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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운동가의 사진 하나, 시 하나

건강한 노년은 세상의 욕망에서 자유롭다.

2265. 인문 운동가의 인문 일지
(2023년 2월 12일)
생활의 편의를 위한 도구는 날이 갈수록 발전하고 있지만, 가슴의 헛헛증은 좀처럼 가시지 않는다. 아름다운 것을 보아도 무덤덤할 뿐 좀처럼 경탄할 줄 모르는 정신의 혼수상태에 빠진 이들이 의외로 많다.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고, 방향조차 분명치 않은 길 위에서 사람들은 영문도 모른 채 달려간다. 그런 내달리기는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영혼에 트라우마를 남긴다. 열정 뒤에 가려졌던 비애와 상실감 그리고 공허함이 모습을 드러낼 때 사람들은 자기 자신의 모습에서 낯선 존재를 발견한다. 존재의 불화가 시작되는 것이다.
 
파커 J. 파머는 <<온전한 삶으로의 여행>>을 통해 파편화된 삶에 지친 우리를 온전한 삶의 길로 초대하고 있다. 그는 이 책에서 그의 필생의 네 가지 주제라 할 수 있는, 온전한 삶의 형태, 커뮤니티의 의미, 삶의 변모를 위한 가르침과 배움, 비폭력적인 사회변화의 문제를 다루고 있다. 2007년도에 번역 출판된 초판본을 중고로 샀다. 당시 10,000원이던 것을 16,500원과 배송료 3,300원을 보태 19,800원 구입했다.
 
이 책은 파편화된 삶에 지친 우리를 온전한 삶의 길로 초대하고 있다. 온전하게 산다는 것은 무엇일까? 분리되지 않는 삶을 사는 거다. 온전한 자들은 자신의 기준, 자신의 욕망과 자신의 양심에 따라 사는 자들이다. 자기 자신으로부터 나온 권력을 틀어쥔 사람들은 외부의 권력에 휩쓸리지 않는다. 그래서 사회는 구성원들 간의 분리를 권한다. 그러면서 사회는 우리들의 삶을 파편화 시킨다. 사회구성원들끼리 서로 싸우게 한다.
 
이렇듯 우리는 분리된 삶을 살면서 터무니 없는 대가를 치른다. 내가 나의 정체성을 부인하는데, 어떻게 다른 사람의 정체성을 확신할 수 있을까? 예를 들어 내가 나의 감정을 무시하면, 다른 사람의 감정도 쉽게 무시할 수 있다. 그러니 세상 모든 것이 그 출발은 '나 자신과의 관계'로 부터이다. 내가 나에게 하는 행동이 결국 내가 남에게 하는 행동이다. "온전한 삶으로의 여행' 이야기는 구입한 책을 다 읽고, 공유할 생각이다.
 
오늘 공유하는 시처럼, 늘그막에는 늘 "그럼그럼" 고개를 끄덕이고 "그렁그렁"한 눈으로 나 자신과 세상을 보는 것이다. 오늘 아침 사진의 나무에서 "그럼 럼"을 읽었다. '온전한' 나를 위해. 온전함은 완전함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깨어짐을 삶의 불가피한 부분으로 받아들이는 것을 뜻한다. 자세히 보면, 자연도 완벽하지 않다. 다만 변화하고 순환할 뿐이다. 완벽한 생태계가 있지 않다. 서로의 죽음으로 서로를 살리고, 어디선가 균형이 무너지면 어디선가 균형을 다시 세운다. 그저 '균형 찾기' 이다. 사회가 우리에게 중요하다고 가르치는 것은 세상을 조종할 능력을 주는 '객관적인' 지식이다. 그러나 우리는 '나는 누구인가' 라는 자신의 정체성을 인식하는 일에 소홀하다. 앞에서 말한 객관적 지식은 세상을 주무르고, 조종할 능력을 제공하지만, 그러한 지식은 오히려 우리들이 온전한 삶을 살게 하는 일에 오히려 방해가 된다. 그런 의미에서 필요 이상으로 똑똑한 사람들을 나는 별로 신뢰하지 않는다. 한 가지에 집착한다는 뜻은 균형을 놓치기 쉽기 때문이다.
 
 
늙음/최영철
 
늘 그럼 하고 고개를 끄덕이는 것
늘 그럼그럼 어깨를 토닥여주는 것
늘 그렁 눈에 밟히는 것
늘 그렁 눈가에 맺힌 이슬 같은 것
늘 그걸 넘지 않으려 조심하는 것
늘 그걸 넘지 않아도 마음이 흡족한 것
늘 거기 지워진 금을 다시 그려 넣는 것
늘 거기 가버린 것들 손꼽아 기다리는 것
늘 그만큼 가득한 것
늘 그만큼 궁금하여 멀리 내다보는 것
늘 그럼그럼
늘 그렁그렁
 
 
몇 일전부터, "성공적인 나이 듦을 위한 네 가지 기둥"에 대한 이야기를 우리는 공유하고 있다. 그 내 기둥은 이동성(Mobility), 마음 건강(Mentation), 건강과 질병(Medical issues), 나에게 중요한 것(What Matters)이다. 오늘 우리는 이 중 두 번째로 "노화의 속도를 늦추는 두 번째 기둥, 마음 건강" 이야기 중 "건강한 노년은 세상의 욕망에서 자유롭다"는 주장을 공유한다.
 
정희원 교수는 융의 이론을 소개한다. 융은 자아를 세상이나 타인과 분리된 것으로 인식하는 의식의 개념으로 설명한다. 자아는 자기(self)에 소속되지만 자기와는 구별되는 개념이다. 자기는 개인의 영혼을 의미하는데, 의식하는 것과 의식하지 못하는 것 모두를 포함한다. 융이 제시한 자기의 개념을 개인의 신체, 정신 활동을 포괄하는 것으로 확장한다면, 자기는 곧 4M 모두를 의미한다. 이 자기(나)에서 극히 일부를 차지하는 자아는 지각, 기억, 생각, 감정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나'라는 인격이 어제와 같다고 느낄 수 있는 틀이다. 자아는 사람을 개인으로 존제하게 만드렁 주는 도구이지만, 잘못 사용하면 자기, 그러니까 4M을 고통스럽게 만드는 근원이 된다는 거다.
 
문제는, 융이 말하는 자기, 4M을 부르는 이름들이 너무 다양하다는 점이다. 그래 헷갈린다. 나는 "참나"(윤홍식)라 부른다. 그러나 머튼은 '참자아'라, 불교에서는 '본성 또는 대아(大我)'라, 퀘이커 교도들은 '내명의 교사 또는 내면의 빛'이라, 하시디즘(유대교 신비주의)는 '신성의 불꽃'으로, 인문학자들은 '정체성 또는 성실성', 그냥 많은 이들은 '영혼' 또는 '양심'이라 부른다.
 
그리고 인도인들에게는 자아라는 '아트만(고대 인도인들이 자아를 표현하기 위해 사용한 산스크리트어)'은 두 가지 전혀 다른 의미가 숨어있다. 하나는 소문자 아트만(atman)으로 '경험적 자아'라 한다. '나'라는 개별적 인간의 경험에 의해 형성되어 타인과 구별되는 존재로서 자아(自我)이다. 그런 자아는 습지(濕紙)와 같아 운명적으로 혹은 우연히 만나는 먹물의 색깔에 물든다. 윤홍식은 이걸 '에고'라 한다. 이 에고는 자신이 알고 있는 세계가 무한 세계의 하나라고 생각하지 않고 유일한 세계, 더 나아가 진리를 머금은 유일한 세계라고 우긴다. 이 에고는 허공에서 나부끼는 풍선처럼 비바람에 이리저리 정신없이 흔들린다. 배철현 교수는 그런 사람을 "무식하다"고 말한다. 무식한 사람의 특징은 경험에 의해 정복당한 소문자 '아트만'은 자신이 알고 있는 세계가 무한한 세계의 일부라고 생각하지 않고, 유일한 세계, 더 나아가 진리를 머금은 유일한 세계라고 우긴다.
 
또 다른 하나는 대문자 아트만(Atman)으로 삼라만상의 근원인 '브라흐만(Brahman)'과 일치하는 '초월적인 자아'이다. 윤홍식은 그걸 '참나'라고 한다. 그 '참나'를 찾으려면 인간의 경험적 자아는 초월적인 자아에 의해 정복당해, 친구가 되어야 한다. 그 말은 자아가 추구하려는 최선의 단계인 우주와 합일된 자아가 일상의 자아, 경험적 자아를 정복하여 깨어난 자아로 합일되는 상태이다. 배철현 교수에 의하면, 만일 내가 초월적 자아에 의해 정복당하면, 나는 그 자아와 친구가 되어 승화의 길로 들어 설 수 있다. 그러나 경험적 자아에 사로잡히면 나는 타락의 길로 들어선다고 한다. 잘 사는 삶이란 경험적 자아를 가만히 보고 취사선택하여, 초월적 자아와 합일을 시도하는 과정이다.
 
소문자 아트만=에고=정=욕심=호리피해
대문자 아트만=참나=성=양심=호선오악
 
성리학(性理學)이 인간의 마음을 성(性)과 정(精)으로 구분하는 것처럼, 나는 우리의 마음은 '참나'와 '에고'로 이루어져 있다고 생각한다. 물론 둘 다 '나(자기)'이다. '참나=성(性)'은 시간과 공간이 없고, 너와 나의 구별이 없는 절대계로 순수하고 완전무결하다. 반면 '에고=정(精)'은 '희노애락애오욕'이라는 인간의 감정으로 표현되는 현상계로 시간과 공간 속에서 변화하고, '호리피해(자신의 이익만을 우선으로 한다. 즉 이익은 좋아하고 손해는 피한다는 말이다)의 이치에 따라 나와 남이 구별된다.
 
정희원 교수의 주장은, 남과 자신을 비교하게 만드는 '나(에고)'라는 어떤 고정된 실체가 있다고 생각해서 '나'와 '내 것'에 집착하는 마음을 만드는데, 이 마음에서 불교가 인간의 고통을 만드는 세 가지 근원으로 꼽는 탐욕, 분노, 어리석음, 즉 '3독-탐진치'가 나온다는 거다. '삼독'의 악순환은 어리석음에서 시작된다. 즉 자아의 욕심이 채워질 수 있다고 오해하는 어리석음이다. 이 어리석음이 모든 것에 대한 탐욕을 만들어 낸다. 돈, 음식, 술, 마약, 성적 쾌락, 인기와 명성 등 도파민을 분비 시키는 온갖 것을 갈구한다. 탐욕은 도파민에 중독되는 현상이다. 그러면 그 중독으로 인지기능이 떨어진다. 그 결과로 판단력이 더 나빠지며 더 어리석은 삶을 살아가는 악순환이 이어지는 거다. 이 과정에서 뜻대로 되지 않거나 인위적으로 잠깐 늘어났던 도파민 분비가 다시 줄어들기 시작하면 노르에피네프린과 코르키솔이 만들어내는 분노가 타오르는 거다.
 
문제 다음과 같이 더 확대된다. 자아에 대한 집착, 갈애(渴愛, 목이 말라 물을 찾듯이 삼독에 집착하는 불교 용어)가 커지면 자기와 다른 사람, 이 세상 모두를 객체로 만들어버린다. 이 객체화(비인간화, 사물화) 현상이 약탈, 살육, 전쟁 등 세상의 모든 끔찍한 일어 벌어질 수 있는 원동력이 된다. 정희원 교수는 이런 악업(惡業, 나쁜 의도에 기반한 말과 행동)은 언젠가 나쁜 결과로 돌아오는데, 그것 중의 하나가 가속노화라고 주장한다. '삼독'의 악순환을 내버려두면, 그 업보로 미래의 자기(4M)가 위협받는다는 거다. 그러니까 기속 노화에 빠진 삶은 더 오랜 기간 고통을 경험하도록 자기를 빚어간다는 거다.
 
'삼독'의 악순환은 다음과 같이 '삼학(三學, 계정혜, 戒定慧)'으로 제어하여야 한다.
  • 계(계율): 몸과 입과 뜻으로 나쁜 짓을 하지 않도록 막는 것
  • 정(선정): 어지럽게 흩어진 마음을 한 곳에 머물게 하는 것
  • 혜(지혜): 미혹을 깨뜨리고 진리를 깨닫기 위해, '고집멸도'의 사성제(四聖諦)나 '십이연기' 또는 실상을 관(觀)는 것
 
이 세 가지 방법을 가속 노화와 4M의 관점에서 정희원 교수가 다시 재해석한 것을 공유한다.
첫 째로 고정된 실체로서 자아가 있다고 착각하는 어리석음에서 벗어나냐 한다. 혜(智慧)의 영역이다.
  • 자아의 욕심은 완전히 충족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닫고 도파민의 밑 빠진 독을 바라볼 수 있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 비교가 자아를 끝없이 자극한다는 사실을 이해해야 한다.
  • '탐진치', 탐욕, 분노, 어리석음의 '삼독'은 사람들의 행동을 조작하고 돈을 버는 현대의 소비자본주의를 구성하는 장치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 SNS를 포함한 플랫폼자본주의의 모든 기제는 사람의 이 근본 심리를 이용한다는 것을 이해해야 한다.
  • 우리의 뇌 구조를 폭넓게 이해하면, 4M을 해치는 여러 가지 요소들에 대해 보다 명확하게 자각할 수 있다. 이러한 자각을 통해 자아 강화와 비참함의 악순환을 탈출하여야 한다.
둘 째로 마음 챙김을 통해 번뇌, 즉 탐욕과 분노에서 벗어나야 한다. 정(禪定)의 영역이다.
  • 욕심을 줄이고 화를 내지 않는 거다. 그러나 쉽지는 않다. 하지만 마음 챙김을 늘 신경 쓰면 상황을 보다 객관적으로 바라볼 수 있게 된다. 다시 말하면, 어떤 자극이 자신의 머릿속에 들어 와 화를 만들어 내는 고정을 살펴볼 능력이 생긴다.
  • 분노 회로에 시동을 걸어야 할지 말아야 할지 멈춰 서서 숙고할 능력이 길러지는 것이다.
  • 결과적으로 불필요한 분노나 스트레스를 느끼지 않게 된다.
셋 째로 가속 노화 사이클을 구성하는 요소를 삶에서 덜어내야 한다. 계(戒律)이 영역이다. 4M의 내재역량을 유지하기 위한 모든 생활 습관을 지켜야 한다.
 
이렇게 '삼학'을 실천하면 마음의 엔트로피가 더 낮은 상태, 내재역량이 더 높은 상태의 마음 건강을 빚는다. 세상의 욕망에서 자유로운 건강한 노인이 되는 거다. '삼학'을 통해 '삼독'을 약하게 하면, 그동안 먹고 마시고 싶었던 것들, 갖고 싶던 것들, 이루고 싶던 것들, 화'나게 하던 것들의 영향력이 약해진다.
 
내 개인적인 생각이다. 그러면, 4M을 넘어 영성지수가 늘어난다. 즉 영적 성숙, 아니 영성지능을 높이려면, '참나'가 '에고' 속에, '성'이 '정'에 고스란히 나타날 수 있도록 마음을 잘 다스려야 한다. 호리피해( 好利避害)를 양심적으로 경영하여, 호선오악 好善惡惡(선을 좋아하고 악을 미워하는)만을 보여주는 우주의 질서를 따라 일상을 운전하는 것이다. 그러나 '희로애락'의 에고를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중용>>에서 말하는 중과 화(中과 和, 균형과 조화)로 잘 참나(=性)를 잘 경영하여야 하는 것이다. 잘 사는 길은 늘 공부하여, '에고=정'의 '희노애락'을 조절해가며, 즐겁고 행복하게 자연처럼 살다 가는 것이다. 이게 내 생각이다.
 
에고(자아)와 참나(자기)의 차이를 자각하는 것이다. 그러면 '나에게 중요한 것'의 우선 순위를 조정하기 위한 초석이 된다. 목표 설정과 행동이 모두 바뀔 때 비로소 자기(참나)와 세상을 상대로 벌이는 불필요한 전쟁을 매일매일 치르지 않을 수 있다는 거다. 정희원 교수의 주장이다.
 
다른 글들은 나의 블로그 https://pakhanpyo.tistory.com 이나 https://pakhanpyo.blogspot.com 에 있다. 최근에는 우리마을대학 홈페이지 블로그에도 글을 올린다. https://www.wmcss.net 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