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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운동가의 사진 하나, 시 하나

우리의 만우절은 없다.

1949. 인문 운동가의 인문 일기

(2022년 4월 1일)

 

오늘이 벌써 4월 1일로 만우절(萬愚節)이다. 악의 없는 가벼운 거짓말로 서로 속이면서 즐기는 날이다. 언젠가부터 삶이 더 팍팍 해지고, 여유가 없어지면서, 우리의 만우절은 그냥 지나가는 듯 하다.  프랑스는 매년 4월 1일에 어른이나 아이들이 농담과 장난을 하거나, 물고기 모양의 초콜릿을 주고받는다. 영어로는 April Fool's day(4월 바보의 날)이라고 하고, 프랑스어로는 Le poisson d'avril(4월의 물고기)라고 한다. 이름에 걸맞게 프랑스에서는 이날 종이로 물고기를 만들어 친구나 선생님 등에 몰래 붙여 놓는 장난을 쳤다. 


프랑스에서는 1564년까지 한 해의 시작이 4월 1일이었다. 율리우스력에서 그레고리력으로 바꾼 샤를 9세 때 새로운 달력이 생겨나고 이 때부터 1월 1일이 새해 초가 되었다, 1565년의 1월 1일, 프랑스 인들은 희망찬 한해를 기원하고 선물을 주고받으며 새해를 맞이하였다. 그런데 정작 4월 1일이 되자 사람들은 예전의 습관이 남아 있어서 그냥 조용히 지내기에는 허전한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선물을 준비하되 정말 값진 선물이 아닌 웃음을 자아내는 가짜 선물을 주고받게 되었다. 오늘날에는 새학기에 갓 적응하고 있는 학생들이 서로 장난치고 깔깔대면서 서로 부쩍 친해지는 계기가 되는 날이기도 한다. 프랑스 거리의 초콜릿 가게에서는 가지각색의 물고기 모양 초콜릿과 디저트가 오고 가는 사람들의 눈을 사로잡는다. 물론 만우절이니 만큼 웃음 터지는 거짓말도 빠지지 않는다, 프랑스에서는 이 날 방송이나 신문에서도 유쾌한 거짓말을 치곤 한다. 이런 식으로, 사는 데 여유가 있어야 하는데, 우리의 4월 1일의 만우절은 없다. 여유가 없기 때문이다.

오늘도 어제에 이어 노자 <<도덕경>> 제15장을 읽는다. "옛날부터 도를 잘 실천하는 자는  미미(微微)하고 묘(妙)하며, 가믈(玄)하고 통달(通)해 있다"고 하며, "그걸 알 길이 없지만  드러난 모습을 가지고 억지로 형용하자면" 다음의 7가 모습이라고 노자는 말한다. 그러니까 노자는 도를 깨달은 사람의 겉모습을 이렇게 7가지로 표현하고 있다. 머뭇거림(豫焉, 예언), 주춤거림(猶兮, 유혜), 어려워함(儼兮, 엄혜), 맺힘이 없음(渙兮, 환혜), 소박함(敦兮, 돈혜), 트임(曠兮, 광혜), 탁함(混兮, 혼혜). 7개의 감탄사가 멋지다.

이 말들이 얼른 그림으로 그려지지 않는다. 그런데 <도덕경>의 원문을 보면, 이 말들이 이미지로 그려지고 있다. 이렇게. 사실 무언가를 설명할 때 예를 들지 못하면, 나는 그것을 관념으로만 알고 있는 것이라고 높이 평가하지 않는다. 예증보다 더 나아가 그것을 이미지로 그려낼 수 있다면, 나는 훨씬 더 쉽게 잘 이해하며 그것을 높이 산다. 노자는 시적으로 미묘현통한 도의 구현자들의 삶의 모습을 표현하고 있다.
(1) 머뭇거림은 마치 살얼음 낀 겨울 강을 건너는 것 같고,
(2) 주춤거림(망설임)은 마치 사방의 주변을 두려워하는 것 같고,
(3) 어려워함(엄숙함)은 마치 손님이 된 듯하고,
(4) 맺힘이 없음(넉넉함)은 마치 얼음이 녹는 듯하고,
(5) 소박함(질박함)은 마치 다듬지 않은 통나무와 같고,
(6) 트임은 마치 골짜기와 같고,
(7) 탁함은 마치 흙탕물처럼 흐리다.

 요즈음 우리가 생각하고 그렇게 되기를 바라는 모습과는 많이 다르다. 우리는 모든 것을 불도저처럼 밀어붙이는 적극적이고 진취적인 인물, 모든 것을 물 샐 틈 없이 조직하여 완벽하게 처리해 가는 계획성 있는 인물, 매끈한 매너와 교양을 갖춘 귀티가 날 정도로 고고한 인물, 말을 조리 있게 잘하고, 머리 회전이 빠른 민활한 인물 등을 훌륭한 인물로 여긴다. 물론 오늘 같은 사회에서 그런 사람들이 필요하다. 그러나 그것만 가지고는 충분하지 않다는 것이다. 이런 인물들은 유가적 교양의 초보 단계이다. 참으로 도를 따라 사는 사람은 이런 예의 바른 교양인의 단계를 넘어선 사람이다. 따라서 딴 사람이 보기에는 뭔가 어섹하고 모자란 듯 보인다. 

그러나 도(자연의 이치)를 알고 따르는 사람은 사물을 도의 시각에서 보기 때문에 어느 한 가지만을 딱 부러지게 주장하는 것도 아니고, 열린 마음 때문에 "글쎄요"하는 정도로만 대답하니 끊고 맺는 데가 없어 보인다. 도를 아는 사람이 그렇게 보이는 까닭은 도와 하나가 되므로 틀에 박힌 규범이나 주의 주장 등 인위적인 모든 속박에서 완전히 자유스러운 상태이기 때문이다.

"예(豫)"는 큰 코끼리이고, "유(猶)"는 원숭이라 한다. 큰 코끼리는 행동이 둔하므로 머뭇거린다든가, 행동을 결행하지 않고 주저한다는가 하는 이미지이고, 두 번째로 두려움이 많은 원숭이가 두리번두리번 주변을 살피는 모습으로 풀이한다. 흥미로운 것은 우리의 일상적 언어에서 "유예(猶豫)"라는 말이 있다는 거다. 그 말은 망설여 일을 당장 결행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법률용어로 '집행유예', '선고유예' 등이 쓰인다.

나는 개인적으로 '머뭇거림'이라는 말을 좋아한다. 사실 전체를 파악하는 자는 구체적인 사태에 임하여서는 머뭇거리며 조심할 수밖에 없다. 잠시 마음을 놓으면, 우리들의 삶은 우리를 한 방향으로 몰아간다. 그 분잡에 휩쓸리다 보면 존재에 대한 질문은 스러지고 살아남기 위한 맹목적 앙버팀만 남는다. 숨은 가빠지고 타인을 맞아들일 여백은 점점 사라진다. 서슴없는 언행과 뻔뻔한 태도가 당당함으로 포장될 때 세상은 전장으로 변한다. 정치, 경제, 문화, 언론, 사법, 종교의 영역에서 발화되는 말들이 세상을 어지러움 속으로 몰아넣고 있다. 지금 우리 시대에 필요한 태도가 있다면 ‘머뭇거림’이 아닐까? '머뭇거림'은 다음을 내포한다.
• 알 수 없는 것을 아는 것처럼 말하지 않으려는 겸허함, 
• 함부로 속단하지 않으려는 조심스러움, 
• 그리고 이해할 수 없는 것조차 수용하려는 열린 마음.

'머뭇거림'의 반대가 '서슴없음'이다. 시몬느 베이유(Somone Veille)는 "우리가 사랑 가운데 서로를 대하기 위해 필요한 태도가 머뭇거림"이라 했다. 속절없이 흐르는 세월 속에서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머뭇거림은 답답함으로 느껴질 수 있다. 하지만 머뭇거림 속에는 함부로 말하거나 판단하거나, 응대하지 않으려는 조심스러움이 담겨 있다. 지나칠 정도로 단정적 언어를 사용하는 이들이 있다. 자기도 오류를 범할 수 있는 존재임을 알지 못하는 이들이다. 확신은 고단한 생을 지탱해주는 든든한 기둥이지만, 그 확신이 다름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폐쇄성에 갇힐 때는 아집에 불과할 수 있다.

여기서 멈추고 이어지는 이야기는 블로그로 옮긴다. 벌써 4월이다. 역병이 창궐하는 틈으로 시간이 확 지나가 버렸다. 그러나 거리는 완연한 봄이다. ‘4월’을 뜻하는 영어 'April'은, 사랑과 아름다움의 여신 아프로디테(Aphrodite)에서 유래된 단어이다. 그래서 4월은 ‘아프로디테의 달’이다. 4월은 아름다운 계절이다. 온갖 화사한 꽃들이 만발하고 아지랑이가 모락모락 피어 오르는 4월이 아름다움의 여신의 이름을 갖게 된 것은 당연한 것 같다. 그리고 4월하면, 시를 좋아하는 나는, 영국 시인 엘리엇의 <황무지>가 제일 먼저 떠오른다. 그는 “4월은 가장 잔인한 달”이라고 쓰고 있다.

“4월은 가장 잔인한 달
죽은 땅에서 라일락을 키워내고
추억과 욕정을 뒤섞고
잠든 뿌리를 봄비로 깨운다. (…….) “

왜 "잔인한"가? 4월이 잔인한 것은 마치 겨울잠을 자듯 자기 존재를 자각하지 않으려는 인간들을 뒤흔들어 깨우는 봄 때문이라는 것이다. 엘리엇은 봄비가 잠든 식물 뿌리를 뒤흔드는 4월이 가장 잔인한 달이며, 망각의 눈(雪)으로 덮인 겨울이 차라리 따뜻하다고 했다. 얼어붙은 현실에 안주하려는 사람들에게 약동과 변화를 일깨우는 봄의 정신이 숭고하면서도 잔인하기 때문이다.

한 방울의 물도 떨어뜨리지 않는 항아리는 황무지를 만든다. 참 기가 막힌 문장이다. 옛말에 등 굽은 소나무가 선산을 지킨다고 했다. 이와 비슷한 말이다. 물이 너무 맑으면 고기도 살지 못하듯, 사람도 너무 완벽하면 피곤하다. 좀 부족한 듯 사는 인생이 인간 답게 사는 인생이다. 그래 오늘 아침 시는 <곡선을 기르다>이다.


곡선을 기르다/오새미


곡선을 기르는 나무
잎사귀나 꽃은
직선이 없고 곡선만 있다
무성한 줄기로 슬픔과 배려를 기르며
숲도 달빛도 동반자라고 가르친다

직선을 선호하는 사람
꺾일 수도 떨어질 수도 있어
엄마 젖을 먹으며 자라는 아기를
곡선으로 기른다

둥지 잃은 산새와
비바람에 쓰러지는 풀잎의 울음
둥글게 드리운 산그늘이 감싼 붉은 이슬
곡선이 아니고는 품을 수가 없다

나무를 가꾸며 꽃을 피우고
사람까지 키우는 곡선

봄 산을 오르다 무더기로 피어난
제비꽃과 철쭉에 멈춰서는 발걸음
햇살의 그림자와 바람의 손길

눈앞이 곡선의 세상이다



제15장의 원문과 번역은 다음과 같다.
古之善爲士者(고지선위사자), 微妙玄通(미묘현통),  深不可識(심불가식) ; 옛날부터 도를 잘 실천하는 자는  미묘하고 현통하며 그 깊이를 알 수가 없다. 
夫唯不可識(부유불가식), 故强爲之容(고강위지용); 그걸 알 길이 없지만  드러난 모습을 가지고 대강 형용하자면 

豫焉 若冬涉川(예언약동섭천), 겨울에 강을 건너듯 머뭇거리며 신중하고, 
猶兮 若畏四隣(유혜약외사린), 사방의 이웃을 대하듯 두리번거리며 조심스럽고, 
儼兮 其若容(엄혜기약용(객)) : 얼굴에는 엄숙함이 묻어 있고, 
渙兮 若氷之將釋(환혜약빙지장석) : 흩어질 때는 녹으려 하는 얼음과 같고, 
敦兮 其若樸(돈혜기약박) : 통나무처럼 도탑고, 
曠兮 其若谷(광혜기약곡) : 계곡처럼 확 트이고, 
混兮 其若濁(혼혜기약탁) : 흙탕물처럼 탁하다.

孰能濁以靜之徐淸(숙능탁이정지서청), 누가 능히 자기를 흐리게 만들어 탁한 것을 고요하게 하여 서서히 맑아지게 하고, 
孰能安以久動之徐生(숙능안이구동지서생), 누가 자기를 안정시켜 오래가게 하며 천천히 움직여서 온각 것을 생동하게 할 수 있을까?
保此道者(보차도자) 不欲盈(불욕영), 도를 간직하고 있는 사람은 채우려 하지 않는다. 
夫唯不盈(부유불영) 故能蔽不新成(고능폐불신성): 굳이 채우려 하지 않기 때문에, 자신을 너덜너덜하게 하지 새로운 모습으로 완성치 않는다.

위의 원문에서 "儼兮 其若容(엄혜기약용 얼굴에는 엄숙함이 묻어 있고)"에서 "용(용)"은 "객(客)"의 전사상의 오류로 보기도 한다. "儼兮 其若客(엄혜기약객)"으로 "손님처럼 어려워하고"로 해석하는 경우가 더 많다. 도올은 "근엄하도다! 그것이 손님의 모습과 같고"로, 최진석 교수는 "진중하구나! 마치 손님과 같다"고 풀이했다. 나는 "어려워함(엄숙함)은 마치 손님이 된 듯하다"고 해석했다.

다듬지 않는 통나무, "박(樸)은 가능성의 극대치이다. 통나무는 무엇이든지 될 수 있는 원초적 가능성, 허가 극대화 되어 있는 형체미분의 잠재태이다. 그리고 통나무는 꾸밈이 없고, 순박하고, 진솔하고, 분화되지 않은 전일(全一)의 상태를 뜻한다. 도가 그런 것처럼 도인도 그러하다는 것이다.

"混兮 其若濁(혼혜기약탁), 흙탕물처럼 탁하다'는 도의 "티끌과 하나됨(同其塵, 동기진, 제4장)같이, 도를 알고 따르는 사람은 고고하게 자기 혼자만의 결백성을 주장하며 산에서 홀로 살아 가는 것이 아니라, 세상과 함께하고 세상의 모든 것을 감싸 안는다. 그러기에 어쩔 수 없이 탁해지지만 그렇다고 거기에 물들거나 탁한 채 그대로 남아 있는 것만은 아니다. 탁함을 고요히 하여 드디어 맑게 하고, 정지되어 맑게 된 것을 다시 움직여 결국은 생동하게 하는 일을 한다는 거다. 오강남은 "孰能濁以靜之徐淸(숙능탁이정지서청),  孰能安以久動之徐生(숙능안이구동지서생), 保此道者(보차도자) 不欲盈(불욕영)" 를 "혼탁하면서도 고요히 하여 서서히 맑아지며 편안해 하면서도 움직여서 서서히 살아나니 이런 도를 간직한 사람은 채워 짐을 원하지 않는다"로  풀이한다.

"처염상정(處染常淨)"이라는 말이 떠오른다. '더러운 곳에 머물더라도 항상 깨끗함을 잃지 않는다'는 말이다. 진흙 탕 속에서 피어 나지만 결코 더러운 흙탕물이 묻지 않는 연꽃을 이르는 말이기도 하다. 더러움(진흙)과 깨끗함(연꽃)의 이분법적 대립을 넘어섰기 때문이다.  세속에 물들지 않고 '그냥' 살아가는 삶을 꿈꾼다. 세속은 이분법적으로 쪼개진 세계의 공기를 마신다. 선이 있어야 악이 있으니, 선하게 살 일도 아니다. 붓다가 말하는 해탈의 세계는 선과 악의 대립이 없다. 성경도 그런 이야기를 한다. "하느님은 선인이나 악인이나 똑같이 해를 비추고 비를 내리신다." 선악을 가르는 화살이 녹은 자리에 핀 꽃이 연꽃이란다. 그래서 이 꽃의 이름은 '해탈'이기도 한다. 해탈의 꽃은 진흙에 물들지 않는다. 왜? 더 이상 진흙이 없기 때문이다.

保此道者(보차도자) 不欲盈(불욕영), 도를 간직하고 있는 사람은 채우려 하지 않는다. 그리고 또 채워지길 바라지 않는다. 인간이란 생래적으로 "채움의 길"을 간다. 뭐든지 모자란다고 생각하고 더 채우고 더 가지려 한다. 도를 알고 따르는 사람은 채움의 길을 버리고 '비움의 길'을 걷기에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하고 노래할 수 있다. '있음 그대로(being)에 자족하는 삶을 살게 된다. 

그래서 도를 아는 사람은 "굳이 채우려 하지 않기 때문에, 자신을 너덜너덜하게 하지, 새로운 모습으로 완성치 않는다(夫唯不盈(부유불영) 故能蔽不新成(고능폐불신성)." 잘 이해가 되지 않는다. 도올은 "그러므로 능히 자기를 낡게 하면서, 부질없이 새롭게 작위하지 않을 수 있는 것이다."로 풀이한다. 허(虛)를 극대화시키면서 자꾸 채우려 하지 않는다는 테마를 강조한 것이라 본다. 어떤 이는 불신성(不新成)이란 단어는 혁신을 부정하기 위해 쓰인 것이 아니라 자연에 인위를 덧댈 필요가 없다는 의미로 일기도 한다. 그러면서도 "불신성(不新成)"을 "이신성(而新成)"의 오사(誤寫)로 보고, 이렇게 풀이 하기도 한다. "능히 자기를 낡게 하면서 또 새롭게 생성한다." '끊임 없는 생성(becoming)'의 창조력을 강조한 것으로 본다. 맨 마지막 문장은 어렵다.

어쨌든 노자의 철학에서는 이 세상의 어떤 것도 특정한 '본질' 안에 갇혀 있지 않다. 즉 자신 안에 자신의 존재 근거를 두고 있지 않은 것이다. 모든 것은 그 반대편 것과의 관계 속에서 비로소 존재하며, 그 반대 방향을  향해 열려 있다. 그래서 어떤 특정한 본질을 최대로 발휘시키려 하거나 그 본질을 꽉 채우려 하는 행위 자체가 무의미 해진다. 이런 의미에서 노자의 철학은 해체적이다.


나의 블로그 https://pakhanpyo.tistory.com 이나 https://pakhanpyo.blogspot.com 이다. 최근에는 우리마을대학 홈페이지 블로그에도 글을 올린다. https://www.wmcss.net 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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