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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운동가의 인문에세이

태과불급(太過不及)

자연과학적으로 말하면, 생명은 물질과 정신의 교집합이다. 여기서 교집합에 방점을 찍는다. 교집합이 욕망의 배치이다. 생리적인 것과 심리가 교차하는 만큼이 우리들의 생명의 바탕이기도 하다. 만약 물질, 생리적인 것만 있으면, 그건 기계가 될 것이고, 만약 심리만 있으면 그건 유령이 될 것이다. 물질과 정신이 교차하는 만큼이 인간 존재성이라 말할 수 있다. 그게 욕망의 기본이고, 욕망의 배치이다.

우리 존재는 우주의 부분이면서, 동시에 우주 전체이기도 하다. 그게 생명이다. 그러니 욕망도 마찬가지이다. 욕망을 존재와 분리해 버리면, 우리는 생명이 없는 추상적인 존재로서 아주 수동적인 삶을 살아가야 된다. 거기서부터 우리는 이미 욕망의 포로가 될 준비가 되어 있는 거다.

고미숙은 생명을 식욕과 성욕으로 푼다. 우리의 일상에서 펼쳐지는 생명 활동이 먹는 것과 성욕이다. 먹는 것은 우리가 항상성을 유지하고 생존을 지키는 데에 기본적인 것이다. 그러나 계속 섭취만 하면 안 되니까 이걸 발산해야 한다. 발산하는 가장 강력한 게 성욕이다. 식욕이 외부의 것을 내 안에 들이는 거라면, 성욕은 외부에 있는 타자를 향해 달려 가는 거다. 그러나 근본적으로 성욕은 번식을 위한 거다. 생존했으니 번식하라는 것이다. 우리의 생명이자 욕망은 다음과 같이 두 가지 방향인 것이다. '살아라, 내 몸의 향상성을 지켜라' 그리고 그 다음에 '타자와 하나가 되어서 번식해라. 즉 다른 생명을 낳아라'이다. 이걸 간단하게 말하면, 흡수와 발산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받아들였으니, 아이에 걸맞는 창조를 해야 한다는 점이다.  이것이 흡수했으면 발산해야 하는 물리학적인 원칙이다. 이를 간단하게 하면, "지속하고 접속하라'이다. 이렇게 해서 내가 다른 존재로 변형되어 가는 걸 우리는 성장이라 한다.

우선 내 몸의 항상성을 위해 노력해야 한다. 그러나 이것만 하면 그냥 건강의 노예가 된다. 이건 생명 활동의 반쪽밖에 안 된다. 타자와 접속해야 한다. 여기서 말하는 타자 안에는 시공간도 들어가고, 동물, 인간, 기계 다 포함된다. 타자와 접속해서 나를 변형시켜야 온전한 생명활동이 이루어지는 거다. 문명도 마찬가지이다. 우리가 살아 있으면서 누구나 계속 접속하고 뭘 창조하다 보면, 오늘의 문명 수준까지 따라온다. 우리는 계속 그 활동, 접속하고 창조하는 리듬 안에 있어야 한다. 근대 서구 합리주의는 이성으로 그걸 제어할 수 있다고 보았다. 이건 착각이었다. 욕망은 그런 식의 균질화와 분류, 유형 따위를 허용하지 않는다. 그래서 욕망은 카오스이다. 방향도 없고 그냥 움직인다. 게다가 움직이면서 계속 생존하면서 번식하는 것뿐이다. 그러나 이제 욕망을 마주하고 그걸 성찰하는 힘이 필요한 시점이다. 욕망의 방향을 바꿀 때이다.

<동의보감>에 따르면, 모든 사람은 태과불급(太過不及) 상태로 태어난다. 태과불급은 동아시아 철학의 오행 상극관계에서 사용하는 말이다. 적절한 조화를 이루지 못한, 지나치게 과다하거나(太過), 부족한 것은(不及) 모두 병이라는 뜻으로 "태과불급 개위질(太過不及, 皆爲疾)'이라는 말을 쓴다. 그러나까 모든 사람은 다 이떤 식으로든 기울어져 있다. 왜 그런 가? 우주 자체가 기울어져 있기 때문이다. 이 기울어짐 때문에 태양계가 전혀 다른 모습으로 계속 변화하는 거다. 기울어져 있어서 계속 차이가 만들어지기 때문이다. 우리 인간도 마찬가지이다. 원래 기우뚱하게 태어났는데,  태어난 시, 공간 안에서도 계속 차이가 생겨난다. 그러나 고민할 필요는 없다. 오히려 만약 모든 게 세팅이 되었다면 평생 고민을 할 필요도 없고, 세팅 되어진 대로 살면 된다. 그건 재미 없는 일이다. 늘 움직이고 변하고 있는 거라면 여기에 미세한 털끝만큼의 차이만 있어도 내가 온전히 바뀔 수 있다는 가능성이 있기 때문에 흥미로운 일이다.

문제는 인간이 역사와 문명을 만들면서, 누군가 특수한 사람에게 특수한 상황에서 맞는 걸 진리라고 만들어 놓았다는 거다. 예를 들면 노예제 사회. 그게 많은 사람들하고 맞지도 않는데, 진리라고 주입해야 되니까 폭력이 발생하게 된 거다. 맞지 않는데, 우기다 보니 그렇게 되는 거다. 이 끝이 자본주의이다. 자본주의 물질적 소유를 통해서 욕망을 다 채우게 하는 시스템이기 때문이다. 우리 사회도 물질적 소유를 향해 열심히 따라왔지만, 생명의 이치나 자연의 지혜인 영성에 대해서 너무 소홀히 했고, 하고 있다.

욕망은 타자를 만나서 접속하는 거다. 즐거 우려면, 욕망과 접속이 동시에 일어나야 한다. 그리고 그 속에서 스토리가 있어야 한다. 타자와 만나 스토리가 없으면 폭력이 된다. 욕망을 카오스적이기 때문에 무엇이든 될 수 있다. 특히 자본주의와 욕망이 결합하면, 맹목적인 식욕, 성욕, 그 다음에 분노조절장애로 나타난다. 자기가 누구인지 모르는 데 욕망을 아무리 채워야 무슨 소용이 있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