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95. 인문 운동가의 인문 일지
(2023년 3월 15일)

우리는 바쁘게 살다가 지쳤다고 하소연한다. 그리고 쉴 시간이 없다고 한다. 막상 시간이 나면 잘 놀지 못한다. 뭘 하고 놀아야 할지 모르겠다고 한다. '쉬는 것'에 대해 진진한 사유를 해야 한다. 잘 쉬기 위해서는 다음과 같이 세 요가가 만족돼야 한다고 하지현 정신과 교수는 말한다. "'매일, 짧게, 혼자'이다. 그 반대 '어쩌다, 길게, 여럿'이다." 일상의 피곤함은 차곡차곡 쌓아 두었다가 긴 휴식으로 단번에 털 수 있는 게 아니다. 조금씩 자주 쉬는 것이 더 효과적이다. 사람이 여럿이 모여야 쉴 수 있는 것은 관계 유지에 들 수밖에 없는 에너지로 휴식의 효과가 반감된다. '혼자 잇기'는 고립이 아니라, 관계의 디톡스가 될 수도 있다. 관계의 피로도 휴식의 대상이다.
휴식이 필요하다. 휴식은 콘센트에 충전기를 꽂은 것처럼 에너지가 가득 충전되게 한다. '매일, 짧게, 혼자'하는 휴식을 권한다. 각자 그 방법을 찾아야 한다. 나는 텃밭에 가기, 짧은 산책과 맨발 걷기 등 먼 곳으로 가지 않아도 되는 동네 주변에서 휴식을 취한다. 특히 조용한 곳을 산책하며 노래를 부르는 것이 즐겁다.
현대인의 휴식 시간은 이전의 어느 세대보다 많다. 현대인에게 부족한 것은 휴식 시간이 아니라 휴식을 즐기는 여유와 고요이다. 사람들은 휴식 시간에도 끊임없이 수다를 떨거나 스마트폰을 만지작거린다. 해외여행을 가서도 아침부터 밤 늦게까지 바쁘게 돌아다닌다. 휴식을 위한 여행에서도 쉬지 못한 채 스트레스만 받고 돌아온다. 진정한 휴식은 내면의 고요에서 나온다. 고요는 바깥의 소음과는 상관없다. 고요는 마음만 먹는다면 기차나 자동차 안에서도 느낄 수 있다. 일상 중에 잠시 고요를 즐겨야 한다. 다음 <<대학>>에 나오는 말이다.
"머무름(멈춤)을 안 뒤에 야 자리를 잡는다(知止而後有定).
자리 잡은 뒤에 야 능히 고요할 수 있으며(定而後能靜),
고요한 뒤에 야 능히 안정이 되며(靜而後能安),
안정된 뒤에 야 능히 생각할 수 있고(安而後能慮),
깊이 사색한 뒤에 야 능히 얻을 수 있다(慮而後能得)."
'정좌관심(靜坐觀心)', 조용히 앉아 마음을 들여 다 본다. 마음을 안정한 후에 생각을 가다듬는다. 마치 호수 위에 떠 있는 별과 달은 그 물이 잔잔해야 제대로 비쳐진다. 매일 시간을 가리지 말고 한 시간 정도 정좌하라. 아니면 고용한 곳에 가라. 자신의 혼란스러운 생각을 통제할 수는 없어도 적어도 자신의 생각이 얼마나 혼란스러운지는 관찰할 수 있다. 그러면 가난 속에서도 마음은 가을 물처럼 맑고, 고요해진 마음은 봄바람처럼 부드럽다.
노자의 행복론도 "치허극, 수정독(治虛極, 守靜篤)"이다. "욕심을 버려 마음을 비우고, 맑고 고요한 상태를 굳세게 지켜라"는 뜻이다. 사실 욕심을 비우면 존재가 채워지고, 고요함을 지키면 삶의 진면목을 보게 된다. 소유하려는 마음을 비우면, 그 양만큼 존재가 자리한다. 행복은 소유가 아니라, 존재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가 살면서 추구하는 목표는 원하는 것을 얻는 일이다. 문제는 근데, 그걸 얻었다고, 행복하지 않다는 것이다. 왜? 만족하지 못하니까. 그리고 목표를 찾아 나서는 첫 마음이 '가지는 것'이 아니라, '누리는 것'이라는 사실을 잊거나 모르고 있기 때문이다. 소유는 우리의 최종 목표가 될 수 없다. 이런 게 "지혜"이다. 오늘 아침 사진은, 긴 겨울의 휴식 후에, 고요 속에서 자신의 일을 하고 있는 나무의 부드러움이다.
지혜/세라 티즈데일
내가 불완전한 것들에 대항하느라
내 날개를 꺾어버리는 일을 그만둘 때,
좀처럼 열리지 않는 문 뒤에서 타협하는 법을 배울 때,
성숙한 고요함과 매우 냉철한 지혜의 내 눈으로 삶을 바라볼 때,
삶은 나에게 진실을 가르쳐준다.
삶이 가져간 젊음 대신.
병원에 입원해 있는 동안, 작가이자 정신과 의사인 문요한의 <<오티움>>이라는 책을 e-북으로 읽었다. 그처럼, 나도 이젠 '자기 돌봄'이 필요한 때이다. 그는 '자기 돌봄'을 몸 돌봄, 마음 돌봄, 관계 돌봄 그리고 생활 돌봄의 네 영역으로 나누었다. 일년 동안 망설이던, 갑상선 유두암을 제거했고, 치아 리폼(reform)도 방향이 잡혔다. 약 한 달이면 다 회복될 것 같다. 나도 이젠 삶의 중심인 몸과 마음을 리폼하고 돌보면서, 마을 사람들과 더 친밀한 관계를 다시 맺으며, 영혼의 기쁨을 주는 활동을 찾아 이를 향유할 생각이다. 그의 책, <<오티움>>과 함께, 회복하는 한 주간 동안, 생활 돌봄으로서의 '오티움'을 공부하고 공유할 생각이다. 오티움은 '능동적 여가 활동'으로 '어른 놀이'라는 라틴어이다. 오늘은 "지금 우리에게 오티움이 필요한 이유"를 찾아 본다.
오늘 아침은 그 두 번째 질문으로 "쉬는 시간이 늘었는데, 왜 행복하지 않을까"이다. 사람들은 흔히 일이 많고 여가 시간이 적을수록 불행하다고 느끼고, 일을 하지 않고 여가 시간이 많을수록 삶은 행복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렇지 않다. 여러 연구에 의하면, 일정 시간 동안은 여가 시간의 증가에 따라 행복지수가 올라간다. 하지만 평균을 넘어서게 되는 순간, 사교성, 변화 수용력, 삶의 통제력, 욕구 충족도, 주변 친화 및 목표달성 노력 등 행복지수와 관련한 모든 문항에서 부정적 영향을 미치는 것으로 조사되었다. 다시 말하면, 여가 시간이 많다고 해서 꼭 행복이 보장되는 것은 아니고, 너무 많은 경우에도 오히려 행복에 역행하는 수도 있다는 거다.
여가 시간은 행복의 필요 조건일 수는 있지만, 충분 조건은 되지 못한다. 단순한 여유 시간이 아니라, 기쁨을 느끼는 시간이어야 한다. 많은 현대인들의 비극은 여가 시간의 부족에 있는 게 아니라, 여가 시간을 즐길 줄 아는 능력이 없다는 데 있다. 자유를 즐기는 것, 놀 줄 아는 것은 일하는 것보다 훨씬 더 높은 경지의 능력이다. 그래 어른도 놀이가 필요하다. 정신과 의사 스튜어트 브라운은 "놀이가 인생을 구제할 수 있다는 말은 절대 과언이 아니다"라 말했다. 그의 연구에 따르면, 어린 시절에 잘 놀지 못했던 사람들은 성인이 되어 많은 정신적 문제를 보였다는 거다. 이들은 어른이 되어서도 즐거움을 느끼지 못하고, 경직되어 있으며, 중독 성향이 강하고, 일중독에 빠지거나 우울했다고 한다.
세 번째 질문이 "놀 줄 아는가"이다. 인류학자들은 고등 생명체의 특징 중 하나로 '놀이'를 꼽는다. 사람도 역시 생존과 안전이 확보되고 나면 그 다음은 노는 것에 관심이 간다. 아이들을 보면 대번에 알 수 있다.아이들에게는 세상의 모든 곳이 놀이터이다. 놀이는 신나고 즐거운 것이다. 일과 달리 놀이는 어떤 목적을 이루기 위한 도구가 아니며 그 자체가 목적이다. 그 활동 자체가 좋아서 할 떼 우리는 가장 주체적인 상태가 된다.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빠져들며 몰입하게 된다. 그런데 어른이 되면 우리는 이러한 능력을 잃어버린다. 활동의 과정이 아니라, 보상과 결과를 따지게 되기 때문이다. 특히 생산성과 효율성 잣대를 들이댄다. 그러면서 이렇게 말한다. "내가 이렇게 시간을 보내도 되나?" "그런 것 배워서 뭐 하려고?" 그리고 “그게 돈이 되는기가?”(<재벌집 막내아들>)만 묻는다.
그러나 놀이는 있어도 되고 없어도 되는 게 아니다. 우리 사회의 정신 건강이 극도로 나빠진 것은 바로 '놀이 결핍' 때문이라는 주장들이 많다. 놀이가 없는 어른은 일하지 않는 시간이 주어지면 어떻게 시간을 보내야 할지 몰라 막막해 한다. 그래서 여가의 소비자로 전락하고 만다. 쇼핑, 게임, 음식, 스포츠 관람, TV와 인터넷 등에 시간을 빼앗긴다. 이를 우리는 '유사놀이'라 한다. 놀이의 능동성과 창조성을 거세하고 유희성만을 남겨놓은 것을 말한다. 문제가 놀이를 상품으로 구매하여 소비할 뿐 놀이의 주체가 되지 못한다는 거다. 그래 아무리 생활이 풍족해도 정신적으로 가난한 이유이다.
행복 하려면, 놀이를 되찾아야 한다. 과정의 기쁨을 회복해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건강의 기준은 달라져야 한다. 잘 노는 게 건강이고, 잘 놀지 못하는 것이 병이다. 치유 역시 마찬가지이다. 치유는 잘 놀지 못하는 상태를 잘 놀 수 있는 상태로 만드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단순한 여가가 아니라, 놀이와 같은 여가이다. '일을 놀이처럼 생각하라'는 말은 뭐든지 마음 먹기에 달렸다는 말처럼 허망하다. 물론 마음가짐이 중요하지 않다는 말은 아니다. 기본적으로 힘든 일은 힘들 뿐이다. 아주 노력을 하면 힘든 일이 의미 있는 일이 될 수는 있지만, 힘든 일이 좋은 일이 되기는 어렵다. 우리는 불행에서 의미를 찾을 수는 있지만, 불행 자체를 행복으로 느낄 수는 없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왜냐하면 행복은 생각도 아니고, 태도도 아니고, 감정이기 때문이다. 긍정적 감정의 복합 상태가 행복인 것이다.
의미를 부여한다고 해서 좋은 감정이 막 생겨나는 것은 아니다. 감정은 억지로 만들어지지 않기 때문이다. 행복도 마찬가지이다. 문요한 저자는 행복의 핵심은 '좋은 경험'에 있다고 주장한다. 그는 행복의 핵심이 마음가짐에 달려 있다고 보는 유심론적 태도를 경계한다. 여기서 '좋은 경험'은 그 시간에 온전히 몰두할 수 있고, 기쁨과 같은 좋은 감정을 안겨줄 수 있는 경험을 말한다. 우리가 행복 하려면 좋은 경험을 찾아내고, 이를 늘려가는 게 중요하다. 행복은 기본적으로 기쁨, 기다려지고, 하고 싶은 것이어야 한다. 잠시 나의 '좋은 경험'을 기억해 본다. 그런 '좋은 경험'의 추억이 많은 사람이 행복하다. 그래 나는 나이가 들더라도 나 자신만의 놀이를 즐기고 발달시켜 나갈 생각이다. 어쩌면 그게 문요한 저자가 말하는 '오티움'이 아닐까? 그것이 '진정한 휴식'이 아닐까? 잘 놀아야만 활기가 생기고 재충전이 이루어진다. 결론적으로 우리는 잘 놀 때 행복할 수 있다.
그렇지만 행복은 초점이 필요하다. 바닷물을 끓일 수는 없지만, 냄비에 담긴 바닷물은 끓일 수 있다. 그래서 좋은 '오티움'을 가지려면, 무엇보다 자신이 무엇을 할 때 행복한지를 잘 알아야 한다. 그러니까 소크라테스가 말한 "너 자신을 알라"는 말은 "너의 영혼에 기쁨을 주는 것이 무엇인지 알라"는 말로 이해 할 수 있다는 거다. 소크라테스의 과제가 아테나인들의 영혼이 최선의 상태가 되도록 돌보는 일이었다. 소크라테스는 '너 자신을 알라'는 말을 기초로 하여 '영혼의 최선의 상태'를 유지하기 위한 영혼에 대해 깊게 생각하면서, 삶의 온전한 방법을 아는 것을 지식의 목적이라고 하였다. 지식의 목적은 단순한 지식이 아니라, 실천지(實踐知)를 중시하는 것 같다.
아메리카 인디언들은 한 참 말을 달리다가 멈추곤 한다고 했다. 왜냐하면 영혼이 뒤 따라올 시간을 주기 위해서 란다. 바쁠수록 영혼을 챙겨야 한다. 오늘날 신자유주의 시장 경제는 경쟁에서 이기는 것을 우상화 하여 앞만 보고 달리는 삶을 최선의 삶이라고 의식화 하였다. 그러다 보니 자본주의 사회 속에서 우리는 멈추고 싶어도 멈출 수 없다. 루저로 규정되면 달리기 명단에서 빼기 때문이다. 그런 논리에 훈련 받아 우리는 영혼을 잃어버리거나 놓고 내달리기만 한다. 영혼을 뒤에 남겨 놓고 달리기만 하는 삶은 우리에게 삶의 물질적 풍요를 가져다 줄지 모르지만, 삶의 정신적 행복은 빼앗긴다. 다 알고 있지만, 그래도 세상은 멈춰 서고, 비우는 것을 허용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우리의 영혼이 우리를 제대로 따라오고 있는 지를 돌아보는 것이 절실하다.
그러니까 영혼을 앞세워 영혼이 시키는 대로 삶의 방향을 잡고 따라가는 삶이 행복의 원천이 된다. 앞에서 말한 바 처럼, 가끔 멈춰 서서 영혼이 뒤따라오기를 기다려주는 삶보다 중요한 것은 영혼을 길잡이로 앞장 세워 따라가는 사람이다. 어쩌면 이 후자가 길을 잃지 않고 걷는, 더 좋은 삶의 기술일 수 있다. 이를 나는 '영혼의 떨림을 따라가는 삶'이라고 말한다. 나는 매일 매일의 일상에서 영혼이 떨리는 삶을 살고 싶다. 그리고 그런 사람들과 지내고 싶다. 영화 <리스본 야간열차>에서, 15분 밖에 남지 않은 기차를 즉흥적으로 타고 리스본으로 가면서, 주인공은 자신이 근무하던 교장에게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의 다음 문장을 남기고 떠난다. "자기 영혼의 떨림을 따르지 않는 사람은 불행할 수 밖에 없다."
다소 어려운 "영혼의 떨림" 대신, 오늘 아침 나는 '나의 놀이는 무엇인가'로 질문을 바꾼다. 놀이가 바로 행복이라 보기 때문이다. 어른도 놀 줄 알아야 느리게 나이들 수 있다. 여기서 놀이의 본질은 능동적으로 참여하고 과정 자체의 즐거움을 느끼는 거다. 이번 몸의 리폼(reform)이 끝나면 나를 기쁘게 하는 놀이를 더 많이 할 생각이다. 나의 세계를 만드는 휴식을 찾을 생각이다. '나'는 찾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 가는 것일 수 있다.
다른 글들은 나의 블로그 https://pakhanpyo.tistory.com 이나 https://pakhanpyo.blogspot.com 에 있다. 최근에는 우리마을대학 홈페이지 블로그에도 글을 올린다. https://www.wmcss.net 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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