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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운동가의 사진 하나, 시 하나

불편한 진실

1989. 인문 운동가의 인문 일기

(2022년 5월 11일)

 

"역사와 시대의 고통에 대한 처절한 연민, 자신의 어깨 위에 드리워진 소명과 책무 그리고 이를 겸허히 감당하겠다는 헌신의 약속은 없고, 설교와 설득으로 가득 찬 말에는 말의 주인인 자신이 없어 공허하고, 그런 말은 말이 말이 되어 휘발된다. 우리가 듣고 싶은 것은 설교가 아니라 리더의 진실한 고백과 약속인 것을. 어느 취임사를 읽다 보니 ㅠ" (이창준 교수)

애써 외면하고 있지만, 간간히 들려오는 새 대통령의 취임사가 더 더욱 나를 실망스럽게 한다. 그의 취임사에는 ‘자유’가 35차례 등장했다고 한다. 자유라는 말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하였는지 의심스럽다. 그리고 그는 민주주의 위기가 닥친 원인으로는 ‘반지성주의’를 지목했다. “집단적 갈등에 의해 진실 왜곡”과 “다수의 힘으로 상대 의견을 억압”하는 반지성주의가 “민주주의에 대한 믿음을 해치고 있다”는 거다. 이는 "독선'과 '퇴행'이다. 오늘 사진 처럼, <줍깅 운동회>를 하고 싶다,

취임사는 극복해야 할 반지성주의의 한 유형으로 "다수의 힘으로 상대의 의견을 억압"하는 것으로 꼽았다. 의견이 다른 상대방을 반지성주의라 매도하는 일방적이고 오만한 태도가 오히려 반지성적이다. 2년 전 11월에 반-지성주의 이야기를 <인문 일기>에서 말한 적이 있다. 중앙일보의 윤석만 기자가 한 말이다. "트럼프 식 가짜 민주주의는 3A로 요약 된다. 반-자유주의(Anti-liberalism), 반-지성주의(Anti intellectualism),  대안적 사실(Alternative fact: 가짜뉴스). 지난 2016년 선거에서 트럼프는 러시아 댓글부대(IRA)의 가짜 뉴스 덕을 보았고, 당선 뒤에도 그는 비판을 가짜뉴스로 치부하고 '대안적 사실'이라며 거짓말도 서슴치 않았다. 그의 반-자유주의는 다양성과 관용, 소수 배려가 사라지게 했기 때문이다. 게다가 자유세계의 동맹국보다 독재정권을 선호하고 헌법 같은 규범을 공개적으로 멸시했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잘못된 코로나-19 대응처럼 전문가 의견과 과학적 사고를 무시하는 반-지성주의 모습을 보여주었다."

이 3A, 즉 반-자유주의, 반-지성주의 그리고  대안적 사실(가짜 뉴스)이 강력한 효과를 발휘하는 곳에서는 패거리 정치가 일어난다.  증거에 기반한 이성적 논의, 이견을 받아들이는 다원성이 패거리에는 존재하지 않는다. 상대를 쓰러뜨려야 할 적으로 규정할 뿐이다. 우리의 정치 풍토도 그런 모습이다. 패거리의 다른 말이 '팬덤'이다. 정치가들이 문제이다. 그들은 다양한 이익과 갈등을 대의하지 않고, 자신에게 유리한 정략적 이슈를 내세워 갈등을 조장하고 지지층을 결집시키는 데에만 열을 올린다. '팬덤'을 기초로 동원된  패거리들 사이엔 이성과 합리가 숨 쉬지 못한다. 합의와 토론보다는 '너 죽고 나 사는 목숨 건' 투쟁만 존재한다. 해결책은 서로를 적으로 가르지 말고, 상대의 목소리를 들어야 한다는 것이다.

금 긋기와 몰아내기는 배제의 논리다. 이제까지 국가는 통치자와 귀족, 평민, 노예로 금을 그었고 종교는 불신자와 이교도, 이단으로 찢어져 전쟁을 일으키고 파문하며 제거했다. 경제적 인간은 자본가와 노동자로 갈라 착취와 저항으로 대결 시켰고 독재권력은 그 비판자들을 반동과 역적으로 잡아들이고 자유로운 현대 학문조차 찰스 퍼시 스노의 <<두 문화>>에서 보듯 과학과 인문학의 상호 무지로 배척한다. ‘자유롭고 평등하고 아름다운’ 인간적 삶’은 금기와 무지, 몽매와 편협이 빚는 ‘배제의 논리’로부터 이해와 관용, 연대와 제휴의 ‘포용의 논리’로 살 만한 세상을 향해 진화한 모습일 것이다. 이게 우리 인간의 영혼일 것이다. 영혼 없는 취임사 였다.

평등과 자유는 등가의 가치를 가진다. 실질적 평등이 보장되지 않는 자유는 잡아 먹힐 자유와 잡아먹을 자유만 있을 뿐이다. 인류의 보편적 가치는 프랑스 혁명에서 주장한 자유, 평등, 박애 정신이다. 평등은 결과의 평등이 아니라 기회의 평등이다. 물론 모두가 다 같이 평등하자는 주장이 아니다. 기울어진 운동장이나 고장 난 저울 같은 사회는 기회부터 불평등하다. 그러면 결과가 절대 평등할 수 없다. 그리고 그 평등 안에서 자유로워야 한다. 

유발 하라리의 <<호모 데우스>>를 정리하다가 만난 문장들이다. "자유주의가 죄와 우 양쪽에서 공격을 받는다. 사회주의자들은 자유주의가 사실은 정 없고 착취적이며 인종차별적 시스템을 가리는 무화과 잎일 뿐"이라고 주장한다. "자유(liberty)는  무슨, 재산(peoperty)이라고 정정해서 읽어라!" "자유주의 아래에서 모든 사람은 굶어 죽을 자유가 있다는 빈정거림도 있다. 자유주의는 사람들을 파편화시킨다. 자유주의는 사람들이 자신을 고립된 개인으로 보게 함으로써, 같은 계급의 동료들끼리 그들을 억압하는 시스템에 맞서 단결하지 못하게 된다."

부인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내 눈에 우리 사회는 극단적 자유시장경제로 인해 세계에서 가장 불평등한 나라가 되었고, 여기서 살아남기 위해, 우리는 매일 매일 무한 경쟁을 치러야 한다. 이런 구조 속에서 연대이니 협력이니 찾아 볼 수 없고, 승자독식의 싸늘한 논리만 존재한다. 이건 정글이다. 우리 사회는 양육 강식의 정글 자본주의 사회이고, 시장이 인간을 잡아먹는 야수 자본주의 사회이다. 그 대안으로 나는 막연하게 다음과 같이 세 가지를 꼽고 싶다. 우리 사회의 불평등 해소, 한반도의 지속가능한 평화 그리고 문화와 예술 향유를 통한 경쟁이 아닌 여유로운 '저녁이 있는' 삶을 우리 사회의 시대정신으로 여기고 싶다. 그리고 나는 최근에 여기에다 승자 독식 사회에서, 모든 것을 다 가지려고 하는 엘리트들과 전쟁을 덧붙인다. 이건 우리나라만의 문제가 아니다. 프랑스도 가장 핫(hot)한 이유이다. 엘리트들이 구축한 기득권 세력들이 이젠 적폐이다. 

불편한 진실이다. 그러나 자기 수준에 아는 만큼 보이고, 자기 기준에 보이는 만큼 알 뿐이다. 오늘 이런 이야기를 하는 것은, 인문 운동가는 인문치료사가 아니기 때문이다. 인문 운동가는 사람들을 계몽할 대상으로 보거나 고급 교양 교육과 사교의 장을 만드는 데 관여하지 않는다. 필링(peeling)하는 인문 운동가가 되고 싶다. 한 동안 우리 사회를 달구고, 지금도 이야기 돠고 있는 힐링(healing) 인문학은 절망의 인문학이다. 한국 방송대 유범상 교수가 쓴 『필링의 인문학』이라는 책을 읽으면서, 갖게 된 생각이다.

고달픈 현실을 힐링하며 더 높은 생산성을 위해 영감을 제공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현실을 필링하는 말(馬)에 들러 붙은 '등에(쇠파리, gadfly)'가 되어 새로운 상상의 '산파(産婆)'가 되고 싶은 것이다. 인문운동가는 현실에 천착(穿鑿, 어떤 원인이나 내용 따위를 따지고 파고들어 알려고 하거나 연구함)해 있지만, 어느 편에 서서 통치나 저항을 정당화하는 것이 아니라 '등에'처럼 모든 권력을 문제 삼아 비판하는 가운데 새로운 상상을 하는 통로이며, 통로를 만드는 '산파'라고 보기 때문이다.


슬픈 시/서정윤

술로써
눈물보다 아픈 가슴을
숨길 수 없을 때는
세상에서 가장 슬픈 시를 적는다.

별을 향해
그 아래 서 있기가
그리 부끄러울 때는
세상에서 가장 슬픈 시를 읽는다.

그냥 손을 놓으면 그만인 것을
아직 <나>가 아니라고 말하고있다.
쓰러진 뒷모습을 생각잖고
한쪽 발을 건너 더디면 될 것을
뭔가 잃어버릴 것 같은 허전함에
우리는 붙들려 있다.

어디 엔들 슬프지 않은 사람이 없으랴마는
하늘이 아파, 눈물이 날 때
눈물로도 숨길 수 없어
술을 마실 때
나는
세상에서 가장 슬픈 시가 되어
누구에겐 가 읽히고 싶다.


자유에는 평등이 동반되지만, 윤석열은 수구꼴통들의 단골 메뉴인 자유민주주의를 강조하고자, 평등을 뺀 자유만 줄기차게 외치고 있다. 인간이 존엄하고 가치가 있는 존재가 되기 위한 필수적인 조건은 자유와 평등이다. 자유에 보조를 맞추는 평등이 동반되어야 한다. 평등을 뺀 자유는 팥 없는 찐빵과 같다. 평등은 모든 사람의 동등한 존엄성과 가치(평등한 가치), 누구에게나 정체성을 인정하는 차이의 인정, 소외계층의 불이익을 없애는 소외계층의 기본권 인정, 모든 계층에 참여를 보장하는 것(평등한 참여)이다. 지금 우리사회에 시급한 것은 자유의 무한한 확대가 아니라 OECD 국가 중  소득의 불평등이 심화된 것을 넘어 고착화되어 가고 있는 불평등의 조정기능이다. 우리사회에 불평등의 심화는 소외계층을 양산하고 서로의 차이를  인정하지 않게 되고 평등한 참여도 보장받지 못하는 우를 범할 수 있다. 소수 부를 걸머진 가진 자들의 무한한 자유를 통해  평등한 가치가 아닌 불평등을 더욱 획책하고 싶은가?"(양해림)

나는 사회 관계(공동체)의 해체, 세습 자본주의, 학벌 계급 사회 등이 한국 사회를 '지옥'처럼  만들었다고 주장하는 김 누리교수의 생각에 동의한다. 이는 우리 사회가 지유시장경제(free market economy) 체제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자유시장경제체제가 정확히 무엇이고, 그것이 자신들의 삶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를 정확히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

유럽에서는 대체로 앞에 '자유'가 붙는 당이 자유시장경제체제를 지지한다. 이런 정당들은 인간의 자유를 신장시키는 것을 목적으로 한 정당이라기 보다는 기업의 자유, 시장의 자유, 자본의 자유를 중시하는 정당이다. 유럽의 '사회적 시장경제(social market economy)'는 시장경제의 활력과 효율성은 활용하되, 시장경제가 몰고 오는 핵심적인 문제, 즉 실업과 불평등은 '사회적'으로 해결해야 한다는 입장이다. 개인에게 '자유롭게' 내맡겨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김누리 교수는 '야수 자본주의'라는 말을 소개했다. 자본주의는 '기본적으로 자유롭게 놓아두면 인간을 잡아먹는 야수가 된다'의 의미이다. 1970년 독일 총리였던 헬무트 슈미트는 "자본주의는 기본적으로 야수의 속성을 가지고 있다. 자본주의가 사회에서 인간을 잡아 먹는 것을 막아내는 것이 정치의 책무이다"라는 신념을 가지고 있었다고 한다. 

지난 세기동안 보면, 시회주의적 경제 체제보다 자본주의 시장경제가 인간의 욕망을 충족시키는 데, 더 효율적인 체제인 것으로 판명이 났다. 그래서 자본주의가 사회주의를 이겼다. 특히 자본주의 효율성 경쟁에서 승리를 했다. 그러나 자본주의가 효율적인 체제임을 분명한데, 인간을 잡아 먹는 야수적 속성을 지녔다는 점이 문제이다. 그래서 유럽의 많은 나라들은 시장 경제의 '효율성''은 활용하되, '야수성'은 통제해야 한다는 생각을 한 것이다. 여기서 사회적이라는 말은 공산주의가 아니고, 국가가 나서서 야수들에게 재갈도 물리고 고삐도 채워 컨트롤 역할을 해야 한다는 의미를 내포한 것이다. '사회적'이라는 말은 야수가 인간을 잡아먹지 못하게 해야 한다는 말이 함축되어 있다.

나의 블로그 https://pakhanpyo.tistory.com 이나 https://pakhanpyo.blogspot.com 이다. 최근에는 우리마을대학 홈페이지 블로그에도 글을 올린다. https://www.wmcss.net 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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