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9. 인문 운동가의 인문 일기
(2022년 4월 21일)

한 부자가 고기를 요리하여 나누지 않고 자신의 몸에 가지고 다니면서 자랑만 일삼는다. 사람들이 맨 처음에는 고기 한 점을 얻어 먹기 위해 줄을 섰으나, 그가 구두쇠란 사실을 알고 그의 곁을 떠나간다. 부자는 고기가 썩는 줄 모른다. 악취에 익숙해 자신의 몸에서 썩은 고기(腐) 냄새가 나는 줄 모른다. 그러다가 그가 고기를 나누어 먹겠다고 사람들을 불러 고기를 진열(陣列)하였다. 그러나 아무도 그에게 오지 않았다. 왜냐하면 고기가 이미 부패(腐敗)했기 때문이다. 우리는 그런 사람을 진부(陳腐)한 사람이라고 한다.
이러한 일은 왜 생기는 걸까? 깊이 숙고하지 않기 때문이다. 쉽게 말하면, 자신에게 온전히 집중하지 못하고, 다른 사람들의 삶에 참견한다. 배철현 교수는 진부한 사람들의 특징을 이렇게 나열한다. 진부한 사람은
- 다른 사람의 안녕이나 입장을 헤아릴 능력이 없다.
- 세상에서 사장 소중한 것은 오직 자신의 욕망, 자신의 본능, 자신의 필요 그리고 자신의 변덕이다.
- 자신이 다른 사람보다 지적으로 우월하고 중요하다고 착각한다.
- 다른 사람이 이루어 놓은 업적을 인정하지 않거나 폄하한다.
- 자신을 우월하다고 생각하며 자신의 결점이나 한계를 보지 못하는 장님이다.
한 마디로 이런 사람들은 오만하다. 이 오만의 반대는 겸허(謙虛)와 겸손(謙遜)이다. 그건 "곡즉전"으; 태도에서 나온다. 다시 말하면, 내가 보는 세상이 전부라는 생각을 버리면 비로소 빛나게 될 것이고, 내가 옳다는 생각을 버리면 오리려 남들로부터 박수를 받게 된다. 겸손이 우리에게 새로운 생각들이 피어나고, 그 생각이 빛날 것이다. 오늘 아침에 읽을 노자의 <<도덕경> 제22장이 겸손에 대해 잘 가르쳐 준다. 천천히 읽으면 맛이 나는 장이다.
휘면 온전할 수 있고(曲則全 곡즉전),
굽으면 곧아 질 수 있고(枉則直, 왕즉직),
움푹 파이면 채워지게 되고(窪則盈, 와즉영),
헐리면 새로워지고(敝則新, 페즉신),
적으면 얻게 되고(小則得, 소즉득),
많으면 미혹을 당하게 됩니다(多則惑, 다즉혹).
그러므로 성인은 '하나'를 품고 세상의 본보기가 됩니다(是以聖人抱一 爲天下式, 시이성인 포일, 위천하식).
스스로를 드러내려 하지 않기에 밝게 빛나고(不自見 故明, 부자견 고명),
스스로를 옳다 하지 않기에 돋보이고(不自是 故彰, 부자시 고창),
스스로 자랑하지 않기에 그 공로를 인정받게 되고(不自伐 故有功, 부자벌 고유공),
스스로 뽐내지 않기에 오래갑니다(不自矜 故長, 부자긍, 고장).
대저 오로지 다투지 아니하니 하늘 아래 그와 다툴 자가 없다(夫唯不爭 故天下莫能與之爭, 부유부쟁, 고천하막능여지쟁).
옛말에 이르기를 휘면 온전할 수 있다고 한 것이 어찌 빈말이겠습니까?(古之所謂曲則全者 豈虛言哉, 고지소위곡칙전자 기허언재)
진실로 온전하여지는 것들은 모두 도로 돌아간다(誠全而歸之, 성전이귀지).
나는 이 "곡즉전(굽어서(曲) 온전할(全) 수 있다)"이라는 말을 좋아한다. 세상의 모든 길도 강(江)도 나무도 적당히 휘어져 있어 자신의 임무를 다할 수 있다. 또한 땅 속의 온갖 나무뿌리도 알맞게 굽어서 척박한 땅 속에서도 자신의 생명을 보존하고 성장할 수 있다 . 그러니까 "휘면 온전할 수 있다." 다시 말하면 온전하려면 휘어져야 한다. 들판의 풀잎들을 보면 그렇다. 바람이 불 때 휘어지지 않는다면 뿌리에 뽑혀 버리고 말 것이기 때문이다. <<장자>>에 나오는 이야기처럼, 나무가 구부러져 쓸모없어 보이면 잘리지 않고 그대로 온전히 남을 수 있는 거다. 살아 가는데 융통성, 유연성을 유지라는 말로도 이해된다. 이 문제는 오늘의 시를 공유한 다음 그 이야기를 이어간다. 어쨌든 나는 오늘 아침 공유하는 시처럼, <구부러진 길>을 좋아한다.
구부러진 길/이준관
나는 구부러진 길이 좋다.
구부러진 길을 가면
나비의 밥그릇 같은 민들레를 만날 수 있고
감자를 심는 사람을 만날 수 있다.
날이 저물면 울타리 너머로 밥 먹으라고 부르는
어머니의 목소리도 들을 수 있다.
구부러진 하천에 물고기가 많이 모여 살듯이
들꽃도 많이 피고 별도 많이 뜨는 구부러진 길.
구부러진 길은 산을 품고 마을을 품고
구불구불 간다.
그 구부러진 길처럼 살아온 사람이 나는 또한 좋다.
반듯한 길 쉽게 살아온 사람보다
흙투성이 감자처럼 울퉁불퉁 살아온 사람의
구불구불 구부러진 삶이 좋다.
구부러진 주름살에 가족을 품고 이웃을 품고 가는
구부러진 길 같은 사람이 좋다.
"곡즉전"이라는 말은 노자의 말이 아니라, 노자 이전부터 민간에서 회자되어 오던 격언 같은 것으로 본다. "곡즉전" 다음에 나오는 "枉則直(왕즉직, 굽으면 곧아질 수 있고), 窪則盈(와즉영, 움푹 파이면 채워지게 되고), 幣則新(폐즉신, 낡으면 새로워지고), 少則得(소즉득, 적으면 얻게 되고), 多則惑(다즉혹, 많으면 미혹을 당하게 된다)의 다섯 가지 항목은 "곡즉전"을 노자가 부연 설명한 것으로 본다. 도올 김용옥의 주장이다.
"곡(曲)"이라는 하는 것은 "꼬부라진 것, 휘어진 것, 구부러진 것"을 의미하지만, 인생에서 "억울한 일을 당해서 옴츠러든 상태'라는 의미도 함의하고 있다. 꼬부린 채로 사는 상태, 그러나 그러한 상태가 온전하게 펴질 수도 있는 가능성을 내포하는 삶의 자세, 즉 곧은 것보다는 곧아질 수 있는 가능성을 내포한 구부러진 상태가 오히려 안전하다고 볼 수도 있다는 게 도올의 생각이다. 나 자신도 곡(曲)과 전(全), 왕(枉)과 직(直), 와(窩)와 영(盈), 폐(蔽)와 신(新), 소(少)와 다(多)의 가치에 있어서 후자의 항목보다는 전자의 항목을 껴안는 자세가 노자적 삶의 태도라고 본다. 왜냐하면 중간에 있는 포일(抱一, 하나, 즉 도를 품는 것)과 마지막의 "귀지(歸之, 도로 돌아가는 것)라는 말과 상통하는 말이기 때문이다. 이런 사람은 "不自見(불자견, 스스로를 드러내지 않고), 不自是(불자시, 스스로 옳다 하지 않고), 不自伐(불자벌, 스스로 자랑하지 않고), 不自矜(불자긍, 스스로 뽐내지 않는다)." 그러므로 "부쟁(不爭)"할 수 있다는 거다. 부쟁하기 때문에 천하의 어느 누구와도 이 사람과 다툴 수가 없는 것이다.
그리고 "곡(휘어짐)"과 "전(온전함)", "왕(굽어짐)"과 "직(곧아짐)" 등이 양립 불가능한 반대 개념이 아니라, 오히려 상호 불가결의 상관 개념으로 보는 거다. 도올은 전체를 보는 것이라 하여 "전관(全觀)"이라는 표현을 했다. 나도 이 말이 좋다. "전관의 지혜를 가지는 자는 대대(對待) 관계의 양면을 포월(包越)한다"(김용옥)는 거다. "대립하는 것들은 서로 의지하여 자신의 존립을 도모한다. 유가 있기 때문에 무가 있으며, 무가 있기 때문에 유가 있다. 그래서 유무상생(유무상생), 난이상성(난이상성)이라고 말했다. 즉 대립자들은 대립하는 가치들을 포섭하는 것이다. 유는 무를 포섭하고, 무는 유를 포섭한다. 어려움은 쉬움의 포함하며, 쉬움은 어려움을 포함한다. 그런데 결국 이 대립자들은 서로 대립되는 상대방으로 이동하게 된다. 쉬움이 어려움이 될 수가 있고, 어려움이 쉬움이 될 수가 있다. 이렇게 대립되는 양면을 한층 더 높은 차원에서 통일하는 것이 포월(包越, 품어 안고 넘는다)의 지혜"(김용옥)라는 거다. 그 길이 전관(全觀)의 인간이 되는 거다.
자벌레를 가만히 보면, 굽어져야 곧아지고, 곧아져야 굽어진다. 곧아지려면 굽어져야 하고, 굽어지려면 곧아져야 한다. 굽어짐이 돋 곧아짐이고, 곧아짐이 곧 굽어짐이다. 굽어짐과 곧아짐은 서로 떼어 생각할 수 없는 관계에 있다. 이처럼 "와(파임)"과 "영(메워짐)", "폐(헐어짐)"과 "신(새로워짐)", "소(적음)과 "다(많음)"은 모두 반대되는 별개의 개념이 아니라, 우주의 생성 변화 과정에서 어쩔 수 없이 서로 붙어서 돌아가는 하나의 진행일 뿐이다. 따라서 노자적 삶을 사는 사람은 '반대의 일치'라는 위대한 진리를 통찰하고, 거기에 따라 살아가는 자이다. 그러기에 어느 한 쪽에 치우치는 일이 없이 사물을 "포일(하나로 품고)", "전관(全觀)하는 사람"이 된다. 그래서 그런 사람은 "천하식(天下式, 세상의 본보기)"가 된다는 거다. 그런데 이 '포월'의 지혜는 추상적인 고차원을 갖는 것이 아니라 상대적 가치의 양명성 그 자체의 관계 속에서 지혜의 비밀을 발견하는 것이다.
스스로를 드러내려 하지 않기에 밝게 빛나고(不自見 故明, 부자견 고명),
스스로를 옳다 하지 않기에 돋보이고(不自是 故彰, 부자시 고창),
스스로 자랑하지 않기에 그 공로를 인정받게 되고(不自伐 故有功, 부자벌 고유공),
스스로 뽐내지 않기에 오래갑니다(不自矜 故長, 부자긍, 고장).
보통 우리는 세상을 한 쪽 면으로 본다. 이런 사람은 어느 한 쪽이 다른 한 쪽보다 절대적으로 더 좋다고 생각하고, 그 한 쪽을 위해 전심 전력한다. 위에 본 것처럼, 스스로를 드러내는 것이 빛도 없이 이름도 없이 한 세상 지내는 것보다 좋다고 생각했으면 스스로를 드러내는 일에 온 힘을 기울인다. 기회 있을 때마다, 기회가 없으면 만들어서라도 자기가 뭔가 되는 것처럼 목에 힘을 주고, 자기를 자랑하고, 뽐내려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이런 짓들은 오히려 역효과를 가져올 뿐이다. 세상을 양면으로 다 보는 사람은 어느 한 쪽ㅇ 치우치는 일이 없어 구태여 그런 일을 하지 않는다. 그러기에 더욱 빛이 나고, 돋보이고, 인정을 받고, 오래 기억된다는 것이다.
결국 이런 트인 생각을 가진 사람들은 한 면만 보는 데서 오는 단견에 입각한 자기의 입장을 관철하려거나 자기를 드러내려고 겨루거나 다투는 일을 하지 않는다. 이런 사람들은 부쟁(不爭)하는 사람들이다. 그런 사람들은 "대저 오로지 다투지 아니하니 하늘 아래 그와 다툴 자가 없다(夫唯不爭 故天下莫能與之爭, 부유부쟁, 고천하막능여지쟁). 이런 삶의 태도가 쉽지는 않다. 그래 노자는 "옛말에 이르기를 휘면 온전할 수 있다고 한 것이 어찌 빈말이겠습니까?(古之所謂曲則全者 豈虛言哉, 고지소위곡칙전자 기허언재)." "곡즉전"이라는 말은 그냥 헛된 말이 안라, 정말로 실제로 가치가 있는 말이라는 뜻이다.
제일 마지막 구절이 "진실로 온전하여지는 것들은 모두 도로 돌아간다(誠全而歸之, 성전이귀지)"이다. 여기서 "성전(誠全)"의 "전"은 "곡즉전"의 "전", 다시 말해서 "곡"을 포월하는 "전"의 상태를 의미하는 것이다. 이러한 "전"에 도달한 사람은 결국 도의 경지에 이르게 되는 것이다. 도올 김용옥의 강의 내용을 공유하는 것으로 오늘 글을 마친다.
"노자가 말하는 '곡'은 '전'을 포월하는[품어 안고 넘어가는] '곡'이다. 그래서 온전하여 질 수 있는 것이다. 무지(無知)는 유지(有知)의 극치로 이해될 수 있으며, 무위(無爲)는 유위(有爲)의 구극적 차원으로 이해될 수도 있다. 노자의 무지(無知)는 단순한 무지가 아니라, 빛을 지니고 있으면서도 빛을 말하지 않는 '광이불요(光而不燿, 제58장)'의 고차원 상태를 말하는 것이다." 어쨌든 정말로 온전한 것은 그 "곡즉전"의 원리로 귀결된다는 거다. 모든 온전한 상태, 즉 가장 좋은 결과들은 모두 그 "곡즉전"의 원리에 의해서 비로소 얻어질 수 있다는 거다. 오강남은 "종교란 궁극적으로 구원을 목표로 하는데, '구원'이란 '온전함'을 회복하는 일"이라고 했다.
이 자리에서 파커 J. 파머의 <<온전한 삶으로의 여행>>을 소개하고 싶다. 그는, 이 책을 통해, 파편화된 삶에 지친 우리를 온전한 삶의 길로 초대하고 있기 때문이다. 다른 날 <인문 일기>에서 이 책 이야기를 할 생각이다.
나의 블로그 https://pakhanpyo.tistory.com 이나 https://pakhanpyo.blogspot.com 이다. 최근에는 우리마을대학 홈페이지 블로그에도 글을 올린다. https://www.wmcss.net 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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