려 한다.
다른 글들은 나의 블로그 https://pakhanpyo.tistory.com 이나 https://pakhanpyo.blogspot.com 에 있다. 최근에는 우리마을대학 홈페이지 블로그에도 글을 올린다. https://www.wmcss.net 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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