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62. 인문 운동가의 인문 일지
(2023년 2월 9일)

2월은 애매한 달이다. 한 해의 시작인 1월은 새로움으로 반짝이고, 봄을 앞둔 3월은 설렘으로 싱그러운데 중간에 낀 2월은 이도 저도 아니게 어정쩡한 느낌이다. 다른 달에 비해 날수가 적어서 더 아쉽고, 애틋한 달이기도 하다. 그 2월도 벌써 삼분의 일이 지나간다. 결심은 옅어 지고, 조바심은 쌓이는 때이다. 흘러간 시간을 후회하지도 말고, 다가올 앞날을 미리 두려워하지도 말자고 스스로를 다독인다. 지인의 글을 아침에 만났다. 그 속에 이런 말이 있었다. “생속의 반대말은 썩은 속이었다. 속이 썩어야 세상에 관대해질 수 있었다. 산다는 건 결국 속이 썩는 것이고 얼마간 세상을 살고 난 후엔 절로 속이 썩어 내성이 생기면서 의젓해 지는 법이라고 배추적을 먹는 사람들은 의심 없이 믿었던 것 같다.”(김서령 <<외로운 사람끼리 배추적을 먹었다>> 중에서) 여기서 배추적은 아마도 배추전을 말하는 것 같다. 우리 동네는 이 전을 모른다. 그런데 경상도에서는 일반화된 전으로, 제사상에도 오른다고 한다. 몇 해전에 상주 출신의 지인이 만들어 준 적 있다.
오늘 아침은 김연수 작, <사랑의 다산 2014>(<<이토록 평범한 미래>>에 수록)의 글이 생각난다. "사람은 평생 삼천 명의 이름을 접한다고 한다. 이름과 얼굴을 함께 기억하는 사람은 삼백 명 정도인데, 그 중에서 친구라고 부를 수 있는 사람은 서른 명이고, 절친으로 꼽을 수 있는 사람은 세 명이라고. 그렇다면 사랑한다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은 몇 명이나 될까? 그건 언제나 한 명 뿐이라고 지훈은 생각했다. 평생 삼천 명의 이름을 접한다고 해도 그 중 사랑한다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언제나 단 한 명 뿐이라고, 그 단 한 사람이 없어서 사람의 삶은 외로운 것이라고." 아침 사진은 어제 오후에 동네 수목원에서 몰래 찍은 거다.
사랑/박철
나 죽도록
너를 사랑했건만,
죽지 않았네
내 사랑 고만큼
모자랐던 것이다
몇 년 전부터 생각했던 사랑에 대한 단상들 중 몇 가지를 오늘 아침 공유한다. “방법을 가진 사랑은 사랑이 아니다.” 이성복 시인의 글에 나오는 말이다. “사랑의 방법 때문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희생되었는가. 방법을 가진 사랑은 사랑이 아니다. 우리는 이미 사랑 속에 포함되어 있기 때문이다.” 사랑에 성공하는 법이라 느니, 이렇게 하면 사랑을 잘 할 수 있고 저렇게 하면 실패한다 느니 하는 말은 모두 맞지 않다. 사랑을 표현하는 방법을 두고 밤새 끙끙거리며 고민하는 것도 사실 다 쓸데없는 짓이다. 사랑은 일정한 방법을 따라가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사랑에는 특별한 방법이 없다. 사랑하는 방법을 아는 사람을 비속어로 ‘선수'라고 표현한다. 그런 사람이 하는 걸 우리는 사랑이라고 부르지 않는다. 따라서 사랑하는 법을 몰라서 사랑에 실패했다는 말은 사실이 아니다. 사랑을 표현할 줄 몰라서 사랑에 실패하는 것도 아니다. 사랑을 하면 절로 보인다고 말하지 않는가? 사랑을 어떻게 하는 것인지 말이다.
그러나 잔인해 져야 자기 사랑을 한다. 사랑을 한다는 것은 자기 자신이 주인공이 되고, 사랑하는 상대방도 주인공이 되는 사건이다. 조연으로만 있으면 사랑은 이루어지지 않는다. 노예는 주인에게 잔인하지 못한 반면, 주인은 때리기도 하고, 상도 준다. 잔인해 지려면 자신의 품위 지키기를 내려놓아야 한다. 자신의 내면에 있는 야성을 끌어내야 한다. 그리고 냉정한 선택을 하여야 한다. 어떤 사람을 만난다는 것은 다른 사람을 못 만나는 것이다. 전기 코드를 빼듯이 얌전히 관계를 끊어야 한다. 처벌 받을 각오를 하는 사람만이 살인을 하듯이, 누구를 많이 미워하고 버린 만큼 우리는 다른 것을 잡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버려 보았기 때문에 아무거나 잡지 않는다. 사랑의 남녀 사이는 박수와 같다. 소리는 혼자서는 안 난다. 내가 속물이면 그 사람도 그만큼 속물이다. 사랑에 대한 기본적인 생각은 내가 어떤 마음을 가지느냐가 중요하다. "남에 희생을 당할 만한/충분한 각오를 가진 사람만이/살인을 한다" (김수영, <죄와 벌>)
그러나 사랑이라는 것은 나무와 같다. 나무가 자라면 그만큼의 그림자가 생기는 것처럼, 사랑도 사랑하는 만큼 사랑으로 당할 고통을 감당하는 것이다. 그 사랑의 고통을 줄인다고 그림자를 반으로 쪼개려면 사랑을 반으로 쪼개야 한다. 사랑은 고통이다. 내가 누군가를 사랑한다면 그 고통을 감당한다는 것이다. 자전거를 타려면, 넘어지는 게 무섭지 않아야 하는 것처럼, 사랑을 하려면 두려워하지 말아야 한다. 우리는 흔히 자신이 안 해 본 것을 두려워한다. 그러나 막상 겪어보면 그만큼 두렵지 않다는 것을 깨닫는다. 그래서 사랑하는 사람들 끼리 서로의 아픔을 나눌 수 있어야 한다.
그러나 사랑은 하나가 되는 순간 끝이 난다. ‘하나'되는 사랑은 사랑의 종말이다. 사랑하는 두 사람 모두 혹은 두 사람 중 한 명이 자신의 자유를 포기해야만 하나가 될 수 있다는 전제를 함축하는 말이기 때문이다. 알랭 바디우는 그래서 사랑은 결코 ‘하나'가 아니라, ‘둘'의 사건이라고 강조했다. 사랑은 진짜 둘로 서는 순간이다. 제3의 요소가 개입되면 사랑을 못한다. 진짜 둘이 설 때, 사랑의 꽃이 핀다. 사랑은 일방적으로 헌신하는 것이 아니다. 내가 널 주인공으로 만들면, 너도 나를 주인공으로 만들어 주는 것이다. 그래서 진정한 사랑의 관계에서 이타심은 이기심이다. 사랑하면서 상대방에게 진심으로 헌신하는 것은 그 헌신이 나에게 되돌아오기를 바라는 것이다.
그러나 사랑은 영원하지 않다. 다만 사랑이 영원하다고 말하는 것은 꽃이 피었다는 것이다. 이것은 시간적인 지속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질적인 비약을 이야기하는 것이다. 영원한 사랑이란 정확히 말해 너무나 강렬해서 영원히 온 몸에 각인된 사랑을 했다는 것이다. 시각적인 지속만을 하는 것은 단지 조화(造花)같은 것일 뿐이다. 사랑이 꽃 폈다는 것이 중요하지, 지는 때는 중요하지 않다. 질 것 같아서 꽃을 피우지 않는 것은 헤어질 것 같아서 사랑하지 않는 것과 같다. 아무리 아름다운 영화도 언젠가는 끝난다. 이 세상의 모든 존재는 언젠가 무너지는 모래성처럼 소멸하게 마련이다. 사랑의 영원함은 꽃이 피었는지 피지 않았는지를 표현하는 말이다. 꽃을 피운 적이 없는 경우는 주인공이 된 경험이나 둘이 된 경험이 없다는 말이다. 정으로 지낸다는 것은 습관적으로 지낸다는 것이다. 나의 사랑이 식을 때, 상대방의 사랑도 식는다. 내가 사랑의 손을 꽉 잡지 않고 느슨하게 쥐면, 상대방도 꽉 잡지 않는다.
사랑의 역설이 있다. 우리는 다른 사람을 잘 알아서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에 빠지면서 그 사람을 알아가게 되는 것이다. 유홍준이 잘 말한 것이다. “사랑하면 알게 되고, 알면 보이 나니 그 때 보이는 것은 전과 같지 않으리라.” 무언가를 알아가려면 우리는 무엇보다도 먼저 그것을 사랑해야 한다. 사랑은 우리를 새로운 것, 혹은 낯선 것들을 경험하게 하는 원동력이 될 수 있다. 사랑은 사랑하는 대상에 대한 몰입과 호기심을 낳고, 마침내는 사랑하는 대상에 대한 앎으로 이끌기 때문이다. 그래서 레비나스는 말했다. “사랑은 타자에게로 나아가는 열망과 초월이다.” 좀 쉽게 말하면 알지 못하는 누군가에게 나를 건네 주는 것이다. 그러면 나는 죽는다. 그냥 바램이지, 다가가서 소유하고 장악하면 그 유혹의 대상은 죽고 만다. 스핑크스처럼, 사이렌처럼. 레비나스의 이 말도 생각난다. 타자에게로 나아감은 에로스적 관계에서 출발한다. 사랑의 역설, 즉 알지 못하면서 누군가에게 자신을 건넨다는 것을 키에르케고르는 ‘목숨을 건 비약’이란 표현을 했다. 타자로의 비약이 성공한다면, 우리는 ‘죽어도 좋을 정도’의 행복에 젖어들 수 있기 때문이다.
사랑은 비대칭관계로 타자와 시작된다. 이 말은 주고받는 것이 대칭관계가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타자는 죽어 있는 사물과는 달리 살아 있는 존재이자 생각하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타자는 자신만의 삶과 자유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사랑하는 타자는 언제든지 자기 원하는 때에 떠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랑하면 상처받을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사물을 사랑하면 자신의 욕망만을 언제든지 충족시킬 수 있지만, 그것은 진정한 사회적 관계가 아니다. 그것은 자위일 뿐이다. 그러나 상처와 불행의 위험을 감당하면서 타자에게로의 ‘죽음을 건 비약’을 하는 것이 진정한 사랑이다. 사랑의 감정에는 독점욕 혹은 질투의 감정이 항상 수반하고 있기 때문에 때로 고통과 상처를 안겨준다. 일반적으로 사랑에는 즐거움과 괴로움 또는 상처가 항상 뒤섞여 있다. 사랑의 감정이 가진 모순적인 두 가지 측면이다. 다음도 사랑의 역설이다. 사랑에 눈이 머는 것이 아니다. 사랑은 더 적게 보이게 하는 것이 아니라, 더 많이 보게 한다. 다만 더 많이 보이기 때문에 더 적게 보려고 하는 것이다. (줄리어스 고든) 사랑은 의도적으로 보고 싶은 것만 확대해서 적게 보려 한다.
다른 글들은 나의 블로그 https://pakhanpyo.tistory.com 이나 https://pakhanpyo.blogspot.com 에 있다. 최근에는 우리마을대학 홈페이지 블로그에도 글을 올린다. https://www.wmcss.net 이다.
'인문운동가의 사진 하나, 시 하나' 카테고리의 다른 글
| 누군가 슬퍼할 때/김현옥 (0) | 2023.02.10 |
|---|---|
| 현관/강기원 (0) | 2023.02.10 |
| 자세/허연 (0) | 2023.02.09 |
| 정월대보름/손병흥 (0) | 2023.02.09 |
| 세 가지 선물/박노해 (0) | 2023.02.0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