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4. 인문 운동가의 인문 일기
(2022년 4월 6일)

이어지는 오늘 아침 <인문 일기>는, 비우고 비워 더 비울 것이 없는 텅 빈 경지에 이르러, 그 무엇에도 흔들리지 않는 고요한 마음을 두텁게 지키라는, ""致虛極(치허극) 守靜篤(수정독)"(제16장)을 위해, 노자 읽기를 한다. 오늘 읽을 제18장을, 좀 먹물을 먹은 사람들은 "윤리적 차원의 한계", 반면 젊은 학자들은 "화목한 가정에는 효자가 없고 화평한 국가에는 충신이 없다"는 상식을 뒤집는 이야기로 해석한다. 도올도 그냥 단순하게 유교적 덕목에 대한 안티테제(반대명제)로 읽기 보다는 인의(仁義. 사랑과 정의)라든가 효(孝)와 자비(慈悲)라든가, 충의절개(忠義節槪)라든가 하는 것이 유교적 덕목으로서가 아니라, 사회의 기본 덕성으로서 필요한 가치라는 상식적 사유 속에서 그 근원을 탐색하여 그러한 일상적 덕목이 절대적 선으로서 우리를 지배해서는 아니 된다는 일종의 가치전복(價値顚覆, transvaluation)으로 읽었다. 그 원문가 해석이다. 상대적으로 짧다.
大道廢(대도폐) 有仁義(유인의), 큰 도가 사라지면, 어짐과 의로움가 있게 되고
慧智出(혜지출) 有大僞(유대위), 지혜가 나타나나, 커다란 위선이 판을 친다.
六親不和(육친불화) 有孝慈(유효자), 가정이 화목하지 않으면 효와 자애가 있게 되고
國家昏亂(국가혼란) 有忠臣(유충신), 나라가 혼란하면 충신이 있게 된다.
인(仁, 어짐, 사랑)은 '인(人)과 '"이(二)'가 합한 것으로 보기도 한다.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에 기본적으로 있어야 할 윤리적 특성이라 풀이하는 거다. 그런 의미에서 사람을 사회적으로 사람 답게 해주는 '사람됨'이라 할 수 있다. 그걸 우리는 또 인성(人性)이라 한다. 의(義)는 '옳다고 생각되는 것을 하는 마음으로 풀이한다. 유교에서는 무엇을 할 때 이(利)가 된다고 하여 하는 행동과 이해(利害)에 관계없이 오로지 옳기 때문에 하는 행동으로 구별한 다음, 이해 관계에 구애됨이 없이 오로지 옳다고 여겨지면 하라고 가르치고 그렇게 하는 것이 바로 의에 입각한 행동이라고 강조한다. 이익에 따라 행동하는 것은 소인배이고, 의에 따라 행동하는 것이 군자의 행동이라고 한다. 다시 말하면, 호리피해 好利避害(나의 이익만 좋아하고, 손해를 싫어하는 것)를 양심적으로 경영하여, 호선오악 好善惡惡(선을 좋아하고 악을 미워하는)만을 보여주는 우주의 질서를 따라 일상을 운전하는 것이 군자의 행동이라 한다.
"혜지(慧智)"는 인간의 이원론적 사고방식에서 얻어진 분별지나 이성적 지식 혹은 일상적 의식의 한계 내에서 머리를 짜내어 얻어진 지략(智略)을 뜻한다. 전체 자연계의 존재 형식과 운행 원리를 모델로 하는 개인과 사회를 추구하는 노자의 철학체계에 비추어 본다면 이런 덕목들은 제한적 조건 위에 서 있는 것에 불과할 뿐이다. 그래서 노자는 이런 덕목을 인위적 고안품으로서 자연의 대도(大道)를 모델로 하는 방식보다 한 단계 낮은 것으로 치부해 버린다. 노자는 인위(人爲) 또는 유위(有爲)를 부정하고 무위(無爲)를 주장한다. 위(僞)는 허위일 수도 있고, 인위일 수도 있다. 노자가 말하는 무위는 자연성의 또 다른 표현이다. 자연(自然)은 말 그대로 "스스로 그러함"이다. 자연은 변화와 관계 속에 있다. 그런데 인위적인 지적 활동은 일정한 체계를 근거로 어떤 특정 대상을 다른 것 들로부터 고립시켜서 부각시키는 활동인 것이다. 그래서 노자는 지혜라는 지적 활동을 통해 허위나 인위가 생겨난다고 보는 것 같다.
그 다음 문장의 "육친(六親)"은 나와 부, 모, 형, 제, 아내, 자식 가족 구성원들이다. 효(孝)는 자식이 부모에게 드리는 사랑이고, 자(慈)는 부모가 자식에게 베푸는 사랑을 뜻한다. 이러한 효와 자는 가정에 질서가 없기 때문에 제창되는 덕이라는 것이 노자의 뜻이다. 만일 인간의 자연적인 심사가 지연적으로 발휘되고 있다면 이러한 효나 자에 대한 강조는 아예 필요 없을 것이다. 그리고 그 다음 문장에서 충신(忠臣)을 강조하는 것도 국가가 혼란스러워 충신이라는 것이 필요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요약하면, 인(仁), 의(義), 효(孝), 충(忠)은 유교에서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덕목이다. 어질고 의로운 개인, 부모에게 효도하는 자식, 자식을 자애로 보살피는 부모, 국가에 충성하는 신하는 유교에서 으뜸으로 여기는 인간형이다. 그러나 노자는 이러한 유교적 가치체계를 뒤집는다. 대도(大道)가 실현되면 인간관계나 사회생활, 국가의 질서 유지를 위해 굳이 인위적인 도덕률을 도입하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세상이 다스려진다는 것이 노자의 생각이다. 사람들은 자연을 닮은 밝은 마음으로 서로를 존중하고 신뢰하므로 구태여 정의와 불의를 구분할 필요가 없다. 가정도 부모, 자식, 형제가 제 자리를 지키면 저절로 화목 해지므로 효도니 자애니 하는 덕목을 애써 강조할 필요가 없다. 국가도 사사로운 욕심을 버린 지도자가 무위의 리더십으로 다스리면 저절로 질서가 잡히므로 충성스런 신하들이 있을 필요가 없다는 거다.
상식을 뒤엎는 이야기라 좀 어렵지만, 이 장을 소개한 한 블로그(https://m.blog.naver.com/chamnet21)에서 읽은 것인데, 제18장에서 노자가 하려는 이야기를 금방 이해하게 한다. "기업이 건강하면 많은 돈을 들여가면서 인위적으로 홍보를 하지 않아도 된다. 컨설팅도 필요 없다. 회계처리를 투명하게 하고, 기술개발과 인재육성을 열심히 하면 요란스럽게 광고를 하거나 외부 전문가를 초빙해서 경영진단을 받지 않아도 기업의 미래는 저절로 밝아진다. 홍보를 대대적으로 한다는 것은 상품과 서비스에 자신이 없다는 증거이며 경영진단을 받는다는 것은 기업이 병들어 있다는 증거이다. 스타벅스는 미디어 광고를 일체 하지 않는다. 잘 나가는 연예인이나 스포츠선수를 동원한 스타마케팅도 하지 않는다. 거기에 들어갈 비용을 실내장식이나 제품의 품질 유지, 종업원들의 후생복지 등에 쓴다. 그렇게 해서 매장을 찾는 고객들과 커피를 만드는 바리스타들의 입소문으로 자연스럽게 홍보를 대신한다. 이런 무위의 전략으로 스타벅스는 세계 최고의 기업으로 성장했다."
이해를 돕기 위해 한 번 더 말을 보탠다. 실제 사회에서도 "이웃을 사랑하라"고 강조하는 것은 사람들이 서로 사랑하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모두가 서로 사랑하고 있다면 구태여 사랑하라고 말할 필요가 없다. 사랑이 강조되면 될수록 그만큼 사랑이 부족함을 반증하는 셈이다. 도덕적으로 타락한 사회일수록 도덕이 더 거론되고, 정신적으로 병든 사회일수록 종교가 더욱 성행하게 된다. 마치 강력한 약이 많고 용한 의원이 많다는 것은 그 사회에 아직 질병이 많다는 것을 증거함과 같다고 할 수 있다.
개인적으로는, 한 번, 대도(大道)를 믿고, 오늘의 난국을 견디어 보고 싶다. 그래 천양희 시인의 <견디다>를 오늘 아침에 공유한다. 사진도 사람이 인위로 고통받는 나무들이 견디고 있는 것을 찍은 것이다. 견디다 보면, 자연의 되돌아감을 볼 수 있다.
견디다/천양희
울대가 없어 울지 못하는 황새와
눈이 늘 젖어 있어 따로 울지 않는 낙타와
일생에 단 헌 번 울다 죽는 가시나무새와
백 년에 단 한 번 꽃피우는 용설란과
한 꽃대에 삼천 송이 꽃을 피우다
하루 만에 죽는 호텔 펠리시아 꽃과
물 속에서 천일을 견디다 스물 다섯 번 허물 벗고
성충이 된 뒤 하루 만에 죽는 하루살이와
울지 않는 흰띠거품벌레에게
나는 말하네
견디는 자만이 살 수 있다
그러나 누가 그토록 견디는가
칠곡 동명 정암사 주지이신 대현 스님의 좋은 글을 읽고 마음이 평화로워졌다. 코로나 후유증으로 우울하고, 세상이 다 미쳐 거꾸로 돌아가는 것 같아 슬펐던 마음이 사라졌다. 스님 말처럼, "부정적인 쪽으로 눈을 돌리다 보면 모든 생각이 불행한 삶으로 이끌려가며, 불안감이 더해져 결국 우울증에 이른다." 실제로 "긍정과 부정은 한 단어만 다르지만, 인생 전체로 보면 그 차이는 크다. 부정적인 생각은 우리의 삶을 한 발자국도 나아갈 수 없도록 하고, 불행과 좌절을 낳게 한다. 긍정적인 생각은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진취적인 즐거움을 가져다준다. 맹목적인 낙관주의가 아닌 인내와 용기를 가진 자세다. 불교의 인연법으로 본다면 부정 속에 긍정이 있고, 긍정 속에 부정이 내재해 있다. 그 실체를 알아차리는 것이 깨달음이다. 인과 연이 모여 현상을 이루다가, 인연이 흩어지면 실상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오랜만에 인연 이야기를 좀 해본다. 모든 것은 그 자체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다 인연으로 이루어진다. 그러니 모든 것은 직접적인 원인(因)과 간접적인 조건(緣)이 만나서 생긴 것이고, 당연히 직접적인 원인과 간접적인 조건이 헤어지면 모든 것은 소멸한다. '있는 그대로', 여여(如如)하게 보는 사람, 즉 깨달은 사람은 모든 것을 공(空)으로 보기에 그것들에 집착하지 않는다. 그리고 인연이라는 말에서 중요한 것은 '인'보다 '연'에 방점을 찍어야 한다고 나는 생각한다. 직접적인 원인인 '인'이 발생하면, 간접적인 조건인 '연'은 내 몫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예컨대 부처가 되었다면, 그에게는 치열한 자기수행이라는 원인과 좋은 스승이라는 조건이 갖추어 져 있었던 것이다. 여기서 부처가 된다는 것은 살아서 인간이 살아낼 수 있는 가장 자유로운 삶을 영위하는 것을 말한다.
스님의 새 이야기는 힘을 준다. "모든 동물과 식물은 만들어진 대로 잘 적응하며 살고 있다. 하지만 유달리 새들만이 입이 뾰루퉁하게 튀어나와 있다. 새들은 어느날 스스로 불만을 늘어놓았다. '다른 동물에게는 튼튼한 다리를 주면서 우리에게는 왜 나무젓가락처럼 가늘고 못생긴 다리를 주며, 왜 다른 동물은 튼튼한 팔을 주면서 우리에겐 왜 양어깨에 날개라는 무거운 짐을 주는건지.' 그러던 어느날 누군가가 새들에게, 무거운 짐이라 생각하는 날개를 쫙 펴보라고 했다. 새들이 거추장스럽던 날개를 펴고 힘을 주자 몸이 가벼워지고 하늘로 날아올랐다. 이제까지 보지 못했던 세상이 눈앞에 펼쳐지고, 원망했던 마음은 어디론가 사라졌다. 새들은 그제서야 자신이 남보다 어려운 것만 가진 것이 아니라, 남이 없는 특별한 것을 갖고 있다는 것을 알고 행복에 젖었다는 얘기다."
스님은 "새들만이 어리석은 것이 아니라 인간들도 끝없이 어리석다"고 했다. "인생의 날개를 달 수 있는 기회가 많은데도, 내 안에서 진짜 나를 보지 못하고 믿지 못하는 것에서 힘겨움은 시작된다"는 거다. 그 힘겨운 마음을 잠시 내려놓고 내 인생과 교감을 할 때 비로소 하나가 된다고 했다. 내 스스로가 내 삶의 진정한 주인이 돼서 내 도움을 필요로 하는 가족과 친구들, 나에게 부여된 책임과 일들, 이겨내야 할 고난에 대한 의미를 부여할 때 비로소 인생의 날개를 찾고 날 수 있을 것이다. 이게 노자적 사유이다.
제18장을 읽으며 스님의 다음 말에 고개 끄덕였다. "좋은 사람도 항상 좋은 것이 아니다. 성질이 날 때는 나쁜 사람보다 더 포악할 때도 있다. 나쁜 사람도 항상 나쁘게만 살아가는 것이 아니다. 남의 기준에는 나쁜 사람이지만 자신이 처한 환경에 따라 자비로움을 갖고 있다. 우리의 어려운 환경도 시간이 가면 지나가기 마련이다. 어려움 속에서 날개를 찾을 수 있어야 한다." 그게 '대도(大道)'가 펼치는 모습이라 본다.
나의 블로그 https://pakhanpyo.tistory.com 이나 https://pakhanpyo.blogspot.com 이다. 최근에는 우리마을대학 홈페이지 블로그에도 글을 올린다. https://www.wmcss.net 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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