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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운동가의 사진 하나, 시 하나

휴식, 진짜로쉴줄아는것은능력이다.

2021. 인문 운동가의 인문 일기

(2022년 6월 12일)

 

나는 최근에 잘 사는 방법은 긴장의 양과 이완의 양이 균형을 이루게 하는 방법을 찾는 것이라 생각하고 있다. 삶은 그러니까 '균형 맞추기'이다. 비슷한 양과 질로 말이다. 이완이란 긴장을 푸는 일이다. 이는 진짜 '쉬는' 것이다. 제일 좋은 방법은 '외부 자극 없는 시간 보내기'이다. 산책이 좋다. 아니면 명상도 괜찮다. 쉰다는 것은 삶을 건사하는 가장 적극적인 행동이다. 불안과 우울, 압박감 같은 감정들을 다른 자극으로 눙치는 것이 아니라 자기 내면을 직시하고 다독이는 방법이 필요하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쉬지 못한다. 늘 비우려기 보다는 성취를 고민한다. 쉴 틈이 생기면 쉬는 게 아니다. 삶을 지탱하느라 들쑤셔진 마음을 다독거릴 재주가 없어 또 다른 자극을 주입한다. 자신의 마음을 어루만져 주는 대신, 정신이 쏙 빠지게 단 콜라 따위를 물려준다. 질리고 움츠러든 마음은 달콤한 흥분으로 덧씌워졌지만 그게 진정한 이완은 아니다. 이런 식이다. 각성상태가 나를 피로하게 하지만 제대로 이완하는 법을 모르기에 마취를 택한다. 예를 들어, 삶을 지탱하느라 이어지는 흥분과 불안에 지친 상태에서, 말잔치만 이어지는 TV 예능 프로그램을 틀어 두거나 아예 생각의 여지를 주지 않는 먹방 따위를 본다. 혹은 SNS에 접속해서 무한대로 펼쳐지는 타인들의 삶을 지문이 닳도록 문지른다. 그리고 알고리즘의 신에게 혼을 빼앗겨 무더기 같은 영혼으로 헤매다 동틀 무렵 어느 벌판에 쓰러져 잠들곤 한다. 홍인혜 시인의 솔직한 고백이다.

휴식, 진짜로 쉴 줄 아는 것은 능력이다. 잘 놀고, 잘 쉬는 것은 말처럼 쉽지 않다. 거기에도 삶의 내공이 필요하다. 제대로 쉬려면, 일단 노동과 돈의 스트레스에서 벗어나야 한다. 낮의 노동이 힘든 건 노동 자체가 아니라, 그것이 주는 소외와 압박 때문이다. 자기가 원하지 않는 일을 하는 것이 소외이고, 의지로 성과를 내야 하는 것이 압박이다. 그러니까 쉰다는 건 앞의 두 가지, 즉 소외와 압박에서 벗어나는 것을 의미한다. 가족과 쉰다고, 그건 아니다. 왜냐하면 오늘날 가족은 감정노동의 현장이기 때문이다. 감정적인 배설이 무차별적으로 이루어지는 현장이기 때문이다. 이젠 그런 배치를 벗어나야 한다. 그러니까 노동의 스트레스와 감정의 배설로부터 벗어나는 활동 혹은 관계가 필요하다. 내가 어떤 활동을 하면, 어떤 사람들과 관계를 하면, 소외와 압박으로 부터 벗어나는 가를 살펴 보아야 한다. 고미숙은, 자신의 경험에 따라, 지성을 중심으로 관계를 재구성하라고 한다. 예를 들어, 책을 읽는 모임이 좋다고 했다. 

그래 나는 매주 금요일 아침에 노자 <<도덕경>>을 함께 읽는 모임을 한다. 그 때가 나의 경우는 정말로 쉬는 시간이다. 특히 읽기를 마친 후, 함께 점심 식사 하는 시간은 내 영혼을 힐링하는 때이다. 지난 금요일에는 도반인 우당이 두 사람을 소개해 주었다. 그런 정보는 정말 보너스이다. 그러니까 우리는 사람을 만나냐 한다. 그래야 인식의 지평이 확장되고, 영토의 재배치가 이루어진다. 이게 내 생각이다.

소개해 준 한 분은 교통사고로 왼쪽 팔을 잃고도 독하게 훈련해 지난 해 WBC 피트니스 대회에서 우승을 한 김나윤씨 이다. 일반 대중들이 잘 모르다가, 이번 대통령 취임식에 참석하면서 알려졌다. 다른 한 분이 재불 화가였던 이성자(2009년 작고)라는 분이다. 이 두 분의 스토리를 <인문 일기>에서 공유할 생각이다. 우선 오늘 나는 딸과 진주에 간다. 그 화가를 만나러, <진주시립이성자미술관>에 가는 거다. 

오늘 공유하는 시처럼, 그 화가의 "결"을 보고 싶기 때문이다. 오늘 시를 읽다 보면, 결을 서로 받아들이면, 같음과 다름이 함께 할 수 없는 세상이 아니라 서로 개입하여 넘나들고 매만지면서 이해하는 세상이 된다. 서로 결을 헤아리며 살고 싶다. 마음이 지붕 고치듯 할 수 있는 일이라면 세상의 모든 고통과 번민은 사라질지라도 모를 일이지만, 세상을 바꿀 수 없으니 내 마음을 바꾸는 것만이 정답이다. 코로나-19의 사회적 거리가 해제된 후 처음으로 가는 여행이기도 하다. 오늘 사진은 내 주말농장의 감자 꽃이다. 결이 다르다.


결/이사라

세상에는
아름다운 사람이 많다

깃털 같은 마음으로
사막에 집을 짓는 건축가도 있다.
눈빛 속에 사람을 심는 예술가도 있다.

태어나서 무엇을 그렇게 생각하는지
어디든 지붕만 얹으면 살아나는 것이 집이라며

물이 물결을 만들 듯이
나무가 나뭇결을 만들 듯이
결이 보일 때까지 느긋하게 살면서
사람 결을 만드는 사람들도 있다.

지붕 고치듯 마음만 고치면
몇 백 년을 훌쩍 넘긴 마음도 가질 수 있다.


이젠 지난 6월 3일에 멈춘, <<도덕경>> 제28장을 이어 읽는다. 인상적인 문장이 다음의 세 개이다. 지웅수자(知雄守雌), 지백수흑(知白守黑), 지영수욕(知榮守辱). "지웅수자"는 수컷을 알고, 암컷을 지킨다고 자구대로 해석이 된다. 이 말은 남성성과 여성성을 잘 조화롭게 알고 지킨다는 것으로 확장할 수 있다. 여기서 알고 지킨다는 것은 운용할 줄 안다는 말이다. 더 나아가 음양의 성질을 잘 운용한다라고도 볼 수 있다. 노자는 다시 말해 음영의 이치를 알고(知), 그 이치에 따른다면(守) 천하만물을 기르고 거두어 들이는 골짜기와 같이 될 수 있다는 거다. 또는 천하 만물이 모두 산골짜기로 삼는다고 보기도 한다. 밖으로 향하는 마음(외향성, 원심력)을 알아차리고, 인으로 향하는 마음(내향성, 구심력)을 지키고 있으면 세상의 낮은 곳에서 자유로이 흐르는 시냇물이 된다는 것이다. 그게 계곡이다. 계곡의 물은 어느 것에도 방해받지 않고 자유롭게 흐른다. 우리도 자신을 낮추고 낮은 곳에 있으면 훨씬 더 자유롭다.


"지백수흑"은 백을 알고 흑을 지킨다. 백과 흑은 인간의 시비 이해와 만물의 변화하는 이치를 말하는데 이것을 천하의 기준(방식)으로 삼고 따른다는 거다. 서예 하는 사람들의 원칙이기도 하다. 글자 사이의 여백을 강조하는 말이다. 이렇게 해석하는 사람도 있다. 그 밝음 알면서도 그 어둠을 지키면 하늘 아래 모범이 된다. 알고 지키는 것이 중요하다. 그게 바로 말그대로 수행이다. 알고 만 있는 것은 무의미하다. 그 이치를 알고 그 이치를 따르는 것(지키는 것)은 수행을 함을 말한다. 그런 의미에서 수행은 삶을 말한다.

"지영수욕"은 속세의 영화가 어떤 것인가를 알고 욕된 생활을 참고 견뎌 내는 거다. 더 나아가, 영화로움이 덧없다는 것을 알아차리고 욕되고 비천한 자리를 지키고 있으면 세상의 낮은 곳에서 모든 것을 너그러이 받아들이는 골짜기가 된다. 결론적으로 '웅자', '백흑', '영욕' 같은 반대 개념을 대할 때 어느 한 쪽을 택하는 '이것이냐 저것이냐'의 태도가 아니고 양쪽을 모두 껴안는 '이것도 저것도'의 태도를 취해야 한다고 가르친다. 지도자의 이러한 태도와 안목을 지닐 때만 진실로 '세상의 본보기'가 될 수 있고, 세상의 모든 물이 모여들듯 천하의 인심이 그에게 모여드는 '세상의 계곡'이 된다고 한다.

자연은 하나로 존재한다. 분할하지 않는다. 봄 여름 가을 겨울, 낮과 밤은 인간이 구분한 것이지 자연이 구분한 것은 아니다. 이 장에 나오는 남성스러움과 여성스러움, 흑과 백, 영광과 오욕 등은 인간의 대립적 사고에 의해 분리된 것이다. 노자는 이것들을 통합적으로 인식할 때 도를 깨우치게 된다고 말한다. 천하의 계곡, 어린아이, 천하의 본보기, 무극, 통나무와 같은 표현은 통합적 사고를 함으로써 얻게 되는 진리의 원천, 본질을 나타내기 위해 쓰인 것들이다. 노자는 순수하고 명증한 진리, 즉 도를 깨우친 상태를 통나무에 자주 비유한다. 이것은 가공하기 전 원형 그대로의 통나무가 가지는 자연스러움과 질박함, 원만함 등이 단순하고 소박한 도의 속성과 잘 어울리기 때문이다. 

통나무를 쪼개서 그릇을 만든다는 표현은 오해를 불러일으킬 수도 있다. ‘분할하지 않는다’는 문장과 상반되어 보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통나무를 쪼갠다고 할 때의 분할과 흑과 백, 영광과 오욕을 구분한다고 할 때의 분할은 다른 의미로 쓰인 것이다. 흑과 백, 영광과 오욕은 명확하게 구분된다. 하지만 통나무를 쪼갠다고 통과 나무가 되는 일은 없다. 통나무는 쪼개도 통나무와 통나무다. 도를 쪼갠다고 도와 비도로 분할되지 않는 것과 같은 이치다. 통나무를 쪼개서 만든 그릇으로 국가경영에 사용한다는 말은 질박하고 순수한 도를 리더십의 원천으로 삼는다는 의미다. 


나의 블로그 https://pakhanpyo.tistory.com 이나 https://pakhanpyo.blogspot.com 이다. 최근에는 우리마을대학 홈페이지 블로그에도 글을 올린다. https://www.wmcss.net 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