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54. 인문 운동가의 인문 일지
(2023년 2월 1일)

2월이다. 어제 이호준 시인의 페이스북 담벼락에서 만난 문장이다. "2월이 반가운 이유는 그 끝에서/3월을 만날 수 있기 때문/휘파람 불 듯 입술 동그랗게 말아 봄, 하고 불러볼 수 있
기 때문"이다. 이젠 봄을 준비할 시간이다. 오늘 아침 시는 훌리오 노보아 폴란코의 <나만의 생>이다. 이제 매일 만보 걷기를 한다. 그러면서 유튜브를 통해 시 낭송을 듣는다. 거기서 만난 시이다. 나도, 오늘 공유하는 시처럼, "홀로 굳세고 자유롭게 설 수 있다면/차라리 못생긴 키다리 잡초가 되리라."
나만의 생/훌리오 노보아 폴란코
그대들은 꽃처럼 살아라
사람들이 항상 물 주고 보살피고 찬양해주지만
한낱 화분에 매인 운명이 되어라
나는 못생긴 키다리 잡초가 되리라
독수리처럼 절벽에 매달려
높고 거친 바위들 위에서 바람에 흔들리리라
돌 껍질 뚫고 나온 생명으로
광활하고 영원한 하늘의 광기에 당당히 맞서리라
시간의 산맥 너머, 또는 경이의 심연 속으로
내 영혼, 내 씨앗을 날라주는
태곳적 바다의 산들바람에 흔들리리라
차라리 사람들의 눈에 띄지 않으리라
모든 이가 피하는 잡초가 되리라
달콤하고 향기로운 라일락 향 대신
차라리 퀴퀴하고 푸른 악취를 풍기리라
홀로 굳세고 자유롭게 설 수 있다면
차라리 못생긴 키다리 잡초가 되리라
우리 대부분은 "한낱 화분에 매인 운명"처럼 산다. 그러니까 자유롭지 못한 채 살아가도 있다. 심지어는 자신이 자유롭지 않다는 것조차 모르고 사는 이들도 있다. 자유로운 삶을 살려면, 시인은 다음과 같이 살라고 한다.
"독수리처럼 절벽에 매달려/높고 거친 바위들 위에서 바람에 흔들리리라.
돌 껍질 뚫고 나온 생명으로/광활하고 영원한 하늘의 광기에 당당히 맞서리라.
시간의 산맥 너머, 또는 경이의 심연 속으로/내 영혼, 내 씨앗을 날라주는/태곳적 바다의 산들바람에 흔들리리라."
삶이 주는 고통에 피하지 않고 정면으로 만나자는 거다. 그래서 시인은 사람들의 손에 결국 뽑히고 마는 좋은 향을 풍기는 꽃이 되기 보다, "차라리 사람들의 눈에 띄지 않"는 "모든 이가 피하는 잡초가 되리라"고 말한다. 그러면서 자유롭고 싶다는 거다.
말년의 미셸 푸코는 '내가 누구인지' 묻는 근대화의 주체화 방식을 뒤로하고, '내가 무엇일 수 있는지' 묻는 고대의 주체화 방식으로 복귀하여야 한다고 말했다. 내 안에 있는 것을 발견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인식론적인 세계관보다는 내 안에 없는 나를 만들어 가기 위해 스스로를 변형시켜가는 실천적인 세계관으로 살아야 한다는 거다. 푸코는 이때 필요한 것이 영성(spritualité)라 했다. 그 영성은 나를 변형시키는 정신의 삶을 위해 필요한 '자기와의 관계 맺기'와 '자기 돌보기'의 핵심을 의미한다.
최근에 꼼꼼하게 읽고 있는 김연수의 신작 소설, <<이토록 평범한 미래>>를 해설한 박혜진 문학평론가는 "거대한 전환의 시대에는 자신을 아는 것보다 자신을 변형시키는 것이 중요할 수 있다. 아는 것은 딜레마에 빠지게 하지만, 선택하는 것은 딜레마로부터 벗어나게 하기 때문이다. 이유는 알게 한다. 하지만 이해는 행동하게 한다"고 말했다. 딜레마에 빠져 있던, 나에게 커다란 통찰을 주었다.
이번 김연수 소설은 '미래를 기억하자'는 거다. 그 말은 '자신이 누구인지 묻지 않고 자신이 누구일 수 있는지 물으며 스스로를 변형시키자'는 거다. "미래가 기준이 되어서 현재를 결정하면 자신이 원하는 대로 주체를 변형시켜 나가는 정신의 삶을 살 수 있다"(박혜진)는 거다. 이를 위해, 우리는 시간을 다시 정의해야 한다.
시간이 과거에서 현재로, 현재에서 미래로 흐른다는 근대적 시간 개념은 기억의 대상을 과거에 한정 짓는다. 하지만 시간이 다시 정의되면 기억도 다른 범주를 필요로 한다. 경험한 것 만을 기억할 수 있다는 믿음은 경험하지 못한 것도 기억할 수 있다는 믿음으로 바뀌고, 기억의 쓸모는 확장된다는 거다. 내게 생길 일을 기억하는 것은 모두의 일을 기억하는 것보다 더 강한 힘을 발휘할 수 있다는 거다. 내게 생길 일은 내가 기억하지 않으면 사라지고 말기 때문이다. 오늘 아침 공유했던 시처럼, '나 만의 생'을 지켜낼 수 있는 세계가 있을 때, 우리는 절망을 모르는 사람이 될 수 있다. 절망을 모르는 마음으로 간절하게 기억하는 미래는 우리 사람을 그 미래로 데리고 간다는 거다.
작년부터 생각했던 거다. 우리가 자본의 공세에 맞서고, 상품의 유혹에 끌려 다니지 않으려면, 일상을 구성하는 힘이 필요하다. 이 일상에서 우리가 갖고 있는 자산, 즉 생각, 말 그리고 행동을 지식에서 지성으로 그리고 지성에서 영성으로 전환하려는 생각, 말 그리고 행동을 하는 거다. 이 말은 우리들에게 "욕망의 재배치"를 요구하고 있는 거다. 다시 말하면, 욕망의 '건너 가기'를 해야 한다. 어떻게? "쾌락에서 지성으로, 중독에서 영성"으로 건너가야 한다.
지성이나 영성이나 하는 정의를 작년에 고미숙으로부터 배웠다. 지식, 지성 그리고 지혜 , '3 지(知)'에서, 지식은 주로 정보, 물질의 원리를 탐구하는 것, 그리고 그걸로 인간이 누리는 부를 확장하는 것이다. 고미숙은 이걸 '기술지(技術知)'라 부른다. 지성은 '문명지(文明知)'라고 정의한다. 물질을 알고 부를 확장하면 그걸 어떻게 나누고, 이걸 어떻게 인간 삶에 적용할까, 이 문제가 부각되는데, 그럴 때 관계에 대한 탐구를 하는 것이 지성이다. 기술지와 접속하는 것이다. 그 다음은 지혜이다. 인간은 천지를 연결할 수 있는 존재이다. 그러므로 인간 너머가 궁금하다. 그때 우리는 인간에 대해 묻는 것이 아니라 생명에 대해 묻게 된다. 그리고 지구를 묻는 것이 아니라 우주를 질문하는 것이 지혜이다. 이 영역으로 가면 기술지와 문명지처럼 손에 잡을 수 있는 게 없다. 거대한 무의 세계를 만나게 된다. 생명과 우주가 무엇인가라고 묻게 되면 그 보이는 모든 것을 해체해 버린다. 그걸 지혜라고 부르는데, 동시에 영성(靈性)이라고도 한다. 그걸 인류학적 용어로 쓰면 '자연지(自然知)'이다.
고미숙에 의하면, 한 사회의 문명 수준을 알려면 이 지식, 지성 그리고 지혜의 인드라망 순환을 보아야 한다고 했다. 그 순환을 통해 그 사회에서 살고 있는 사람들의 인식의 방향이 결정된다. 이때 가장 중요한 인간다운 앎은 지혜, 영성이다. 그래 이것이 바탕이 되어야 기술지와 문명지도 그 활발한 역동성을 갖게 된다. 왜 그런 가? 지식은 계속 기술을 확대해서 인간 마음에 소유에 대한 증폭, 곧 욕망을 불어넣는다. 그래서 사람들은 너무 많은 것을 갖고 싶고 누리고 싶어지 게 하는 거다. 이 마음을 해체하는 게 지혜인데, 이 지혜가 개입하지 않으면 무조건 욕망을 향해 나아간다. 그래서 기술이 아무리 발달해도 우리가 더 자유로워질 수 없는 거다. 한편 지성은 사회적 관계에 대한 많은 시행착오와 토론, 논쟁, 교육 등을 주도하는데, 이 지성이 지혜와 연결되지 않을 때, 그것은 엘리트와 대중의 차이가 강화되는 쪽으로, 그래서 엘리트가 대중을 지배하고 군림하는 식으로 나가게 된다.
이 말은 우리들에게 "욕망의 재배치"를 하라는 거다. 다시 말하면, 욕망의 '건너 가기'를 해야 한다는 거다. 어떻게? "쾌락에서 지성으로, 중독에서 영성"으로 건너가야 한다는 거다. 아무리 멋진 자동차나 명품가방도, 일정한 시간이 지나면 시시해 진다. 더 좋은 자동차와 가방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한다. 이 쾌락적응은 인간관계에서도 마찬가지다. 우리가 꿈에 그리던 상대를 만나 관계를 맺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상대방의 장점이 아니라 약점에 대해 '깊이 숙고'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이내 새로운 사람을 만나기를 갈망한다. 우리는 쾌락적응을 통해, 만족이 불가능한 쳇바퀴 속에서 스스로를 소진한다. 인간은 실현이 불가능한 욕망이 있다는 사실을 확인할 때, 불행하다. 우리는 한 가지 욕망을 실현시켰을 때, 만족스러울 것이라고 착각한다. 그러나 그 욕망이 실현되었을 때, 욕망은 진부한 일상이 되기 때문이다.
어떤 사람이 낙타에게 물었다. "오르막이 좋으냐, 내리막이 좋으냐?" 낙타가 대답했다. "오르막길 내리막길이냐는 문제가 아니다. 중요한 것은 짐이다." 저 사막을 횡단하는 낙타에게 짐이 없다면 얼마나 발걸음이 가벼울까? 인생에서도 어떤 모습으로 살고 있느냐가 아니고, 어떤 마음으로 사느냐가 중요할 때가 많다. 마음의 짐이 무거우면 인생 길이 힘들다. 살아가는 일이 자꾸 짐을 만들어 가는 것은 아닌지 되돌아보게 된다. 욕망을 가볍게 하는게 삶의 목적이 되어야 한다.
이런 지혜의 씨앗으로, 내 영혼을 다듬고, 내 영성을 키워 새로운 봄을 맞는 2월이고 싶다. 이젠, 몇 일전부터 고유하고 있는, "성공적인 나이 듦을 위한 네 가지 기둥" 이야기를 한다. 그 내 기둥은 이동성(Mobility), 마음 건강(Mentation), 건강과 질병(Medical issues), 나에게 중요한 것(What Matters)이다. 우리는 이 중 첫 번째 "노화의 속도를 늦추는 첫 번째 기둥: 이동성(Mobility)으로 노화를 이기는 몸" 만들기를 공유하고 있다. 오늘은 "올바른 사람의 방향은 자세에서 시작된다"는 주장이다.
우리는, 2010년대를 지나면서 스마트폰과 태블릿PC가 일상이 되어, 자세와 연관해 발생하는 근골격계 질환을 더 많이 앓고 있다. 잘못된 자세에서 시작되는 악순환이 일어나고 있다. 주변의 많은 사람들이 시종일관 고개를 숙이고 스마트폰 화면을 보고 있다.스마트폰의 사용은 등뼈가 앞으로 굽고 허리와 목을 긴장시키며, 목과 등의 통증을 증가시킨다. 게다가 코로나-19를 거치면 전국민이 영상미디어 빠져 있다. 책상 앞에 앉아 같은 자세로 장신간 화면을 보면 몸의 형태가 구조적으로 변화한다. 허벅지근육이 짧아지고, 등뼈와 어깨가 굽는다. 엉덩이 관절과 어깨 관절의 구조까지 달라져 제대로 서 있기도 어려워진다. 여기에 정상적인 신체활동 감소에 따른 근력 저하, 증가하는 업무시간과 스트레스로 인한 수면 부족과 피로, 통증 그리고 줄어드는 식사시간 등이 이를 더 악화시킨다.

행동미래학자 윌리엄 하이암 등이 2019년에 만든 실물 크기의 미래 사무직 노동자 모델 엠마이다. 굽은 등뼈, 그를 보상하는 목장의 긴장과 둥글게 된 흰 어깨, 블록 튀어나온 배, 부종이 생긴 팔과 다리는 가속 노화 생활습관에 스마트기기 장기간 사용이 더해졌을 때 일어난 체형 변화의 결과이다. 끔찍하다.
똑바로 앉은 자세를 유지하면 긍정적인 마음을 가질 수 있고, 인지기능이 좋아질 가능성도 있다. 또한 스트레스 상황에서 자존감을 지켜주고 우울감을 줄일 수도 있다. 나쁜 자세를 유지하는 경우 동일한 영양섭취와 운동습관을 유지하더라도 배는 더 볼록해 지고 팔다리는 앙상해 질 가능성이 높다. 편하고자 하는 사람의 본성은 이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하지 못하고, 더 오랜 시간, 더 많이 고통받는 방향으로 이끈다. 게다가 문제는, 스마트기기 사용을 줄이고 체계적으로 근력운동을 하며 수축된 근육을 스트레칭으로 늘리려는 등 능동적으로 노력하기보다는 주사나 마사지, 물리칠, 진통제와 근이완제 같은 일시적이고 수동적인 해소 방안을 찾는 것이다. 그러니 어느 정도의 불편을 감수해야만 근본적인 문제가 해결되고 장기적인 불편과 고통이 감소될 수 있음을 늘 기억해야 한다. 이건 오늘 아침 화두인 미래를 기억하는 일이다.

일을 할 때 왼쪽 그림처럼 앉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오른쪽 그림처럼 궁둥뼈결절을 이용해 바르게 앉으면 척추가 불필요하게 긴장하지 않고 등뼈가 앞으로 구부러지지 않는다. 척추 정렬을 전반적으로 신경 쓰는 자연스러운 자세를 잡는 것이 기본이 되어야 한다. 앉은 상태에서 골반뼈를 만지면 작은 동전만 한 돌출부를 찾을 수 있는데(궁둥뼈결절), 이 뼈가 의자의 착좌면과 닿도록 앉는 것이 기본이다. 이 상태로 등뼈가 앞으로 굽지 않게 신경을 쓰면 자연스럽게 복근에 힘이 약간 들어간다. 그 다음 자연스럽게 앞을 바라보면 머리부터 척추, 궁둥뼈결절이 안정적인 수직선을 만들고 목 뒤의 긴장이 상당부분 해소된다.
올바른 자세를 앉으려면, 처음부터 긴장해서 억지로 바르게 앉으려고 하는 것은 좋지 않다고 한다. 몇 개월에 걸쳐 코어근육을 강화하고 스트레칭을 충분히 하면 점차 긴장 없이 바르게 앉을 수 있게 된다고 한다. 우리가 긴장 없이는 제대로 앉지 못하는 원인은 대부분 코어근육의 상대적 취약성과 상체의 가동성 제약 때문이라 한다.
흥미로운 것은, 좋은 자세로 앉으려면, 의자는 착좌면이 딱딱하고 평평한 것이 좋다고는 것이다. 왜냐하면 딱딱한 의자의 장점은 똑같은 자세로 장시간 앉아 있기 어렵게 해준다는 것 때문이다. 같은 자세로 오랫동안 앉아 있으면 대사적 가속노화를 일으키고 근육은 불필요하게 긴장할 수 있다. 그러니 몸에 좋지 않은 자세로 오래 앉아 있게 해주는 푹신하고 편안한 의자는 애초에 좋을 것이 없다. 따라서 프란체스코 시릴로(Francesco Cirillo)가 제안한 '뽀모도로 기법(Pormodo technique, 25분 일하고, 5분 휴식하는 방법)'을 적용해서, 25분 동안 앉아서 열심히 일한 후 짧은 휴식시간 동안 일어나서 몸을 풀어주는 것이 좋은 방법이다. '뽀모도로'는 이탈리아어로 '토마토'를 뜻한다. 끝으로 지하철이나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면서 서 있을 때나 걷기, 계단 오르기 등의 알상 동작을 하면서 바른 자세를 유지하고 있는지 자각하는 것이 중요하다. 내일은 '운동 습관의 중요성'에 대해 이야기를 할 생각이다.
다른 글들은 나의 블로그 https://pakhanpyo.tistory.com 이나 https://pakhanpyo.blogspot.com 에 있다. 최근에는 우리마을대학 홈페이지 블로그에도 글을 올린다. https://www.wmcss.net 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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