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92. 와인 파는 인문학자의 인문 일기 (2021년 4월 9일)
오랫동안 구상해오던 <우리마을대학>의 실체가 점점 더 구체화된다. 지난 해부터 준비해 오던 협동조합 영리 법인 <우리마을대학 협동조합>이 시청 인가를 거쳐 법원에 등기를 내고, 드디어 세무서에서 사업자 등록증(법인사업자)을 어제 받았다. 이제 필요한 건 상상력이다. 개인적으로는 새로운 제 3의 인생이 시작으로 여긴다. 따라서 용기와 세상에 대한 따뜻함을 유지하기 위해, 어제부터 하기로 한 일은 저널리스트 이진순이 만난 사람을 다시 글로 만나는 일이다. 지난 4월 2일에 운명을 달리 하신 채현국 할배 덕이다.
어제 글에 나는 다음과 같은 문장을 썼다. "개인적인 경험의 틀 속에서 갇히지 않고, 낯선 것, 새로운 것, 나와 다른 것에 자신을 열며, 그 신선한 소통으로 스스로 진화하고 싶다." 짧게 말하면, '경험과 논리에 갇히지 않고 즐겁게 소통하고 진화하는 사람'이 되자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좋은 사람에게만 좋은 사람이고 싶다. 만날 사람이 많다. 아닌 건 아니다. 일부러 찾아다니며 만날 필요는 없다.
바쁜 틈에도, 매주 목요일에 함께 하는 <장자> 읽기를 했다. <장자>라는 책에 흐르는 중심은 다음과 같은 말들이다.
(1) 망아(忘我): 자기 자신을 잊어 버리다.
(2) 승물유심(乘物遊心): 노니는 마음으로 세상의 파도를 타다. 사물이나 일의 변화에 맡겨 조화를 이룸으로써 마음을 노닐게 한다.
(3) 탁부득이(託不得已) 양중(養中): 어찌할 수 없음에 맡김으로써 중(中)을 기른다. '탁부득이'는 사람의 힘으로 어찌할 수 없는 것은 그냥 내버려 둠으로써 자신의 한계를 깨닫는 삶의 방식이다. 세상 일에 한계가 있음을 알고 내면의 세계를 어디에도 기울지 않고 중(中)을 지켜 나가는 것이다.
위에서 말한 세 가지를 한 마디로 말하면, 무위(無爲)의 가르침이다. 모든 것을 억지로 하거나 꾸며서 하지 말고, 순리대로 자연스럽게 행동하라는 것이 '무위의 가르침'이다. 어제 함께 읽은 부분에서는 '무위의 가르침'으로 무엇보다도 말을 조심하라는 것이었다. 억지로 꾸민 말, 과장한 말, 잔재주를 부리는 간사한 말, 남을 곤경에 몰아넣으려는 말, 남을 억지로 고치려는 말 등을 삼가라는 것이다. 이를 위해 제사하는 방법은 다음과 같다.
(1) 마음이 사물의 흐름을 타고 자유롭게 노닐도록(遊心, 유심) 하십시오.
(2) 부득이 한 일은 그대로 맡겨 두고(託不得已, 탁부득이),
(3) 중심을 기르는 데(養中, 양중) 전념하십시오,
(4) 그저 그대로 명을 받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명은 피할 수 없는 것이므로 이를 억지로 거역하지 말고 편안한 마음으로 수용하라는 말이다. 이를 우리는 안명론(安名論)이라 한다. 우리의 운명이 모든 면에서 조금도 움직일 틈이 없이 꽉 짜여 있다는 것을 철학적으로 논증하고 그것을 꼼짝 없이 그대로 믿는 운명이나 숙명론과는 다르다. 안명론은 니체가 말한, '아모르 파티(amor fati, 운명을 사랑함)과 비슷하다. 니버의 기도도 이런 맥락에서 나온 것이 아까?
주님 제가 변화시킬 수 없는 것을 받아들이는 평화를 주시고,
제가 변화시킬 수 있는 것을 바꿀 수 있는 용기를 주시며
이 둘을 구별하는 지혜를 주소서.
나는 몇 일 전부터 이런 기도를 한다.
주님 늘 '역경을 이기긴 쉬워도 풍요를 이기긴 어렵다'는 말을 기억하게 하소서.
주님 '우리가 가진 것을 사랑하면 행복하고 못 가진 것을 사랑하면 불행하다'는 말을 잊지 않게 하소서.”
주님 '사람은 누구나 가질 수 있는 것과 가질 수 없는 것이 있다'는 사살을 받아들이게 하소서.
그래 오늘 아침 시도 이정하 시인의 것을 택했다. "내가/낮은 곳에 있겠다는 건/너를 위해 나를 온전히 비우겠다는 뜻이다." 여기서 '너'는 하늘의 길, 도(道)라고 본다. 아침 사진은 하얀 색의 제비꽃이다. 자세를 낮추어야 만날 수 있다. 제비들이 지천이다. 코로나-19로 카바레가 문을 닫아서라한다. 제비들이 갈 곳이 없어 길로 나섰다. 피식. 썰렁. 시는 진지하다.
낮은 곳으로/이정하
낮은 곳에 있고 싶었다
낮은 곳이라면 지상의
그 어디라도 좋다
찰랑찰랑 물처럼 고여들 네 사랑을
온 몸으로 받아들일 수만 있다면
한 방울도 헛되이
새어 나가지 않게 할 수만 있다면
그래, 내가
낮은 곳에 있겠다는 건
너를 위해 나를 온전히 비우겠다는 뜻이다
나의 존재마저 너에게
흠뻑 주고 싶다는 뜻이다
잠겨 죽어도 좋으니 너는 물처럼 내게 밀려오라
오늘 아침의 화두에 해당하는 것이 노자의 <도덕경> 마지막 장인 제 81장에도 나온다. "아름답게 꾸민 말", "변론을 위한 말", "박식을 드러내는 말"을 하지 말라는 것이다.
"믿음직스러운 말은 아름답지 못하고, 아름다운 말은 믿음직스럽지 못합니다. (信言不美, 美言不言)
선한 사람은 변론하지 않고, 변론하는 사람은 선하지 안습니다. (善者不辯, 辯者不善)
아는 사람은 박식하지 못하고, 박식한 사람은 알지 못합니다. (知者不博, 博者不知)
진리의 말은 아름답지 못하다는 말은 현란한 미사 여구나 화려한 이론이 아니다. <도덕경> 제 35장에서 말하고 있는 것처럼 도에 대한 말은 본질 상 듣기 좋은 음악이나 입에 맞는 음식같이 얼른 보기에 그럴듯한 무엇이 아니고, "담박 하여 별 맛이 없는" 것이다. 도 자체가 다듬지 않은 통나무 같기 때문이다. 자기가 하는 말에 온갖 수사학을 동원하여 치장하고 번지르르하게 꾸며서 내놓은 사람은 그 자체로서 신빙성이 없다. 말의 영역 너머에 있는 진리에 관심이 있는 것이 아니라, 자기 말만 아름답게 꾸미는 데 신경을 써서 결국 모든 것이 말장난에 그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진리의 말은 변론이 아니라는 것은 지금껏 말한 것처럼 '반대의 일치'로서 양쪽을 다 같이 포용하는 '이것도 저것도'의 말이기 때문에 사물을 '이것이냐 저것이냐'로 분명히 딱 쪼개서 끊는 논리적인 변론일 수 없다. 변론을 잘 한다는 것은 어떤 사물에 대하여 자기가 가진 제한된 생각이나 고정 관념을 평소 달달 외우고 있던 틀에 맞추어 독단적으로 그리고 일사천리로 주장하는 일이다. 마치 공산주의들이 어떤 문제에 대하여 모두 판에 박은 듯이 청산 유수로 말하는 것과 같다. 한 가지 생각, 곧 자기가 가진 생각만 옳고 다른 생각은 모두 틀렸다고 보는 입장이기 때문에 우선은 무지의 특권인 확신을 가지고 힘차게 말할 수 있다.
마지막으로 진리를 아는 것은 박식이나 박학의 결과가 아니라고 했다. <도덕경> 제48장에서 말한 것처럼, 일반적인 학문의 길은 하루하루 쌓아 가는 것이지만, 도의 길은 하루하루 없애 가는 것이다. 도를 알고 체득하는 길은 우리가 가진 잡생각이나 편견을 하루하루 없앨 때 생기는 직관 통찰에 있다. 이것이 박식과 박학일 수 없고, 박식이나 박학을 절대적인 뭔가 되는 것처럼 주저리주저리 달고 다니는 사람은 도에서 그만큼 멀 수 밖에 없다.
<도덕경> 제81장의 나머지 부분을 인용한다. "성인은 쌓아 놓지 않습니다. 사람들을 위해 뭐든지 하지만 그럴수록 더욱 많이 가지게 되고, 사람들을 위해 모두를 희사하지만 그럴수록 더욱 많아지게 됩니다. 하늘의 도는 이롭게만 할 뿐 해로운 일이 없습니다. 성인의 도는 하는 일이 있더라도 겨루지를 않습니다." (聖人不積, 旣以爲人, 己愈有, 旣以與人, 己愈多. 天之道, 利而不害, 聖人之道, 爲而不爭.)
성인은 쌓아 나가는 일을 하지 않는다. 욕심이 없으니 재물을 저축할 필요를 느끼지도 못하고 그럴 능력도 있을 수 없는 노릇이다. 있다고 하더라도 그저 사람들을 위해 다 내어 준다. 그러건만 점점 더 풍요로워진다. 그리고 노자가 말한 하늘의 길, 이 진리를 따르는 것은 세상 만사에 득실이 함께 있는 것과는 달리 오로지 이익만 있을 뿐 결코 해로울 것이 없다고 한다. 성인의 길, 이 진리의 길에서의 '함'은 세상의 모든 인위적 행위와는 달리 '함이 없음의 함(무위의 위)'이 기 때문에 경쟁이나 시비나 싸움의 원인이 되지 않는다고 한다.
다시 <장자>의 이야기로 넘어간다. 장자는 '부득이(不得已, 어쩔 수 없는 일은 '운명으로 말고 편안히 받아들이는 것(安命之命, 안명지명)이 바로 '덕의 극치'라는 것이다. 이렇게 할 때 슬픔이나 기쁨 따위 감정이 개입할 여지가 없다는 것이다. 이렇게 "자신을 잊고", "생사에 초연"한 태도를 지니면 어디로 가든 문제될 것이 없으니, 이러한 태도를 가질 수 있으면 된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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