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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운동가의 사진 하나, 시 하나

믿음은 말로 고백하고 믿는 것이 아니라, 삶에 있어서 가장 소중한 것을 깊은 묵상을 통해 알아내고, 그것들을 최선을 다해 심지어는 목숨을 바쳐 지키려는 삶의 태도이다.

1966. 인문 운동가의 인문 일기

(2022년 4월 18일)

 

어제 부활절을 맞아 나는 예수가 우리에게 가르친 것은 크게 다음과 같이 네 가지라는 말을 하고 이야기를 멈추었다.

1. 예수는 자신을 신이라고 주장한 적도 없고, 그것을 믿으라고 강요한 적도 없다. 
2. 그는 행동으로 보여주었다. 그가 제자들에게 보여준 행동, 가난한 자들, 즉 고아, 과부 그리고 이주자들을 보살피고 배고픈 자들을 먹이고 헐벗은 자들에게 옷을 주라고 주문했다. 
3. 또한 학연, 지연에 얽매이지 말고 자신만이 중요하다는 생각을 버리고, 하늘의 새와 들판의 백합처럼 자연과 더불어 살며, 생명의 신비를 마련하고, 만물을 존재하게 하는 아버지-어머니 같은 존재인 신을 의지하라고 요구했다.
4. 이렇게 살려고 결심하고, 행동으로 옮기는 것, 그것이 피스티스, 즉 믿음이다. 이 믿음에 대한 기쁜 소식(복음)을 우리는 사회적으로 저명하거나 특권층 뿐만 아니라 창녀들과 고리대금업자들에게 전해야 하고, 그 믿음은 자신만을 위한 삶이 아니라, 내 이웃을, 더 나아가 내 원수까지도 아낌 없이 사랑하는 삶의 태도로 보여주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믿음이라는 말의 그리스어 명사  '피스티스'가 로마로 와서 '피데스(fides)'가 되고, 동사 '피스튜오'는 '크레도(credo)'로 번역된다. 이 '피데스'가 영어로 피델리티(fidelity)가 된다. 그 의미는 '약속에 대한 엄수, 충실, (배우자에 대한) 정절'을 의미하게 된다. 반면 믿음은 '크레도'이다. 믿음은 동사이다.

그러나 믿음은 삶의 태도이자 어떤 사실을 믿는 정신적인 활동만이 아니다. '나는 믿는다'라는 의미를 지닌 라틴어 크레도(credo)를 어원적으로 보면, '우주의 질서에 맞게 말하고 행동하는 것'이란 말이다. 노자가 말하는 '도(道)'를 따르는 사람이다. 인도유럽어에서 'cr'는 심장을 의미한다. 고대로부터 심장은 그 사람의 생각, 말, 행동이 담겨져 있는 중요한 부분이다. 'do'는 '우주의 질서에 맞게 삼라만상을 정렬하다'라는 의미이다. 이와 같은 어원에서 파생된 단어가 '신'을 의미하는 그리스어 'Theos'로 그 본래 의미는 '우주 천체를 질서에 맞게 배치하는 분'이란 의미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흔히 말하는 'credo'라고 하는 것들은 '말로 하는 고백'이 아니라, 인간의 삶을 근본적으로 조망해 우주의 질서가 무엇인지, 신이 원하는 삶이 무엇인지 탐구해 그 사람의 채취로 묻어나는 것이다.

영어 성서로 오면, 'fidels'와 'credo'는 각각 'belief'와  'believe'가 된다. 이게 한국에 와서 '신앙(信仰) 혹은 믿음'이란 단어로 번역된다. 원래 믿음은 그리스도교의 삼위일체나 불교의 사성제, 팔정도를 말로 고백하고 믿는 것이 아니라, 믿음은 삶에 있어서 가장 소중한 것을 깊은 묵상을 통해 알아내고, 그것들을 최선을 다해 심지어는 목숨을 바쳐 지키려는 삶의 태도이다. 

라틴어 'Credo ut intelligam(안셀무스)'라는 말이 있다. 이 말은 '나는 이해하기 위해서 믿는다'로 직역되지만, 이 말을 배철현 교수는 '나는 인생에 있어서 소중한 것을 묵상을 통해 찾아내고, 그것을 지키려고 노력한다면, 그 결과 삼라만상의 비밀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로 의역한다. 그런 의미에서 믿음은 내가 목숨 바쳐 지켜야 할 원칙이고, 나에게 그 원칙은 내 인생에 소중한 것이다. 

믿음은 많은 사람들이 현실에 대해 객관적이고 당연하고 상식으로 받아들이는 지식의 상태를 말한다. 그러나 신념은 이 믿음의 내용을 일인칭으로 나 자신에게 적용할 수 있는지의 문제이다. 믿음을 belief 라고 하면, credo는 신조(信條)라 번역한다. '믿음을 넘어 신념을 실천하여야' 우리는 그를 '위대한 개인'이라 부른다. 믿음은 3인칭 객관자의 관점이지만, 신념은 일인칭적 믿음이다. 믿음을 자신의 행동으로 실천하려면 일인칭 신념이 있어야 한다. 나에 대한 믿음이 신념이 되어야, 그 믿음이 행동으로 나아간다. 

지금 우리가 겪고 있는 여러 가지 문제들은 믿음은 넘치지만, 신념은 고갈된 현상에서 생긴다. 다시 말하면 세상에 대해 3인칭 믿음을 가진 사람은 넘치지만, 이것을 일인칭화 해서 자신에게 적용하는 신념을 가진 사람은 드물다는 말이다. 불확실성 때문이다. 불안과 두려움 때문이다. 이걸 극복할 수 있는 방법은 나 자신을 희생하더라도 달성해야 할 더 큰 이유가 있다는 깨달음이 전제되어야 한다. 희생과 공포를 이기고 달성해야 할 더 큰 삶의 이유를 우리는 '목적(purpose)'이라 한다. '목적 있는 삶'이어야 하는 이유가 이 거다. 자신의 삶의 목적, 나는 이것을 명(命), 즉 소명(召命)이라 부른다. 자신의 삶의 목적을 발견해서 이를 실현하기 위해 일인칭으로 나서는 사람들만 신념으로 행동하며 자신과 세상을 바꾸는 사람들이 된다. 이게 credo이다. 배 교수가 말하는 믿는다는 말이다. 영어로 믿음이 belief라면, 신념은 faith이다. 나는 이 신념을 '신앙'이라 말하고 싶다.

좀 어려움 것 같지만, 잘 읽어보면 매우 중요한 통찰을 준다. 세상에 대해 3인칭 믿음을 가진 사람은 넘치지만, 이것을 일인칭화 해서 자신에게 적용하는 신념을 가진 사람은 드물다. 믿음은 말로 고백하고 믿는 것이 아니라, 삶에 있어서 가장 소중한 것을 깊은 묵상을 통해 알아내고, 그것들을 최선을 다해 심지어는 목숨을 바쳐 지키려는 삶의 태도이다. 일상에서 희생과 공포를 이기고 달성해야 할 더 큰 삶의 이유인, '목적(purpose) 있는 삶' - 나는 이것을 명(命), 즉 소명(召命)이라 부른다 - 을 살아야 한다.

오늘 아침 사진은 봄이 오고 있는 강가에서 찍은 것이다. 어제 부활절 오후에 긴 산책을 하다가 만난 거다. 


강이 풀리면/김동환  

강이 풀리면 배가 오겠지
배가 오면은 임도 탔겠지

임은 안 타도 편지야 탔겠지
오늘도 강가서 기다리다 가노라.

임이 오시면 이 설움도 풀리지
동지섣달에 얼었던 강물도

제멋에 녹는데 왜 아니 풀릴까
오늘도 강가서 기다리다 가노라.


나는 믿기로 했다. 왜냐하면, 믿음과 진실은 구별해야 하지만, 믿음은 인간이 구축한 문명화와 문화를 지탱하는 힘이기 때문이다. 믿음은 내가 사는 사회가 정상적이어서, 나를 악이 공격하지 않을 것이라는 희망이다. 믿음은 나의 신실함을 보았던 동료가 소문에 의거하여 나를 의심하고 배척하지 않을 것이라는 바램이다.

서로 믿는 믿음의 세계가 구축되려면, 중요한 것이 서로 간의 분명한 소통이 보장 되는 언어가 있어야 하고, 그 언어로 뒤에서 뒷담화를 할 수 있는 분위기가 보장되어야 한다. 더 중요한 것은 자신의 믿음-신념 체계가 우연히 알게 된 것들 중에 하나라고 생각하는 일이다. 자기가 믿는 신념 체계가 유일하고 정당하고 옳은 체계라고 착각하면 문제가 되기 시작한다. 우리 사회가 다소 그러한 점이 있다. 그런 착각을 하는 사람은 상대방의 신념을 고치려고 충고하고 질책하기까지 한다.

우리가 말하는 좌와 우의 문제도 그렇다. 자신에게 운명적으로 주어진 위치에 따라 자신의 세계관과 그 신념이 형성될 뿐이다. 예컨대, 1에서 10까지의 눈금이 있어, 내가 2에 있다면 1은 좌이고, 나머지 3-10은 우이다. 내가 9에 있다면, 1-8운 좌이고, 10은 우이다. 자신에게 운명적으로 주어진 위치에 따라 자신의 세계관과 그 신념이 형성된다. 그래서 우리는 공부하고 배워야 한다. 왜냐하면 공부나 배움은 자신의 눈금을 객관적으로 보려는 노력이다. 이러한 노력을 통해 우리는 자신의 세계관이 형성된 눈금이 중요한 만큼, 상대방에게도 그의 눈금이 있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 깨달음이다.

깨달은 사람은 자신의 눈금을 깊이 파는 사람이 아니라, 자신에게 그 눈금이 구속시키는 프레임이라면, 그것을 벗어 버리고 상대방 눈금의 위치를 알아차리고 역지사지하는 공감을 지닌 사람이다. 세상에 제일 무서운 신념이 근본주의(根本主義)이다. 자신들의 종교만이 진리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근본주의자들이다. 이들의 배타적이고 폭력적인 주장으로 종교 전체가 그 위치를 상실하고, 개인적인 영성이나 치유를 강조하는 '쁘띠 심리학'으로 전락하고 있다.

우리는 상대방에 대한 믿음을 가지기 전에, 그 대상에 대한 깊은 관찰과 탐구를 통해 믿음을 쌓아가다가 이 믿음이 지속되면 그것을 절대 신뢰하는 경지에 이르게 된다. 이게 어떤 사람에 대해 믿음을 주는 작동 원리이다. 관찰과 후 지속성이 유지되어야 한다. 대부분은 지속성이 없다.

이데올로기에 대한 믿음은 좀 다르다. 특히 근본주의자들의 믿음은 자신들만의 신앙체계가 유일한 진리라고 생각하고, 다른 종교들에는 구원이 없다고 배타적인 태도를 취한다. 이들은 서로 상대방을 '이단'이라고 폄하하며 자신들이 신봉하는 교리만이 구원에 이르는 길이라고 터무니없이 주장한다. 이런 무지(無知), 아니 무식(無識)는 무섭다.

인간이 자신이 경험한 편견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그 안에서 세계관을 형성하고, 자신만이 옳다고 주장하는 처사(處事)를 우리는 '무식'이라 부른다. 우리는 이 무식을 피하기 위해 공부한다. 공부를 통해, 우리는 나와 다름의 신비함과 아름다움을 알게 된다.  여기서 말하는 공부는 학교에서의 공부 뿐만 아니라, 우리가 사는 자연의 오묘함, 우리가 만나는 사람들에 대한 관찰을 통해 배우는 혜안을 포함한다.

믿음 그 자체는 매우 중요하다. 왜냐하면 인간의 생존은 절대적인 믿음으로 가능하기 때문이다. 예컨대, 어린 아이는 태어나면서 '어머니'라고 부는 존재를 절대 신뢰하게 된다. 왜냐하면 어머니는 아이의 생존을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바치기 때문이다.

'우리가 누구를 믿는다'라고 하는 말은 '단순히 지적으로 그의 존재를 믿는다'라는 말이 아니다. 예를 들어 '내가 어떤 신의 존재를 믿는다'고 말로 고백해 천당에 가고, 그렇지 않으면 지옥에 가는 그런 저급한 차원이 아니다. 배철현 교수의 묵상을 읽고 얻은 생각들이다.


나의 블로그 https://pakhanpyo.tistory.com 이나 https://pakhanpyo.blogspot.com 이다. 최근에는 우리마을대학 홈페이지 블로그에도 글을 올린다. https://www.wmcss.net 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