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15. 인문 운동가의 인문 일지
(2022년 12월 24일)

오늘은 기도하고 싶은 날이다. 창문을 여니 밖은 밤사이 소복하게 눈이 내렸다. 눈은 세상의 모든 것을 하얗게 덮어 놓았다. 성탄절 전날이다. 영어로는 크리스마스 이브이다. 그래 기도를 좀 하기로 했다. 주먹의 힘보다 기도의 힘이 더 강하다. 주먹의 힘은 모든 것을 파괴하는 데 불과하지만, 기도의 힘은 모든 불가능한 것을 이루어지게 하기 때문이다. '공감을 넘어 환대하는 사람이 되게 하여 주소서!' 이게 이번 크리스마스에 내가 올리는 기도이다. 여기서 기도(祈禱)는 나 자신을 위한 최선을 찾는 행위이고, 습관적으로 해오던 생각과 말, 행동을 하지 않겠다는 다짐에서 출발한다. 우리가 말하는 기도는 흔히 절대자인 신에게 자신이 원하는 욕망을 요구하는 행위로 알려져 있다. 기도를 기복(祈福)으로 생각한다. 그런 의미의 기도는 자신의 욕망을 강화하기 위해 신의 이름을 이용하는 자기만족일 뿐이다.
기도의 '기(祈)'자를 풀이하면, '빌 기'자이지만, 날카로운 도끼(斤)를 자기 앞에 겨누는(示) 수련을 뜻한다. 도(禱)는 목숨(壽)을 자기 앞에 내놓고 구(求)하는 행위이다. 기도는 자신에게 주어진 오늘이라는 시간을 위대하게 만들기 위해 자신의 목숨을 내놓는 굳은 결심이다. 기도는 무엇을 바라는 것이 아니라., '하지 않아도 되는 것'과 '하지 말아야 할 것'을 가려내는 결단의 순간이다. 그렇게 해서 기도는 자신만의 심연(深淵)으로 들어가 자신에게 쌓여 있는 적폐(積弊)를 제거하는 행위이다. 배철현의 <<수련>>이라는 책을 읽고 내 생각으로 정리한 것이다.
이젠 공감(empathy) 이야기로 다시 돌아온다. 현재 우리 사회의 문제는 한국 엘리트들이 환대는 커녕 공감 능력마저 부족하다는 거다. 특히 "[현] 정부 관료들의 공감능력이 부족하다는 것은 이제 알 만한 사람은 다 안다. 이태원 참사, 화물연대 파업, MBC사태 등에 대응하는 방식에 국민들은 “공감력이 떨어져도 너무 떨어진다”고 말한다. 공감능력이 부족하면 당연히 소통과 협치 능력도 제한되며, 그래서 들이댈 수 있는 무기가 바로 ‘법과 원칙’이다. 이 과정에서 대화 단절과 투쟁이 뒤를 잇는다. 대화와 이해가 필요한 사람들, 특히 자신의 노동을 갈아 넣어야 겨우 기본적인 생활이 유지되는 사회적 약자층에 대해서조차 공감과 연대 대신에 ‘법과 원칙’이 작동한다." 서울대 교육학과 한숭희 교수의 주장이다.
공감능력은 ‘함께 살아가는 능력’의 핵심이다. 미국의 전 대통령 버락 오바마의 다음 말이 잘 말해준다. “공감한다는 것은 다른 누군가의 처지가 되어 보는 것이다. 우리와 다른 사람의 눈으로, 배고픈 아이의 눈으로, 해고된 철강노동자의 눈으로, 기숙사를 청소하는 이민노동자의 눈으로 세상을 보는 일이다.” 그런데 왜 한국 사회는 엘리트일수록 공감 능력이 부족할까? 그 답을 한 교수로부터 들어 본다.
"권력 엘리트들이 처음부터 공감능력 결핍이라는 DNA를 가지고 태어나지는 않았을 것이다. 태생적 사이코패스가 아니라면 누구나 공감능력을 학습할 수 있다. 다만 양육과 성장, 교육과 경험 속에서 타자를 이해해야 할 필요성 혹은 상황에 노출되지 않도록 ‘관리’되었을 뿐이다. 청년 전기까지 이어지는 십수년의 과잉 경쟁 속에서 아이들은 학교성적을 올리는 데 공감능력이 크게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부모들은 아이들을 사회적 관계로부터 고립시켜 공부에 집중하도록 한다. 이 과정이 성공적으로 이루어진 학생들이 입시에 성공하고 엘리트 계층의 반열에 들어선다. 결국, 한국 엘리트들의 공감능력 부족은 과잉경쟁이라는 시대상황이 만들어낸 창조물이다. 그러한 학습경험의 결핍은 그대로 공감능력의 결핍을 낳는다." 좋은 성적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함께 사는 능력(공감-친교-협동)의 성장을 억제해야 한다는 것이며, 입시생을 둔 부모들은 이 점을 잘 알고 있다.
한숭희 교수는 공감 학습이 필요하다고 강조한다. "유네스코가 강조해왔던 ‘함께 살아가는 능력을 학습하는 일(tolearntolivetogether)’은 모든 학교교육과 평생학습의 핵심이 되어야 한다. ‘함께 사는 능력’은 우리 사회의 ‘지속 가능성’을 위해 가장 중요하게 학습되어야 할 역량이다. 어릴 때 그나마 가지고 있던 사회적 연대와 공감, 공존의 능력을 갈수록 퇴화시켜가는 학교체제와 방식에 대한 대대적인 수술이 필요하다. 공감 학습은 정서와 인지, 상황과 맥락을 넘나드는 범경계적 학습을 필요로 한다. (…) 공감학습을 위해서는 마음과 머리가 모두 필요하다." 오늘 만이라도, 다른 사람의 시선으로 세상을 보는 ‘공유된 마음’을 갖고 싶다. 공간 학습을 위해.
공감은 상대가 가진 아픔이나 기쁨을 인지적으로 이해하는 능력이다. 공감은 상대의 고통을 인지하기는 하지만, 이것을 해결하기 위한 행동으로 이어지지 못한다는 지적을 들어왔다. 설사 공감이 행동으로 이어진다 하더라도 공감이 이끄는 행동은 아픈 사람들에 대한 일방적이고 시혜적인 위로(sympathy) 정도이다. 그러니까 공감이란 단순히 타인의 감정을 동일하게 느끼는 것뿐만 아니라, 그들이 처한 상황과 관점을 이해할 수 있는 지적 해석이 동반되는 과정이다. 전자를 정서적 공감능력이라고 한다면, 후자는 인지적 공감능력이라고 한다. 그러나 공감 능력이 있다고 해서 위로를 넘어 고통의 문제를 원인의 수준에서 근원적으로 해결하는 혁신적인 행동이 나오는 것은 아니다.
공감은 이기적이거나 상업적 목적으로 쉽게 전용된다. 물론 상대방의 정서적 상태를 이해하는 공감이 원활한 일상 생활을 영위하는 데 기본이다. 자신의 의견을 다른 사람에게 개진 시켜서 받아들이게 해야 하는 리더들도 과거에는 그냥 직책으로 밀어붙였다. 지금은 그런 리더십을 행사한다면 갑질이 된다. 따라서 최소한 공감을 통해 정서적 상태를 파악한 후 상대의 정서에 맞게 자신의 의견을 제시해야 한다. 아랫사람이 의견을 받아들였다고 문제가 해결되는 것은 아니다.
광고 회사가 이용하는 것도 고객의 감성을 자극하는 공감이라는 "설탕 코팅"(윤정구)을 통해서이다. 고객이 광고회사의 스토리로 설탕 코팅된 제품을 샀다고 해서 이 제품의 품질과 가격이 좋아지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자신들에 지불된 고대 광고비용은 가격을 낮추거나 품질을 개선하는데 들어갔어야 할 비용이다. 고객을 설탕 코팅된 제품을 비싸게 사는 꼴이 된다.
그러나 문제가 있다. 이점을 윤정구 교수는 잘 설명하고 있다. "경기가 좋을 때는 공감능력만 있어도 최소한 소통에서는 도움을 받을 수 있어서 설정한 목표를 받아들이게 하는데 큰 문제가 없었다. 하지만 지금은 경기가 꺽기고 여기서 해결되지 못한 문제들이 쌓여 구더기가 생겼고 이 구더기가 무서워 누군가가 거적을 덮어논 상태다. 고통의 상처에 구더기가 파고들기 시작해서 고통의 문제가 극단으로 치닫고 있다. 고통의 문제의 원인을 찾아서 원인의 수준에서 근본적으로 치유하지 않는다면 재앙이 덮치는 것은 시간문제다. "
이런 상황에서 공감을 대신하는 개념이 환대(hospitality)이 절실하다. 그 환대가 아기 주 예수가 세상에 오신 이유이고 메시지이다. 여기서 말하는 환대는 공감을 넘어 상대의 아픔을 자신의 아픔으로 받아들여, 긍휼(compassion)로 치유에 나서는 행동을 의미한다. 예수의 십자가이다. 예수는 당시 절대왕권이 있던 세상에서 '모든 이는 하느님의 자식이다.' "하느님은 사랑이시다'라고 주장하시다, 결국 십자가에 매달려 돌아가셨다. 그러나 그는 부활했다. 이는 예수의 몸의 부활보다 신 앞에 모든 인간은 평등하다고 말했던 예수의 정신이 부활한 것이다. 하느님은 아무런 조건 없이 사랑하시는 하느님이다. 이러한 사랑의 하느님에게 기꺼이 가는 길은 '예수가 하느님이시다'라고 고백하고, 갖가지 예식에 참여하는 것이 아니라, 성숙한 지혜로 사람들과 뭇 생명을 사랑하는 것이다.
긍휼이란 단어를 나의 앱 <모든 국어사전>에서 찾아보니, 간단한 단어가 아니었다. "불쌍하고 가엽게 여겨서 돕는 것'이다. 나는 방점을 '돕는 것'에 찍고, 나의 '긍휼 정신'을 반성해 보았다. 불쌍히만 여기고, 돕기를 하지 않은 마음이 찬바람처럼 불어왔다. 긍휼을 한문으로 써보아도, 언뜻 그 뜻을 알 수 없다. 그런데 긍휼의 영어 표현이 compassion, mercy였다. Compassion을 우리는 '연민'이라 하고, mercy는 '자비'라 한다. 이 mercy의 동의어가 humanity(인간성, 인성)이다. 그러니까 긍휼은 인성이다. 인성을 키우려면 긍휼하는 마음의 그릇을 키우는 일이다. 맹자가 말하는 '측은지심'이 mercy이다. 여가서 나오는 인(仁), 어진 마음이다. 그걸 우리는 사랑이라고 하고, 철학에서는 에로스라 한다. 나는 이 에로스를 '생명력'으로 풀이한다. 공감과 달리 상처와 고통에 대한 근원적 치유 행동이 전제도지 못하면 긍휼은 아니다.
공감이 단순히 의사 소통을 증진시키는 데는 도움을 주고, 상대의 아픔에 반창고를 붙여주거나 진통제를 처방해 일시적으로 증상을 완화시킬 수 있는지 모르나 상대방을 주인으로 온전하게 세움을 위한 치유 행동을 일으키는 것은 아니다. 상대와 자신의 아픔을 긍휼로 환대해가며 치유해 궁극적으로 삶의 주인으로 만드는 것이 환대의 정신이다. 나는 예수에게서 그 환대를 보았다.
그래 아기 예수가 오늘 저녁에 오시는 거다. 예수는 1세기 유대사회의 금기를 깨뜨렸다. 당시 유대인들은 신을 인간과는 질적으로 다른 '거룩한 존재'라고 여겼다. 사람들은 신과 인간 사이에는 건널 수 없는 무한한 간극이 있다고 믿었다. 반면 예수는 신이 예루살렘 성전이나 율법에 감금된 화석화된 교리가 아니라, 인간의 삶에서 자비의 손길이 필요한 사람과 동물 안에 숨어 있다고 말했다. 예수는 '자신과 신이 하나다'라고 말했다. 예수는 신과 인간의 경계를 허문다. 그는 더 나아가 '타인을 자신처럼 사랑하라'고 말했다. 심지어는 원수까지 사랑하는 행위가 바로 ‘신’이라고 선언했다. 유대인들은 이 거침 없는 청년의 생각을 도저히 수용할 수 없었다. 그래 당시 유대인들과 로마인들은, 특히 당시 종교인들과 정치인들은 그런 건방진 예수를 십자가에 못을 박아 처단했다. 예수가 신의 경계를 침입하였다는 이유이다.
오늘 아침 사진의 구유는 성탄절의 아름다운 모습을 연출하기 위한 장식품이 아니다. 구유는 비참한 현실에 있는 이들의 마지막 선택이며, 하느님의 보호이다. 그리고 가난한 형제는 우리가 연대하며 다가가야 할 성탄 구유이다. 이것이 살아 있는 성탄 구유이다. "우리가 구세주를 진정으로 만날 수 있는 성탄 구유는 가난한 이들이다"고 말씀하신 성 프란체스코의 말씀으로 시작하는 성탄절 아침 <인문 일기>이다.
성모 마리아를 통하여 베들레헴에서 태어나신 그리스도께서 믿음을 통해 내 마음 안에 탄생하지 않으신다면, 성탄은 나에게 하나의 축제이고 공휴일로 기억될 뿐이다. 성탄은 산타 클로스가 오시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가 오신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그리스도처럼 모든 이를 기억하며, 낮은 곳으로 내려가는 것이다. 그 정신을 믿고, 하느님이 나를 사랑하신다는 믿음을 늘 지니고 절망하지 말고 믿어야 한다. 희망을 가져야 한다. 포기하지 말아야 한다. 사랑 가득한 성탄이 되어야 하는 이유이다. 주변에 고생하는 사람에게 선물을 주면서, 축제의 소리보다 사랑의 향기가 가득한 따뜻한 성탄이 되도록 오늘 하루를 보낼 것이다.
성탄절의 기도/진장춘
주여 지난 날 헛되이 보낸 성탄절을 용서하시고
올해는 성탄의 의미를 바로 새기게 하소서.
왕궁이 아닌 누추한 말구유에 임하신 까닭을 알게 하소서.
가난한 목동의 인사를 먼저 받으신 의미를 깨닫게 하소서.
인류의 죄를 십자가로 보속하기 위해
가장 낮고 누추한 곳으로 오신 예수님
영광이 아닌 가난과 고통을 받으러 오신 예수님
저도 당신과 함께 낮은 곳으로 임하게 하소서.
헛된 욕망을 비우고
가난한 마음이 되어
아기 예수님 모실
정결한 말구유 하나 마련하게 하소서.
비움과 나눔과 겸허한 마음으로
기쁘게 아기 예수님을 맞이하게 하소서.
어려운 이웃 속에서 예수님을 만나게 하소서.
오소서 아기 예수님!
내 마음에 오소서.
간절히 비오니 예수님을 닮아가게 하소서.
다른 글들은 나의 블로그 https://pakhanpyo.tistory.com 이나 https://pakhanpyo.blogspot.com 에 있다. 최근에는 우리마을대학 홈페이지 블로그에도 글을 올린다. https://www.wmcss.net 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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