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4. 인문 운동가의 인문 일기
(2022년 3월 27일)

오늘은 노자 <<도덕경>> 제13장을 읽는다. 제13장은 크게 두 개의 테마가 함께 있다. 하나는 "총욕약경(寵辱若驚)"이고, 다른 하나는 "대환약신(大患若身)"이다. 왕필은 '총욕'과 '대환'을 같은 류의 문제로 보아 양 테마가 결국 같은 의미를 호환하고 있다고 보았다. "총욕약경"의 경지를 통하여 자기 신체를 아끼고 귀하게 보전할 수 있는 자가 곧 성인(聖人), 즉 자유인이라는 거다. 그리고 그러한 성인야말로 우리는 천하를 그에게 맡길 수 있고 운영케 할 수 있다는 거다. 그 성인은 자기 몸을 장악한 자이고, 자기 몸을 장악한 자는 "총욕약경"의 덕성을 갖추고 있는 뜻이 된다.
우리는 종종 자신이 보고 싶은 것만을 보기 때문에 인생을 전체적으로 보지 못하고 일부분만을 보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지혜로운 자는 이러한 상대적 가치로부터 초연하기 때문에 정신이 자유롭고 자연히 넓은 시야를 갖게 된다. 따라서 노자가 이 경구들을 통해 일러주는 교훈은 화복에 대한 이분법적 분별심을 버리고 화복의 양면을 전체적으로 바라볼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 원문과 번역부터 공유한다.
(1) 寵辱若驚(총욕약경) 貴大患若身(귀대환약신): 총애를 받으나 수모를 당하거나 다같이 놀란 것 같이 하라. 큰 걱정을 귀하게 여기기를 내 몸을 귀하게 여기듯 하라.
(2) 何謂寵辱若驚(하위총욕약경)? 寵爲下(총위하) 得之若驚(득지약경) 失之若驚(실지약경) 是謂寵辱若驚(시위총욕약경) : 총애를 받아도 놀란 듯이 하고 욕을 당해도 놀란 듯이 한다는 말은 무슨 뜻인가? 총애는 윗사람에게 받는 것이므로 내가 그 아래에 있다는 뜻이다. 총애는 항상 욕이 되게 마련이라는 거라고도 본다. 윗사람의 총애를 받아도 나로서는 놀라운 일이고, 윗사람의 총애를 잃어도 나로서는 놀라운 일이다. 이것을 일러 '총욕약경'이라고 한다.
(3) 何謂貴大患若身(하위귀대환약신) 吾所以有大患者(오소이유대환자) 爲吾有身(위오유신) 及吾無身(급오무신) 吾有何患(오유하환): 큰 환란을 내 몸처럼 귀하게 여긴다 함은 무엇을 두고 하는 말인가? 내가 큰 환란을 당하는 것은 내가 몸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나에게 몸이 없다면, 내게 무슨 환란이 있겠는가?
(4) 故貴以身爲天下(고귀이신위천하) 若可寄天下(약가기천하) 愛以身爲天下(애이신위천하) 若可託天下(약가탁천하): 그러므로 천하를 내 몸처럼 귀하게 여기는 사람에게는 가히 천하를 맡길 수 있고 천하를 내 몸처럼 사랑하는 사람이야말로 천하를 부탁할 수 있는 것이다.
사람이 살아가면서 받게 되는 총애(寵)와 욕(辱)이라는 상반된 두 가지 사회적 평판을 비유로 들어 도의 원리를 설명하고 있다. 세상을 살다 보면 총애와 욕은 번갈아 가면서 나타난다. 총애만 받고 사는 사람도 없고, 수모만 당하면서 사는 사람도 없다. 나의 신체(身)를 중심축으로 총애와 수모는 회전목마처럼 빙글빙글 돌면서 교대로 나타난다. 신체, 즉 몸이 도가 드러나는 플랫폼이다. 그 플랫폼만 굳건하게 잘 지키면 된다. 총애와 욕은 왔다가 사라지는 바람과 같은 것이다. 그러니 일희일비(一喜一悲)할 필요가 없다. 총애를 받을 때나 욕을 당할 때나 변함없이 중심을 지키는 것이 중요하다. 이렇게 플랫폼을 잘 지키는 사람에게는 천하를 맡길 수도 있다. 수신제가치국평천하(修身齊家治國平天下)라고 했듯이 신체를 잘 보존할 수 있는 사람은 천하를 잘 다스릴 수 있기 때문이다.
한 문장 씩 정밀 독해를 한다. (1) 寵辱若驚(총욕약경) 貴大患若身(귀대환약신)은 '총애를 받거나 치욕을 당하거나 간에 그것들 모두에 깜짝 놀라는 태도로 대할 것이며, 큰 환란을 중시하기를 마치 자신의 몸을 중시하는 것만큼 하라는 뜻으로 읽는다. 총애나 욕은 모두 상대적이다. 노자가 보기에는 총애를 받는 이도 욕됨을 당하는 일도 모두 일정한 가치 안에서 생기는 일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총애에 대해서도 혹은 욕됨에 대해서도 항상 경계하는 태도를 취하라는 것이다. 이는 나와 관련된 총애나 욕됨에 얽매이지 않고 올바르게 자신의 삶을 살아나가야 한다는 뜻이다. 노자는 이 경구를 통해 항상 화복을 경계하여 자신을 살피는 경(敬)의 자세로 살아야 함을 강조하고 있다.
도올이 강의에서 들려주는 다음의 일화가 "총경약경"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된다. <<한비자>>의 '세난'편에 나오는 고사라 한다. 춘추시대 위나라 영공의 총신으로 미자하라는 능력 있는 인물이 있었다. 그가 젊고 유능할 때 미자하의 모친이 병이 들었다. 미자하는 왕의 수레를 몰래 빌려 타고 모친에게 갔다. 군주의 수레를 몰래 타는 자는 '월(刖)"일는 형벌에 처해진다고 했다. 그 형벌은 두 발목을 절단하는 거다. 군주는 이 사실을 보고받고도, "효자다! 어머니의 병고 때문에 발리 잘리는 벌까지 잊었구나"라 말했다고 한다. 그 후 어느 날 군주를 모시고 과수원에 놀러 갔다. 복숭아를 먹다가 너무 맛있어 다 먹지 않고 그 반쪽을 군주에게 바쳤다. 군주는 말했다. "나를 사랑하는구나! 그 좋은 맛을 잊고서 나를 먹여주는 구나!" 그 뒤 미자하의 용모가 쇠퇴하고 총애가 엷어 지자 군주는 미자하를 이렇게 책망했다 한다. "이 녀석은 거짓을 꾸며 내 수레를 탄 일이 있고, 또 전에 먹다 남은 복숭아를 나에게 먹게 한 일이 있었다."
이런 식으로 군주의 총애와 배신, 토사구팽(兎死狗烹)과 같은 이야기로 읽을 수 있지만, 동시에 한 인간의 삶의 시간에 총애와 수모는 항상 혼재(混在)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도 있다. 그러니 수모를 당한다 하더라도 그다지 노여워 하거나 슬퍼하지 말고, 칭찬을 받는다 하더라도 지나치게 신나 하거나 우쭐거리지 말라는 것이다.
<<법구경>>에서도 "육중한 바위가 바람에 움직이지 않듯 지혜로운 사람은 남의 칭찬이나 비난에 흔들리지 않는다" 했다. 공자도 "남이 나를 알아주지 않는 것을 염려하지 말고, 내가 남을 알아주지 않는 일이 있나 염려하라"(<<논어>> 1:16) 했다. 이어지는 <<도덕경>> 제13장 읽기는 내일로 이어진다.
지난 주에 너무 긴장을 하고, 무리를 했는지 몸이 좋지 않다. 원래는 동해파랑 걷기를 가는 날인데, 취소했다. 봄인데, 빨리 회복되었으면 한다. 어제에 이어 오늘도 황인숙 시인의 시를 공유한다.
봄날
‘전화 받지 말 것’
이라고 쓴 딱지를 전화기에 붙여놓고
나는 부재중이었다.
나, 세상으로부터 멀리
떠나갔다 돌아왔을 때
오랜 잠에도 식지 않고 베개의 부드러움에 묻힌
턱뼈로만 존재했다.
어떤 소리도 분간되지 않고
그저 소리로만 공기를 끄적이고
눈을 떴는지 감았는지
마음은 풀리고 적막했다
적막하게 평화로웠다
나, 아득히 세상과 멀리.
닝닝닝 전화벨이 울렸다.
닝닝닝 전화벨 끊이지 않고
닝닝닝 다 됐니?
넘실거렸다.
나는 꽉 눈을 감았다.
닝닝닝 꽃이 피고 닝닝닝 바람 불고
닝닝닝 닝닝닝 누군가
내 다섯 모가지를 친친 감았다.
아주 달아날 수 있을 것 같았다.
"총욕약경"을 다른 식으로 읽어 보자. 총애를 받아도 그 총애가 네 것이 아니다. 너에게 있는 어떤 점이 총애를 해주는 사람의 그것과 같았기 때문이다. 그 점이 그저 총애를 해주는 사람의 맘에 들었기 때문일 뿐이다. 그것이 달라지면, 총애가 비난으로 바로 바뀐다. 누가 너를 비난하더라도 크게 흔들리지 마라. 네가 받은 비난이 사실은 네 것이 아니다. 잘못되었 다기보다도 너에게 있는 어떤 점이 비난하는 사람의 그것과 맞지 않았기 때문이다. 총애이건 비난이건 사실은 다 네 것이 아니다. 총애하는 사람과 비난하는 사람 자신의 감정 표현일 뿐이다. 거기에 좌우되지 않아야 자신을 지킬 수 있다. 평판에 쉽게 좌우되는 한 자기 자신은 없다. 좀 비틀면, 다른 사람을 총애하거나 비난하는 일보다도 먼저 자신을 살피는 일이 더 중요하다는 뜻도 된다.
어떤 사람을 칭찬하는 일 대부분은 자신의 맘에 든다는 것 이상이기 힘들다. 어떤 사람을 비난하는 일 대부분은 자신의 맘에 들지 않는다는 것 이상이기 힘들다. 이렇게 되면, 자신은 없고 자기에게 박힌 특정한 가치만 있는 꼴이다. 깊이 생각하지 않고도 확신에 차서 즉각적으로 아주 강하게 상대를 칭찬하고 비난하는 일을 하게 하는 것 세 가지가 있다. 종교적 믿음, 정치적 신념, 도덕적 확신이다. 최진석 교수의 글에서 만난 것이다. 그 사람과 어떤 수준의 교류를 했고, 어떤 깊이의 대화를 했더라도, 갑자기 맘에 들지 않고 서운한 마음이 들면 자신이 그 사람을 좋아한 것이 아니라 바로 내 안에 박힌 정치적이고 도덕적이고 종교적인 믿음들에 빠져 있음을 알아차려야 한다.
때때로 사람들이 보내는 비판, 질투 혹은 도발에 대해 침묵을 지키는 사람들은 말주변이 없거나 용감하지 못해서가 아니라고 나는 본다. 단지 무지한 사람이 말할 때, 똑똑한 사람은 웃는다. 하지만 다른 사람의 비판이나 경멸을 받을 때 침착함을 유지하기란 만만하지 않다. 그래도 무지한 사람들이 질투하고 비난할 때, 현명한 사람들은 무시하거나 웃어 넘긴다. 왜냐하면 결국 무지한 사람들은 본인의 무지함을 무시하고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우리가 비난을 받아들이기 어려운 이유 중 하나는 사람들이 인정 받고자 하는 욕구가 있기 때문이다. 비난은 자존심으로 지탱하는, 미묘하고 개인적인 균형을 무너뜨린다. 하지만 비판이 깊은 무지에 근거한다면, 결코 자존심 상해할 필요가 없다. 아무리 설명해도 듣기를 거부하고, 설득 당하기를 거부한다면 조용히 그냥 웃고, 내버려두는 것이 좋다. 무지함은 편견에서 온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그 편견은 특히 세가지이다. 종교적 믿음, 정치적 신념, 도덕적 확신이다.
제13장의 다음 문장은 이 거다. "何謂寵辱若驚(하위총욕약경)? 寵爲下(총위하) 得之若驚(득지약경) 失之若驚(실지약경) 是謂寵辱若驚(시위총욕약경)"이다. 그 뜻은 '총애를 받아도 놀란 듯이 하고 욕을 당해도 놀란 듯이 한다는 말은 무슨 뜻인가? 총애는 윗사람에게 받는 것이므로 내가 그 아래에 있다는 뜻이다. 총애는 항상 욕이 되게 마련이라는 거다. 윗사람의 총애를 받아도 나로서는 놀라운 일이고, 윗사람의 총애를 잃어도 나로서는 놀라운 일이다. 이것을 일러 '총욕약경'이라고 한다.'
이와 비슷한 내용을 담고 있는 성어로 ‘새옹지마(塞翁之馬)’라는 고사가 있다. 이 고사는 세상일의 좋고 나쁨을 예측할 수 없으므로 눈앞에 벌어지는 결과에 너무 연연하지 말아야 한다는 의미다. 곧, 자신에게 닥친 화나 시련에 굴하지 않고 진실하게 자신의 삶에 최선을 다해 나가야 한다는 교훈을 담고 있다. 이 고사는 ‘총욕약경(寵辱若驚)’이 시사하는 교훈과 유사한 메시지를 담고 있기 때문에 이 경구를 배경으로 생겨난 이야기일 수도 있다.
일반적으로 총애나 귀함을 소중히 여기지 않는 사람은 드물다. 심지어 총애나 명예를 자신의 목숨보다 소중하게 생각하는 사람도 있다. 하지만 진정한 자아를 추구하는 삶은 탐욕으로부터 자신을 지키는 것이다. 이를 통해 노자는 순간에 닥친 행복으로 어찌할 줄 모르는 어리석음을 피할 수 있으며 불행이 닥쳐도 그 안에 반전의 요소가 무엇인지 살펴야 함을 말하고 있다.
총위하(寵爲下)는 다양하게 해석된다. 문자 그대로 하면 총애는 윗사람에게 받는 것이므로 내가 그 아래에 있다는 뜻과 총과 욕 중에서 오히려 진짜 나쁜 것은 욕이 아니라 총이라는 뜻으로 본다. 그러나 도올은 "총애는 항상 욕이 되기 마련이다"라고 해석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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