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68. 인문 운동가의 인문 일지
(2023년 2월 15일)

"누가 인문학 책을 쓰고 읽습니까? 인문학은 인터넷에 다 들어 있습니다." 지난 화요일 어느 한 출판사에서 들은 이야기가 머리를 떠나지 않는다. 인문적 지식을 기능적인 이해의 대상으로만 삼지 내 삶에 충격을 주는 송곳으로 받아들이는 태도가 아니다. 인문학은 배고픈 사람에게 빵 하나 주지 못한다. 그러나 "이 세상에 굶주리는 사람이 숱하게 존재한다는 추문을 퍼트림으로써 이 비정한 세계의 가혹한 현실을 폭로하고 선의의 양심을 부끄럽게 만든다." (김병욱) 인문학은 그 '쓸데 없음'이 마련해준 자유를 통해 실용주의에 매인 욕망에 수치심을 느끼게 하며, 그 실용성의 억압으로부터 해방시켜준다.
난 인문 운동가이다. 이제는 '무엇'을 전하는 일보다 전할 가치가 있는 것을 생산해야 한다. 인문 운동가는 지식을 전달하는 자가 아니라, 인문 정신을 생산하여 이 사회를 인문적 높이로 올리고자 하는 사람이다. 인문 정신을 갖는다는 것, 인문적으로 산다는 것은 보편적으로 완성된 이론을 내면화 하는 것이 아니라, 지금 자기가 처한 상황, 그곳에서 자기 눈으로 발견된 그 문제를 해결하려고 덤비는 인문적 활동으로 일상을 채우는 것을 말한다. 지금 필요한 것은 대답하는 삶에서 질문하는 삶으로 건너가는 일이다. 이론을 숙지하는 삶에서 문제에 빠져드는 삶으로 전환하는 것이어야 한다. 그래 나는 오늘 아침 공유하는 시처럼, "혼돈을 사랑"한다.
혼돈을 사랑하라/알베르트 에스피노사
혼돈을 사랑하라
세상이 가르쳐 준
모든 규칙을 잊으라.
너 자신의 세계를 창조하고
너 자신의 언어를 정의하라.
너의 혼돈을 억압하는 대신
사랑해야 한다.
만약 너의 혼돈을 사랑한다면
이 세상은 해답을 주지 못할 것이다.
해답은 네 안에 있다는 걸 발견하게 될 것이다.
너의 가장자리를 두려워하지 말라.
누군가가 너를 이해할 수 없다고 하면
그에게 말하라.
‘나의 혼돈을 사랑하라’고.
너의 혼돈에 질서를 주입하려고 하는
세상에 반역하라.
네가 존재한다는 것을 알리기 위해
세상을 힘껏 두드려야 한다.
두려움은 단지
아직 풀리지 않은 의문에 불과할 뿐,
네가 해답에 다가갈수록 우주는
너와 놀이를 하며
너로 하여금 질문을 잊게 할 것이다.
너 자신이 되라.
남들이 원하는 사람이 되면
정복당할 것이니,
너의 혼돈을 사랑하라.
너의 다름을 사랑하라.
너를 다르게 만드는 것
사람들이 너에 대해 이해하지 못하는 것
사람들이 너에게 바뀌기를 원하는 것
너를 유일한 존재로 만드는
그것을 사랑하라.
외부에서 자극이 들어 오면 우리는 반응한다. 박테리아 수준이다. 그러나 동물의 세계로 오면, 외부의 자극을 감각으로 받아들이고, 회피, 아니 도망갈 것인가 싸울 것인 가를 결정하는 의식 행위를 한다. 그걸 지각이라 한다. 그러나 사람은 외부 자극 없이도 지각을 한다. 그걸 생각이라고 한다. 더 정확히 말하면 환각이다. 그 환각을 잠을 잘 때는 꿈으로 나타난다. 그 꿈에 비해 낮에 하는 생각은 낮에 꾸는 꿈이다. 그러나 환각과 생각의 차이는 통제가 가능하냐 아니 냐에 달려 있다. 그러니까 생각은 낮에 꾸는 꿈이지만, 꿈과 달리 제어가 가능하다는 거다.
사유는 좀 다른 말이다. 생각은 단편적이다. 상황에 따라 잠시, 하루에도 수백 번씩 스쳐 지나가는 감정의 편린이다. "나는 너를 좋아한다", "너를 사랑한다", "너를 싫어한다", "너를 혐오한다" 하는. 그러나 사유는 한 사람의 세계다. 내가 너를 왜 좋아하고 사랑하는지, 너를 왜 싫어하고 혐오하는지, 거기에 이르는 명확한 체계를 말한다. 그러니까, 생각을 거듭하고, 스스로에 대한 물음표를 던지고, 치열하게 답해 나가는 동안 완성된 한 사람의 세계관이다. 다정한 사람은 타인의 생각을 들여다보는 데 그치지 않고 그 생각에 이르기 까지를 사유로서 살핀다. 누군가의 처지가 되어본다는 건 그의 세계를 섬세하게 살피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래야 그를 이해하고, 그의 잘됨을 위해 움직일 수 있다. 예를 들면, 굶주리는 누군가의 불쌍함에 공감하는 데서 나아가, 저러한 굶주림은 왜 시작되었는지를 묻는다든가 아니면 타인을 동정하는 그 마음이 어디에서 왔는지를 살핀다든가, 하는 것이다. 이게 인문학이 필요한 이유이다.
난 나이를 먹으면서, 나의 영역과 권한은 줄었지만 대신 '3 유'를 알게 되었다. 자유(自由)/사유(思惟)/여유(餘裕). 특히 사유를 통해 나는 여유를 얻었다. 우리가 초조하고 조바심을 느낀다든가 성급하다는 것은 부족함과 두려움의 반영이다. 그 까닭에 앞뒤가 맞을 리 없고 손발이 맞을 리 없다. 그 상태로는 도움이 될 리 없고 협력이 될 리 없다. "빨리빨리"가 습관인 자는 실은 가장 늦는 자이다. 입만 빠르고 마음만 바쁘며 정작 손발은 허투르다. 마음과는 다르게 '대충대충'으로 끝나는 경우가 일상다반사이기 때문이다. 가장 빠른 자는 가장 정확한 자다. 빠르게 끝내고 싶은가? 그렇다면 정확하게 하라. 정확한 자가 냉철하고 여유가 있기 마련이다. 고저장단(高低長短), 경중완급(輕重緩急), 경유강약(硬柔强弱) 전후좌우(前後左右), 모두 정확하지 않으면 지닐 수 없는 것들이다.
그리고 지지(知止), 즉 멈춰야 할 때 멈출 줄 아는 것이 중요하다. 인간사 지혜의 근본은 '지지(知止)'일 수 있다. 멈출 때를 안다는 것은 부족함을 안다는 것이며, 부족함을 안다는 것은 채워야 할 것을 안다는 것이기 때문이다. 채워야 할 것을 안다는 것은 사유할 줄을 안다는 것이며, 사유할 줄 안다는 것은 자신을 안다는 것이기 때문이다. 고로 '나는 존재할 수 있다'는 것이다. Cogito Ergo Sum. Je pense donc je suis. 그래 나는 이문 장을 '나는 사유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 번역한
여유의 반대인 초조함은 죄악이다. 초조함은 문제를 정면으로 응시하지 못하게 하기 때문이다. 초조한 사람은 문제의 진행을 충분히 지켜볼 수 없기에 어떤 대체물을 문제의 해결책으로 간주하려 한다. 다시 말하면, 성급한 해결을 원하는 조바심이 해결책이 아닌 어떤 것을 해결책으로 보이게 만든다. 그리고 이 때문에 사태의 종결은 불가능해진다. 파국을 막기 위한 조급한 행동이 파국을 영속화하는 것이다. 우리가 믿는 많은 지름길들, 금방 치료가 되고 금방 구원이 되고 금방 개선이 될 것으로 보이는 그런 많은 길들이 실상은 비극의 수레바퀴를 굴리기 위해 우리의 초조함이 닦아놓은 것들인지도 모른다.그래 우리는 인문학을 지식으로만 익히지 말고, 사유하면서, 인문 정신을 길러야 한다.
초조함을 몰아내려는 치열한 노력이 인문 정신이다. 인문학에서 나오는 인문 정신은 '곧바로 반응하지 않는 것'이다. 그것은 '지름길을 믿지 않는 것'이다. 삶의 정신적 우회이다. 삶을 다시 씹어보는 것, 말 그대로 반추하는 것이다. 지름길이 아니라 에움길로 걷는 것, 눈을 감고 달리지 않고 충분히 주변을 살펴보는 것, 맹목이 아니라 통찰, 그것이 인문학이다. 인문학은 한마디로 초조해하지 않는 것이다. 그래 점심을 먹고, 을지로 거리를 많이 걷다 내려왔다. 노늘 아침 사진이 거기서 찍은 것이다. 그리고 집에서 와서 오늘 아침 시를 다시 꺼내 읽었다. "너의 혼돈에 질서를 주입하려고 하는/세상에 반역하라/네가 존재한다는 것을 알리기 위해/세상을 힘껏 두드려야 한다/두려움은 단지/아직 풀리지 않은 의문에 불과할 뿐/(…)너 자신이 되라/남들이 원하는 사람이 되면/정복당할 것이니/너의 혼돈을 사랑하라."
다른 글들은 나의 블로그 https://pakhanpyo.tistory.com 이나 https://pakhanpyo.blogspot.com 에 있다. 최근에는 우리마을대학 홈페이지 블로그에도 글을 올린다. https://www.wmcss.net 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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