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6. 인문 운동가의 인문 일기
(2022년 3월 29일)

코로나 확산, 대내외 경제 여건 악화, 미-중 갈등, 우크라이나 전쟁, 북한의 도발 등 악재들이 겹치고 있는 상황이다. 특히 길어지는 팬데믹에 정신적으로 경제적으로 고통받는 사람들이 많다. 나도 힘들다. 그런데, 어제 아침에 낭포성 섬유 질환이라는 시한부 생명을 선고받고 태어난 클레어 와인랜드가 21살이라는 짧은 삶을 마감하면서 했다는 다음 말을 소환하고 위안을 얻었다. “인생이란 그저 행복하고 건강하게 살라고 있는 것만은 아니에요. 인생은 자신이 뿌듯해 할 수 있는 삶을 살라고 있는 거예요.” 인생은 다른 누군가가 아닌 내가 뿌듯한 삶을 사는 것이다.
너무 어려워 하지 말자. 작은 것이라도 내가 뿌듯해 할 수 있는 것을 찾아보면서, 평범하게 사는 것이다. 중국의 옛 시인 백거이(白居易)처럼 말이다. 나는 그의 이름처럼 살 생각이다. 그의 이름은 『중용』14장에 나오는 "군자거이사명(君子居易俟命, 군자는 평범한 자리에 살면서 천명을 기다린다)"라는 말의 거이(居易)를 따온 것이라 한다. '거이'는 '거할 거+평범할 이'가 합쳐진 말이다. 그러니까 '평범한 곳에 거한다'는 뜻이다. 또 그의 자가 낙천(樂天)이라 한다. 이는 『주역』의 "계사편"에 나오는 "낙천지명고불우(樂天知命故不憂, 천명을 즐기고 알기 때문에 근심하지 않는다)"라는 말에서 따왔다고 한다. 그는 낙천적이며 긍정적인 사고로 생활했기 때문에 중앙정치 무대의 격심한 당쟁에 휘말린 적이 없었던 것 같다. 시인은 아마도 평범한 일상을 지향하면서, 다가오는 운명이 어떤 것이든 그에 맞는 가장 최적의 인생 방법을 찾아낸 고수라는 생각이 든다.
이런 저런 생각들을 접고, 오늘도 노자 <<도덕경>> 깊게 일고 공유한다. 제14장 읽을 차례이다. 제25장과 함께 도(道)에 대해 이야기 하는 장으로 잘 알려져 있다. 잘 쓰여진 일종의 노래 같다. 원문 없이 한국어로 옮겨 본다. 어떻게 도의 실체(實體)에 다가설 수 있을 까?에 대한 고민이다.
視之不見(시지불견) 名曰夷(명왈이), 보아도 보이지 않는 것을 이름하여 '이(夷, 빛 없음, 아득함)라 하고,
聽之不聞(청지불문) 名曰希(명왈희), 들어도 들리지 않는 것을 이름하여 '희(希, 말 없음, 아리송함)'라 하고,
搏之不得(박지불득) 名曰微(명왈미), 만져도 만져지지 않는 것을 이름하여 '미(微, 꼴 없음. 여림)'라 한다.
此三者(차삼자) 不可致詰(불가치힐), 이 세 가지(이, 희, 미)는 코치코치 캐물을 수 없다.
故混而爲一(고혼이위일), 그러므로 뭉뚱그려 하나로 삼는다.
其上不曒(기상불교) 其下不昧(기하불매), 이 '하나'라는 것은 그 위는 밝지 않고, 그 아래는 어둡지가 않다.
繩繩不可名(승승불가명), 이어지고 또 이어지며 아스라하고 아득하여 이름 붙일 수 없어,
復歸於無物(복귀어무물), 다시 물체 없는 데(무물, 無物)로 돌아가니,
是謂無狀之狀(시위무상지상) 無物之象(무물지상) , 이를 일컬어 형상 없는 형상(모습 없는 모습)이고, 물체 없는 형상이라 한다.
是謂惚恍(시위홀황), 이를 일컬어 황홀(恍惚, 어렴풋하고 어슴푸레하여 알기 어려움)이라 한다.
迎之不見其首(영지불견기수) 隨之不見其後(수지불견기후), 앞에서 맞이하여도 그 머리가 보이지 않고, 뒤에서 따라가도 그 꼬리가 보이지 않는다.
執古之道(집고지도) 以御今之有(이어금지유), 옛날의 도를 가지고 오늘의 있음을 제어한다(지금의 현실을 다스린다).
能知古始(능지고시) 是謂道紀(시위도기), 능히 옛 시작을 파악하니 이를 일컬어 도의 실체로 들어가는 벼리(실마리)라 한다.
이 장에서 노자는 시각기관, 청각기관, 촉각기관과 같은 사람의 감각기관으로는 도를 인지할 수 없다고 말한다. 도(道)란 아득하고(夷), 희미하고(希), 미세(微)하다. 그래서 볼 수도, 들을 수도, 잡을 수도 없다. 도란 이 세 가지 요소가 하나로 혼합되어 있는 것이다. 모양과 형체가 있긴 있지만 인간의 언어로는 그것을 표현할 방법이 없다. 그래서 다만 황홀하다는 말로 표현할 수 있을 뿐이다. 1장에서는 미묘함이라는 단어를 사용했는데 여기서는 황홀이라는 단어를 썼다. 의미와 맥락은 같다. 도란 끝없이 이어져 결국 무(無)의 상태로 수렴하기 때문에 인간의 감각기관으로는 도저히 인지할 수 없다. 다만 직관적으로 깨달을 수 있을 뿐이다.
우리가 노자를 읽는 것은 인문적 지식을 통해, 우리의 일상이 인문적 삶이 되게 하자는 거다. 도(삶의 길)의 근본자리는 결국 없음(無)의 세계이다. 그러나 도는 그 자체 형상이 없고, 모양도 없지만 도는 모든 형상, 모든 모양을 가능하게 하는 형상 자체, 모양 자체이다. 이렇게 말로만 엮어 나가도 어질어질하고 아물아물한데 도 그 자체는 오죽하겠는가? 그야말로 앞도 뒤도 모르는 두루뭉수리 같은 존재 아닌 존재로서, 없으면서도 있고, 있으면서도 없는 무엇이다. 그러나 이렇게 아리송하고 신비스런 도이지만 그 도를 가지고 그 원리에 입각해서 현상 세계의 사실을 대하라고 한다. 그러면 태고의 시원도 알 수 있게 될 것이라고 한다. 존재하는 모든 것, 유의 세계에 있는 모든 것을 통해 그것들의 근원이 되는 비존재, 무의 세계를 보라는 것이다. 이렇게 하는 것이 도의 본질로 들어가는 '실마리'가 된다는 것이다. 오강남의 주장이다. 어렵지만, 여러 번 읽어 보면, 도를 지켜 현재를 다스리라는 것이 핵심이라고 본다. 구도자(求道者)들을 위한 하나의 수행 기도문 같다. 원문과 함께, 정밀 독해는 블로그로 옮긴다.
기도문 이야기를 하니까, 요즈음 SNS에 떠다니는 개딸(개혁의 딸)들의 기도문이 생각난다. 여성들이 자각했으니, 절망의 시간은 끝났다고 본다. 나는 늘 우리나라 여성들이 대단하다고 생각했다. 메달이 중요한 것은 아니지만, 올림픽에서 메달을 획득하는 것은 대부분이 여성들이었다. 난 깨딸들을 믿는다. MZ 세대들의 시대가 될 것이다. 믿는다. 이게 도이다. 음양의 순환이다. 개딸들의 기도문은 다음과 같다. "정치인들은 국민을 두려워하게 하시고/기업인들은 사람을 존중하게 하시며/언론인들은 진실을 말하게 해 주시고/법조인들은 양심을 지키게 하소서!"
지금은 그리움의 덧문을 닫을 시간/류시화
세상을 잊기 위해 나는
산으로 가는데
물은 산 아래
세상으로 내려간다
버릴 것이 있다는 듯
버리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 있다는 듯
나만 홀로 산으로 가는데
채울 것이 있다는 듯
채워야 할 빈 자리가 있다는 듯
물은 자꾸만
산 아래 세상으로 흘러간다
지금은 그리움의 덧문을 닫을 시간
눈을 감고
내 안에 앉아
빈 자리에 그 반짝이는 물 출렁이는 걸
바라봐야 할 시간
<<도덕경>> 제14장의 원문이다.
視之不見(시지불견) 名曰夷(명왈이)
聽之不聞(청지불문) 名曰希(명왈희)
搏之不得(박지불득) 名曰微(명왈미)
此三者(차삼자) 不可致詰(불가치힐)
故混而爲一(고혼이위일)
其上不曒(기상불교) 其下不昧(기하불매)
繩繩不可名(승승불가명)
復歸於無物(복귀어무물)
是謂無狀之狀(시위무상지상) 無物之象(무물지상)
是謂惚恍(시위홀황)
迎之不見其首(영지불견기수) 隨之不見其後(수지불견기후)
執古之道(집고지도) 以御今之有(이어금지유)
能知古始(능지고시) 是謂道紀(시위도기)
우선 "視之不見(시지불견)", "聽之不聞(청지불문)"에서 '시'와 '견' 그리고 '청'과 '문' 모두 "보고 듣는다"이지만, 노자는 이것을 혼용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깊이 숨어 있는 의미가 다르기 때문이다. '시'와 '청'은 보거나 들으려는 위지와 욕망이 개입된 지각 활동이라면, '견'과 '문'은 의지와 욕망의 개입 없이 어떤 것이 스스로 다가와 들리거나 스스로 다가와 보여지는 현상이다. 그냥 '시'와 '청'은 능동적으로 행위로 보고, '견'과 '문'은 수동적인 행동으로 보면 나에게는 더 쉽다. 실제로 일상 생활에서도 우리는 '견문각(見聞覺)' 교육이라는 말 대신 '시청각(視聽覺)' 교육이라고 한다. 그리고 여기저기 돌아다니면서 많은 거을 알게 된 사람을 우리는 '견문(見聞)'이 넓다고 하지, '시청(視聽)'이 넓은 삶이라고 하지 않는다. 최진석 교수의 명쾌한 해설이다. 그러면서 최 교수 설명을 다음과 같은 설명을 덧붙인다. 나에게 노자를 이해하는 좋은 길잡이가 되었다.
노자 철학에서 인식이나 통치 및 행위의 모델은 자연의 존재 형식이자 운행 방식이다. 자연이 가진 가장 특정적인 모습 가운데 하나는 어떠한 특정한 목적이나 방향이 없다는 것이다. 다르게 말하면 자연은 특정한 의지나 욕망을 따라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는 뜻이다. 실제로 노자는 제79장에서 "천도무친(天道無親)"이라는 말을 한다. '하늘의 도는 편애하는 일이 없다'는 말이다. 이것은 일반적으로 우리가 가지고 있는 목적론적인 자연관이나 목적론적인 신관(神觀)과는 거리가 멀다. 노자에게 있는 철학사적 의의도 바로 의지를 가지고 있는 하늘의 뜻(천명)이 지배하던 당시의 천명관(천명관)을 극복하고 자연의 존재 형식을 기반으로 하는 인문학을 건립하였다는 데 있는데, 바로 여기에 그 특징이 담겨 있다. 그런 차원에서 자연의 존재형식을 압축해서 하나의 기호로 번부 화한 것이 '도(道)'라고 보니 쉽게 와 닿는다. 따라서 이 도는 분석과 구분의 칼로 무장한 의지나 욕망이 개입된 지각 활동의 접근을 거부하게 되는 거다. 그러니 당연하게 '시', '청', '박'의 지각 활동 앞에서 '도'는 자신의 진상을 드러내 줄 수가 없다. 그것이 본문에서 "블견", "불문", "불득"이 나오고, 그것들이 "이". "희, "미"하다는 거다.
"이(夷)", "희(希)", "미(微)", 이 세 글자의 사용이 아름답다. 여기서 우리가 알고 있는 '동이(東夷)라'는 말은 단순히 오랑캐라는 의미가 아니다. 보아도 보이지 않는 저 먼 동쪽에 있는 위대한 도의 문명을 건설한 사람들이라는 뜻으로 보아야 한다. 그리고 우리 말에 '희미하다'는 말이 있다. '분명하지 못하고, 어렴풋하다'는 말인데, "희"와 "미"에서 딴 것 같다.
"此三者(차삼자) 不可致詰(불가치힐)"에서 세 가지는 "이", "희" 그리고 "미"를 가리킨다. "힐(詰)"은 어떤 생각을 가지고 따져 묻는 일이다. 앞의 이 세가지는 분별적으로 따져 물을 수 있는 대상으로서 있는 것이 아니라는 뜻이다. 왜냐하면 도는 아직 나누어지지 않은 상태로 있는 하나이기 때문이다. "불가치힐"은 감각적 인식으로 따져 물을 수 없다는 뜻이다. 우리가 잘 쓰는 불가사의(不可思議)와 비슷한 의미이다.
최진석 교수는 "故混而爲一(고혼이위일)"에서 나오는 "혼"은 장자가 말하는 혼돈(혼돈, 카오스)의 개념과 다르게 보아야 한다고 말했다. 여기서 '혼"은 <<도덕경>> 제1장과 제2장에서 보이는 것처럼, 두 계열이 동거한다거나 꼬여 있는 상태를 가리키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고 했다. 장자의 "혼돈"은 우주 발생론과 깊은 연관을 갖는 개념이라 했다. 장자에게서 혼돈을 가능하게 하는 개념은 바로 "기(氣)"이다. 모든 것이 분별되어 질서를 부여 받기 이전의 상태를 혼돈으로 규정하고, 거기서부터 만물이 발생되어 나오고, 그런 다음 어떤 요인에 의해 질서를 가지게 된다는 식의 우주 발생론 모델이다.
<<장자>> "내편" 마지막 장의 "혼돈칠규(混沌七竅)"가 기억난다. "남쪽 바다의 임금을 '숙"이라고 하고, 북쪽 바다의 임금을 '홀'이라 하였고, 그 중앙의 임금을 '혼돈'이라 하였다. 숙과 홀이 때때로 혼돈의 땅에서 만났는데, 혼돈은 그 때마다 그들을 극진히 대접했다. 숙과 홀은 혼돈의 은덕을 갚을 길이 없을까 의논했다. "사람에게 모두 일곱 구멍이 있어, 보고, 듣고, 먹고, 숨쉬는데, 오직 혼돈에게만 이런 구멍이 없으니 구멍을 뚫어 줍시다." 했다. 하루에 한 구멍 씩 뚫어 주었는데, 이레가 되어 혼돈은 죽고 말았다." 이런 이야기이다.
다시 노자에게로 되돌아 온다. 노자에게서 '일(一)'은 '혼'과 같이 이해하여야 한다. 노자의 '일'은 순수한 단일성이 아니라, 반대되는 두 가닥이 꼬여서 '하나'의 새끼줄을 만든 것 같은 상태에서의 '일'이다. 따라서 노자에게서 '일'은 순종이 아니라, 이미 잡종이다. 두 개의 대립면이 이루는 하나인 것이다. 그래야 다음 문장, "其上不曒(기상불교) 其下不昧(기하불매)"가 이해된다. "이 일"이라는 것은 그 위가 밝지가 않고, 그 아래는 어둡지가 않다는 거다. <<도덕경>>에서 '일'은 '도'의 다른 이름이라 말할 수 있다. 노자가 보기에 '도'는 위로 드러나더라도 빛을 발하거나 혹은 자신의 실루엣을 분명하게 가지고 있는 어떤 것이 아니다. 하지만 아래로 가라앉아 있더라도 아무런 역할을 없이 막막하게 있는 것도 아니라는 말이다. 그러니까 도는 자신의 본질을 가지고 배타적 존재성 속에 구체적으로 있는 어떤 것이 아니기 때문에 있다고 할 수도 없지만, 그것이 세계의 가장 근저에서 세계의 존재 형식으로 가능 한다는 점에서 없다고 할 수도 없다. 세계의 존재 형식으로 이 세계의 모든 것에 관여한다는 점에서 그것은 또 분명히 있는 것이다. 이어지는 이야기는 내일로 미룬다.
나의 블로그 https://pakhanpyo.tistory.com 이나 https://pakhanpyo.blogspot.com 이다. 최근에는 우리마을대학 홈페이지 블로그에도 글을 올린다. https://www.wmcss.net 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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