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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운동가의 사진 하나, 시 하나

친구

2282 인문 운동가의 인문 일지
(2023년 3월 12일)
Amicus는 라틴어로 '친구'라는 말이다. 형용사로, '친한 또는 즐거운'으로도 쓰인다. 프랑스어로 '친구'란 뜻의 '아미(ami)가 여기서 나온다. 이를 내 친구라고 하면, '모나미(mon ami)'가 된다. 우리 나라에서는 볼펜 이름이기도 하다. 친구라는 말은 참 좋은 거다. "amicus ad aras(아미쿠스 아드 아라스)"란 말이 있는데, '죽을 때까지 우리의 우정은 변치 않는다'는 뜻이다. 오늘 내가 다니는 성당에서 "amicus" 모임이 창단되었다. 나는 병원에서 퇴원하는 날이라 참석하지 못하고, 카톡으로 소식을 받았다. 다음 모임부터 참석할 생각이다.
 
사진은 친구처럼, 때가 되면 찾아 오는 산수유이다. 작가 조용호는 꽃 기행 산문 집 <<꽃에게 길을 묻다>>에서 “산수유 꽃은 두 번에 걸쳐 피어 난다"고 했다. “처음에는 알에서 병아리가 껍질을 깨고 나오듯 겉 꽃잎이 먼저 피고, 겉 꽃이 열리면 다시 속 꽃잎이 별처럼 화사하게 터져 나온다.” 그러니 산수유 꽃은 자세히 들여다봐야 제 모습을 살필 수 있다. 오늘 아침에 공유하는 사진을 보면 그렇다.
 
사람은 묵을수록 좋다는 말이 있다. 오랫동안 가깝게 사귄 벗을 우리는 친구(親舊)라 한다. 친(親)은 친할 '친'이고, '구(舊)'는 '예부터 친하게 지내온 사람'을 가리키는 말이다. 우리 말로는 '벗'이라 한다. 한자어로는 '붕(朋)'이라는 말이 있는데, '함께 공부한 벗'을 말한다. 반면 '우(友)'는 뜻을 함께 하는 동지(同志)로 붕 이외의 친구를 말한다. 어쨌든 사랑하는 사람보다 친구가 필요할 때가 있다. 아픈 이야기 힘든 이야기들을 허물 없이 그리고 서슴없이 마음을 터 놓을 수 있는 친구, 이런 이야기나 저런 이야기 그리고 세상 살아가는 이야기를 나누며 위로하고 위로 받을 수 있는 친구, 나의 속내를 가식 없이 들어내도 괜찮은 편안한 친구가 필요할 때가 있다.
 
SNS에 떠다니는 "네 종류의 친구"가 있다. 첫 째는 꽃과 같은 친구(花友, 화우)로 꽃이 피어서 예쁠 때는 그 아름다움에 찬사를 아끼지 않는다. 그러나 꽃이 지고 나면 돌아보는 이 하나 없듯이, 자기 좋을 때만 찾아오는 친구는 바로 꽃과 같은 친구이다. 둘 째는 저울과 같은 친구(秤友, 칭우)로 저울은 무게에 따라 이쪽으로 또는 저쪽으로 기운다. 그와 같이 자신에게 이익이 있는지 없는지를 따져 이익이 큰 쪽으로만 움직이는 친구가 바로 저울과 같은 친구이다. 셋 째는 산과 같은 친구(산우, 山友)로 산이란 온갖 새와 짐승의 안식처이며 멀리 보거나 가까이 가거나 늘 그 자리에서 반겨준다. 그처럼 생각만 해도 편안하고 마음 든든한 친구가 바로 산과 같은 친구이다. 넷 째는 땅과 같은 친구(지우, 地友)로 땅은 뭇 생명의 싹을 틔워주고 곡식을 길러내며 누구에게도 조건 없이 기쁜 마음으로 은혜를 베풀어 준다. 한결 같은 마음으로 지지해 주는 친구가 바로 땅과 같은 친구이다. 친구가 많음이 중요한 게 아니라 깊이가 중요하다. 산과 같은, 땅과 같은 친구가 진정한 친구이다.
 
오늘 아침 공유하는 시처럼, "늙어가는 길"에 좋은 친구들을 만난다고 하니 주님께 감사할 따름이다. 감상선에 있는 암을 제거하고, 집으로 내려가는 날이다. 이렇게 몸의 질병들 과도 친구로 살아가는 거다.
 
 
늙어가는 길/윤석구
 
처음 가는 길입니다.
한 번도 가본 적이 없는 길입니다.
 
무엇 하나 처음 아닌 길은 없었지만
늙어가는 이 길은 몸과 마음도 같지 않고
방향 감각도 매우 서툴기만 합니다.
 
가면서도 이 길이 맞는지
어리둥절할 때가 많습니다.
때론 두렵고 불안한 마음에
멍하니 창밖만 바라보곤 합니다.
 
시리도록 외로울 때도 있고
아리도록 그리울 때도 있습니다.
 
어릴 적 처음 길은
호기심과 희망이 있었고
젊어서의 처음 길은
설렘으로 무서울 게 없었는데
처음 늙어가는 이 길은
너무나 어렵습니다.
 
언제부터 인가
지팡이가 절실하고 애틋한
친구가 될 줄은 정말 몰랐습니다.
 
그래도 가다 보면
혹시나 가슴 뛰는 일이 없을까 하여
노욕인 줄 알면서도
두리번두리번 찾아봅니다.
 
앞길이 뒷길보다 짧다는 걸 알기에
한발 한발 더디게 걸으면서 생각합니다.
 
아쉬워도
발자국 뒤에 새겨지는 뒷모습만은
노을처럼 아름답기를 소망하면서
황혼 길을 천천히 걸어갑니다.
 
꽃보다 곱다는 단풍처럼
해돋이 못지않은 저녁노을처럼
 
아름답게
아름답게 걸어가고 쉽습니다.
 
 
<<장자>>에는 "사생존망(死生存亡)이 일체임을 터득한 네 명의 벗"이야기가 나온다. 내용은 이렇다. "자사(子祀), 자여(子輿), 자리(子犁), 자래(子來) 네 사람이 함께 이야기를 나누었다. “누가 무(無)를 머리로 삼고 생(生)을 등뼈로 삼고 사(死)를 꽁무니로 삼을 수 있는가? 누가 생(生)과 사(死), 존(存)과 망(亡)이 한 몸임을 아는가? '만일 그런 사람이 있다면, 우리는 그와 사귀고 싶다.' 그리고는 네 사람이 서로 쳐다보면서 빙그레 웃고 마음에 거슬리는 것이 없어지자 마침내 서로 더불어 벗이 되었다."
 
여기서 등장 하는 친구는 이렇게 4명이다. 제사 선생인 자사(子祀), 수레 선생인 자여(子輿), 쟁기 선생인 자려(子㴝) 그리고 오심 선생인 자래(子來)이다. 그리고 서로 거슬림이 없는 막역지우(莫逆之友)들이다. 여기서 막역(莫逆)은 '서로 거슬리는 일 없음'을 의미한다. '막역지우'란 '아주 허물없이 지내는 친구'를 말한다. 친구를 뜻하는 한자 성어는 굉장히 많다. 죽마고우(竹馬故友). 수어지교(水魚之交), 지란지교(芝蘭之交), 백아절현(伯牙絶絃), 간담상조(肝膽相照), 교유이신(交友以信), 단금지교(斷琴之交), 문경지교(刎頸之交), 경개여구(傾蓋如舊), 도원결의(桃園結義) 등이다.
 
장자가 말하는 서로 거슬림 없는 사이의 친구인 '막역지우'는 죽음과 삶, 있음과 없음이 바로 떨어져 독립한 실체가 아니라 몸의 다른 부분처럼 하나의 유기적 관계를 가진 단위임을 자각하고, 서로 의연하고 자연스럽게 대할 수 있는 찬구 사이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세 종류의 친구 이야기를 했다. 즐기기 위한 친구, 이용 가치를 위한 친구, 마지막으로 선과 덕을 바탕으로 한 친구가 있다 했다.
 
장자가 말하는 참된 친구란 선과 덕을 바탕으로 한 우정보다 더 깊은 차원에서 맺는 친구이다. 인생관이나 세계관의 차원에서 의기투합할 수 있는 친구, 한번 같이 웃기만 해도 속마음을 서로 이해할 수 있는 친구가 진정한 친구라는 거다. 이런 친구는 귀하기 때문에 거리에 관계없이 서로 찾는다. 그래 공자는 <<논어>>의 첫머리에서 "친구가 있어 멀리서 찾아오면 역시 기쁘지 아니한가?(유붕자원방래, 불역낙호, 有朋自遠方來, 不亦樂乎)"하지 않았을까?
 
고통은 그것을 경험한 사람만이 알 수 있는 '고약한' 신의 선물이다. 왜 신의 선물인가? 신은 고통을 통해 자신의 비밀을 조금씩 알려주시기 때문이다. 그래 고통은 인간을 정신적으로 영적으로 성장시키는 유일한 길이 된다. 그 길에 들어서서 그 고통을 감내해야, 그 여행 중에, 그 목적지로 가는 도중에 신의 흔적이 발견되기 때문이다. 고통은 과거 자신에게 소중했던 가치를 버리는 유기에서 시작한다. 우리는 남들이 좋다고 하는 것, 그래서 우리도 좋다고 착각한 것을 여전히 품고 다니면서 자랑한다. 누가 나에게 너는 누구이냐 라며 묻는다면, 나는 당신들이 좋아하는 것을 가진 사람이라고 소개한다. 자신을 깊이 응시하고 자신이 누구인가를 정색을 하고 물은 적이 없기 때문에, 남들의 평가가 나라고 착각한다.
 
성서에 등장하는 신의 첫 질문은 히브리어로 '아이에카'이다. 이는 '너는 어디에 있느냐?'란 뜻이다. 이 문장에는 동사가 없다. 이 문장은 다음과 같이 세 개를 의미한다.
  1. 너는 지금 너에게 어울리는 장소에 있느냐?
  2. 너는 어제 너에게 어울리는 장소에 있었느냐?
  3. 너는 내일 네가 가야 할 곳을 알고 있느냐?
그러면서 하루를 인생의 마지막 날처럼 살고, 그런 마음을 지니고 있다면, 우리는 남들의 기대나 환호는 중요하지 않게 된다. 질문은 자신의 삶에서 가장 소중한 재화인 패(貝)를 만들기 위해 양손에 도끼 두 자루 '斤斤'를 들고 만들기 시작하는 수고이다. 이 수고로 나오는 해답은 그 질문에 대한 해답이 아니라, 더 깊은 질문을 자신에게 던지고 그것을 해결하려는 수고이다.
 
나는 누구인가" 라는 질문은 '나는 무엇을 위해 목숨을 바칠 수 있는가? 라는 질문으로 바꿀 수 있다. 따라서 인간이 목숨을 바칠 만한 것을 찾지 못했다면, 그는 어리석고, 만일 찾았으나, 최선을 다하지 않으면 비겁한 거다. 말 그대로 죄를 짓고 있는 거다. 영어의 죄(sin)라는 말이 '과 녘을 벗어나다'라는 뜻이다.
 
인간이 자신이 간절하게 열망하는 그것을 추구할 뿐만 아니라, 열망하는 그것과 하나가 될 때, 우리는 행복하다. 고통은 소중한 그것을 알려주는 유일한 통로인 것이다. 많은 사람들은 그 길이 좁아 들어가려고 시도하지 않고, 남들이 가는 넓은 길로만 가고 싶어 한다. 좁은 문을 통과하려면, 자신을 겸손하게 만들어야 하기 때문이다.
 
베드로가 자신의 눈앞에 있는 그 존재가 세상을 구원할 메시아이며, 육신을 지닌 존재가 신이라고 고백했다. 이 고백은 베드로가 자신의 스승을 신적인 존재로 여기고, 자신도 예수처럼 신적인 삶을 살겠다는 다짐을 한 것이다. 베르로도 사랑이라는 소중한 가치를 전파하다 십자가 처형을 당하였다. 베드로처럼, 인간은 고통을 통해 다시 태어난다. 외부에서 오는 고통보다도 자신이 택한 고통에 나는 주목한다. 인간은 다시 태어나기 전, 이기심과 본능의 노예가 되어 그럭저럭 연명한다. 이 속에서 인내와 절제를 발휘하는 것 자체가 고통을 선택한 것이다. 우리는 자신이 주인 같지만, 사실은 쾌락과 편함이 주인이 되어 나를 마음대로 움직인다. 그러나 인간의 심연 속에는 신적인 불꽃이 숨어 있다. 그 불꽃에 불을 지펴, 빛으로 살지 못할 때, 그는 죄인이 된다. 죄인이란 자신이 누구인지 모르는 무식이고, 알더라도 최선을 경주하지 않는 게으름이다.
 
고통은 내가 누구인가 가장 선명하게 알려주는 훈련사이다. 신이 욥에게 한 질문이다. "내가 세상의 기초를 세울 때, 너는 어디에 있었느냐?" 욥이 고백한다. "저는이제 손을 입에 갖다 대고 신을 눈으로 보기만 하겠습니다." 본다는 것, 듣는다는 것, 맛을 본다는 것, 감각할 수 있다는 것, 이 당연한 모든 것은 사실 기적들이다. 질문이 답이다.
 
그리고 "네 이웃이 누구인가?" 이 질문도 중요하다. 신은 언제나 낯선 자이다. 왜냐하면 낯선 자에게 사랑을 베풀면, 그 낯선 자는 자신의 본모습을 드러내기 때문이다. 그 본모습이 신이다. 나의 사람이, 낯선 자를 신으로 둔갑시킨다. 내가 자비를 베풀 때 그 가운데 신이 등장한다. 그 이웃이 내 친구이다.
 
 
다른 글들은 나의 블로그 https://pakhanpyo.tistory.com 이나 https://pakhanpyo.blogspot.com 에 있다. 최근에는 우리마을대학 홈페이지 블로그에도 글을 올린다. https://www.wmcss.net 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