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38. 인문 운동가의 인문 일지
(2023년 1월 16일)

오늘 아침은 '나를 깨우는 하루 한 문장 50일 고전 읽기'라는 부제의 <<어른의 새벽>> 읽기 열 번째 이야기를 한다. 오늘의 고전 한 마디는 <<장자>>의 <인간세>에 나오는 문장이다. "내 앞에 문도 없고 출구도 없을 때 그리고 모든 거처를 하나로 대하면 부득이한 것 속에서 머물 곳을 찾게 될 때, 나는 거의 다 온 것이다."
원문은 이 거다. "无門无毒(무문무독) 一宅而寓於不得已(일택이우어부득이) 則幾矣(즉기의)." 직역하면, '문도 없고 나갈 구멍도 없거든, '하나'로 집을 삼고, 부득이한 일에만 거하라, 그러면 그런 대로 성공할 것이다.' 이 대목에서 장자는 마음의 재계(齋戒)를 강조하고 있다. 즉 자신의 이름이나 명예를 버리고 무심한 경지에 이르러야 일체의 사물을 받아들일 수 있다는 것이다. 또한 마음의 눈과 귀로보고 들어야 사물의 참된 모습에 접할 수 있다고 하였다. 이렇게 그는 허(虛)와 무(無)를 내세우고 있는 것이다. 장자는 '자신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것'을 심재(心齋)라 한다. 심재를 하면, 일상의 의식 속에서 이루어진 옛날의 '작은 나(self, 小我)'가 사라지고, 새로운 큰 나(Self, 大我)'가 탄생한다. 그런 근본적인 변화가 생겼을 때 명예나 실리 추구에 초연하게 되고, 그 때 비로소 새장 같은 조정이나 정치판, 사회 어느 곳에 있더라도 위험 없이 할 일을 제대로 할 수 있을 것이라고 했다.
그런 일이 쉽지는 않다. 세상과 완전히 인연을 끊고 은둔하면 몰라도, 사회에 참여하면서 마음을 비우고 살기란 몹시 어렵다. 그렇지만, 진정으로 심재를 하며 마음을 완전히 텅 빈 방과 같은 상태가 되면 그 '텅 빈 방이 뿜어내는 흰 빛', 곧 순백의 예지가 생기는 것을 체험하리라는 것이다. 이를 위해, 1) 고요히 머물러야 한다. 가만히 앉아 몸과 마음을 고요히 하는 것, 2) 그 중에서 특히 '마음을 모으는 일'이 기본 요건이다. 몸은 가만히 앉아 있으나 마음이 함께 앉아 있지 못하고 사방을 쏘다니게 되면 헛일이다. 이렇게 몸은 앉아 있으나 마음이 쏘다니는 상태를 '좌치'라고 하는데, 가만히 앉아 자기를 완전히 잊어버린다는 좌망과 맞서는 개념이다. 좌망이 마음의 구심(求心)운동이라면, 좌치은 마음의 원심(遠心) 운동인 셈이다.
<<장자>>를 조금 더 읽다 보면, "且夫乘物以遊心(차부승물이유심) 託不得已以養中至矣(탁부득이이양중지의)"이라는 말이 나온다. 그 뜻은 '마음이 사물의 흐름을 타고 자유롭게 노닐도록 하십시오. 부득이한 일은 그대로 맡겨 두고, 중심을 기는 데 전념하십시오'이다.'' 정리하면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다.
(1) 망아(忘我): 자기 자신을 잊어 버린다. 나를 비운다.
(2) 승물유심(乘物遊心): 노니는 마음으로 세상의 파도를 탄다. 사물이나 일의 변화에 맡겨 조화를 이룸으로써 마음을 노닐게 한다.
(3) 탁부득이 양중(託不得已 養中): 어찌할 수 없음에 맡김으로써 중(中)을 기른다. '탁부득이'는 사람의 힘으로 어찌할 수 없는 것은 그냥 내버려 둠으로써 자신의 한계를 깨닫는 삶의 방식이다. 세상 일에 한계가 있음을 알고 내면의 세계를 어디에도 기울이지 않고 중(中)을 지켜 나가자는 거다.
위에서 말한 세 가지를 한 마디로 말하면, '무위(無爲)의 가르침'이다. 모든 것을 억지로 하거나 꾸며서 하지 말고, 순리대로 자연스럽게 행동하라는 것이 '무위의 가르침'이다. 이는 억지로 꾸민 말, 과장한 말, 잔재주를 부리는 간사한 말, 남을 곤경에 몰아넣으려는 말, 남을 억지로 고치려는 말 등을 삼가라는 것이다. 이를 위해 오늘 아침 다시 다짐한다.
(1) 遊心(유심): 마음이 사물의 흐름을 타고 자유롭게 노닐도록 한다.
(2) 託不得已(탁부득이): 부득이 한 일은 그대로 맡겨 둔다.
(3) 養中(양중): 중심을 기르는 데 전념한다.
(4) 安命(안명): 그저 그대로 명(命)을 받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명은 피할 수 없는 것이므로 이를 억지로 거역하지 말고 편안한 마음으로 수용하자는 거다. 이를 우리는 '안명론(安命論)'이라 한다. 우리의 운명이 모든 면에서 조금도 움직일 틈이 없이 꽉 짜여 있다는 것을 철학적으로 논증하고 그것을 꼼짝 없이 그대로 믿는 운명론이나 숙명론과는 다르다. '안명론'은 니체가 말한, '아모르 파티(amor fati, 운명을 사랑함)와 비슷하다.
삶이 내 의지대로 이루어지지 않는다고 느낄 때, 부득히함(탁부득이)에 나를 맡기는 순간 순응보다는 돌파하려는 욕구가 더욱 커진다. 그런 의미에서 어쩌면 장자의 '거의 다 온 것(則幾矣, 즉기의)'이라는 말은 의지를 최소화하라는 뜻 같다. 여기서 안명(安命)이 시작된다. 그때부터 우리는, 역설적으로, 어떤 마음으로 살아가야 할지 진지하게 고민하기 시작한다. 그러면서 부득이함 속에서도 내가 머물 수 있는 최소한 공간을 찾게 된다. 나를 이루고 있는 삶을 완전히 부정하거나 바꿀 수는 없지만, 조금 다르게 생각해보거나 마음을 키우는 일은 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러면 아주 작은 일이라도 나의 의지를 관철시킬 수 있는 무언가를 찾게 된다. 그것부터 시작하면 된다. 나는 이걸 삶에 작은 틈, 아니 균열을 내는 거라고 말한다.
<<어른의 새벽>> 저자 우승희는 이때 고전을 읽는 것이었다고 고백한다. 나도 그게 좋은 방법이라고 생각한다. 소크라테스의 철학의 제1원리는 "네 자신을 알라"이다. 자기 이해에 대한 정언 명령이고, 제2원리는 "길을 잃고 헤매는 내 자신을 제대로 돌보라며, 숙고하라는 자기 규율의 정언 명령이다. 자기와 세상에 대한 제대로 된 자기인식의 나침반으로 인문학 고전을 읽는 것이 중요하다. 그 인문학적 지도 위에서 나침반의 극성(極性)을 다시 점검하며 정신의 근육을 키워야 한다.
저자 우승희가 꺼내 든 책은 <<논어>>였다. 나도 이 책의 첫 구절을 매우 좋아한다. 공자는 인간의 품격을 잘 갖춘 사람을 '군자(君子)'라고 하며, 군자로 나아가는 길은 <<논어>>의 첫 페이지에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흔히 우리는 이것을 '군자 3락(君子三樂, 즐거움)'이라고 한다.
(1) "학이시습지 불역열호(學而時習之 不亦說乎)": 배우고 수시로 익히면 기쁘지 아니하겠는가? 배우고 익히는 것이 인생에서 제일 즐겁다. 여기서 학습은 단순히 나의 지식을 얻는 것이 아니라, 내 영혼을 바꾸고, 내 삶의 태도를 바꾸는 것으로 본다.
(2) "유붕자원방래 불역낙호(有朋自遠方來 不亦樂乎)" 벗이 먼 곳으로부터 찾아온다면 즐겁지 않겠는가? 여기서 벗은 '벗 우(友)'가 아니라 '벗 붕(朋)'자이다. '벗 우'는 이익에 따라 만나고 헤어지는 것이고, '붕'은 꿈과 뜻이 같은 친구들이다. 그런 '벗 붕'들과 함께 지내며 사는 것은 인생 두 번째 즐거움이다.
(3) "인부지이불온이, 불역군자호(人不知而不溫 不亦君子乎)" 남이 알아주지 않더라도 서운해 하지 않는다면 군자답지 않겠는가? 이 말은 남들이 나를 어떻게 평가하든지 연연하지 않고 내 일상을 유지하며 그저 묵묵히 내 삶을 유지해 나가는 것이 진정한 군자의 모습라는 거다. 종합하면, 군자란 학습하는 인간, 같은 꿈을 꾸는 동지와 함께 사는 인간 그리고 남의 평가에 연연하지 않고, 내 일상을 지배하고 유지하며 사는 사람이다. 그런 사람에게는 배움의 기쁨, 우정의 소중함, 남이 아닌 나를 위한 삶들이 들어 있다. 오늘 아침 이 세 문장 중에 내가 방점을 찍고 싶은 것은 세 번째 문장이다. 나 다운 삶을 살고 싶기 때문이다. 최근에 나는 많은 사람에게 의미를 가지는 일보다 나에게 의 있는 일이 무엇인지 찾아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기 때문이다.
다시 장자 이야기로 돌아 온다. 장자는 우리가 어찌할 수 없는 부득이한 곳에 머물게 될 때, 오히려 마음이 깨어난다고 말한다. 일상에서 쓰는 말로 '마음을 먹기' 시작하는 거다. 그러면 그 부득이 한 곳에서 마음만은 자유로이 할 수 있다는 것을 깨닫는다. 저자 우승희는 "살다 보면 스스로 직시할 수밖에 없는 순간과 마주한다. 그 시간들을 축적하며 우리는 더디지만 어른이 된다"고 말했다.
나이가 들어도 좀체 자기 삶에 대한 확신이 들지 않는다. 이게 맞나 싶다 가도 금세 의심이 생긴다. 그래 나는 고전을 많이 읽는다. <<장자>>를 읽었고, 지금은 <<도덕경>>을 함께 읽고 있다. 이어서 공자의 <<논어>를 같이 읽고 싶다.
논어 새로 읽기/권순진
사람이 칠십까지 살아 내기가 여의치 않았던 시절
그 나이라면 가르칠 일도 깨우칠 것도 없었겠다.
나이 오십에 하늘의 뜻을 다 알아차려야 한다 했으니
그 문턱 넘은 뒤로는
다만 제각기 붙은 자리에서
순서대로 순해지기만 하면 되는 것이었다.
귀가 순해지는 이순耳順에 앞서
쉰 다섯 즈음엔 입이 순해지는 구순口順이어야 지당하고
귀와 입이 양순해진 다음에는 눈의 착함이 순서란 말이지
예순 다섯 안순眼順은
세상으로 향하는 눈이 너그러워질 때.
입과 귀와 눈이 일제히 말랑말랑해지면
좌뇌 우뇌 다 맑아져서 복장 또한 편해지겠거늘
아직도 주둥이는 달싹달싹
귓속은 가렵고 눈은 그렁그렁
찻잔 속 들여다보며 간장종지만 달그락대고 있으니.
다른 글들은 나의 블로그 https://pakhanpyo.tistory.com 이나 https://pakhanpyo.blogspot.com 에 있다. 최근에는 우리마을대학 홈페이지 블로그에도 글을 올린다. https://www.wmcss.net 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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