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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운동가의 사진 하나, 시 하나

싫어하는 것과 미워하는 것은 다르다.

1950. 인문 운동가의 인문 일기

(2022년 4월 2일)

 

4월은 사랑과 아름다움의 여신 '아프로디테(Aphrodite)의 달’이다. ‘4월’을 뜻하는 영어 April이 여기서 나온 말이다. 온갖 화사한 꽃들이 만발하고 아지랑이가 모락모락 피어 오르는 4월이 아름다움의 여신의 이름을 갖게 된 것은 당연한 것 같다. 아직도 자기가 겨울이라면, 빨리 4월의 약동과 함께 눈을 떠야 한다. 어제 만난 이야기이다. 다 생각하기 나름이다. "한 도시에 참한 아가씨가 있었대. 절뚝거리며 걷는 장애인 선생님을 사랑했지. 부모님에게 이 친구를 소개해야겠는데 어찌 운을 뗄지 밤새 고심. “다리를 모두 절지 않은 것도 감사해요. 게다가 걸을 때만 다리를 절 뿐이랍니다.” 입에서 말이 떨어지기도 전에 엄마가 딸을 꼭 안아주었대. 그래도 아빠는 매섭게 물었지. “몸도 성치 않은데, 건강을 어떻게 챙길 작정인가?” “네 그래서 저는 매일 운동 삼아 걷고 있습니다. 길을 걷다가 따님도 만났죠. 다른 사람들보다 느리게 걷고, 또 땅을 보고 걷노라니 행운의 돈을 주울 때도 있답니다.” 총각의 대답에 아빠가 꼭 안아주었대." 사는 거 이런 마음이 된다.

오늘 아침 공유하는 시처럼, "봄이라고 해서 사실은/새로 난 것 한 가지도 없다/어디인가 깊고 먼 곳을 다녀온/모두가 낯익은 작년 것들이다." 그래 다시 지난 <인문 일기>를 펴고, 새로운 마음이지만, 몇 년 전 것을 다시 꺼내 마음의 근육을 키운다.

▪ 말을 할 때는, 따끔한 말 두 마디, 따뜻한 말 여덟 마디, 이 비율이 딱 좋다. 말의 2:8 법칙이다. 주철환 PD에게서 배운 것이다.

▪ 싫어하는 것과 미워하는 것은 다르다. 이 문장을 접하니, 처음에는 뭔가 '촉'이 오지 않았다. 그런데 좀 생각하니, 싫어하되 미워하지는 말자는 생각이 딱 든다. 생을 아름답게 사는 방법 중 하나가 싫음과 미움을 구분하는 것이다. 싫고 좋고는 사람마다 다르다. 내가 싫다고 다른 사람도 다 싫어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니 '나는 당신이 싫어요, 좋아요.' 말할 필요 없다. "나는 당신이 이해가 안돼" 이런 말은 마음 속에 사랑이 부족할 때 나오는 것이다. 그런 생각은 속으로 하면 된다.

▪ 못된 놈은 자기밖에 모르는 놈이고, 못난 놈은 자기를 모르는 놈이다. 나만 아는 사람, 나 뿐인 사람이 나쁜 사람이다. 자기 자신을 알면 즐거움이 커진다. 그래서 나는 나를 연구한다. 내가 어떻게 하면 즐거울까 생각하는 것이다.

▪ 자신감과 자존감은 다르다. 자신감보다 자존감이 더 귀하다. 자존감은 다른 사람을 끌어들이는 힘이 있다. 자존감은 자기 신뢰에서 나온다. '겸손하지만 비굴하지 않게, 당당하지만 교만하지 않게'이다. 겸손과 당당함은 모순적인 게 아니다. 겸손하면서 당당한 사람은 어디를 가나 호감을 얻는다. '자존감'은 '나는 소중하다'하면서 자신을 존중 하는 마음이다. 반면 '자존심'은 '나는 잘났다'면서 자신을 지키는 마음이다. 

▪ 모자람의 미학, 이거 중요하다. 사람들은 너무 완벽하면 싫어한다. 약간 부족한 부분이 보여야 상대가 무장해제한다. 넘치는 사람은 따가운 눈총을 받지만 모자란 사람은 따뜻한 눈빛을 받는다.  좀 어리숙하게 행동하고, 사는 것이 세상과 어울리는 지혜이다. 부러움을 살 일이 생기면 약간 모자란 사람처럼 행동하는 게 좋다. 그래야 미움을 덜 받는다.

▪ 솔직함을 앞세워 나쁜 씨앗을 뿌리지 않는다. 솔직함과 정직함은 차이가 있다. 거짓말을 하지 않는 것이 '정직함'이고, '솔직함'은 내 마음 속의 판단이기 때문에 옳을 수도 있고, 틀릴 수도 있다. 솔직한 감정을 전달하는 것은 평화를 깨는 경우가 많다. '솔직히 말해서' 라는 발언은 관계를 망가뜨리기 쉬운 말이다. 그냥 말을 안 하는 것이 낫다. 그러나 거짓말을 하는 것은 정직하지 못한 일이다. 나는 가끔 내 솔직한 마음을 말하여 대화 분위기를 '뻘쭘'하게 만들곤 한다. 이젠 솔직한 말은 가급적 안 할 예정이다. 그리고 아무리 가치 있는 말이라도 그것이 누군가의 가슴 속에 들어가 화학작용을 일으키지 않으면 의미가 퇴색된다. 그러나 가치 있다고 상대에게 함부로 충고하거나 '지적 질'하는 것은 좋지 않다. 상대가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 

오늘 아침 시이다. 이 시를 읽고 난 후에는 노자 <도덕경> 제16장 이야기를 할 생각이다. 그리고 그건 블로그로 옮긴다.

아름다운 곳/문정희

봄이라고 해서 사실은
새로 난 것 한 가지도 없다
어디인가 깊고 먼 곳을 다녀온
모두가 낯익은 작년 것들이다

우리가 날마다 작고 슬픈 밥솥에다
쌀을 씻어 헹구고 있는 사이
보아라, 죽어서 땅에 떨어진
저 가느다란 풀잎에
푸르고 생생한 기적이 돌아왔다

창백한 고목나무에도
일제히 눈 펄 같은 벚꽃들이 피었다
누구의 손이 쓰다듬었을까
어디를 다녀와야 다시 봄이 될까
나도 그곳에 한번 다녀오고 싶다


노자 <도덕경> 제16장을 읽는다. 이 장은 헛된 욕심과 잡생각을 모두 비우고 조용히 앉아 우주 만상의 생겨남을 관조하면 모든 것이 결국 그들의 뿌리로 돌아 감을 보게 된다는 것이다. 생성과 변화의 세계에서 모든 것의 뿌리, 만물의 근원, 도(道)로 돌아가서 참된 고요를 찾는 것이 곧 우주 만상의 본래적 운명에 귀의함이라는 것이다. 이렇게 무엇이든 생겨났으면, 그 근원으로 다시 돌아가는 반복적 과정은 우주의 영원한 범칙, 영원한 진리이다. 이 흐름을 꿰뚫어보는 것이 '밝아짐(明)'이다. 여기 '명'이란 어둠과 대비되는 것으로 깨달음, 지혜를 의미한다. 항상 그러한 여여(如如)의 세계를 바르게 아는 것이 '밝음', 또는'밝아짐'이다. 그리고 비움의 상태가 지극하다는 것은 유형의 것들이 완벽하게 비워져 도의 근원(根)인 무의 세계로 돌아갔다는 의미다. 그래서 "각복귀근(各復歸根)"이라 했다. 근원으로 돌아가는 것은 소명에 충실한 것이므로 명(命)에 따른다고 했다. 명에 충실한 것은 자신의 근원을 밝게 헤아린다는 의미이며, 그러할 때 인간은 윤리적으로, 규범적으로 가장 이상적인 상태에 이른다는 거다. 제16장의 원문과 번역을 공유한다.

致虛極(치허극) 守靜篤(수정독), 비움이 지극하면, 고요하고 돈독함을 지킬 수 있다. 이렇게 읽기도 한다. 비우고 비워 더 비울 것이 없는 텅 빈 경지에 이르러, 그 무엇에도 흔들리지 않는 고요한 마음을 두텁게 지키라. 또는 빔에 이르기를 지극하게 하고, 고요함을 지키기를 돈독하게 하라.  이렇게 읽는 이도 있다. 완전한 비움에 이르십시오. 참된 고요를 지키십시오.
萬物竝作(만물병작) 吾以觀復(오이관복), 만물이 더불아 함께 자라는데 나는 돌아 감을 볼 뿐이다. 
夫物芸芸(부물예예) 各復歸其根(각복귀기근), 歸根曰靜(귀근왈정) 是謂復命(시위복명), 사물들이 무성하게 피어나지만 결국은 모두 자신의 뿌리로 돌아가 고요함을 얻으니 이를 일러 제명으로 복귀한다고 한다. 
復命曰常(복명왈상) 知常曰明(지상왈명), 제명으로 돌아 감을 늘 그러함이라 하고, 늘 그러함을 하는 것을 밝음(明, 지혜)이라 한다.
不知常(불지상) 妄作凶(망작흉): 늘 그러함을 알지 못하면 망령되어 흉을 짓는다. 
知常容(지상용) 容乃公(용내공), 늘 그러함을 알면 온각 것을 포용하게 되고, 포용하면 공평하게 된다. 
公乃王(공내왕) 王乃天(왕내천), 공평해지면 왕처럼 되며, 왕은 곧 하늘이다. 
天乃道(천내도) 道乃久(도내구), 沒身不殆(몰신불태), 하늘은 곧 도가 되고 도는 영원하니 죽는 날까지 위태롭지 않게 된다. 

이젠 한 문장씩 정밀 독해를 한다.
致虛極(치허극) 守靜篤(수정독), 비움이 지극하면, 고요하고 돈독함을 지킬 수 있다는 것인지, 완전한 비움에 이르고, 고요함을 지키기에 돈독하게 하라는 것인지 비슷하지만 뉘앙스가 다르다. 참고로 죽간본에서는  "치허(致虛), 항야(恒也), 수중(守中) 독야(篤也)"로 되어 있다. 텅 빈 상태를 유지해야 오래 가고, 중을 지켜야 돈독 해진다는 거다.

내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비움을 끝까지 하고, 고요한 상태를 돈독하게 하여 지키는 일상을 꾸리라는 말로 읽는다. 도올의 주장처럼,  노자의 허(허, 비움)는 생명의 기운으로 가득 찬 '빔'이며, 그의 "정(靜)"은 '동(動)'을 함유한 '정'이기 때문이다. '정지정(靜祉靜)'이 아니라, '동지정(動之靜)'이라는 말이다. 노자의 정은 동의 가능태로서의 정일 뿐이다. 정하지 않고서는 도할 기이 없다는 거다. "유무상생(有無相生)"에서 처럼, '허(빔)와 만(참)', '동(움직임)과 정(고요)'과 같은 모든 개념이 상호 부정의 대자가 아니라, 서로 기다리고 서로를 긍정하는 대자의 관계에 놓여 있다. 기다림, 느낌, 수용과 배제 속에서 생성은 이루어진다. 생성은 곧 창조이며 창조는 새로움의 요소이다. 그래 나는 이 문장을 비워야 채워지고, 고요해야 움직일 수 있다는 것으로 이해한다. 비쁜 날들이 계속되면, 이 문장을 소환하고, 비우고 고요 해지려고 한다. 이젠 문장 구조를 알겠다. '치허'를 지극하게 하고, '수정'을 돈독하게 하라는 것으로 읽는다.

萬物竝作(만물병작) 吾以觀復(오이관복), 만물이 연이어 생겨나지만 나는 그들이 돌아가는 것을 본다. 도올은 "만물이 더불어 함께 자라는데, 나는 돌아감을 볼 뿐이다"고 해석한다. 나는 '만물이 다 함께 자라는데, 나는 그것을 통해 되돌아가는 이치로 본다"로 읽고 싶다. 만물이 다 함께 번성하는 모양 속에서 되돌아가는 이치를 본다는 거다. 

제40장에 나오는 "반자, 도지동(反者, 道之動)"이 떠오른다 도의 운동 모습은 되돌아가는 것 혹은 반대편을 향한 움직임이다. '복'은 '바'을 의미한다. 그리고 '복'은 '돌아감'으로 생성의 완성을 의미하기도 한다. 생성이 완성되면 죽는다.  그러나 죽음 새로운 생성을 위한 '돌아감'이다. 이 '돌아감'은 종료가 아니라, 새로운 시작이다. 새로운 시작을 위한 객관적 질료가 되는 것이다. 그래 그 다음 문장이 쉽게 와 닿는다. 생애를 완성하고 자기 뿌리(지기의 근원, 본성)으로 돌아간다는 거다.

夫物芸芸(부물예예) 各復歸其根(각복귀기근), 歸根曰靜(귀근왈정) 是謂復命(시위복명), 사물들이 무성하게 피어나지만 결국은 모두 자신의 근원으로 돌아가 고요함을 얻으니 이를 일러 제명으로 복귀한다고 한다. 여기서 "복명"의 '명'은 <<중용>>에서 말하는 "천명지위성(天命之謂性), 솔성지위도(率性之謂道), 수도지위교(修道之謂敎)", '하늘이 우리에게 본성을 주었는데, 다시 말하면 인간의 격을 말해 주었는 데, 그 본성을 따르는 것이 '길(道)'라 했다. 그 길은 우리가 인간으로 품격을 가지고 일상을 살아가는 날들이 그  '길(道)'라고 본다. 그리고 그 '도'를 잘 '다듬고 기르는' 것이(修道가)  교(敎, 工夫공부)라는 말이다.' 이'명'과 같이 보면 된다. 명으로 돌아간다는 것은 천명을 받은 것이고, 천명을 받는다는 것은 '항상 그러한 도", 즉 '상도(상도)"의 세계에 충실함을 의미하는 것이다. 결국 명(명)에서 상(상)이 오는 것이다. 그래서 다음 문장에서 말하는 것처럼, 그 항상 그러함을 알묜 모든 것이 밝아진다는 거다.

復命曰常(복명왈상) 知常曰明(지상왈명), 제명으로 돌아 감을 늘 그러함이라 하고, 늘 그러함을 하는 것을 밝음(明, 지혜)이라 한다.
不知常(불지상) 妄作凶(망작흉): 늘 그러함을 알지 못하면 망령되어 흉을 짓는다. 
눈코 뜰 사이 없이 부산하게 돌아가는 오늘날 같은 생활에서 언제 이렇게 한가하게 앉아 우주의 흐름이나 사물의 실상이 영원한 진리니 따지고 있을 시간이 있을까? 그러나 이런 근본적인 진리에 입각하지 않고 엄벙덤벙 살아 가면 아무리 설치고 부산하게 일이 늘어놓아도 그것은 결국 "망작흉(망작흉, 미망으로 재난을 당하는" 결과밖에 가져오지 못한다고 경고하는 것이다. 시간이 남아 돌아서가 아니라, 삶을 삶 답게 하고, 일상의 허망한 생각과 무거운 짐에서 해방되는 찬 자유를 누리려면 어쩔 수 없이 영원한 진리를 추구하는 데 전념하는 일 밖에 딴 도리가 없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영원한 진리를 알면 구체적으로 어떻게 된다는 말인가? 그 다음 문장이 잘 말해준다.

知常容(지상용) 容乃公(용내공), 늘 그러함을 알면 온각 것을 포용하게 되고, 포용하면 공평하게 된다. 
公乃王(공내왕) 王乃天(왕내천), 공평해지면 왕처럼 되며, 왕은 곧 하늘이다. 
天乃道(천내도) 道乃久(도내구), 沒身不殆(몰신불태), 하늘은 곧 도가 되고 도는 영원하니 죽는 날까지 위태롭지 않게 된다. 
영원한 진리를 알면, 우선 너그러워진다(容)고 한다. 옹고집이나 독단은 무지나 단견이나 편견에서 나온다. 사물의 영원한 실체를 꿰뚫어보게 된다면 자연히 옹고집이나 독단은 눈 녹듯 사라지고 쓸데없이 다투거나 조그마한 일로 안달복달할 일이 없어진다. 통이 큰 사람, 여유 있는 사람, 융통성 있는 사람이 된다. 그리고 '영원한 시각'에서 사물을 봄으로써 융통성, 포용성, 활달함을 갖게 되면, 사(私)가 없어지고 공(公)적인 인간, 공평 무사한 인간이 된다고 한다. 이렇게 되면 계속해서 왕 같은 사람, 하늘 같은 사람, 도와 같은 사람이 된다는 것이다. 이런 사람은 도(道)와 하나되므로 작은 '나'라는 것이 없어지고 무사(無私), 무아(無我)의 사람, 큰 '나'로 새로 태어난 사람이기 때문에 육신적인 죽음이 별로 문제될 것이 없다. 비록 몸이 없어진다 하더라도 영원한 나는 없어지지 않으므로, 그야말로 '죽는 날까지 위태롭지 않은(몰신불태, 沒身不殆)'" 경지에 이르는 셈이다. 맨 마지막 문장에서 하늘의 동행자는 도의 구현자이다. 도의 구현자는 장구한 시간을 견디어 낸다. 그 것을 '몰신불태(沒身不殆)"라 한다. 우주적 시간과 한 인간의 몸의 시간을 일치시켜 논의 한 것이다. 몸의 위태롭지 아니함, 즉 몸의 건강(health)을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다. 나의 몸의 건강은 곧 내가 속한 사회의 건강을 의미하고, 사회의 건강은 그 사회를 구성하는 모든  개체의 건강을 보장한다는 거다. 가장 불건강한 것은 항상 그러한 상도의 세계를 모름으로써 지어내는 망상이다. 그리고 "몰신불태"란 죽을 때까지 위태롭지 않다는 뜻이므로 천하를 다스리는 왕이 관용을 베풀고, 공평하게 일을 처리하면 정치권력을 항구적으로 유지할 수 있다는 의미로 해석할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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