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49. 인문 운동가의 인문 일지
(2023년 1월 27일)

몇 일 전부터, 우리는 산상수훈 '팔복' 중 한 가지 씩 정밀 독해를 하고 있다. 오늘은 제4복인 "행복하여라, 의로움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들! 그들은 흡족해질 것이다"를 갖고 길게 사유 해본다.
산상수훈의 '팔 복'중 4-8복은 맹자가 말한 '4단(端)+1=5행'으로 바꿔 볼 수 있다. 여기서 '의로움'이란 '어떤 기준에 부합하다'는 뜻으로 영어로는 'righteousness'이다. 문제는 그 기준이 시대마다 다르다. 아브라함에겐 '네 양심에 충실 했느냐 였다. 모세 때에는 '십계명'이었다. 십계명을 잘 지켰는지가 의로운 가, 아닌 가의 기준이었다. 십계명의 알맹이는 '하느님 사랑, 이웃 사랑'이다. 나중에는 그게 쏙 빠져버렸다. 그래서 이스라엘에선 십계명의 껍데기로만 기준을 제는 율법주의가 판을 쳤다. 그걸 예수가 '사랑'으로 뒤집었다. 예수는 의로움의 기준을 '사랑'으로 제시하셨다. 사랑이 깔린 의로움은 '격'이 달라진다. 어떻게? 격이 낮은 의로움은 날카롭고 차갑다. 그건 상대방을 비판하고 단죄한다. 그러나 격이 높은 의로움은 부드럽고 따뜻하다. 상대장을 안아서 녹이기 때문이다. 전자는 허공에다 정의를 외치고, 후자는 눈물로 사랑을 산다. 사랑이 담긴 정의이다. <<무지개 원리>>를 쓰신 고 차동엽 신부는 다음과 같은 예를 들어 설명하셨다. 안중근 의사(義士)는 독립운동 근거지가 탄로 날 우려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일본군 포로를 풀어준 적이 있다. 그리고 '약한 것으로 강한 것을 물리치고, 어진 것으로 악한 것을 물리친 거다. 그에게 하나의 생명도 아끼는 사랑의 마음이 있었던 것이다. 안중근 의사는 그 마음으로 이토 히로부미를 쏘았다. 더 많은 생명을 구하기 위해서 였다. 사랑이 밑바탕이 된 정의이다. 그게 진정한 의로움이다. 정의를 편에서 분노할 줄 알아야 하는 것도 정의이다. 사랑이 있는 정의이다. 더 큰 불의를 막기 위해.
사랑의 마음을 맹자는 측은지심(惻隱之心)이라 했다. 이런 것이 없다면, 바른 사람이 아니다. 그러니까 인간성의 시작(인격, 人格)은 사랑으로부터 나온다. '남과 나를 구별하지 않는 마음.' 그런 사랑을 위해서는 또 다음의 4가지가 필요하다고 보는 것이 맹자의 생각이다.
▪ 정의로워야 한다. 그것은 내가 당해서 싫은 것을 남에게 하지 않는 일이다. 그리고 맹자가 말한 수오지심(羞惡之心)이다. 그런 일을 했다면 수치심을 갖고 창피해 할 줄 알아야 한다. 그러지 못한 자신을 미워할 줄 알아야 한다. 절제하지 못하는 지나친 사랑은 사랑이 아니다. 정의가 아니다.
▪ 예절이 있어야 한다. 겸손과 배려의 마음이다. 예절을 몸에 익혀야 한다. 사양지심(辭讓之心)이라고도 한다. 다른 사람에게 자신의 편의와 안락을 양보할 줄 알아야 한다. 이것이 다른 사람과 공감하는 능력을 만들어 준다. 상대방의 입장에서 생각하면 더 쉽다. 지혜로워야 한다. 옳고, 그름을 판단할 줄 알아야 한다. 속마음으로는 자명한 것과 찜찜한 것을 구별할 줄 알아야 한다.
▪ 진리를 알아차릴 줄 알아야 한다. 진리에 입각한 옳은 판단을 하는 힘이 지혜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자연을 잘 관찰하고, 침묵으로 말하는 자연 속에서 그 진리를 파악할 줄 알아야 한다. 지연이 보여주는 진리와 지혜는 같다고 본다. 그리고 평화를 이루는 사람이다.
▪ 이러한 마음을 일시적으로만 갖는 것이 아니라, 늘 성실하게 마음 속에 지니고 일상에서 실천한다면, 그것이 사람들이 자신을 믿게 하는 '믿을 신(信)'이다. 믿음이 가는 사람이 되는 것이다. 박해를 받더라도 믿음을 갖고 의로운 일을 하면 하늘이 알아줄 것이다.
'사랑'과 '정의'가 인간 본성이다. 사랑은 무조건 주는 것이리면, 정의, 아니 의로움은 하나의 '기준'이다. 그러나 우리는 흔히 다른 사람을 욕망과 이익 문제로 단순화하곤 한다. 한번쯤은 ‘내가 잘못 생각하고 있나?’ 혹은 ‘내가 모르는 뭔가 있지 않을까?’ 생각하면 좋겠지만, 자신만의 정의가 앞서면 그만큼 깊은 확신의 함정에 빠지곤 한다. 내가 옳고, 이 일은 필요한 일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선량하게 무례할 수 있다. 의로움, 정의는 간단히 말하면, '내가 당해서 싫은 것을 상대방에게 하지 않는 것이다.
이번 설 연휴 명절기간에 소설가 김연수의 새 소설집 <<이토록 평범한 미래>>를 읽었다. 거기서 오늘 공유하는 일본 시인 미야자와 겐지의 시를 알게 되었다. 소설 속에 이런 대사가 나온다. "버티고 버티다가 넘어지긴 다 마찬가지야. 근데 넘어진다고 끝이 아니야. 그 다음이 있어." (…) "바로 그때 바람이 불어와." (…) 무슨 바람이냐고 물었더니, '세컨드 윈드'라고 하더라구요." 달리기나 보트 레이스같이 격렬한 운동을 할 때는 운동을 시작하여 잠시 후에 매우 괴로운 시기가 온다. 이것을 사점(死點: dead point)이라고 하며, 이를 극복하고 견디어 내면 괴로움이 점차 누르러진다. 이와 같은 변화가 일어나는 시기를 '세컨드 윈드'고 한다. 운동 뿐만 아니라 어떠한 일을 할 때 우리는 종종 '사점'과 비슷한 상황과 자주 마주하게 된다. 눈 앞에 마주한 현실이 너무나도 힘들게 느껴지고 당장 포기하고 싶기까지 하다. 하지만 그 '사점'을 잘 버텨내면 분명히 '세컨드 윈드'라는 신선하고 시원한 새 바람이 불어 오며, 그 상황을 버텨낼 수 있는 힘을 우리는 반드시 얻게 된다. 그러니 비바람에 지지 않고, 사는 거다.
비에도 지지 않고/미야자와 겐지
비에도 지지 않고
바람에도 지지 않고
눈보라에도
여름 더위에도 지지 않는
튼튼한 몸과
욕심 없는 마음으로
절대로 화내지 않고
언제나 조용히 웃음 짓고
하루에 현미 네 홉과
된장과 야채 조금을 먹고
모든 일에 내 잇속을 따지지 않고
사람들을 잘 보고 듣고 알고
그래서 잊지 않고
들판의 소나무 숲 그늘 아래
작은 집에 살고
동쪽에 병든 아이가 있으면
가서 간호를 해 주고
서쪽에 지친 어머니가 있으면
가서 볏 짐을 날라 주고
남쪽에 죽어가는 사람이 있으면
가서 두려워하지 말라 달래고
북쪽에 싸움이나 소송이 있으면
의미 없는 일이나 그만 두라 말하고
가물 때에는 눈물을 흘리고
추운 여름이면 걱정하며 걷고
모두에게 바보라 불려도
칭찬에도 미움에도 휘둘리지 않는
그런 사람이 나는 되고 싶네
어제에 이어 오늘도, 가속노화를 그치게 하기 위해, 복합적응계인 '몸'에 대한 이해를 이어간다. 오늘의 주제는 "삶의 내재역량이 높아야 노화의 가속도를 줄인다"는 거다.
우리는 항상성(恒常性)을 유지하지 못하면 생존하기가 어렵다. 항상성이란 '생명체가 여러 가지 환경 변화에 대응하여 생명 현상이 제대로 일어날 수 있도록 일정한 상태를 유지하려는 성질'이다. 이런 항상성 제어 체계 덕분에 우리 몸에서는 생존하는 데 필요한 매우 다양한 변수가 아주 좁은 오차범위 내에서 최적의 상태로 유지되고 있는 거다. 의학적으로나, 분자생물학적 스케일에서 보면 측정하고 관리할 수 있는 변수는 무궁무진하지만, 우리 몸의 항상성 변수들은 크게 다음과 같은 것들이 있다.
- 들어오고 나가는 에너지(칼로리)의 차이
- 수분의 섭취와 배설
- 심장의 출력 조절
- 체온
- 전해질
- 혈당과 포도당 합성
- 장운동의 속도
- 운동기능을 유지하기 위한 신경전달 물질의 균형
- 수면 패턴 등이다.
이것들을 나열해 본 이유는 우리는 이런 변수가 존재하고 있는지조차 의식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생명체는 지구의 자연환경에서 생존할 수 있도록 수많은 변수를 '알아서' 조절하는 시스템을 유전자로 물려받아 생명을 유지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항상성을 뜻하는 영어가 'homeostasis'이다. 이 단어에는 '상태'를 의미하는 '-stasis'라는 어미가 붙어 있다. 이 어미는 '안정, 정지 성태'를 뜻한다. 이 때문에 항상성 개념은 다소 정적으로 들린다. 하지만 여러 가지 변수들이 작용하더라도 겉으로 보기에 일정한 상태가 유지되는 것은 다양한 방향에서 주어지는 힘이 시시각각 변하면서도 균형을 만들어내기 때문이다. 그러나 스트레스가 동일하더라도 해당 시스템의 상태에 따라 항상성을 유지하기 휘해 필요한 노력의 정도가 크게 달라질 수 있다. 이런 개념을 '안전마진(safety margin)'으로 설명한다. 다음 그림에서 보는 것처럼, 내재역량이 감당할 수 있는 범위의 스트레스라면 적은 노력으로도 시스템의 항상성을 유지할 수 있다. 하지만 감당할 수 없는 범위라면 실제 스트레스의 크기는 같더라도 항상성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매우 큰 힘이 든다.


이 시스템은 생명체의 항상성뿐만 아니라 금융 시장, 기후변화, 교통정체 등 복잡적응계의 양상을 띠는 많은 곳에서 관찰된다. 항상성을 유지하는 힘을 '알로스타틱 부하(allostatic load)'라 한다. 이 말은 생명체가 스트레스에 대응하기 위해 들이는 노력의 총합을 의미한다. 항상성이라는 단어의 앞부분인 'homeo'가 '같음'을 뜻한다면 그것을 '다름'을 뜻하는 'allo'로 바꾼 용어이다. 변화에 대응하는 것이다.
이 그림에서 오른쪽으로 밀어내는 힘의 화살표 길이가 같은 것은 주어지는 스트레스의 크기가 같다는 말이다. 그러나 생명체가 스트레스에 대응하는 힘인 알로스타틱부하 정도가 다르므로 공을 가운데로 끌고 가서 항상성을 회복시키기 위해서는 첫 번째그림보다 두 번째 그림이 더 큰 힘이 들게 된다. 생명체라는 복잡적응계에서는 안전마진을 '내재역량'으로 설명할 수 있다. 특히 사람은 성능이 좋은 에너지 균형 제어 장치를 가지고 태어난다.
그러나 자연적으로는 존재하지 않는 초가공식품이나 정제곡물, 단순당으로 강력한 당부하의 폭탄을 외부에서 계속 투하하면서 신체활동도 하지 않으면, 과잉 에너지를 태우는 발열기관이나 높은 혈당을 저장하는 인슐린 신호체계가 고장 난다. 그 결과 에너지 균형을 유지하는 내재역량이 감소하면서 두 번째 그림 같은 상태가 된다. 이 상태를 '보상기능상실'이라고 한다. 예를 들어, 과잉에너지 섭취가 안전마진을 넘기면 어느 순간부터는 식용이 조절되지 않고 발열기전 역시 작동되지 않아 체중이 급격히 불어난다.
이런 내재역량의 개념은 정신의학 분야에서는 '회복탄력성(resilience)'이라 한다. 이 내재역량은 생활습관 어떻게 만드는지에 따라서 조절할 수 있다. 적절한 근력운동을 지속적으로 수행하면 당부하를 견디는 대사체계의 내재역량이 개선된다. 그러니까 관리하기에 따라 낮은 내재역량도 끌어올릴 수 있다.
나이가 들수록 신체적, 정신적 내재역량은 노화가 축적됨에 따라 조금씩 낮아진다. 체내에 구조적, 기능적으로 눈에 보이지 않는 고장 난 부분이 많아지면 스트레스를 견딜 여력이 줄어들기 때문이다. 이를 의학적으로 '노쇠(frailty)'라 한다. 중요한 것은 사람은 어떻게 관리 하느 냐에 따라 내재역량을 꾸준히 증진시킬 수 있을 뿐 아니라 기능적으로 노쇠하는 시기도 늦출 수 있다는 점이다. 예를 들어 신체활동과 인지활동을 끊임없이 수행해서 내재역량 전반을 높게 유지하는 사람은 아밀로이드 신경병변이 상당히 축적(치매를 일으키는 병리적 변화)되며 뇌가 많이 쪼그라들더라도 외부적으로 드러나는 기능은 비교적 정상인 경우가 많다. 반대로 전반적 내재역량을 낮게 유지하는 사람이라면 아주 미미한 뇌 병변만 발생해도 일상생활을 온전히 수행하기 어렵다.
오늘은 여기서 멈추고, 내재역량을 높게 유지하기 위한 건강 활동들의 개념과 방법들에 대해서는 내일 이어간다.
다른 글은 나의 블로그 https://pakhanpyo.tistory.com 이나 https://pakhanpyo.blogspot.com 에 있다. 최근에는 우리마을대학 홈페이지 블로그에도 글을 올린다. https://www.wmcss.net 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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