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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운동가의 사진 하나, 시 하나

"바꿀 수 없는 것을 평온하게 받아들이는 평온과 바꿔야 할 것을 바꿀 수 있는 용기, 그리고 이 둘을 분별하는 지혜를 허락 하소서." 기도문의 이름은 ‘평온을 비는 기도’다.

1957. 인문 운동가의 인문 일기

(2022년 4월 9일)

 

절치부심(切齒腐心, 몹시 분하여 이를 갈며 속을 썩임)은 하지 않기로 했다. 특히 부심(腐心)을 안 하기로 했다. 그래 우리는 벚꽃 밑에서 파티를 하고, 나는 동네 5일장에 나갔다. 후리지아도 두 다발 사고, 막 나온 두릅, 머위나물을 사가지고 왔다. 덤으로 오는 길에 빨간 꽃이 핀 작은 화분도 하나 사왔다. 부심(腐心)하지 않기 위해서이다. 썩는다는 말은 부패(腐敗)와 발효(醱酵)라는 말 두 가지가 있다. 부패라는 말만 나오는 거의 암기하는 문장들이다.

만물이 변하는 데, 만일 자기가 스스로를 변화의 대상으로 삼지 않고 방치하거나, 내가 아닌 타인을 변화시키려 한다면, 불행이 발생한다. 우리는 그런 방치를 '부패(腐敗)'라고 부른다. 부패는 썩어서 패한 자이다. 같이 썩는 것인데 발효(醱酵)는 다르다. 부패와 발효는 똑같이 시간이 지남에 따라 나타나는 현상이지만, 어떤 미생물이 작용하는가에 따라 해로운 변화와 이로운 변화로 나뉘듯이, 어떤 문장이나 단어는 무의식 속에서 정신을 부패 시키고, 어떤 단어와 문장은 기도처럼 마음의 이랑에 떨어져 희망과 의지를 발효시킨다. 우리는 그것을 '만트라'라고 한다.

어제 내 SNS에는 “개인을 중심에 두고 볼 때 최고의 도덕적 이상은 이타성이고, 국가를 중심에 두고 볼 때 최고의 도덕적 이상은 정의를 세우는 것이다”(라인홀드 니부어)는 말이 여러 군데서 나왔다. 이 말을 한 사람이 <도덕적 인간과 비도덕적 사회>의 그 니부어 맞다. 우리에게 그는 다음의 기도문으로 잘 알려진 20세기 미국 신학자이다. "바꿀 수 없는 것을 평온하게 받아들이는 평온과 바꿔야 할 것을 바꿀 수 있는 용기, 그리고 이 둘을 분별하는 지혜를 허락 하소서." 기도문의 이름은 ‘평온을 비는 기도’다. 이 기도문은 미국의 금주협회에서 애용되면서 유명해졌다. 아마 이 기도문을 아는 사람도 다른 버전으로 기억하는 이들이 많을 테다. 금주협회를 통해 다양한 버전이 양산되었기 때문이다. 예컨대, "신이여, 바라옵건대, 제게 바꾸지 못하는 일을 받아들이는 차분한 믿음과 바꿀 수 있는 일을 바꾸는 용기와 그 차이를 늘 구분하는 지혜를 주옵소서" 여기서 믿음과 용기보다 더 필요한 것이 지혜이다. 은혜 대신 믿음이라고 하고, 또는 차분함(靜)으로 바꾸기도 한다.

그 기도문은 다음과 같이 세 개로 나누어 볼 수 있다.
(1) “바꿀 수 없는 것을 평온하게 받아들이는 은혜.” - 바꿀 수 없는 것을 받아들이는 차분함(靜).
바꿀 수 없는 걸 평온하게 받아들인다는 게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우리 모두 알고 있다. 바꿀 수 없다는 말에서 누군가는 체제나 구조 같은 단어를 떠올릴 것이다. 그러나 정말 바꿀 수 없는 건 이미 벌어진 일들이다. 내가 한 말과 행동, 선택으로 인해 이미 벌어진 일들 말이다. 사실 바꿀 수 없는 것이 존재한다는 건 인간이 겪을 수 있는 가장 큰 고통 가운데 하나 이다. 그러나 끝내 받아들이지 못하거나 너무 늦게 인정하면 삶이 파국으로 빠지는 걸 막을 수 없다. 벌어진 일을 인정하고 받아들여야 한다.
(2) “바꿔야 할 것을 바꿀 수 있는 용기.” - 바꿀 수 있는 변화의 용기(勇)
비슷한 것 같지만, 좀 다른 뉘앙스가 있다. 바꿀 수 있는 걸 바꿀 수 있는 용기. 바꿀 수 있는 것과 바꿔야 할 것은 다르다. 어쨌든 네가 아무리 추악한 결론에 이르러 있더라도 아직 그것은 삶의 결론이 아니라는 것이다. 너는 아직 할 수 있는 것이 많고 그것을 이루려면 피해의식으로부터 결별하여 마침내 ‘그것이 삶이었던가? 좋다! 그렇다면 다시 한 번!’(니체의 영원회귀와 '아모르 파티')을 외칠 수 있어야 한다. 바꿀 수 있는 걸 바꿀 수 있는 용기를 가진 인간을 니체의 언어로 바꾸어 말하자면, 그것은 '위버멘쉬'일 것이다. 한때 초인으로 번역되었으나 이제는 극복하는 인간, 혹은 그냥 '위버멘쉬'이다. '위버멘쉬'는 전지전능한 슈퍼맨이 아니다. 말 그대로 스스로를 극복해 나가는 인간이다. 영원회귀와 '아모르 파티'는 이 삶이 영원히 똑같이 반복된다 할지라도 주체적으로 끌어안고 긍정하며 살아내겠다는 자기선언이다. '위버멘쉬'는 이를 실천하는 인간이다. 나아가 내 삶이 영원히 반복되는 것이라면, 그렇다면 영원히 반복되어도 좋을 만큼 제대로 바꾸고 극복하며 살아내겠다는 거다. 즉, 바꿔야 할 것을 바꿀 수 있는 용기란 자기 삶을 향한 주체적인 긍정으로부터 나온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위버멘쉬'란 단계가 아닌 태도에 붙여지는 이름이 이날, 고통마저 긍정하고 사랑하며 운명을 바꾸어 나가는 삶의 과정이다. 이것은 단 한 번의 각성이 아닌 끊임없는 다짐과 실천을 통해서만 가능하다.
(3) 이 둘을 분별하는 지혜를 허락하소서.” - 이 두 가지를 구별할 줄 아는 지혜(智). 
바꿔야 할 것을 바꿀 수 없다며 인내하고 받아들이거나, 바꿀 수 없는 것을 바꿔야 한다며 이미 벌어진 일을 마음에 담아두고 스스로를 궁지에 몰아넣는 일을 막기 위해 필요한 지혜이다. 니부어의 기도문은 구조상 이 마지막 구절을 위해 쓰인 것이  아닐까? 이 지혜를 위해서, 우리는 신에게 매일 기도하는 자세가 필요하다. 우리는 끊임없이 생각-사고를 해야만 한다. 데카르트가 <<방법 서설>>에서 존재를 확인하기 위해 필요하다 했고, 한나 아렌트가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에서 악이 평범한 것은 사고를 허용하지 않기 때문이라며 강조했던 바로 그 생각-사고 말이다. 시키는 대로 주어진 대로 혹은 우리 편이 하라는 대로 따르는 게 아니라 계속해서 생각하고 의심하고 고민하는 태도만이 오직 바꿀 수 없는 것과 바꿔야 할 것을 구별할 수 있는 밝은 눈으로 이어진다고 보기 때문이다. 

절치부심이라는 말에서 부심하지 않기 위해 니부어의 기도문에 대해 오래 사유했다. 부심에서 심이 그냥 부패되지 않고, 발효되게 하려면, 니부어가 말하는 지혜를 위해 사유하는 힘을 길러야 한다. 선택해야 한다. 선택은 선택하지 않은 것을 견디고 감당하는 일일 수 있다. 선택은 동전의 양면 같아서 어느 하나를 원하면 하나는 포기해야 한다. 이런 이유로 사람들은 선택을 싫어한다. “삶이 너무 안락하면 글을 쓸 이유가 없고, 너무 고단하면 여력이 없다”는 정희진의 말처럼 무엇 하나 녹록지 않은 복잡한 삶 속에서 선택은 점점 고달프고 힘들어진다. 소설가 백영옥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그러므로 좋은 선택을 하는 내가 아는 거의 유일한 방법은 선택하지 않아도 되는 상황을 만드는 것이다. 가령 운동할 것인가, 집에서 쉴 것인가라는 고민이 들기도 전에, 헬스장에 가 있는 자신을 발견하면 어떻겠는가. 이것이 바로 ‘습관의 힘’이다. 훌륭한 가수나 운동선수들은 휴식과 연습 사이에서 고민하지 않는다. 위대한 작가들의 더 위대한 일은 노벨상이 아니라 그들이 매일 읽고 썼다는 사실이다. 할 수 있는 일을 매일 하는 습관이, 결국 할 수 없던 것을 가능케 만든다. 매일 몇 시간이고 노래하고 춤출 수 있다면 그는 점점 그 일을 더 잘하게 된다. 그리고 신은 이런 사람들을 선택하고 힘껏 돕는다." 그리고 일상에서 최대한 선택의 종류와 순간을 줄이는 것이다. 이 이야기는 오늘의 시를 읽은 후에 이어가고, 그건 블로그로 옮긴다.


선택하기에/임영준

네가 서 있는 세상은
암담한 막장이 아니야
우리가 바라는 낙원은
아스라한 별이 아니야
깃드는 바람 따라
충만한 열망을 따라
기다리고 있는 거야
선택하기에 달린 거야


'신경 쓰다'와 '신경 쓰이다'의 차이가 있다. '신경 쓰다'는 나의 의지와 닿아 있다. 내가 자의적으로 내 신경을 쏟아 그것에 관여하는 것이다. 반면 '신경 쓰이다'는 불가항력적이다. 마치 '가렵다'거나 '마렵다'와 비슷하다. 내가 신경을 쓰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나를 신경 쓰게 만든다. 가렵고 마려운 것이 의지의 문제는 아니 듯이, 뭔 가가 신경이 쓰이는 것 또한 우리의 의지 문제는 아니다. 그러나 어딘 가가 심각하게 가려운데 긁을 수도 없는 상황이라면 어떻게 해야 하나? 처음엔 가려움이 심해 아무 것도 할 수 없다가, 점점 다른 부위에 자극을 줘서 신경을 분산 시키려 노력하면서, 가려움이 수그러들길 기다릴 수밖에 없다. '거스러미'도 그렇다.

'거스러미'는 손톱이 박힌 자리 위에 살갗이 거슬려서 일어난 보풀 같은 것을 말한다. 나무의 결 같은 것이 얇게 터져 일어나 가시처럼 된 부분 또한 거스러미라고 한다. 문제는 마음에도 거스러미가 있다는 점이다. 이것이 마음에 삐죽 돋아나 따끔따끔 마음이 쓰이고 종국엔 내 삶의 매끈함을 해친다. 작은 일에 예민한 사람으로 사소한 사건에도 마음이 제 리듬을 잃고 요동치는 것이다. 안달하는 성미이다. 초조해 하고 조급한 성격이다. 세상에 될 일을 다 그렇게 된다. 좀 기다릴 줄 알아야 한다. 그 거스러미는 제거해야 한다. 그 거스러미가 자꾸 신경 쓰인다. 

마음의 거스러미도 마찬가지이다. 처음엔 집착적으로 마음을 기울이다, 지쳐 나가 떨어져 다른 것에 신경을 분산 시켜 기왕의 생각에서 벗어나려 노력하다 보면, 느리지만 자연스럽게 거스러미는 무디어지고 순해지고 급기야는 살에 편입되는 순간이 온다. 시간이 필요할 뿐이다. 그런 마음의 거스러미가 일지 않게 하려면, 필요할  것 같은 그 마음을 잘 다스리는 것이다. 그러면 삶이 평온하다. 우리의 일상은 계속되는 선택의 연속이다. 일상에서 최대한 선택의 종류와 순간을 줄이는 것이다. 

선택의 심리학이 있다. 예를 들어 선택이 폭이 많으면, 자신이 한 선택에 더 많이 후회한다. 선택의 가능성이 많이 열려 있다는 게 꼭 좋은 것만은 아니다. 역설적이게도 선택지가 많아질수록 우리는 '내가 다른 걸 선택했더라면 어땠을까'란 생각을 하게 된다. 우리가 종종 뷔페 식당의 다양한 음식보다 전문점에서 끓여 낸 칼국수 한 그릇에 더 만족스러워 하는 것도 그런 이유이다. 한 차선만 있는 도로에서 차가 밀린다면, 짜증이 나긴 하겠지만 후회가 생기지 않는다. 그러나 두 차선이 있는 데, 유독 내 차선만 막힌다면 선택에 대한 후회가 밀려 올 것이다. 

바스 카스트의 『선택의 조건』은 선택에 관한 이야기가 가득하다는 것을 소설가 백영옥의 글에서 나는 알았다. 그녀에 의하면, '누구를 사귈 것인가'라는 선택에 관해 말하자면, 연애를 하면 할수록, 상대를 바꾸면 바꿀수록 만족도는 더 낮아진다고 한다. 심리학자 대니얼 길버트는 이런 현상을 우리가 하고자 하는 일이 원하는 경험이 아닐 때, 사람들이 재빨리 다른 경험을 구하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가령 맘에 안 드는 렌터카는 되돌려주고, 형편없는 음식이 나온 레스토랑에서 나와 버리고, 말 많은 SNS 친구는 바로 차단하는 식이다.

『선택의 조건』에 따르면 우리는 경험을 바꿀 기회가 없는 경우에만 기존 관점을 바꾼다. 이 말은 당장 이혼할 수 없기에 배우자에게서 장점과 고마움을 찾아내고, 바로 교체할 수 없기에 낡은 아파트를 수리하고 아끼게 되며, 되돌릴 수 없기에 밤마다 울고 집을 엉망으로 만드는 아이에게서 사랑스러움을 발견한다는 것이다. 도망가거나 취소할 수도 없을 때, 우리는 드디어 관점을 바꾸고 지금 일어난 일에서 긍정적인 면을 찾기 위해 노력한다. "신이여, 바라옵건대, 제게 바꾸지 못하는 일을 받아들이는 차분함(靜)과 바꿀 수 있는 일을 바꾸는 용기(勇)와 그 차이를 늘 구분하는 지혜(智)를 주옵소서"의 니부어의 기도에서 지혜에 이르는 길이 이거라 생각한다. 일상에서 최대한 선택의 종류와 순간을 줄이는 것이다.

이때 필요한 것이 습관이다. 습관은 우리 의식과 삶의 양식에 깊은 영향을 미친다. 우리는 크고 작은 습관의 힘 속에서 살아간다. 그렇다면 습관이란 무엇인가? “습관은 시간을 순서대로 배열하고 통합함으로써 생활 리듬과 양식을 만들어낸다.”(빌리 엔·오르바르 뢰프그렌) 습관은 시간을 가지런히 배열하고, 통합과 질서를 형성하는 힘으로 작동한다. 그렇게 함으로써 우리의 생활 양식을 떠받치고, 그 리듬을 자연스럽게 잇는다. 사람은 습관의 동물이다. 산다는 건 크고 작은 습관의 발명 속에서 이루어진다.

찰스 두히그의 책 <<습관의 힘>>은 새로운 습관이 생기는 과정을 과학적으로 추적한 책이다. 책에 의하면 습관이 생기는 과정은 '신호, 반복행동, 보상'의 3단계로 이루어진다. '우리는 습관 덩어리일 뿐이다'라고 말한 사람은 심리학자 윌리엄 제임스다. 그에 의하면 우리가 매일 내리는 선택이 신중한 결정의 결과물처럼 보이지만 결국 습관일 뿐이라는 것이다. "만약 당신이 달리기를 매일 시작하고 싶다면, 단순한 신호(식사하기 전 운동화 끈을 묶거나, 침대 옆에 운동복을 놓아두라)와 분명한 보상(한낮의 즐거움, 먼 거리를 뛰었다는 성취감, 조깅 후 엔도르핀 효과)을 확실하게 선택해야 한다." 인류에게 양치질 습관이 형성되는 데도 '신호'와 '자극행동' '보상'의 규칙이 작동했다. 치약의 얼얼한 맛과 풍성한 거품이 우리 몸에 각인돼, 그것을 청결과 동일시하는 습관 패턴을 형성한 것이다. 

나의 블로그 https://pakhanpyo.tistory.com 이나 https://pakhanpyo.blogspot.com 이다. 최근에는 우리마을대학 홈페이지 블로그에도 글을 올린다. https://www.wmcss.net 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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