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3. 인문 운동가의 인문 일기
(2022년 4월 15일)

어제는 매우 의미 있는 세 가지 일을 하였다. 특히 공주에 있는 친구 집(러스틱 하우스 틈, 공주 큰샘1길 11-1)에 가서 좋은 분들을 여럿 만났다. 그 만남과 공주 투어 길에서 <길담사원>이라는 책방을 처음으로 들어갔다. 인상적이었다. 나도 그런 책방을 가졌으면 한다. 거기서 기념으로 <다석 유영모>>(박재순 지음)을 샀다. 책 표지에는 '동서사상을 아우른 창조적 생명철학자"란 부제가 있었다. 나는 늘 왜 그의 호가 '많은 저녁, 다석(多夕)'일까 궁금했다. 하필이면 왜 저녁? 류 선생님에 의하면, 저녁에 어머니가 "애들아, 집에 오렴, 저녁 먹을 시간이야" 라고 부르는 이 소리는 신이 인간을 부르는 '저녁 콜'이라는 것이다. 이 '콜'은 신의 아이들인 인간을 부르는 따뜻한 소리라는 것이다. 사실 우리들에게 저녁은 마음의 허기 뿐만 아니라, 몸의 피곤을 달래며 고요히 어둠으로 드는 시간이다. 따뜻하고 편안한 신이 호명하는 목소리의 시간이다. 그런 저녁이 많으면 얼마나 행복할까?
저녁을 찬양하는 그의 어둠론은, 이 세상 밝음이 본질이 아니라, 어둠 이야말로 우주를 아우르는 거대한 품이라는 인식의 산물이다. 그래 그는 "세종석신(世終夕新)"이란 말을 했다. 목숨이 끝나면 저녁을 믿는 법, 저녁은 거룩의 냄새를 맡고 거룩과 가까이 하며 거룩을 닮아가는 시간이다. 그리고 "다석요식 영석불식(多夕要息, 永夕不息)"이란 말을 했다. 생애의 많은 저녁엔 쉼(휴식)이 필요하지만, 영원한 저녁에는 숨(호흡)을 쉬지 않는다. 이 말을 좀 더 쉽게 풀면, 살아있을 때의 저녁은 휴식을 주지만, 영원한 저녁은 숨쉬기 자체가 필요 없어진다." 여기서 '다석(多夕)'이란 말이 나온다. 저녁은 어둠이 찾아오는 문턱이다.
오늘 아침 사진이 저녁이 오는 모습이다. 친구들과 공주를 탐방하다 저녁에 찍은 거다. 세상에 놀라지 말고, 할 수 일만 하자. 세상에 이름을 새기는 "빅 스토리"에 목을 매지 말자. 사회적 존재로서, 우리 인간은 돈이든 명예든 타인의 인정이라는 의미 체제에서 벗어날 수 없다. 하지만 인생은 결국 죽음을 향한 가벼운 발걸음에 불과하다는 진리를 잊어서는 안 된다. '많은 저녁(다석, 多夕) 류영모 선생님의 말씀이다. "우리가 빛 빛 하지만 빛보다 어둠이 더 크다. 깬다 깬다 하지만 깸 보다는 잠이 먼저이다. 삶도 죽음이 먼저이고, 많음 보다 하나가 먼저이다." 이 말이 다음과 같이 한자로 전해진다.
▪ 적여시광(寂餘始光)
▪ 수여시각(睡餘始覺)
▪ 사여시생(死餘始生)
▪ 일여시다(一餘始多)
이 네 구절은 우리가 중요하고 대단한 것이라고 여기는 "빛, 깸, 삶, 많음"보다, 더 본질적이고 더 위대한 것, "어둠, 잠, 죽음, 하나"임을 밝혀 놓은 역설의 문장이다.
▪ 나는 빛이 어둠을 이긴다고 배워 왔다. 그래 한참 생각한 후 깨달었다. 도시문명 속에서는 확실히 빛이 강해 보인다. 그러나 우주의 어둠 속에서는 빛은 미약하며 순간적이다. 소리 또한 마찬가지이다. 나는 소리가 적막을 이긴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침묵과 고요한 적막 뿐인 절대공간에서 소리는 맥을 못 춘다.
▪ 깨어 있는 것도 잠들어 있는 것에 비하면 일부분일 뿐이며, 잠깐일 뿐이다. 깊은 잠으로부터 깨어나지 않은 깸은 깸이 아니다.
▪ 살아 있는 것 또한 죽음의 상태에서 생겨나 잠깐 뒤엔 다시 죽음의 상태로 돌아가는 것일 뿐이다.
▪ 세상에 나와 있는 만물들은 번성하여 영원할 것처럼 보이지만, 그것은 신의 '하나'가 이뤄낸 많은 것일 뿐이며 죽으면 다시 '하나'로 돌아간다. 많음이 하나의 작은 일부일 뿐이다. 심오하다. 내 이름이 '한표'인데, 사람들은 '만표' 또는 '천표'로 바꾸라 한다. 그러니 '만표'도 다 '한표'에서 나온다. 억지인가?
'하나'라는 이야기를 하면, 최근에 알게 된 "태일생수"라는 말이 소환된다. 도올 김용옥에 의하면, <<태일생수>>는 <<노자>>의 한 부분이었거나, <<노자>>와 같이 융합할 수 있는 동질적 사유의 문헌으로 간주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우선 도올이 소개하는 부분을 공유한다. 매우 놀랍다. 동아시아 판 <창세기>를 읽는 것 같다. 그 사유가 놀랍다. 동양의 우주론이다.
"태일(太一)은 물을 생한다. 생하여진 물은 생하는 태일(太一)을 오히려 도운다. [반보(反輔)'라는 말이 인상적이다.] 그리하여 하늘을 이룬다. 하늘 또한 자기를 생한 태일(太一)을 오히려 도운다. 그리하여 땅을 이룬다. 이 하늘과 땅이 다시 서로 도와서 신명(神明)을 이룬다. 신(神)과 명(明)이 다시 서로 도와서 음양을 이룬다. 음과 양이 다시 서로 도와서 네 계절을 이룬다. 이 네 계절(춘하추동, 春夏秋冬)이 다시 서로 도와서 차가움과 뜨거움(창열, 凔熱)을 이룬다. 차가움과 뜨거움이 다시 서로 도와서 습함과 건조함(습조, 溼燥)을 이룬다. 습함과 건조함이 다시 서로 도와서 한 해(세, 歲)를 이루고 이로써 우주의 발생이 종료된다(太一生水, 水反輔太一, 是以成天. 天反輔太一, 是以成地. 天地復相輔也, 是以成神明. 神明復相輔也, 是以成陰陽. 陰陽復相輔也, 是以成四時. 四時復輔也, 是以成凔熱, 凔熱復相輔也, 是以成溼燥. 溼燥復相輔也, 成歲而止).
그러므로 일년의 시간(세, 歲)이라 하는 것은 습조(燥溼, 습함과 건조함)에서 생한 것이요, 습함과 건조함은 창연(滄然, 차가움과 뜨거움)에서 생한 것이요, 차가움과 뜨거움은 네 계절이 생한 것이다. 네 계절은 음양(陰陽)이 생한 것이요, 음양은 신명(神明)이 생한 것이요, 신명은 천지(天地)가 생한 것이요, 천지는 태일이 생한 것이다(故歲者, 溼燥之所生也. 溼燥者, 滄然之所生也. 滄然者, 四時之所生也. 四時者, 陰陽之所生也. 陰陽者, 神明之所生也. 神明者, 天地之所生也. 天地者, 太一之所生也).
그러므로 태일은 물속에 저장되었다가 시간(=네 계절)에 의하여 운행되며[시간 속을 흘러 다니며], 한 바퀴 돌고 나면 다시 시작하곤 하는 것이다. 그래서 자기를 만물을 생성하는 어미로 삼는다[자신을 만물의 근원(母)으로 삼게 된다]. 한번은 비워지고 한번은 채워지니 만물의 법(經=法-규칙, 법칙)으로 삼는다. 이것은(태일太一) 하늘도 소멸시킬 수 없으며, 땅도 매몰시킬 수가 없으며, 음양陰陽으로도 이룰 수가 없다(是故太一藏於水, 行於時. 周而或始, 以己為萬物母. 一缺一盈, 以己為萬物經. 此天之所不能殺, 地之所不能埋, 陰陽之所不能成).
복잡한 것 같지만, 논리 정연하고 소박한 고대인들의 우주발생론(cosmogency)이다. 중요한 것은 생(生)이라고 하는 동사가 예외 없이 모든 단계에서 일방이 아닌 쌍방적 진행이라는 점이다. 그 진행 순서는 다음과 같다.
태일(太一) → 수(水) → 천(天) → 지(地) → 신명(神明) → 음양(陰陽) → 사시(四時) → 창열(凔熱) → 습조(溼燥) → 세(歲): 모든 것을 뒤집으면 하나이다. 그러나 차별과 배제는 도의 세계가 아니다.
이야기가 너무 많이 나갔다. 잠시 멈추고 오늘의 시를 공유할 차례이다. 어제 다시 만난 내 고향 공주는 여백이 있다. 오늘 시처럼. 그런 자리와 사람들을 소개시켜 준 연수 친구에게 고맙다. 코로나-19의 변종인 오미크론이 엄청나게 극성 부리면서, 사회는 거의 단절되어 있지만, 어른 들은 끼리끼리 모여 하고 싶은 것들을 다 한다. 지루하지 않은 삶을 살려면, 활동과 관계가 일상 속에서 계속 이루어지면 자신의 삶의 영토가 확장되게 하는 거다. 모여서 별 쓸모 없는 이야기를 나는 활동은 내가 여기서 말하는 활동의 범주에 들어가지 않는다. 그런 만남은 관계가 이루어지지 않는 거다. 활동과 관계를 통해 내 삶의 차이가 생성되어야 한다.
여백/도종환
언덕 위에 줄지어 선 나무들이 아름다운 건
나무 뒤에서 말없이
나무들을 받아안고 있는 여백 때문이다
나뭇가지들이 살아온 길과 세세한 잔가지
하나하나의 흔들림까지 다 보여주는
넉넉한 허공 때문이다
빽빽한 숲에서는 보이지 않는
나뭇가지들끼리의 균형
가장 자연스럽게 뻗어 있는 생명의 손가락을
일일이 쓰다듬어주고 있는 빈 하늘 때문이다
여백이 없는 풍경은 아름답지 않다
비어 있는 곳이 없는 사람은 아름답지 않다
여백을 가장 든든한 배경으로 삼을 줄 모르는 사람은
그렇지만 생의 과정은 모든 단계에서 동시적으로 상보(相輔) 관계를 이루고 이룬다. "생(生)"의 과정은 반드시 "복상보(復相輔)"라고 하는 역의 관계를 동시에 수반한다. 이 점을 간과하면 안 된다. 흥미롭다. '"복상보"의 논리'에 따르면 내가 나의 자식을 생한다면, 나의 자식은 동시에 나를 생하여야 한다는 거다. 태일이 물을 생한다면 물은 동시에 태일의 생성을 도와 하늘을 생한다. 하늘은 동시에 태일의 생성을 도와 땅을 생한다. 하늘과 땅은 서로가 서로의 생성을 도와 가믈한 신(神)을 생하고 밝은 명을 생한다. 이렇게 전개되어 나가는 전 과정의 특징은 아무런 항목도 실체화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도올이 강의에서 한 말이다.
그의 말은 직접 들어본다. "태일이라는 실체가 물이라는 실체를 탄생시키는 것이 아니라, 태일과 물은 상호 교섭하는 관계일 뿐이며, 그 관계는 끊임없이 서로를 포섭하고 서로가 대자(對者)로 이행하는 과정에서 새로운 항목, 즉 천과 지를 생성시키는 것이다. 그러나 천과 지도 실체가 아닌 교섭의 과정적 사건일 뿐이며 그것은 신명을 생성시키고, 신명은 다시 음양을 생성시키고, 음양은 다시 춘하추동을 생성시키고, 춘하추동은 다시 창열(차가움과 뜨거움)을 생성시키고, 창열은 다시 습조(습합과 건조함)를 생성시킨다. 이 모든 존재(Being)의 과정이 아닌 생성(Becoming)의 과정은 결국 무엇으로 귀결되는가? 그 귀결처를 <<태일생수>>의 저자는 '세(歲)'라고 보았다."
그러니까 우리 인생의 시간은 물의 시간이다. 우리는 물과 더불어 살고 물과 더불어 투쟁한다. 물이 없어도 죽지만, 물이 너무 많아도 죽기 때문이다. 그러나 분명히 해야 할 것은, <<태일생수>>의 저자가 이 세계의 가장 보편적인 현상의 기조를 "물(수)"이라고 보았지만, 그 물은 태일(태일, 도의 다른 이름)과의 관계에서 천지만물의 모든 현상을 생성시키는 비실체적 사건일 뿐, 그 나름대로 원질을 형성하는 존재의 대상이 아니라고 보았다는 점이다. 그런 데 그 물의 궁극적 귀결처가 '세(歲)'이다. 여기서 '세'라는 것은 일 년이지만, 농경사회에 있어서 일 년은 곧 영구한 시간을 의미한다. 계절로 이루어지는 세의 반복이 곧 시간이 것이다.
고로 물은 곧 시간의 창조주인 것이다. 물은 태일을 상보(相輔=反輔, 반보)하여 천지를 생성시키고, 천지는 물에 힘입어 결국 차가움과 따뜻함, 습함과 건조함의 변화를 일으키고 그 변화가 인간에게 시간으로 인지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시간은 물이 없으면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할 수 있다. 물의 한열조습이 우주와 인체와 사회의 리듬을 형성하는 것이다. 놀랍다. 그러니까 물은 모든 존재에 스며 있으며 그것은 생명의 원천이며 시간의 본 모습이다.
태일(太一)에서 일(一)을 이야기 해본다. 노자 <<도덕경>> 제42장은 "도생일(道生一), 일생이(一生二), 이생삼(二生三), 삼생만물(三生萬物). 만물부음포양(萬物負陰抱陽), 충기이위화(沖氣而爲和)"로 시작된다. "도는 하나를 낳고, 하나는 둘을 낳고, 둘은 셋을 낳는데, 셋은 만물을 낳는다. 만물은 음을 등에 엎고, 양을 가슴에 안고 있다. 텅빈 기가 서로를 포섭하여 생성의 조화를 이룬다"는 뜻이다. 이 말도 <태일생수>의 도식에 준거하면 이해가 쉽다.
"도생일"은 "태일생수"와도 같은 것이다. 도가 태일이고, 물(水)이 곧 일(一)이다. 일은 동시에 태일(=도)을 반보(反輔)하여 하늘(天)을 생성시킨다. 이 과정이 곧 "일생이(一生二)"인 것이다. 그러나 하늘은 동시에 태일을 반보하여 지를 형성시킨다. 이 것이 "이생삼(二生三)"인 것이다. 이 삼(도, 천, 지)이 갖추어지면 만물이 생성하게 되는 것이다. 이것이 "삼생만물(三生萬物)"이다.
<<장자>> "제물론'에도 이와 같은 이야기가 나온다. "세상에 가을철 짐승 털끝보다 더 큰 것은 없으니 태산도 그지없이 작은 것이다. 갓나서 죽은 아기보다 오래 산 사람은 없으니 팽조도 일찍 요절한 사람. 하늘과 땅 나와 함께 살아가고, 모든 것이 나와 하나가 되었구나! 모든 것이 원래 하나인데 달리 무엇을 더 말하겠느냐? 그러나 내가 모든 하나라고 했으니, (내가 한 말의 대상이 생긴 셈이라) 어찌 아무 것도 없어서 말을 할 수 없다고 할 수 있겠는가? 하나라는 것과 내가 방금 말한 하나가 합하여 둘이 되었고, 이 둘과 본래의 하나가 합하여 셋이 된다. 이렇게 계속 뻗어가면 아무리 셈을 잘하는 사람이라도 그 끝을 따라잡을 수가 없을 것이니 보통 사람들이야 일러 무엇 하겠느냐? 없음에서 있음을 나아가도 이처럼 금방 셋이 되는데, 하물며 있음에서 있음으로 나아갈 때야 일러 무엇 하겠느냐? 그러니 부산하게 좇아 다니지 말고, "있는 그대로를 그러하다(因是)"고 받아들이자." (天下(천하) 莫大於秋毫之末(막대어추호지말) 而太山爲小(이태산위소) 莫壽於殤子(막수어상자) 而彭祖爲夭(이팽조위요) 天地與我竝生(천지여아병생) 而萬物與我爲一(이만물여아위일) 旣已爲一矣(기이위일의) 且得有言乎(차득유언호) 旣已謂之一矣(기이위지일의) 且得无言乎(차득무언호) 一與言爲二(일여언위이) 二與一爲三(이여일위삼) 自此以往(자차이왕) 巧曆不能得(교력불능득) 而況其凡乎(이황기범호) 故自无適有(고자무적유) 以至於三(이지어삼) 而況自有適有乎(이황자유적유호) 无適焉(무적언) 因是已(인시이)
무한히 작은 도에서 본 털끝은 무한히 크고, 무한히 큰 도에서 본 태산은 무한히 작다. 시간도 마찬가지이다. 도는 아무리 긴 시간보다 더 길고 아무리 짧은 순간보다도 더 짧다. 따라서 갓나서 죽은 아이도 무한히 짧은 순간에 비하면 무한히 오래 산 것이고, 800년을 살았다는 팽조도 무한히 긴 시간에 비하면 무한히 짧게 산 셈이다. 따라서 나자 마자 죽은 아이가 팽조보다 더 오래 살았다고 할 수 있고, 팽조가 그 아기보다 짧게 살았다고 할 수도 있다.
사물을 양쪽 관점에서 동시에 보기 때문이다. 장자가 말하는 방식은 '자기를 잃어버린 마음 상태(오상아)', 앉아서 잊음(좌망), 마음 굶기기(심재)처럼 변화한 마음 상태에서 얻은 직관적 체험으로 말하는 것이다. 장자가 본 세계는 <도덕경> 제49장에 나오는 '혼기심(渾氣心)'처럼 분별하는 마음이 없어질 때 생기는 관조와 직관, 초월적 혜안으로 본 세계였다. 한 마디로 하면, 만물이 하나가 되는 체험의 문제이다. 만물제동. 어려운 일이다. 개별적인 사물들이 독립적으로 존재한다고 보는 상식 세계를 벗어나서 모든 사물은 '다양한 영역'을 넘어 유기적 하나로 존재한다고 보는 초상식의 세계로 들어가 '일원의 영역'을 체득해야 한다는 것이다.
장자에 의하면, 혜자는 말을 했기 때문에 말의 대상이 된 그 세계와 그것에 대해 말하고 있는 내가 분리되어 이원적(二元的) 대립의 관계에 서게 된다는 것이다. 이렇게 구분하고 따지고 변론하고 시비를 가리면서 "부산하게 좇아 다니지 말고", '순수이성의 한계'를 깨닫고 그것을 넘어서는 직관으로 '있는 그대로 인정하고 긍정(因是)'하라는 것이다.
나의 블로그 https://pakhanpyo.tistory.com 이나 https://pakhanpyo.blogspot.com 이다. 최근에는 우리마을대학 홈페이지 블로그에도 글을 올린다. https://www.wmcss.net 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