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0. 인문 운동가의 인문 일기
(2022년 4월 22일)

나는 매주 목요일마다 <배움 사랑방>에 간다. 강의 제목은 '힐링 원예'이다. 이른 점심을 먹고 오후 1시부터 시작하는 프로그램이다. 내가 살고 있는 동네에는 마을 커뮤니티 <이음>이 있다. 거기서 무료로 하는 강의이다. 어제는 '호접란'을 심었다. 나비의 고운 자태를 지닌 란이었다. 오늘 아침 사진이 그 거다. '호접란'에서 호접(胡蝶)은 '나비목에 속한 곤충을 통틀어 이르는 말'이다. 그러니까 '호접란'은 나비 모양의 꽃을 가진" 꽃으로, 여기서 란은 "피어나다'란 뜻이니, '호접란'은 '나비 모양으로 피어난 꽃"이란 말이다.
'호접란'이라는 말을 듣자, 나는 바로 "호접지몽(胡蝶之夢, 나비의 꿈)"이라는 말이 떠올랐다. 이 말은 <<장자>> "재물론"에 나오는 이야기이다. 장자를 몽접주인(夢蝶主人)-'나비 꿈 선생'이란 별명을 준 이야기이다. 두 가지 꿈 이야기이다.
▪ 장자가 나비 되는 꿈: 장자가 꿈에서 나비가 되어 훨훨 날아다녔는데, 물론 그 때에는 자기가 장자라는 생각이 전혀 없었다. 꿈에서 깨어나서야 그것이 꿈이라는 것을 깨달었다.
▪ 나비가 장자 되는 꿈: 꿈에서 깨어나서 다시 곰곰이 생각해 보니, 지금이야 말로 나비가 꿈을 꾸어 그 꿈속에서 장자가 되어 살아가면서 자기가 나비라는 생각을 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문을 갖게 된 것이다.
나비의 꿈은 '나비로 된 꿈'과 '나비가 꾸는 꿈'이라는 두 가지로 해석된다. 꿈이 꿈인 것을 알려면, 그 꿈에서 깨어나야 한다. 그리고 꿈에서 깨어난 상태를 다시 꿈꾸는 것, 이건 깸에서 다시 한 번 깨어났다는 것으로 큰 깨어남, 대각(大覺)이라 한다. 인생은 일장춘몽(一場春夢)이라는 것을 말하려는 것은 아니다. 핵심적인 단어가 물화(物化)이다. 이게 장자 "재물론"의 결어(結語)이다. 장자가 보는 세계는 모든 사물이 서로 얽히고 설킨 관계, 서로 어울려 있는 관계, 꿈에서 보는 세계와 같이 서로가 서로 되고, 서로가 서로에게 들어가기도 하고 서로에게 나오기도 하는 '꿈 같은 세계'이다. 이런 세계는 개물(個物)이 제각기 독특한 정체성(正體性)과 함께 '하나'라는 전체안에서 서로가 서로 될 수 있는 불이성(不二性)이 병존하는 세계이다.
종이와 구름, 구름과 종이, 장자와 나비, 나비와 장자, 서로 넘나들어, 그야말로 자유자재이다. 이것이 이른바 물화(物化)이다. 사물을 깊이 통찰하는 사람이라면 사물을 고정된 무엇으로 보지 않고 언제나 서로 어울려서 함께함을 볼 수 있다. 이런 세계는 '나를 잃어버린 상태(吾喪我)'에서 진정으로 체득할 수 있는 세계이다. 이런 세계를 체득할 때, 쓸데 없는 아집, 편견, 국지주의, 자기 중심주의, 일방적 단견, 오만 등에서 풀려나 관용과 아량과 트임과 조화와 협력을 바탕으로 하는 자유 세계에서 노닐게 된다.
'오상아'가 되어야 물화를 즐길 수 있다. 예를 들어 종이에서 구름을 보는 것이다. 구름이 없으면 비가 있을 수 없고, 비가 없으면 나무가 없고, 나무가 없으면 종이가 있을 수 없다. 따라서 종이에서 구름 뿐만 아니라 햇빛과 비와 나무와 새소리와 공기와 하늘을 다 볼 수 있다. 또한 종이가 타면 재가 되므로 종이에서 재를 볼 수 있고, 탄소도 볼 수 있고, 다이아몬드도 볼 수 있다. 그러니까 종이에는 우주에 있는 다른 모든 것들이 다 들어가 있는 것이다.
그 다음 '호접란'을 심으며, '나비형' 인간이 되기로 마음 먹었다. 인간은 크게 ‘거미형’, ‘개미형’, ‘나비형’, 세 가지로 분류할 수 있다.
▪ 거미형 인간은 생산적, 창조적 노력은 하지 않고, 과거에 얻은 지식과 경험, 지위나 명성 등을 통해 먹고 사는 인간
▪ 개미형 인간은 부지런히 먹을 것을 수집하지만 자신의 가족이나 기업 등을 유지하기에 급급해 하는 인간
▪ 나비형 인간은 자신의 몫을 챙기지 않고, 쉬지 않고 옮겨 다니며 행복과 사랑과 생명을 전파하는 인간
다수 애벌레는 자기가 ‘나비’가 될 거라는 걸 알면서도, 번데기가 되는 아픔(온몸이 굳어가는 아픔)을 모면하려 그냥 애벌레로 여생을 보낸다. 인간으로 치면, 자기의 꿈을 접고, 세상과 타협하며 적당히 살아가는 부류의 인생들이다. 그러나 이를 극복하고 나비가 된 애벌레는 생애동안 다른 어떤 곤충보다도 아름다운 시절을 보내게 된다. 나비가 되어 평생 100Km 이상의 거리를 자유롭게 날고, 꽃가루를 몸에 묻혀, 각종 식물과 나무의 열매도 맺게 하는 좋은 일을 한다. 나비가 된 그는 하늘을 날아, 숲도 보고, 호수도 보고, 강도 즐긴다. 고통의 강을 건너 성공의 강둑에 도착한 인간은 다른 사람도 건너 올 수 있도록 자기의 나룻배를 기꺼이 내놓는다. 자신의 재능과 재산을 사회에 기부하는 것이다. 다른 사람들의 성공을 돕기 위해.
만일 그냥 애벌레로 남았다면, 평생 나뭇잎사귀 정도의 시야에 갇혀 살아야만 한다. 출발은 같았으나 그 끝은 장대한 차이를 이루게 되는 것이다. 원래 우리 모두는 ‘나비’가 될 운명을 갖고 태어났다. 그러나 대부분은 세상에 부대끼며 본인의 의지부족으로 나비가 되기를 거부하고 애벌레로 남는다. 나비가 되던, 애벌레가 되던, 인생은 옵션(option)이다. 그러니 “생각하는 대로 살지 못하면, 사는 대로 생각”하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내가 좋아하는 최승호 시인의 시 <나비>를 소환해 오늘 아침 공유한다. 그리고 시보다 더 익살스러운 반칠환 시인의 덧붙임도 함께 공유한다.
나비/최승호
짐짝을 등에 지고 날거나, 헬리콥터처럼 짐짝을 매달고 날아가는 나비를, 나는 본 적이 없다. 나비는 바늘처럼 가벼운 몸 하나가 있을 뿐이다. 몸 하나가 전 재산이다. 그리고 무소속이다. 그래서 나비는 자유로운 영혼과 같다. 무소유(無所有)의 가벼움으로 그는 날아다닌다. 꽃들은 그의 주막이요, 나뭇잎은 비를 피할 그의 잠자리다. 그의 생은 훨훨 나는 춤이요, 춤이 끝남은 그의 죽음이다. 그는 늙어 죽으면서 바라는 것이 없다. 바라는 것이 없기 때문에 죽을 때에도 그는 자유롭다.
"사실 나비는 영업사원이다. 그는 천 개의 거래처 주막을 드나든다. 한 주막에서 한 잔씩 잔술을 마신다. 술에 약하지만 거절할 수 없다. 고치에서 깨자 배운 게 이 직업이다. 화려하면서도 쓸쓸한 주막을 나서면 대낮에도 허공을 헛 딛는다. 공짜 같지만 그의 어깨에 꽂혀 팔락이는 것은 체크카드와 신용카드다. 눈치 빠른 주모가 끈끈한 암술 카드 리더기에 쓱 긁는다. 결혼정보업체에 등록된 수꽃들의 유전자 정보를 잽싸게 읽는다. 나비는 대개 초과 근로로 인한 과로와 영업상 알코올 중독으로 사망하지만 업무상 재해로 인정받는지 잘 알려져 있지 않다. 나비는 겨울을 건너기 어렵지만 꽃들의 씨앗이 다시 눈을 틔우고, 우리가 내년에도 봄을 맞는 것은 그 덕분이다."(반칠환)
"인간의 몸은 나비가 날아오르는 번데기처럼 영혼을 감싸고 있는 허물"(엘리자베스 퀴블러 로스)이다. 나는 바비를 볼 때마다, 어느 죽은 자의 영혼임을 느낀다. 번데기에서 부화해 나비가 되어 죽음이라 불리는 새로운 세계에 태어났음을 나는 믿는다
호접란을 집에 가지고 오면서 생각했다. 애벌레가 고치 안에서 일정한 시간을 보낸 후에 나비가 되듯이, 우리도 과거의 자신을 직시하고 개신(開新)하기 위해서 자신이 마련한 고치에서 변신을 시도해야 한다. 그 변신은 정신적인 것이다. 우리는 이 정신적인 변신을 '승화(昇華)'라고 부른다. '승화'의 사전적 의미는 '고체에 열을 가하면 액체가 되는 일이 없이 곧바로 기체로 변하는 현상'을 말하지만, 인문학에서는 '어떤 현상이 더 높은 상태로 발전하는 일'을 말한다.
가치나 의미 그리고 위안들은 인식이나 감각이 종합적으로 모이면서 일정 정도로 승화의 절차를 거쳐야만 하는 것들이다. 새로운 길에 대한 상상이나 모험이 일어나는 단계는 감각의 차원을 넘어서는 매우 승화된 지경이다. 승화(昇華)의 시작은 '설렘'에서 시작된다. 승화는 과거의 나가 아닌 새로운 나로 태어나는 시간이다. 승화는 애벌레가 나비가 되기 위해 천지 개벽하는 장소인 고치 안에서 일어나는 변신이다. 고치 밖에서 볼 때 아무런 변화가 없어 보이지만, 실제 내부에서는 상상하는 것 이상의 폭발적인 변화가 생긴다. 승화는 고유한 생각과 말이 깊은 성찰로부터 나오는 삶의 방식이다. 승화는 자신의 간절함이 원하는 바를 거침 없이, 자유롭게 행할 때 자신의 삶에 슬며시 일어날 것이다. 우리들의 삶 속에서 가치나 의미들은 인식이나 감각이 종합적으로 모이면서 일정 정도로 승화의 절차를 거쳐야만 하는 것들이다. 새로운 길에 대한 상상이나 모험이 일어나는 단계는 감각의 차원을 넘어서는 매우 승화된 지경이다.
사는 일은 평탄하지 않다. 늘 문제들이 주변에 깔려 있다. 그렇다 하더라도 그 문제들을 해결해 나가는 거다. 인간은, 이런 수련을 통해, 육체는 소멸해가지만, 정신과 영혼만은 새롭게 단련할 수 있다. 인간은 '자신이 될 수 있는' 그것을 알아차리는 깨달음을 통해, '그것이 되어야만 하는' 존재이다. 인간은 과거의 잔재인 현재가 아니라, 미래에 이루어진 자신을 이 순간에 실천하는 존재이다.
인간(人間)은 종종 '땀'보다 '돈'을 먼저 가지려 하고, '설렘'보다 '희열'을 먼저 맛보려 하며, '베이스캠프' 보다 '정상'을 먼저 정복하고 싶어한다. 노력보다 결과를 먼저 기대하기 때문에 무모해지고, 탐욕스러워지고, 조바심 내고, 빨리 좌절하기도 한다. 자연은 '봄' 다음 바로 '겨울'을 맞게 하지 않았고, 뿌리에서 바로 꽃을 피우지 않게 하였기에, 오늘 땅 위에서 아름다운 꽃을 피우게 했고, 가을엔 어김없이 열매를 거두게 했다. 만물은 물 흐르듯 태어나고, 자라나서 또 사라진다. 이 세상에는 변치 않는게 없고, 아름다움을 그대로 유지하는 것도 없고, 지금 가진 것을 영원히 누릴 수도 없다. 자연은 이렇게 말한다. "모든 것에는 순서가 있고, 기다림은 헛됨이 아닌 과정 이었다고." 그 기다림이 그리움으로 이어지고, 그 그리움이 설렘이 된다. 그리움은 어떤 생각이나 이미지를 마음 속에 긁는 것이기도 하다. 그 그리움이 현실이 될 때가 '설렘'이 된다. 설렘이 많아야 그만큼 더 행복하다. 행복은 작은 것에 있다. 행복은 기쁨의 강도가 아니라 빈도라고 한다. 자신의 분수를 알고 작은 것에 만족할 줄 알아야 행복하다. 행복은 평범한 일상 속에 순간이라는 이름으로 숨어 있다. 나는 매일 그걸 찾아내려고 노력한다.
참고로, 가본지는 못했지만, 내가 좋아하는 최진석 교수는 은퇴하고, 자신의 고향 함평에 집을 짓고 사는데, 그 집 이름을 <호접몽가>라 했다. 그 이름은 장자의 핵심 사상인 도가 사상을 표현한 건물이라 한다. 지붕은 <<장자>>의 모티브인 나비 날개 모양이고, 노자의 기본 사상인 "유무상생(有無相生)"에 따라 둥근 건물 기둥은 종이로 만들었고, 반투명 플라스틱을 댔다고 한다. 그리고 송송 구멍이 뚫린 담벼락을 만들었다고 한다. 이 집은 종교 건축에 일가견이 있는 윤경식 건축가가 설계한 것이라 한다. 최진석 교수는 "철학은 개념으로 지은 집이고, 건축은 벽돌로 쌓은 철학"이라는 멋진 말을 했다. 우리는 평소 집을 의식하며 살지 않는다. 우리가 공간을 만들지만, 우리는 공간의 지배를 받는다.

출처: <우리문화신문>
나의 블로그 https://pakhanpyo.tistory.com 이나 https://pakhanpyo.blogspot.com 이다. 최근에는 우리마을대학 홈페이지 블로그에도 글을 올린다. https://www.wmcss.net 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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