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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운동가의 사진 하나, 시 하나

노자가 생각하는 정치의 핵심은 지도자의 말, 즉 언어(言)이다.

1952. 인문 운동가의 인문 일기

(2022년 4월 4일)

 

어제 우리는 노자가 말하는 멋진 리더십 이야기를 읽었다. 다시 한 번 그 제17장의 원문과 번역을 다시 공유한다. 6월 1일 지방선거에 나온 모든 후보자들이 꼭 읽었으면 한다.

太上 不知有之(태상부지유지) : 가장 좋은 다스림은 밑에 있는 사람들이 다스리는 자가 있는지조차 알지 못한다.
其次 親而譽之(기차친이예지) : 그 다음은 사람들이 가까이하고 칭송하는 것이고 
其次 畏之(기차외지) : 그 다음은 사람들이 두려워하는 것이고 
其次 侮之(기차모지) : 그 다음은 사람들이 멸시하는 것이다. 
信不足焉(신부족언) 有不信焉(유불신언), 말의 믿음이 부족해지니 불신이 판을 치게 된다. 
悠兮 其貴言(유혜 기귀언) : 잘 다스리는 자는 말을 아끼는 것이 조심스럽다. 말을 삼가고 아낀다.
功成事遂(공성사수) 百姓皆謂我自然(백성개위아자연), 공을 이루고 일이 끝나면, 백성들은 그것이 자연스럽게 이루어졌다, 즉 자연(自然), 스스로 그러할 뿐이라 한다. 

어제에 이어 오늘은 다음 문장의 정밀 독해를 한다.

信不足焉(신부족언) 有不信焉(유불신언), 말의 믿음이 부족해지니 불신이 판을 치게 된다. 
悠兮 其貴言(유혜 기귀언) : 잘 다스리는 자는 말을 아끼는 것이 조심스럽다. 말을 삼가고 아낀다.

노자가 생각하는 정치의  핵심은 지도자의 말, 즉 언어(言)이다. 말은 지도자만의 문제가 아니다. "말[言]은 그릇[口]에 형벌 도구인 여(余, 바늘)를 꽂아서 신에게 맹세하는 일이다. 이때 口는 ‘입’이 아니라 ‘신에게 바치는 축문을 담은 그릇’이다. 갑골이나 청동기에는 ‘ㅂ’ 닮은 모양으로 새겨져 있다. 모든 말에는 신성이 깃들어 있어서, 발화만으로도 세상을 바꾸는 힘이 있다. 말과 행동이 어긋나면 신의 벌이 내리므로 말을 함부로 해선 안 된다. 신은 언어에 깃든 뜻을 살펴서 되새길 줄 아는 사람에겐 지혜를 주지만, 말을 무시하고 제멋대로 행하는 자한테는 재앙으로 갚는다. 공자는 “말이 어눌하고 행동이 민첩하기를 바란다”라고 했다. 말의 힘을 거스를까 저어했기 때문이다. 서양의 사유가 소피스트의 말 잘하는 법(수사학)에서 시작했다면, 동양 사상은 공자와 노자의 어눌함에서 출발했다. 공자는 항상 꾸민 말[巧言]이나 헛된 말[佞言]보다 더듬는 말[訥言]을 칭찬했다." (장은수)

공당 대표가 비통한 삶을 사는 장애인을 향해 공감 대신 비난 그리고 서울 교통공사 직원이 대책이랍시고 내놓은 게 ‘장애인 시위대 약점 잡아 소셜미디어에 퍼뜨리기’라는 게 끔찍했다. 사람 다움은 말에서 시작된다. 사람다운 인간의 격은 절로 주어지는 게 아니다. "나날이 노력하고 자신과 싸워서 얻어야 하는 덕목이다. 동물적, 이기적 인간[己]이 뜻을 정성스레 하고 자신을 다듬는 과정[修己]을 통해 저열한 욕망을 이기고[克己] 함께 사는 법[禮]을 아는 인간으로 거듭날 때 비로소 ‘인간답다’라고 말한다. 인간의 품격은 늘 신의 뜻을 물어 자신을 바로잡고, 그 뜻에 거스르는 바를 무찌르는 사람한테만 존재한다. 성인(聖人)은 인간이 이루어야 할 궁극의 인간형이자 이상적 인격이다. 성(聖)은 축문을 읊으면서[口] 발꿈치를 높이 들고[壬] 신의 목소리를 듣는[耳] 일이다. 성인은 사람 다움[仁]을 완전히 체득해서 무엇을 하든지 신의 뜻에 어긋나지 않는다. 그는 “자신이 이루려 할 때 남을 이루게 한다.” 자신이 서려고 남을 주저앉히는 일에는 인간이 없다." (장은수)

말의 중요성은 막말 문제만이 아니라, 한 번 뱉은 말은 반드시 증명될 수는 행위, 사업의 결실로 나타나야 한다. 특히 지도자의 말은 더 하다. 노자도 말의 '신(信)'을 강조했다. 위의 문장에서, 도올은 "신"을 "말의 신험(信驗)'을 의미하는 것으로 풀었다. "정치란 본시 목숨을 거는 것이다. 되지 않을  것을 되도록 만드는 것이다. 권력을 내 몸에 모시는 것이 아니라, 내 몸을 바쳐서 행사는 것이다."(도올 김용옥) 그러니까 "귀언(貴言)"이 "귀신(貴身)"이다라는 거다. 도올에 의하면, 노자가 4 가지의 모든 정치형태를 논한 후에, ㄱ 문제의 핵심은 정치가의 말에 "신험ㅇ 부족하다"는 현실에 있다고 지적하는 것으로 읽어야 한다는 거다.  신험이 부족한 곳에는 반드시 "불신(불신)"이 싹트게 마련라는 것을 지적하는 것으로 보았다. 따라서 지도자는 자기 말을 도처럼 그윽하게 느낄 수 있도록 자신의 말을 귀히 여겨야 한다는 거다. "귀언(貴言)"은 "희언자연(希言自然, 자연은 말 수가 적다.)"과 통하는 말이다. 한 번 던진 말은 반드시 실행에 옮겨야 한다. 그렇게 되면, 결국 공이 이루어지고, 일들이 성과를 낼 수밖에 없다. 그러나 성인과도 같은 정치인은 그거이 나의 공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즉 "공성이불거(功成而不居, 공을 이룬 후 거기에 머물지 않는다.)" 하는 것이다. 그러면 국민들은 이렇게 말한다는 거다. "百姓皆謂我自然(백성개위아자연, 백성들은 모두 한결같이 나 스스로 그러할 뿐이라 하는도다)!"


봄/반칠환

저 요리사의 솜씨 좀 보게
누가 저걸 냉동 재룐줄 알겠나
푸릇푸릇한 저 싹도
울긋불긋한 저 꽃도
꽝꽝 언 냉장고에서 꺼낸 것이라네
아른아른 김조차 나지 않는가

최고의 지도자는 "무위(無爲)로써 일을 처리하고, 말로 하지 않는 가르침(불언지교, 不言之敎)"(제2장)을 하는 자이다. '무위'라는 말은 일을 하지 않는다는 말이 아니라, 상대가 과중하게 느낄 정도로 행동하지 않는다는 말이다. 그러니까 지나치지 않는다는 말이다. 지도자가 특정한 이념이나 가치관으로 강하게 무장하여 그것을 국민들에게 반드시 실행하기를 요구하지 않는다는 말이다. 그리고 거버넌스의 주도권이 주도자가 아니라 지도자들에게 있을 때라야 그려질 수 있는 풍경이다. 이는 신뢰(信賴)의 문제이다. 오늘 아침에 강조하고 싶은 것은 이 상호 믿음의 문제이다. 무신불립(無信不立)이라는 말을 좋아한다. 신뢰가 없으면 아무 것도 만들어 낼 수 없다. <<논어>> 안연편에도 나온다.

영화나 모든 예술도 다 마찬가지이다. 예술가가 예술 향유자의 수준을 믿어야 한다. 신뢰의 문제이다. 믿지 못하면, 예술가의 의도를 못 믿을까 봐 일일이 설명한다. 예술은 소비자가 참여할 수 있는 여백이 만들어져야 한다. 영화의 경우로 들면, 관객이 영화 스토리에 직접 참여하여 함께 구성하는 형식이 아니라, 감독의 '일방통행'을 구경했다는 느낌만 남게 하는 경우에 그 영화는 재미가 없다. 감독의 강압성만 있고 관객의 자발성이 없어진다. 관객은 없고 감독만 남는 형국이 된다. 통치자도 백성을 믿지 못하면, 자기의 뜻을 강하게 관철하려고 한다. 그 이유는 통치자가 강한 이념이나 기준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불신은 자신이 지닌 강한 기준 때문이다. 자식과 부모와 관계도 마찬가지이다. 서로 불신하면, 갈등이 생긴다. 이는 모두 기준 때문이다. 

그래서 노자는 "말을 아끼라(愈兮, 其貴言, 다스리는 성인은 그 말을 귀히 여기는도다"(제17장)고 말한다. 바로 '잔소리'를 줄이라는 말이다. 잔소리는 지켜야 할 것을 부과하는 이념이나 기준이다. 이것을 줄이는 일은 잘못되지 않을 것이라는 믿음이 있어야 비로소 가능하다. 그리고 삶의 주도권을 지도자가 갖는 것이 아니라, 국민이 갖도록 하는 것이 좋다. 그러면 자발성이 일어나고, 스스로의 존재적 자각이나 자부심이 더 크게 자리한다. 백성도 자식에게도 다 마찬가지이다. 이를 무위(無爲)의 통치 또는 '무불치(無不治)의 지경'라고 말한다. 

'무위'는 ‘함이 없다’고 하여 아무 하는 일 없이 가만히 있다는 뜻이 아니라, 그 ‘함’이 너무나 자연스럽고 자발적이고 은은하여 보통의 ‘함’과 너무도 다른 ‘함’, 그래서 ‘함이라고 할 수 없는 함’이다. 도가 이렇게 ‘함이 아닌 함(無爲之爲)’의 원리에 따라 움직이므로 우리 인간들도 도와 하나 된 상태에서, 도와 함께 저절로 나오는 함을 하며 살라는 것이다. 그 반대되는 행위들은 다음과 같다.
▪ 인위적인 행위
▪ 과장된 행위
▪ 계산된 행위
▪ 쓸데없는 행위
▪ 남을 의식하고 남보라고 하는 행위
▪ 자기중심적 행위
▪ 부산하게 설치는 행위
▪ 억지로 하는 행위
▪ 남의 일에 간섭하는 행위
▪ 함부로 하는 행위 등 일체의 부자연스럽고 인위적인 행위
이런 것들을 버리고 자연스럽게 물 흐르듯 살아가는 것이 득이요, 덕이다.

다시 말하지만, <<도덕경>>의 ‘무위(無爲)’의 원칙을 정치 지도자에게 적용하면, “가장 훌륭한 지도자는 사람들에게 그 존재 정도만 알려진 지도자, 그 다음은 사람들이 가까이 하고 칭찬하는 지도자, 그 다음은 사람들이 두려워하는 지도자, 가장 좋지 못한 것은 사람들의 업신여김을 받는 지도자”이다.
(1) 사람들이 두려워하는 지도자는 법치(法治)주의 지도자
(2) 사람들이 따르고 칭찬하는 지도자는 덕치(德治)주의 지도자
(3) 가장 훌륭한 지도자는 무위(無爲)의 원칙을 따르는 무위의 지도자

어제도 말했지만, 무위라고 하여 방치한다는 것이 아니라 산과 들을 풍요하게 하는 이슬처럼, 가랑비처럼 있는지 없는지 모르게 백성들에게 도움을 주어 백성들이 일이 잘될 때 “이 모두가 우리에게 저절로 된 것이라”라고 말할 수 있도록 한다는 뜻이다. 무위를 실천하는 지도자의 통치 스타일은 작은 생선을 굽는 것과 같아야 한다. “큰 나라를 다스리는 것은 작은 생선을 조리하는 것과 같다(治大國若烹小鮮).” 작은 생선을 구울 때는 쓸데없이 젓가락으로 이리저리 들쑤시지도 않고, 한쪽이 잘 익기 전에는 뒤집지도 않는 것이 정석이다. 그렇게 하면 망가지기 때문이다. 한쪽이 잘 익기까지 한 참 동안 지켜보면서 가만히 둔다는 이야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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