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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운동가의 사진 하나, 시 하나

도와 하나 되는 경지

1974. 인문 운동가의 인문 일기

(2022년 4월 26일)

 

노자 <<도덕경>> 23장은 "희언자연(希言自然)"이라는 말부터 시작한다. 많은 주석 가들은 "말을 별로 하지 않는 것이 자연이다" 또는 "말이 없는 것이 자연스러운 것이다"로 해석 한다. 그런데 도올 김용옥은 "도가 말이 없는 것은 스스로 그러한 것이다"라 풀이한다. 크게 다음과 세 가지이다.

오늘 아침은 두 번째 "말이 없는 것이 자연스러운 것이다"란 해석 이야기를 한다. 최진석 교수는 "희언(希言)"을 '언어 체계로 되어 있지 않다'는 의미로 푼다. 즉 자연의 모습인 '스스로 그러함'은 어떤 내용으로 확정하고 한계 지우는 언어 체계로 담아지는 것이 아니라는 뜻이다. 왜 그런 가? 노자가 보기에 인간이 모델로 해야 할 자연의 모습은 모두 반대편 것과의 관계 속에 있거나 반대편으로 향하는 운동 과정 속에 있다는 거다. 그러므로 어떤 특정한 의미로 정지 내지는 고정시키는 언어 체계에는 담겨질 수 없다는 거다. '불언지교(不言之敎, 무위(無爲)로써 일을 처리하고, 말로 하지 않는 가르침)"도 같은 맥락에서 읽어야 한다.

그리고 도올은 "도가 말이 없는 것은 스스로 그러한 것이다"라 번역했다. "희언(希言)"의 '희(希)'를 드물게 말한다는 뜻이라 기보다는 그냥 부정사의 뜻을 가진 것으로 해석했다. 41장의 "대음희성(大音希聲, 거대한 음은 소리가 없다)"의 "희"와 같다는 거다. 그리고 노자의 <<도덕경>>에서 "자연(自然)"이라는 말은 총 5회 나온다. (17, 23, 25, 51, 64장) 한국어는 다음절어이지만, 고전 중국어는 단음절어이다. 다음절어라는 말은 형태소가 여러 음절로 이루어진다는 말이다. 예컨대, 아버지는 아, 버, 지라는 단음절로서는 아무런 의미를 전하지 못한다. 그러나 아버지가 합쳐져야만 의미를 전한다. 한문은 하나의 음절이 형태소가 된다. 따라서 '자연'은 하나의 개념을 나타내는 명사가 아니라, 음절이 독립된 의미를 전하는 술부적 문장이다. 자연은 자연이라는 명사가 아니라, 단지 '스스로 자', '그럴 연'이 합쳐져, '스스로 그러하다'로 읽어야 한다는 거다. "희언자연"도 '자연은 말이 없다'가 아니라, '말이 없는 것으 스스로 그러한 것이다'로 번역해야 한다는 거다. "도법자연"도 '도는 자연을 본받는다'가 아니라, '도는 스스로 그러함을 본받는다'라고 해야 한다는 거다.

그 다음 문장은 "故飄風不終朝(고표풍부종조) 驟雨不終日(취우부종일), 그러므로 회오리바람도 아침 내내 불지 못하고, 소낙비도 하루 종일 내리지 못한다. 孰爲此者(숙위차자) 天地(천지), 누가 이런 일을 주관하는가? 천지 자연이다. 天地尙不能久(천지상불능구) 而況於人乎(이황어인호), 천지 자연도 이처럼 이런 일 일을 오래 할 수 없는데, 하물며 사람이 어찌 그럴 수 있겠는가"이다.

"표풍(飄風, 회오리 바람, 광풍)"과 "취우(驟雨, 소나기, 폭우)"는 일정한 의미 체계를 운용하여 일정한 목표를 향해 미친듯이 내달리는 모습을 상징하기도 한다는 거다. 어떤 가치 체계가 선(善)으로 상정되면, 누구나 그 선을 향하여 질풍노도와 같이 다가가고, 그 선을 향하지 않은 것은 모두 금지 혹은 배제되어야 하며, 그 선에 제대로 접근하지 못하면 모두 낙오자가 된다. 그런데 천지 자연이 하는 "광풍'이나 '폭우'도 하루를 넘기지 못할 정도인데, 인간이 설정한 의미 체계나 가치의 체계 혹은 제도와 같이 언어화되어 있는 것들은 얼마나 유한 범위에 한정되어 있겠느냐 하는 말이다.

이 유한한 범위를 벗어나, 도를 따라 도를 실현하려고 하는 사람은 도의 범위와 같아지고, 덕을 실현하는 사람은 덕의 내용과 같아진다. 반면에 도가 상실된 모습의 일이나 행위, 즉 유한한 가치 체계를 절대적인 것으로 신봉하고 추종하면 자신의 모습도 그런 유한성의 번위 안에 갇히거나 그런 모습과 같아진다는 거다.

그 말의 원문이 이 거다. "故從事於道者(고종사어도자) 道者同於道(도자동어도, 德者同於德(덕자동어덕) 失者同於失(실자동어실), 그러므로 도를 따르는 사람은 도와 하나가 되고, 덕을 따르는 사람은 덕과 하나가 되고, 잃음을 따르는 자는 잃음과 하나가 된다. 이렇게 말할 수도 있다. 도의 실현에 종사하는 자는 도와 같아지고, 덕의 실현에 종사하는 자는 덕과 같아지며, 도를 상실한 일에 열중하는 자는 그 상실된 것과 하나가 된다."

오강남에 의하면, 덕 있는 사람을 만나면 덕이라는 점에서 그와 동조하고, 덕에 결함이 있는 사람을 만나면 그를 경멸하여 멀리하지 말고 다른 공통점을 찾아 그와 하나가 되라는 말로 푸는 사람도 있다 한다. 도올에 의하면, 왕필이 덕에 득(得)의 뜻이 있다고 말한 사실에 따라 도와 덕의 짝, 득과 실의 짝이 동시에 '덕' 한 글자에 겹치게 되는 쌍관어적 용법이라는 거다. 그러니까 얻음(덕=득, 도를 얻은 상태)과 잃음(失, 도를 잃은 상태)을 대조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얻음(덕)'은 도와 하나된 상태를 말하고, '실(잃음'은 도에서 떨어진 상태로 보는 거다. 도와 하나가 되면 우리에게 있던 본래적인 것을 다시 얻게 되는 것이고, 도에서 떨어지면 그것을 다 잃어버리게 되기 때문이다. 

오강남에 의하면, '득'은 일상적 이분법적 의식을 초월함으로 '얻어진' '비이분법적 의식' 내지 '초이분법적 의식'이라 볼 수 있다는 거다. 그리고 말이 많다는 것은 이분법적 의식으로 산다는 것을  뜻한다. 이것은 어느 의미에서 필요한 것이지만, 최상의 상태가 될 수 없는 것이다.인간은 언제까지나 이런 상태 속에서만 계속 살아갈 수 없다. 말장난으로 서의 정치, 말장난으로 서의 변론, 말장난으로 서의 학문 등은 물론 버려야 할 일이지만, 심지어 우리가 살아가는 데 불가결한 합리적 사고와 조리 정연한 말이라도, 그것이 전부라는 생각은 버려야 한다. 말로 할 수 없는 경지가 있다는 것을 깨닫고 이런 경지를 궁극 목표로 삼아야 한다. 그것은 도와 하나되는 경지이다. 이런 경지가 되면 도마저 이를 기뻐한다고 하는 거다.

그 말의 원문이 이 거다. "同於道者(동어도자) 道亦樂得之(도역락득지) 同於德者(동어덕자) 德亦樂得之(덕역락득지), 同於失者(동어실자) 失亦樂得之(실역락득지) 사람이 도와 일체가 되면, 도 역시 그를 얻었음을 기뻐하고, 덕과 일체가 되면, 덕 역시 그를 얻었음을 기뻐하고, 실과 일체가 되면, 실 역시 그를 얻었음을 기뻐한다. 좀 다르게 말하면, 도와 같아진지는 자는 도 또한 그를 즐거이 취하고, 덕과 같아진 자는 덕 역시 즐거이 그를 취하며, 잃음과 같아지는 자는 잃음 또한 그를 즐거이 취한다."

오늘 아침은 밤새 내리던 비가 그쳤다. 자연은 말 없이 일을 한다. "봄이 와서 꽃이 피는 것이 아니라, 꽃이 피어서 봄이 된다. 우리가 꽃을 보고 좋아하는 것은 우리들 마음에 꽃다운 요소가 깃들어 있기 때문이다."(법정) 내 안에 있는 꽃이 피는 하루를 '도'와 하나가 되어 보내고 싶다.


꽃이 핀다/문태준

뜰이 고요하다
꽃이 피는 동안은
  
하루가 볕 바른 마루 같다
  
맨 살의 하늘이
해종일
꽃 속으로 들어간다
꽃의 입시울이 젖는다
  
하늘이
향기 나는 알을
꽃 속에 슬어 놓는다
  
그리운 이 만나는 일 저처럼 이면 좋다


"희언자연"을 다시 생각한다. 언제나 조용하지만 변화무쌍한 자연과, 그 자연의 변화를 주도하는 시간의 특징은 침묵이다. 진리는 이 쪽에도 옳고 저 쪽에도 옳은 중간이다. 말은 자신의 침묵이 만들어낸 보석이어야 한다. 침묵을 통해 단련된 자신의 인격과 품격이 드러난 말은 자연스럽고 찬란하게 드러나기 마련이다.

어느 수도원의 팻말에 “침묵에 보탬이 되지 않는 말이면 하지 말라"고 적혀 있다 한다. ‘단순하고 간소한 생활에 보탬이 되지 않는 물건이면 어떤 것이든 소유하지 말라'로 바꾸어 볼 수도 있다. 침묵을 바탕으로 해서 거기서 움이 트고 잎이 피고 꽃과 열매가 맺기 때문이다. 말 보다 묵묵히 인내하고 기다리는 침묵이 더 필요하다는 것을 이제 알았다. 그런 기다림의 기간이 있어야 있을 것이 있기 시작한다는 사실을 자연은 침묵으로 가르쳐 주었다.

말은 가능한 한 적게 해야 한다. 한 마디로 충분할 때는 두 마디를 피해야 한다. 인류 역사상 사람 답게  살다 간 사람들은 모두가 한 결 같이 침묵과 고독을 사랑한 사람들이었다. 그렇지 않아도 시끄러운 세상을 우리들 자신마저 소음이 되어 시끄럽게 할 필요는 없는 것이다. 정말 말을 적게 하려면, 다른 사람에 대한 이야기나 불평, 불만, 비난, '3ㅂ'를 조심한다. 말이 많은 사람은 누구를 막론하고, 그가 어떤 일을 하는 사람이든 간에 그 내부는 비어 있다. 생각이 떠오른다고 해서 불쑥 말해 버리면 안에서 여무는 것이 없다. 그렇기 때문에 그 내면은 비어 있는 것이다.

태초의 인류에게 경전이란 무릇 소리를 타고 전파되는 신의 메시지였다. 이 소리에 귀를 기울이면 신이 자신 안으로 들어온다고 느꼈다. 고미숙이 인용한 카렌 암스트롱이 쓴 <축의 시대> 일부를 다시 옮긴다. "찬가를 듣는 사람들은 계절이 규칙적으로 이어지고, 별이 자기 갈 길을 벗어나지 않고, 농작물이 자라고, 인간 사회의 갖가지 요소들이 일관되게 결합하도록 돌보는 힘과 접한다고 느꼈다." 말하기와 듣기 안에 이렇게 심오한 의미가 담겨 있다. 그런데 언젠가부터 우리는 말하기와 듣기의 그 신성함을 잊고 산다. 사대 성인들의 진리는 다 말로 이루어져 있는 데도 말이다. 

거짓말, 중상모략, 이간질, 욕지거리, 위선적인 말, 이런 말들이 해롭다는 것은 우리 모두 다 안다. 그래서 모든 종교에는 그런 말들을 금지하는 계율이 존재한다. 이런 말을 하지 않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말의 신성함을 복원하는 일이다. 여기서 신성함은 특별하고 신비로운 것이 아니다. "적당한 때에 말하고, 사실을 말하고, 유익한 말을 하고, 가르침을 말하고, 계율을 말하고, 새길 가치가 있고 이유가 있고, 신중하고 이익을 가져오는 말을 때에 맞춰"(고미숙) 하는 것이다. 왜? 그런 말은 세상의 모든 것을 다 이어주기 때문이다. 그 신성함을 잃게 되면 그 말들이 세상을 단절시키기 때문이다.

오늘 아침 하고 싶은 말은 어떻게 하면 말을 잘 할 수 있을까 하는 문제보다 말의 고귀함을 회복하는 것이다, 이 말은 말이 세상 모두를 연결해 주는 것이라 점에서 고귀하다고 말하는 것이다. 내가 하는 말이 세상을 연결시켜 주는가 아니면 단절시키는가 따져 볼 일이다. 그러다가 인류는 말 대신 글을 쓰기 시작했다. 문자가 탄생한 것이다.


<<도덕경>> 제23장의 원문과 번역은 다음과 같다. 
希言自然(희언자연) : 말을 별로 하지 않는 것이 자연이다. 말이 없는 것이 자연스러운 것이다. 도가 말이 없는 것은 스스로 그러한 것이다.
故飄風不終朝(고표풍부종조) 驟雨不終日(취우부종일), 그러므로 회오리바람도 아침 내내 불지 못하고,  소낙비도 하루 종일 내리지 못한다.  
孰爲此者(숙위차자) 天地(천지), 누가 이런 일을 주관하는가? 천지 자연이다. 
天地尙不能久(천지상불능구) 而況於人乎(이황어인호), 천지 자연도 이처럼 이런 일 일을 오래 할 수 없는데, 하물며 사람이 어찌 그럴 수 있겠는가. 

故從事於道者(고종사어도자) 道者同於道(도자동어도, 德者同於德(덕자동어덕) 失者同於失(실자동어실), 그러므로 도를 따르는 사람은 도와 하나가 되고, 덕을 따르는 사람은 덕과 하나가 되고, 잃음을 따르는 자는 잃음과 하나가 된다. 이렇게 말할 수도 있다. 도의 실현에 종사하는 자는 도와 같아지고, 덕의 실현에 종사하는 자는 덕과 같아지며, 도를 상실한 일에 열중하는 자는 그 상실된 것과 하나가 된다.

同於道者(동어도자) 道亦樂得之(도역락득지) 同於德者(동어덕자) 德亦樂得之(덕역락득지), 同於失者(동어실자) 失亦樂得之(실역락득지) 사람이 도와 일체가 되면, 도 역시 그를 얻었음을 기뻐하고, 덕과 일체가 되면, 덕 역시 그를 얻었음을 기뻐하고, 실과 일체가 되면, 실 역시 그를 얻었음을 기뻐한다. 좀 다르게 말하면, 도와 같아진지는 자는 도 또한 그를 즐거이 취하고, 덕과 같아진 자는 덕 역시 즐거이 그를 취하며, 잃음과 같아지는 자는 잃음 또한 그를 즐거이 취한다.

信不足焉有不信焉(신불족언유불신언) : 신뢰가 부족하면 불신이 따른다.

나의 블로그 https://pakhanpyo.tistory.com 이나 https://pakhanpyo.blogspot.com 이다. 최근에는 우리마을대학 홈페이지 블로그에도 글을 올린다. https://www.wmcss.net 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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