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17. 와인 파는 인문학자의 인문 일기 (2021년 5월 4일)

오늘 아침은 이런 문장을 만났다. " 어디에 선가 날아온 화살에 팔을 맞았는데, 화살이 날아온 곳과 이유 등을 분석하느라 화살을 뽑지 못한 채 산다면 어찌 되겠는가. 중요한 건 화살부터 뽑아내는 것이다. 삶을 항해에 비유하면 인생에서 부는 바람과 파도를 피할 수는 없다. 그러므로 ‘어떻게 내게'가 아니라 ‘나에게도' 이런 일이 닥칠 수 있다고 준비하는 사람에겐 평범한 이 순간이 소중한 것이다. 중요한 건 상처 받지 않는 게 아니라 상처의 시간을 다독여 잘 보내는 것이다." 자식을 잃은 부모의 입장을 말로 표현할 수 없지만, 좀 지나침이 느껴진다. 말을 좀 아낄 필요가 있다. "아이 잃은 아빠는 더 이상 잃을 게 없거든요. 그 대가를 반드시 치르게 해주겠다고 아들에게 맹세했습니다." 지나친 주장인지 모르겠다. 그러나 내 마음은 화살을 뽑아 내는 일이 급하다고 본다.
그리고 오늘 아침 뉴스 중에는 빌 게이츠가 배우자 멀린다가 27년의 결혼 생활을 끝내고 이혼한다고 발표했다. 그 이유가 하나의 통찰을 준다. "우리 인생의 남은 단계에서 부부로서 함께 성장할 수 있다고 더 이상 생각하지 않는다"고 이혼 사유를 밝혔다. 부부가 아니라, 사람들과 관계에서도 서로 성장할 수 없다면, 관계를 정리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본다.
세상에 당연한 것은 없다. 그래서 별 일 없는 지금-이 순간이 소중하다. 어느 날 불행이 확 덮치니까, 행복도 그런 식으로 일어나나 싶었지만, 그렇지 않았다. 행복은 별 일 없이 소소하다. 지금 그런 상태라면, 그게 나의 '화양연화"이다. 세상은 '태과불급(太過不及)"이다. 넘치거나 부족하다. 즉 균형추가 잡히지 않고 항상 기울어져 있다. 지구도 마찬가지이다. 그러나 그 기울어짐은 변화를 통해 끊임없이 균형을 찾아간다. 그래 내 철학으로 산다는 것은 균형 찾기 이다. 그냥 명사로 균형이 아니라, 동명사로 균형 찾기, 즉 Balancing이다. 그 빛나감이 오히려 누구에게나 기회가 될 수 있는 거다.
"태과불급 개위질(太過不及 皆爲疾)"이라는 말이 있다. "넘쳐도 부족해도 병이 된다. 그냥 '과유불급(過猶不及)'이라고도 한다. 조화를 강조하며 지나침을 경계하는 말이다. 삶이 결코 공정하거나 공평하다 말할 수 없다. 하지만 내 편에서 생각과 해석은 달리할 수 있다. 과거의 큰 불행도 내 입에서 가볍게 나오면 듣는 사람도 그리 받아들인다. 내가 어찌할 수 없는 시간은 지나갔으므로 이제 내 탓인 시간이 남은 것이다. 지나치면 덜어내고, 모자라면 보태 주어야 한다.
지인의 담벼락에서 만난 중요한 이야기 하나. "개인과의 소통과 공감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상대방의 창으로 바라보기'가 필요하다." "공감의 주 기술은 경청이다." 대화를 주도하는 것은 '말하기'가 아니라, '경청'이다. 대화를 하면서 나는 상대방의 말에 집중은 커녕 다른 행동을 하거나 상대방의 말을 무시하고 내 말만 하자 않았나 반성한다. 경청의 기술은 두 가지이다. (1) 상대방의 말을 정확하게 파악하며 듣는 것이고, (2) 상대를 존중하면서 듣는 것이다. 한 가지 팁도 얻었다. 더 이상 만나고 싶지 않은 사람이라면 그의 말을 무시해라. 항의대신 연락이 오지 않을 것이다.
마지막 한 가지 더, 내 주변에는 시작은 잘 하나, 지속을 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런 사람 하고는 계속 만나기 어렵다. "시작보다 지속하는 능력이 뛰어난 사람들은 상황을 전환하는 정신적 습관이 있다. ‘지겨움'을 ‘편안함'으로, ‘반복'을 ‘익숙함'으로 바꿔 부르는 것이다. 가령 외국어를 잘하기 위한 핵심은 반복이다. 운동 역시 그렇다. 이런 반복은 고통과 지겨움을 유발한다. 하지만 임계점을 넘으며 그것은 익숙함으로 변환된다. 반복하는 것에는 리듬이 생긴다. 그 리듬에 몸이 반응하면, 춤추거나 노래하듯 한 번도 해보지 못한 언어나 동작을 해내게 되는 것이다. 내가 아는 한, 가치 있는 모든 일은 대개 반복을 요구한다. 한 사람과의 관계에서 지루함이 아닌 친밀함을 느끼는 건 시작보다 지속하는 능력이 탁월한 사람에게서 나타나는 특징이다. 결혼 생활도 지겨움으로 보면 고통이지만 익숙함으로 보면 안락함이다."
반복 되는 지속 속에서 예측가능하기 때문에 관계가 불편하지 않다. 그러나 지속하지 못하는 사람은 늘 불안하다. 웬디 우드 박사는 저서 ‘해빗’에서 나이키의 ‘just do it(일단 시작해라)’이 정신력에 대한 과대평가이자 자본주의의 달콤한 거짓말이라고 말한다. 시작은 결코 반이 아니라는 말이다. 결심 자체를 큰 성공으로 여기게 만드는 자본주의의 힘을 우리가 간과해선 안 되는 이유다. “난 시작은 잘하는데 지속이 안 돼요”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의 인간관계는 넓다는 면에서는 성공이었지만, 깊다는 면에서는 실패이다. 그에게 부족한 건 관계를 오래 유지하는 능력이다. 여기서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시작’보다 ‘지속’하는 능력이 보통 사람보다 부족하다는 것이다. 여기에 지속을 위해 덧붙여야 할 키워드가 하나 더 있다. 바로 ‘탁월함보다 꾸준함’이다.
오늘의 시를 공유한다. 어제 주민센터의 벤치에 앉아 바라보니 양지바른 곳의 등나무 꽃은 지고 있었다. 하지만 그늘 속의 등나무 꽃은 아직 개화 중이었다. 일찍 피니 일찍 질 뿐, 그저 때가 다를 뿐이다. 악착같이 좋은 점을 발견해내는 그 마음이 "화양연화"이다.
술버릇/원태연
술 마시면 어김없이
그대를 생각합니다
한잔 한 잔 보태 갈수록
더 진하게 떠오릅니다.
술 취하면 어김없이
그대에게 전화를 겁니다.
일곱 자리 누르는데
칠십 번도 더 주저하다
그런 내가 초라해 보여
그냥 내려놓습니다.
술이 깨면 어김없이
어제일을 후회합니다.
쓰린 속 냉수로 씻어내며
그저 한편에 자리했던 것만으로
행복할 수 있었던
그 날을 떠올려 봅니다.
지난 번 읽은 <아Q정전> 이야기를 할 기회를 잃었다. 그래 오늘 아침 좀 정리를 해본다. <아Q 정전>의 주인공 아Q는 어떤 사람인지 제대로 아는 사람이 없다. 본적이 어디인지 성씨도 알려지지 않고 이름도 알 길이 없다. 그런 아Q는 동시에 스스로 자신이 누구인지도 잘 모른다.
아Q를 보면, 자신이 누구인지를 모르는 사람의 삶은 엉망진창이다. 자신이 누구인지 알기 위해 자신을 향해서 걷는 일을 할 때의 의식 활동이 바로 생각이다. 자신을 모르는 자는 생각이 없거나 생각을 할 줄 모른다. 그리고 생각은 자기를 벗어나려는 충동인 호기심이 동작하는 한 형태이므로 반드시 앞을 향한다. 그러나 아Q처럼, 생각이 없으면 지난 일을 파먹는 데 골몰한다. 생각이 없으면 대답에 빠지고, 생각을 하면 질문을 시작한다. 그리고 생각을 멈추면, 확증편향이나 자기 확신에 빠진다. 그러다가 자기 확신이 무너지면, 자신의 존재성이 희미 해지므로 억지로 자존심을 내세우게 된다. 예컨대, 눈앞에 구체적으로 자신보다 더 강한 자가 서 있어도, 애써 외면하며 사실은 자신이 더 강하다고 심리적으로 위로해버린다.
그리고 자기 확신에 빠지면, 자기 진리에 도취 되어 자기와 다른 것은 적대시하는 것 이상으로 넘어가지 못하니 무엇인가를 받아들여 더 풍부해질 일이 없다. 당연히 성장도 멈춘다. 여기서 아Q 식 '정심 승리 법'이 나온다. 이는 심리적 기대와 객관적 사실을 혼동하는 것이다. 패배를 승일로 바꿔버리는 심리적 자아도취에 빠지는 것이다. 예를 들어 본다. "동네 건달들은 아Q를 놀리다가 결국 때리기까지 했다. 아Q는 형식적으로 졌다." 그런데 그는 잠시 서서 생각했다. "아들놈에게 맞은 셈 치지. 요즘 세상은 정말 개판이라니까……" 그리고 나서 그도 아주 만족스럽게 승리한 기분이 되어 돌아갔다.
생각이 끊기면 이 지경이 이른다. 객관적 패배를 심리적 승리로 바꿔버리는 정신승리에 빠지는 한, 객관적으로 패배하는 정도는 점점 더 심해진다. 그러면서 자신이 알아서 자신을 버린다. 그러다 보면, 객관적 사실에 자신을 맞추지 모하고 분열된다. 생각은 분열된 의식을 통합시키지만, 생각이 끊기면 통합된 이식도 바로 분열된다. 그러다 보면 사는 일이 무엇이고 죽는 일이 무엇인지도 모른다. 예를 들어, 아Qsms 자신의 사형을 결정짓는 문서에 서명을 할 때, 글을 몰라 동그라미를 그렸는데, "동그라미를 동그랗게 그리지 못한 것"에 더 신경을 쓴다. 이것은 여유가 아니라, 자신을 잃은 자기 분열이다. 그러나 사실의 전개는 심리적 위안으로 변경되지 않는다. 생각하지 않으면 인생은 엉망진창이 된다.생각하지 않으면, 내가 무엇을 바라는지 모른다. 어쩌면 바라는 것이 없으니 생각이 없는 것인 줄 모른다. 무엇인가 바라는 주체가 자기 자신이다. 자기 자신을 향해 걷는 사람만이 자신이 무엇을 바라는지 안다. 자신이 향해 걸을 줄 모르고, 자신이 누구인지 물을 줄 모르고, 자신이 무엇을 바라는 모른다면, 그 가 곧 아Q이다. 생각해야 한다.
이어지는 글은 블로그 https://pakhanpyo.blogspot.com 로 옮긴다.
우리 학교는 아직까지 아이들을 아Q로 만든다. 사고력, 생각하는 능력을 키우는 데 성공적이지 않다. 학생들로 하여금 자신의 생각을 표현하게 해야 비로소 지식 뿐 아니라 사고력을 향상시킬 수 있다. 지금이 교육 혁신의 시기라 본다. 쉽지 않지만 다음 두 가지를 바꾸면 가능하다.
(1) 가르치는 사람에게는, 학생을 자신의 부하로 보는 대신 특정 주제를 탐구하고자 하는 동료나 길동무로 여기고 존중하는 태도가 필요하다. 이런 태도가 있으면 수업은 면대면이든 온라인이든 활발한 대화가 이루어지는 진정한 만남의 시간이 될 수 있다.
(2) 학생들이 충분히 준비하고 수업에 들어오도록 하는 것이다. 인쇄술이 발달하기 전에는 준비할 수 있는 자료 자체가 없었기에 만나서 지식과 기술을 전달했다. 그런데 지금은 더이상 그럴 필요가 없다. 스스로 찾아보며 공부할 수 있는 자료가 많기 때문이다. 혼자서 할 수 있는 부분, 예를 들어 동영상 보기나 책 읽기처럼 스스로 해결할 수 있는 부분은 학생들에게 맡겨야 한다. 수업 시간은 혼자서 할 수 없는 부분을 해결하는 데 써야 한다. 학생들이 가져온 문제에 대해 가르치는 사람이 전부 답해 주는 것도 바람직하지 않다. 학생들이 서로 협력해 답을 찾아보거나 토론을 하게 하자. 토론하고 협력하게 해야 아는 지식을 더 잘 사용할 수 있고 뭘 모르는지도 확실히 알게 되기 때문이다.
면대면 방식에 비해 온라인 강의의 질이 떨어진다는 불평과 염려는 핵심을 놓치고 있다. 제대로 공부하고 싶다면 강의보다 더 좋은 학습 방식인 토론, 팀 과제 수행, 문제중심 학습법 등이 왜 사용되지 않는지를 따져야 한다. 학생들이 그렇게 따지지 않는 이유는 간단하다. 지금도 힘든 공부하기가 훨씬 더 힘들어 지기 때문이다. 문제는 공부는 힘든 일이라는 것이다. 신체 근육과 마찬가지로 지적인 부담이 있어야 지적 근육이 생기는데, 학생들에겐 지적 근육을 키우기보다는 쉽게 과정을 이수하고 싶은 마음이 더 크다. 인지상정이다 그래서 마치 아이들이 몸에 좋은 야채를 싫어하는 것처럼, 학생들은 학습 효과가 더 높은 방식을 싫어한다.
이로 인한 부작용 중 하나는 가뜩이나 변화를 싫어하는 많은 교수와 강사에게 새로운 시도를 하지 않을 빌미를 제공한다는 것이 현실이다. 강의가 중심인 우리의 현재 대학 교육 방식은 혼자 해도 되는 공부를 굳이 모여서 하게 한다는 점에서 낭비다. 학생들이 많은 질문을 가지고 수업에 임하고 교수와 학생이 서로 존중하는 가운데 지식과 생각을 나눌 때 생산적인 수업이 가능해지고 대학의 경쟁력을 확보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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