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94. 인문 운동가의 인문 일지
(2023년 3월 14일)

나는 한 가지 삶의 원칙이 있다. 몇 년 전부터 내 속도로 내 일상을 꾸린다. 아침에 만난 문장이다. 세상 모든 것들에는 저마다의 속도가 있다. 꽃도 계절도 피고 지는 속도가 다르다. 그러나 우리는 종종 ‘효율성'이라는 속도에 맞추느라 자연스러운 몸의 리듬을 놓친다. 일을 빠르게 처리할수록 일이 더 많아지는 역설에 시달리면서 말이다. 그 저마다의 속도를 따르는 것이 '도(道)'를 알고 구현하는 사람이다. 그 도는 자연을 따른다. 그 말을 우리는 "도법자연(道法自然)"(노자)이라 했다.
자연의 봄에는 참 여러 가지 꽃들이 핀다. 제일 먼저 봄을 기다리는 꽃은 동백꽃, 성급해서 눈 속에서 핀다. 그 다음은 버들강아지-갯버들 꽃, 다음은 산수유와 매화 그리고 목련으로 이어진다. 병아리가 생각나는 개나리가 거리를 장식하는 동안, 명자나무 꽃, 산당화 그리고 진달래가 봄 산을 장식한다. 바닷가에서는 해당화가 명함을 돌린다. 다음은 벚꽃이 깊어 가는 봄을 알린다. 그 사이에 마을마다 살구꽃, 배꽃, 복숭아꽃이 이어진다. 그 끝자락에 철쭉도 자신의 순서를 기다린다.
어제는 동네 공원에 핀 산수유 꽃을 찍은 거다. 산수유 꽃이 활짝 피어 하늘이 노란 물이 들었다. 산수유는 어른거리는 꽃의 그림자로 피었다가 노을이 스러지듯 살짝 종적을 감춘다. 산수유 꽃이 지는 것을 보고, 나무가 숨기고 있던 지우개로 저 자신을 지우는 것 같다고 김훈 작가는 묘사한 적이 있다. 나도 내 삶을 지우개로 지우고 싶은 부분이 있다. 산수유처럼.
저 산수유 꽃/이은봉
등불 환히 켜 놓고 걷는 하늘길이다
길 끊긴 곳, 빈 공중을 향해 내뿜는
샛노란 물줄기다 절벽 끝까지
몰려와 삐악거리는 저 병아리 떼
산기슭 어디에도
나아갈 길 없다 종종거리며
치마끈 풀어 헤치는 봄, 자궁 속으로
뜨거운 모가지, 처박을 수밖에 없다
무른 버짐 피어오르는 얼굴
두 손으로 감싸 안으며
꽃이여 그만 등불을 꺼라
끝내 네가 되지 못한, 지난겨울의 꿈
산골짜기 시린 물 그늘 속으로
조용조용 스며들고 있다 이울고 있다.
병원에 입원해 있는 동안, 작가이자 정신과 의사인 문요한의 <<오티움>>이라는 책을 e-북으로 읽었다. 그처럼, 나도 이젠 '자기 돌봄'이 필요한 때이다. 그는 '자기 돌봄'을 몸 돌봄, 마음 돌봄, 관계 돌봄 그리고 생활 돌봄의 네 영역으로 나누었다. 일년 동안 망설이던, 갑상선 유두암을 제거했고, 치아 리폼(reform)도 방향이 잡혔다. 약 한 달이면 다 회복될 것 같다. 나도 이젠 삶의 중심인 몸과 마음을 리폼하고 돌보면서, 마을 사람들과 더 친밀한 관계를 다시 맺으며, 영혼의 기쁨을 주는 활동을 찾아 이를 향유할 생각이다. 그의 책, <<오티움>>과 함께, 회복하는 한 주간 동안, 생활 돌봄으로서의 '오티움'을 공부하고 공유할 생각이다. 오티움은 '능동적 여가 활동'으로 '어른 놀이'라는 라틴어이다. 오늘은 "지금 우리에게 오티움이 필요한 이유"를 찾아 본다.
그 첫번째 질문이 "별사탕을 먼저 먹을까, 건빵을 먼저 먹을까"이다. 사실 우리는 해야 하는 일과 하고 싶은 일, 이 둘 사이에서 늘 갈등한다. 심리학자 대니얼 네틀은 한 사람의 10년 후 행복을 예측하는 데 무엇이 가장 중요한지를 조사해 보았다. 그 조사에 따르면, 나이, 건강, 가족관계, 돈, 지위, 친구 등 여러 가지 요소를 비교했지만, '현재의 행복지수'가 미래의 행복을 예측하는 데 정확도가 있었다. 그러니까 지금 얼마나 행복 하느냐가 미래의 행복을 좌우하는 것이었다. 다시 말하면, 지금 행복한 사람이 미래에도 행복하고, 지금 행복하지 않은 사람은 미래에도 행복하지 않을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다.
지금의 행복을 미루면 행복의 감각이 녹슨다고 한다. 지금의 행복을 미루는 사람들은 행복할 수 없다는 거다. 지금 행복할 줄 모르기 때문이다. 행복은 어떤 조건이 채워졌을 때가 아니라, 우리가 행복을 허락한 만큼 지금 여기에 존재한다. 행복의 감각이 녹슨다는 말을 들으니, 법정 스님의 다음 말이 기억난다. "우리가 걱정해야 할 것은 늙음이 아니라, 녹스는 삶이며, 인간의 목표는 풍부하게 소유하는 것이 아니라 풍성하게 존재하는 것이어야 한다."
감각이 깨어 있어야 한다. 우린 가끔 이성적인 사고를 하겠다는 이유로 세상에 닿을 수 있는 모든 감각의 촉수를 거둬들이곤 한다. 그러나 이성도 감각의 조화 속에서 더 사려 깊어진다. 자동차로 말하면, 이성은 브레이크이고, 감성은 엑셀이다. 그러나 감성이 메마르면 이성도 역시 할 일이 없어진다. 바람직한 것은 자동차이든, 삶이든 엑셀과 브레이크가 공존하는 거다. 그때 균형이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지금 행복을 허락하라고 해서, 내일 일은 생각하지 말고 오늘만 행복하자는 것은 아니다. 삶은 하고 싶은 것만 하면서 살 수 없다. 오늘 걸어야 할 길을 걷지 않으면 내일은 뛸 수밖에 없다. 우리는 보다 더 유연해질 필요가 있다. 그건 균형에서 나온다. <<개미와 베짱이>>의 이야기에서, 낮에는 개미에서 밤에는 베짱이로, 혹은 평일은 개미에서 주말은 베짱이로 이중의 정체성을 유지하며 살아갈 수 있다. 사실 누구나 하루의 몇 시간 혹은 주말의 한나절은 자유 시간이 있다. 이 시간부터 좋아하는 활동으로 채워 넣는 것이다. 인생이란 해야 하는 것도 하고, 하고 싶은 것도 하며 살아가는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건빵 한 개, 별 사탕 한 개 번갈아 가며 먹을 수 있다.
이런 생각을 하다가, 지금 우리의 현실에 눈 길이 가면 답답하고 가슴이 꽉 막힌다. "끝없이 터져 나오는 기괴한 사건들, 부끄러움을 모르는 우쭐거림, 거친 표정과 혐오의 말들, 여백 없는 단정적인 언사들, 공공장소에서 다른 이의 존재는 아랑곳하지 않는 무례한 태도. 일상적으로 경험하는 이런 일들로 인해 마치 구정물을 뒤집어쓴 것 같은 느낌이다. 불쾌함이 켜켜이 쌓여 우울의 지층을 이룬다. 이곳저곳 왈큰왈큰 피어나는 꽃들 앞에 서면 그 아름다움에 황홀해지다 가도 사람으로 사는 게 부끄럽다는 생각이 떠오른다. 생명이 기적임을 보여주는 징표가 도처에서 나타나는데 사람들은 가르고 나누느라 온 힘을 다한다." 김기석 목사의 말이지만, 실제 내 마음이 그렇다. 다들 "술 취한 삼촌"들의 모습과 말들 같다.
"술 취한 삼촌"은 2016년 미국 대선을 앞두고 워싱턴포스트가 유권자들을 대상으로 포커스 그룹 인터뷰를 진행했을 때 나온 말이다. 그 당시 도널드 트럼프 공화당 후보를 묘사할 단어를 고르라고 했더니 ‘술 취한 삼촌’이 거론됐던 것이다. 어제 흥미로운 칼럼을 하나 소개받았다. ‘술 취한 삼촌’ 같은 대통령>(경향신문, 박영환 정치부장)이다.
공공장소에서 본의 아니게 만나는 TV 뉴스에 등장하는 "술 취한 삼촌"들을 역겹게 만난다. 그들은 모두 소시오패스(sociopath), 즉 반(反) 사회적 인격장애자들 같다. 일반적으로 소시오패스는 자신의 성공을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나쁜 짓을 저지르며 이에 대해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않는다. 그 외 자신을 잘 위장하며 감정조절이 뛰어나다. 인생을 이겨야하는 게임이나 도박으로 여기며 다른 사람들을 이용할 타깃으로 생각한다. 매우 계산적이다. 겉으로는 매력적이고 사교적으로 보일 수 있다. 어릴 때 비정상적으로 잔인하거나 공격적인 행동을 재미 삼아 한다. 자신의 잘못이 발각되면, 거짓으로 후회, 반성을 하거나 동정심에 호소하면서 자신의 순진함을 강조한다. 거짓말을 하는 데 능숙하다. 일반인은 양심이 있기 때문에 들통날 까 봐 긴장하지만, 소시오패스는 양심이란 사전 속 단어이기에 일말의 망설임이 없이 거짓말을 할 수 있다. <아주 경제>의 전기연 기자 해석이다.
내 생각으로는, 지적 장애인은 계산하는 데는 문제가 있어도, 감정적으로 자녀를 안아주고 보살피는 데는 아무런 문제가 없다. 사회적으로 지적 장애인보다 계산과 이성만 발달한 소시오패스가 훨씬 더 위험하다. 소시오패스는 가장 빨리 강자의 위치에 도달하지만, 가장 빨리 내려오게 된다. 히틀러처럼 말이다. 오래 생존하는 이들은 감정이 발달한 이들이다. 오직 지적 능력만 키운 사람은 결국 가장 빠르게 도태되기 때문이다. 생존을 위해 가장 중요한 게 적절한 감정이다. 여성이 남성보다 수명이 긴 것도 감수성이 더 발달해서이다. 능력 있고, 못된 인간, 감정에 문제가 있는 인간 즉 그런 독재자들이 힘이 셀 때는 숨죽이고 있지만, 힘이 약해지면 거세게 그들을 제거해왔다. 그날이 빨리 왔으면 좋겠다. 세상의 가치가 뒤흔들린다. 사이코패스와 다르다.
다음 글을 읽고 누군가 짐작해 보자. 열 고개 게임이다. 답은 말하지 않기로 한다.
1. "품위와 운치가 없다. 반말이 대부분이고 욕도 입에 뱄다. 유연성은 영에 가깝고 편견과 아집은 무한대로 수렴한다. 그래서 보는 사람들이 불편한 사람은?
2. 남의 허물에는 추상같고 자신의 잘못에는 인자하다. 반성이나 염치가 없다. 숱한 정책, 인사 실패에도 진정성 있는 사과 한 번 없다. 그래서 부끄러운 사람은?
3. 나는 맞고 남들은 다 틀렸다는 식이다. 양보나 협치는 없다. 그래서 피곤한 사람은?
4. 보기 싫은 현실은 외면한다. 힘들고 욕먹어도 공동체를 잘 운영해보겠다는 의지가 안 보인다. 관리에 관심이 없다. 그래서 무책임한 사람은?
5. "미래지향적"인 한, 일관계라며 일제 강제동원 피해자들의 요구는 외면한 사람은?
6. 제1야당 대표를 잡겠다며 300번 넘게 압수수색을 하면서 본인 배우자의 주가 조작 연루 의혹에는 침묵하는 사람은?
7. "어그레시브", "체인지 싱킹" 등 영어를 쓸데 없이 쓰는 사람은?
8. "한 시간이면 혼자서 59분을 얘기 하는"(이동훈) 사람은?
9. 다른 사람의 조언은 듣지 않고, 원로들 말에도 "나를 가르치려 드냐"며 화부터 내는 사람은?
10. 제발 다음 명절에는 그 "술 취한 삼촌"이 오지 않았으면 하는 사람은?
"누가 대통령을 겸손케 하고 신중케 하고 협치하게 할 수 있을까. 국민밖에 없다." 정말이다. "매달 넷째주 토요 휴무(2002년)→주5일(2004년)→주52시간(2018년)으로 한 발씩 내디뎌온 세상이 ‘과로사회’로 돌아갈지, 위안부 합의 8년 만에 또 굴욕을 맛볼지, 미사일·전략무기 날아다니는 한반도가 안녕할지 맘 졸이는 봄이다. 잘못 끼운 첫 단추는 지난한 역사가 된다." 역사는 다시 말할 것이다. 한 마디만 더 인용한다. "‘The buck stops here(모든 책임은 내가 진다).’ 작년 5월 윤 대통령이 바이든 미 대통령의 방한 선물로 받아 집무실에 놓아둔 팻말이다. 일본과의 강제동원 협상을 ‘결단’이라 한 대통령의 유튜브 쇼츠에 이 팻말이 등장했다. 대통령은 숲속 갈림길에서 한쪽을 택한 시인 프로스트를 떠올렸을지 모르겠다. 반대로, 김구 선생이라면 “눈 내린 들판을 어지러이 걷지 말라”는 시를 읊어줬을 듯싶다." 내 생각도 같다. (이기수 경향신문 기자)
다른 글들은 나의 블로그 https://pakhanpyo.tistory.com 이나 https://pakhanpyo.blogspot.com 에 있다. 최근에는 우리마을대학 홈페이지 블로그에도 글을 올린다. https://www.wmcss.net 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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