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40. 인문 운동가의 인문 일지
(2023년 1월 18일)

오늘 아침은 노자 <<도덕경>> 제54장을 읽고 공유한다. 제목을 "수덕(修德)", 즉 '덕을 닦은 자'로 삼는다. 덕(德)을 닦는(修)는 것을 '수덕'이라고 한다. "부드럽고(無爲, 무위), 포용하는 어머니의 마음(包一, 포일)을 그대로 실천하며 사는 것이 수덕의 삶"이라고 박재희 교수는 설명한다. '덕'은 유교와 불교에서도 모두 중요하게 여기는 덕목이다. 유교에서는 '덕을 밝힌(明德, 명덕)다'라 하고, 도교에서는 '덕을 닦는(修德, 수덕)다'라 한다. 덕을 잘 닦고 베풀면 그 성과는 크게 나타난다.
- 내 몸에 덕이 진실(眞)하게 되고,
- 내 집안에 여유(餘)가 생기고,
- 마을이 번창(長)하고,
- 나라가 풍요(豊)롭게 되고,
- 세상이 두루(普) 평안해지는 효과가 나타난다는 거다.
"수진(修眞)-가여(家餘)-향장(鄕長)-국풍(國豊)-천하보(天下普)"로 묶어 볼 수 있다. 이 모든 효과는 나의 덕을 닦아 진덕(眞德)의 상태에 이르는 것으로부터 시작된다. 그런 차원에서 이런 형식을 만들어 낼 수 있다. "진덕(眞德)-여덕(餘德)-장덕(長德)-풍덕(豊德)-보덕(普德)." 노자에게 덕의 실천은 욕망의 조절, 조건 없는 사랑, 의도와의 결별, 드러내지 않는 나눔, 부드러움의 실천, 조그만 것의 배려 등이다. 그 덕을 실천하고 닦는 것이 우선한다. 그것이 수덕(修德)이다. 이 덕의 수양은 참된 덕을 만나게 되고, 넉넉한, 번창, 풍요, 평안을 가져다 준다는 거다. 노자에게 덕은 그저 수양으로만 그침이 아니라, 지속적인 생존과 번영의 기틀이다. 물론 그 목적을 위해서 덕을 닦고 베푸는 것은 아니지만, 좋은 결과를 가져오게 된다는 거다. 이렇게 덕의 뿌리를 잘 내린 자는 누구도 그를 멸할 수 없고, 덕의 가지로 세상을 품은 자는 누구도 그의 품을 떠날 수 없다는 거다. 이젠 노자 <<도덕경>> 제 54장의 정밀 독해를 한다.
善建者不拔(선건자불발) 善抱者不脫(선포자불탈): 제대로 세운 것은 뽑히지 않고, 제대로 품은 것은 빼앗을 수 없다.
子孫以祭祀不輟(자손이제사불철) : 자자손손 제사가 끊어지지 않는다.
박재희 교수는 "덕으로 나라를 잘 세운 자는 빼앗기지 않는다/백성을 잘 품은 자는 백성이 떠나지 않는다/자손의 제사가 끊이지 않고 영원할 것이다"로 번역했다. 국가의 가장 큰 덕목은 종묘사직을 계속 이어가는 것이다. 제대로 세웠다는 것은 국가의 정통성이 제대로 확립되었다는 의미이고, 제대로 안았다는 것은 민생을 제대로 돌본다는 의미다. 그런 국가는 민심을 얻을 수 있고, 지속적으로 정부를 존속시킬 수 있다. 그래서 자손들의 제사가 끊이지 않는다고 했다. ‘뿌리 깊은 나무는 바람에 흔들리지 않는다'는 용비어천가의 문장과 일맥상통한다.
修之於身(수지어신) 其德乃眞(기덕내진): 몸을 갈고 닦으면 그 덕이 참될 것이고(그 덕이 곧 참되며)
修之於家(수지어가) 其德乃餘(기덕내여): 가정에서 실천하면, 그 덕이 넉넉하게 될 것이고(그 덕이 곧 여유로우며)
修之於鄕(수지어향) 其德乃長(기덕내장): 마을에서 실천하면, 그 덕이 자라날 것이고(그 덕이 곧 자라며, 오래갈 것이며)
修之於國(수지어국) 其德乃豊(기덕내풍): 나라에서 실천하면, 그 덕이 풍성해질 것이고(그 덕이 곧 풍요롭고 풍족할 것이며)
修之於天下(수지어천하) 其德乃普(기덕내보): 천하에서 실천하면, 그 덕이 두루 퍼질 것이다(그 덕이 곧 두루두루 미치며 퍼질 것이다).
수신으로 시작해서 가정, 고장, 나라, 천하의 덕으로 이어지는 문장의 논리 구조는 ‘수신제가치국평천하’라는 유교의 <<대학>> 가르침과 비슷하다. 그러나 노자의 가르침과 유교의 가르침 사이에는 근본적인 차이가 있다. 이어지는 문장들에서 보여 지듯이 노자는 전체성보다는 개별성을 더 중요하게 생각한다. 유교에서는 하위 개체를 상위 개체에 종속시켜 궁극적으로 공동체의 안위와 질서유지에 초점을 맞추지만, 노자는 개별적 단위들 그 자체의 독립적인 가치에 초점을 맞춘다. 그래서 몸의 덕으로 몸을 살피고, 가정의 덕으로 가정을 살피고, 고을의 덕으로 고을을 살피고, 나라의 덕으로 나라를 살피고, 천하의 덕으로 천하를 살피라고 말한다. 유교에서는 개인이 국가의 수단으로 전락하지만 노자에서 개인은 독립된 인격체로서 존중되고 유지된다.
故以身觀身(고이신관신) 以家觀家(이가관가) 以鄕觀鄕(이향관향) 以國觀國(이국관국) 以天下觀天下(이천하관천하): 몸의 덕으로 몸을 살피고, 가정의 덕으로 가정을 살피고, 마을의 덕으로 마을을 살피고, 나라의 덕으로 나라를 살피고, 천하의 덕으로 천하를 살핀다. 도올의 번역이 더 와 닿는다. "내 집을 다스리는 경지로써 모든 사람들의 몸을 볼 것이요, 내 마을을 대하는 경지로써 모든 사람들의 집을 볼 것이요, 내 나라를 대하는 경지로써 모든 나라를 볼 것이요, 내가 천하를 대하는 경지로써 천하를 볼 것이다." 더 나아가, 박재희 교수는 "그러므로 사람을 보면 그 사람의 덕이 보이고, 가정을 보면 그 가정의 덕이 보이고, 마을을 보면 그 마을의 덕이 보이고, 나라를 보면 그 나라의 덕이 보이고, 천하를 보면 그 천하의 덕이 보인다"고 했다.
"몸은 몸으로써 보고, 집은 집으로써 보고, 마을은 마을로써 보고, 나라는 나라로써 보고, 천하는 천하로써 보라"는 것인데, 신, 가, 향, 국, 천하를 이해하는 방식이 각기 그 차원에서 그 나름대로의 가치 기준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신으로써 향, 국을 바라봐도 안 될 것이고, 가의 기준으로 국, 천하를 바라봐도 아니 될 것이다. 주어는 성인이고 치자(治者)이다. 치자의 덕성은 잘 세우고, 잘 껴안는 것이다. 그걸 "선건(善建)", "선포(善包)"로 표현하였다. 그것은 '무위의 정치적 실현'이다. 치자는 유가가 말하듯 단순한 수신의 논리로써 천하를 다스릴 수는 없는 것이다.
관(觀)이라는 글자는, 이미 <<도덕경>> 제1장에서 "관기묘(觀基妙)"라 했듯이, 묘한 세계 까지를 꿰뚫어 볼 수 있는 관법을 지니되 그 궁극에는 무위의 다스림으로 그 모든 것을 통섭하는 자이다. 결국 천하를 가지고서 천하를 보는 보편적 시각으로 통 큰 정치를 할 것을 노자는 요청하고 있는 거다. 그러한 "무위포일(無爲包一)"의 이상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수신으로부터 천하를 다스리는 데까지 거쳐야 하는 단계적인 덕이 있는 거다.
吾何以知天下然哉(오하이지천하연재) 以此(이차): 천하가 이러함을 내가 어떻게 알 수 있겠는가? 이러한 이치를 통해서이다. 이 번역도 도올의 것을 공유한다. "내 어찌 감히 천하의 그러함을 안다고 말하리요? 바로 이러한 이치 때문에 안다!" 세상의 원리가 그렇다는 것을 아는 이유 이 때문이라는 거다.
인터넷에서 다음과 같은 해설을 읽은 적이 있다. "스티브 잡스가 죽은 후 많은 시간이 흘렀지만 애플은 여전히 4차산업혁명시대 최고의 혁신기업으로 굳건히 자신의 자리를 지키고 있다. 실적도 좋다. 잡스의 바통을 이어받은 팀 쿡의 리더십 덕분이기도 하지만 잡스가 뿌려 놓은 혁신 DNA가 여전히 큰 위력을 발휘하고 있음을 부인하기 어렵다. 팀 쿡이 애플의 CEO를 맡은 후 시장에 내놓은 혁신기기는 애플워치가 유일한다. 애플을 떠받히고 있는 것은 여전히 스티브 잡스가 남긴 애플 PC와 아이폰, 아이패드 등이다. 이들 제품이 가진 기능적 자기 완결성과 편리함, 디자인에서의 미적 요소 때문에 애플은 선두자리를 지키고 있다. <<도덕경>>의 위 구절처럼 잡스가 혁신적 아이디어를 워낙 잘 심어 놔서 어지간해서는 잘 뽑히지 않는다. 잡스가 남긴 혁신제품들을 사랑하는 애플 마니아들의 마음속에는 잡스의 미니멀리즘 철학이 하나의 신앙처럼 자리 잡았고, 노자가 말하는 도와 덕의 정신이 그 속에서 면면히 이어져 내려오고 있다." 어떤 일을 하든, 지속가능 하려면, 노자의 덕의 실천으로 씨앗을 잘 심어 놓아야 한다는 거다.
그리고 아무런 조건 없이 베푼 덕은 결국 좋은 결과로 나에게 돌아온다. 돈을 벌려고 하기 전에 덕을 먼저 닦는 것이 순서이다. 예컨대 '덕(德)'은 근본(本)이고, 돈(財)은 말단(末)이니, 덕을 닦고 베풀면 돈이 반드시 들어온다는 '덕본재말(德㡷財末)'의 유교 철학과 만난다. 어쨌든 '덕'은 동아시아 사상에서 모든 철학자가 긍정하는 인간의 위대한 실천이다.
이제 우리가 갖추어야 할 근본적인 동력은 바로 '덕'이다. '덕'은 인간이 인간 수준에서 인간으로 서의 품위를 잃지 않을 수 있는 근거이다. 그리고 자기 자신을 자기 자신으로 만드는 내면의 힘이다. 인격의 원천이다. 덕이 작동되는 사람에게는 그 깊이로부터 우러나오는 향기가 발산되고 그 향기가 감화력을 갖게 해준다. 공자도 "덕필고 필유린(德不孤, 必有隣)"라고 했다. 덕이 작동되는 사람은 혼자가 아니다. 반드시 그 향기에 감화되어 따르는 사람들이 있게 된다. 덕이 있는 사람은 매력이 있고, 그 매력이 강한 카리스마를 만들어 지배력을 갖게 한다.
덕을 키우려면, 아주 구체적인 일상의 일을 잘 관리하는 힘이 있으면 그것이 바로 덕의 표현이 된다. 구체적 세계와 그에 대한 접촉 수준이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인가를 드러낸다. 예컨대, '주워들은 소문을 여기저기 옮기고 다니는 것'이 덕이 없다는 것이라고 공자는 말한다. 덕을 발휘하는 사람은 넓고 근본적이지만, 재주를 발휘하는 사람은 대개 자신만의 신념이나 지적 체계에 갇혀 좁고 고집스럽다. 이들을 공자는 덕을 망치는 '향원(鄕原)'이라 했다. 좁다란 집단 내에서 형성된 단편적인 명성과 시각에 갇혀 자기를 끌고 가며 원래의 마음을 갖고 살지 못하기 때문에 이런 사람에게 덕은 항상 주변으로 밀려난다. 우리는 이렇게 되지 않도록 노력해야 할 뿐 아니라, 이런 사람들에게 휘둘려서도 안 된다.
인간의 근본적인 동력으로 서의 덕을 가진 사람은 결국 인간으로 서의 품위를 유지하는 사람이다. 이런 사람우로 살고 싶다.
- 사회적 책임성을 다른 데서 따지지 않고, 먼저 자기 자신에게 서부터 구하는 사람이다.
- 남을 탓하거나 비판하기 전에 스스로를 먼저 돌아보는 민감성을 유지한다.
- 거대 이념을 향해 쏜살같이 내달리기보다는 우선 일상을 자기 통제권 안에서 지배한다.
- 쓰레기를 함부로 버리지 않는다.
- 경망스럽지 않고 진중하다.
- 덕을 가진 시민은 지적 민감성을 유지하고 있기 때문에 믿고 있는 이념을 설파하지 않고 구체적 세계에서 자신만의 고유한 문제를 발견한다.
어제는, 이런 생각을 하며, 늦은 오후에 대청호길을 혼자 걸었다. 오늘 사진이 거기서 찍은 것이다. "넉넉함 쓸쓸함"을 만났다.
이 넉넉한 쓸쓸함/이병률
우리가 살아 있는 세계는
우리가 살아가야 할 세계와 다를 테니
그때는 사랑이 많은 사람이 되어 만나자
무심함을
단순함을
오래 바라보는 사람이 되어 만나자
저녁 빛이 마음의 내벽
사방에 펼쳐지는 사이
가득 도착할 것을 기다리자
과연 우리는 점 하나로 온 것이 맞는지
그러면 산 것인지 버틴 것인지
그 의문마저 쓸쓸해 문득 멈추는 일이 많았으니
서로를 부둥켜안고 지내지 않으면 안 되게 살자
닳고 해져서 더 이상 걸을 수 없다고
발이 발을 뒤틀어버리는 순간까지
우리는 그것으로 살자
밤새도록 몸에서 운이 다 빠져나가도록
자는 일에 육체를 잠시 맡겨 두더라도
우리 매일 꽃이 필 때처럼 호된 아침을 맞자
다른 글들은 나의 블로그 https://pakhanpyo.tistory.com 이나 https://pakhanpyo.blogspot.com 에 있다. 최근에는 우리마을대학 홈페이지 블로그에도 글을 올린다. https://www.wmcss.net 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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