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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운동가의 사진 하나, 시 하나

"그러므로 저것을 버리고 이것을 취한다 (故去彼取此(고거피취차)."

1943. 인문 운동가의 인문 일기

(2022년 3월 26일)

 

나이를 먹을 수록 우리는 책을 읽어야 한다. 왜냐하면 새로운 지식을 얻어야 늙지 않기 때문이다. 계속 새로운 인간으로 성숙되기 때문이다. 물 주기 싫어서 물을 가득 채운 그릇에 콩나물을 키우면 썩듯이, 독서를 통해 새로운 물을 자신에게 공급하지 않으면, 인간도 물에 고여 그대로 썩는다. 코로나-19의 변종인 오미크론이 엄청나게 극성 부리면서, 사회는 거의 단절되어 있지만, 어른 들은 끼리끼리 모여 하고 싶은 것들을 다 한다. 지루하지 않은 삶을 살려면, 활동과 관계가 일상 속에서 계속 이루어지면 자신의 삶의 영토가 확장되게 하는 거다. 모여서 별 쓸모 없는 이야기를 나는 활동은 내가 여기서 말하는 활동의 범주에 들어가지 않는다. 그런 만남은 관계가 이루어지지 않는 거다. 활동과 관계를 통해 내 삶의 차이가 생성되어야 한다. 그런 생성의 기쁨을 주는 것이 나에게는 매주 금요일 오전에 함께 읽는 노자 <<도덕경>> 읽기이다. 어제는 원정 경기를 했다 서대산이 정면으로 보이는 <서대산 갤러리>에 가서 책을 읽고, 점심까지 잘 대접을 받고 왔다.

오늘은 어제 공유하다 멈춘, 제 12장의 마지막 문장, "그러므로 저것을 버리고 이것을 취한다 (故去彼取此(고거피취차)"를 정밀 독해한다. 이 문장 직전의 것, "성인은 배가 되지 눈이 되지 않는다. 또는 성인은 배를 위할 망정 눈을 위하지 않는다"는 "是以聖人爲腹(시이성인위복) 不爲目(불위목)"을 우리는 어제 길게 이야기를 했었다. 배는 나에게 있는 것을 느끼지만, 눈은 밖을 향해 뚫려 있으면ㅅ 내가 아닌 저 멀리 있는 것을 본다. 배는 바로 내 몸 안에 있는 '이것'(此, 차)이고, 눈은 항상 밖에 있는 '저것'(彼, 피)을 행해 열려 잇다. 어떤 가치 체계 혹은 이상 등은 모두 이 세계를 벗어나 저 멀리 있는 것들이다. '저것'이란 모든 관념적 허구이며, 향이상학적 폭력이며, 감작적 허환(虛還)이다. '이것'이란 나의 일상적 현실이며, 나의 생명 중추가 느끼는 실재이며, 이 세계의 번뇌이며 보리이다.

노자는 저 멀리 있는 어떤 이상이나 체계를 상정하지 말자고 한다. 그 대신 우리가 가지고 있는 몸.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자연 세계의 운행 원리를 모델로 하여 소박하게 살자고 주장하는 것이다. "거피취차(去彼取此)"는 말 그대로 하면, "저것을 버리고, 이것을 취하라"는 뜻이다. 저 멀리 걸려 있으면서 우리를 지배하려 하는 이념들과 결별하고, 바로 여기 있는 구체적인 개별자들의 자발적 생명력, 자신의 욕망에 주목하라는 것이다. 지금까지와 다른 삶, 그것은 어떤 거대한 기회가 찾아올 때 시작되는 것이 아니다. 바로 이 순간, 내 삶을 바꿔야겠다고 결심한 그 순간부터 기적은 시작된다. 경계해야 할 것은 우리들의 탐욕이다. 그 탐욕은 늘 저 먼데를 보고 있어서 바로 눈 앞에 있는 행복을 못보게 한다. 지금 여기서 행복을 찾는 정신이 '거피취차'일 것이다. 문제는 우리가 너무 획일적인 욕망 속에 있다는 것이다. 돈, 지위, 학벌, 권력, 이런 것들말고도 더 다양한 가치에 관심을 기울일 필요가 있다. 문제는 다양하게 욕망하는 방법을 배워야 한다는 것이다. 

배철현 교수는 "사람들이 항상 ‘저기'를 바라보고, '여기'를 직시하지 못한다"고 했다. 사람들은 누구를 만나, 눈을 보고 대화하지 않고 상대방이 아닌 허상을 떠올리고 말한다. 자신의 편견을 일방적으로 토로하는데 안달하며, 자신을 돋보이게 만들기 위해 자신의 지식이 아닌, 다른 사람의 의견을 개진한다. 흔히 사람들의 대화와 토론을 보면, 자화자찬의 전시장이며, 아니면 상대방을 창피주기 위한 격투경기장이다. 그들의 머리는 항상 자신이 가본 적도 없고 경험한 적도 없는 허상에 사로잡힌 장소인 ‘거기’에 홀려있다. ‘거기’를 위해 ‘여기’를 어리석게 희생시킨다. 내 눈앞에 있는 사람이, 동물이, 사물이 ‘신적’이란 사실을 망각한다. 신적인 존재는 항상 ‘여기’에 온전히 몰입한다. 내가 보는 모든 식물과 동물은 항상 자신에게 몰입되어 있어 숭고하고 아름답다. 그래서 유일하고 독특하다. 인간만이 유일하게 자신에게 몰입하지 못하고, 자신이 아닌 ‘저것’을 흉내 내고 부러워한다. 

우리를 온전한 '우리 자신'으로 인정해 주는 것은 둘이다. 하나는 ‘지금’이라는 시간이고 다른 하나는 ‘여기’라는 장소다. ‘지금’과 ‘여기’가 없다면, 우리는 우리로 존재할 수 없다. 이 둘은 만물을 현존하게 만드는 존재의 집이다. 과거를 삭제하고 미래를 앞당겨 이 순간을 종말론적으로 전환하는 것이 ‘지금’이라면, ‘여기’는 ‘나’라는 존재를 새롭게 인식하게 만들어 줄 뿐만 아니라, ‘나’를 생경한 나로 전환시켜주고 더 나은 나로 수련시키는 혁명의 장소다. 오늘 사진처럼, 봄은 멀리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내 발 밑에 와 있었다. 우리는 지금-여기'를 보지 않고, 먼 곳에서 봄을 찾는다. 날씨가 흐리더니 간밤에는 강풍을 동반한 여름 비 같은 봄비가 밤새도록 내렸다. 이 비 그치면, 확연하게 봄이 다가 올 것이다.


봄/황인숙

온종일 비는 쟁여논 말씀을 풀고
나무들의 귀는 물이 오른다
나무들은 전신이 귀가 되어
채 발음되지 않은
자음의 잔뿌리도 놓치지 않는다
발가락 사이에서 졸졸거리며 작은 개울은
이파리 끝에서 떨어질 이응을 기다리고
각질들은 세례수를 부풀어
기쁘게 흘러 넘친다
그리고 나무로부터 한 발 물러나
고막이 터질 듯한 고요함 속에서
작은 거품들이 눈을 트는 것을 본다
 
첫 뻐꾸기 젖은 몸을 털고
떨리는 목소리를 가다듬는다


노자는 '자연'을 보고, 그 자연이 "유무상생(有無相生)"의 형식으로 되어 잇다고 본다. 그리고 "유무상생"의 향식으로 되어 있는 자연을 대상으로 놓고, "거피취차(去彼取此)"의 방식으로 자신의 철학을 세웠다. 공자는 이와 다르다. 공자는 인간을 그 대상으로 하고 인간의 본질을 인(仁)으로 파악하였다. 공자에게서 본질로서의 “인”은 잘 보존되고 키워져 할 대상이다. “인”이 확장된 최종적인 단계를 그는 “예”(禮)라고 말한다. 근대 주의에서 일반적으로 등장하는 보편적인 이념이다.  그래서 그는 “예에 맞지 않으면 보지도 말고, 예에 맞지 않으면 듣지도 말고, 예에 맞지 않으면 말하지도 말고, 예에 맞지 않으면 움직이지도 말라”고 말할 수 있었다. 이런 의미에서 공자의 철학을 한마디로 개괄하여 “극기복례”(克己復禮)라고 한 주자의 말은 매우 정확 해진다. 여기서 “기”(己)는 개별적이고 경험적이며 구체적인 활동을 하는 일상적인 자아다. “예”(禮)는 보편적이며 집단적이고 이념적인 기준이자 체계이다. 공자 철학은, 노자의 "거피추차"를 뒤집어 놓은 "거차취피(거차취피)라고 말할 수 있다. 공자의 철학에서는 일상을 영위하는 경험적이고 개별적인 자아는 부단한 학습의 과정을 거쳐 보편적인 이념의 세계 속으로 편입되어야 성숙이 완료된다. 여기서는 '나'보다는 '우리'가 주도권을 갖는다. 

노자는 이와 다르다. 보편적인 이념이라는 것은 비록 그것이 '선'으로 채워져 있다 하더라도 '이상'(理想)의 지위를 차지하는 한 '기준'으로 행사된다. 기준으로 작용하면 구분하고 배제하고 억압하는 기능을 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구분과 배제 그리고 억압의 기능은 폭력을 잉태하지 않을 수 없다. 그래서 기준으로 행사 될 수 있는 보편적인 이념의 단계를 최대한 약화 시켜야 한다고 본다. 이것을 그는 “거피취차”(去彼取此)라고 표현한다. 즉 “예”처럼 저 멀리 걸려 있는 이념을 버리고, 바로 지금 여기 있는 구체적 '나'(己)의 일상을 중시하라는 말이다. “극기복례”와는 정반대이다. 이렇게 되면 주도권이 '우리'보다는 '나'에게 있게 된다. 보편적 이념의 지배력에 의존하기 보다는 개별적 주체들의 자율성에 의존하자는 것이다.

그러나 공자든, 노자든 궁극지점에서 서로 만난다. 공자의 유가(儒家)에서 강조하는 학(學, 배움)은 모방이다. 전통으로 검증된 지식 체계를 모방하고 반복적으로 실천하면서 계속 쌓아 나가는 것이다. 쌓아 가다가 그 지식 체계의 높이나 넓이가 우주의 영역에까지 닿을 수 있다고 믿고, 또 그러기를 지향한다. 
공자의 "극기복례(克己復禮)" 주장처럼, 어떤 기준이 있어 우리를 옥죄인다고 봤다. 그러나 이황의 <성학십도>를 꼼꼼하게 읽다 보니, 유학(儒學)은 감화(感化)의 철학이었다. 말로 하는 감화가 아니라, 행동으로 보여주는 것이었다. 내가 '도(道)'를 지키면, 그 도는 자연스럽게 주변으로 확산된다는 말이다. 오늘 이 점에 대해 '자기 구원'의 지도를 더 그려본다.

<성학십도> 제2도 <서명>의 하도(下圖) 두 번째 문장이다. 
違曰悖德, 害仁曰賊. 濟惡者不才, 其踐形惟肖者也. (위왈패덕, 해인왈적. 제악자부재, 기천형유초자야) 
어길 위, 어그러질 패, 헤칠 해, 도둑 적, 건널 제, 재주 재, 밟을 천, 닮을 초

이 소명의 위배(違)를 '패덕(悖德)'이라 부르고(曰), 인(仁, 사랑)을 해치는(害) 것을 범죄(賊, 도둑질)라 일컫는다. 악(惡)을 저지르는(濟) 것(자)은 제 본성(才)의 일탈(不)이다. 오직(惟) 하늘을 닮음(肖) 자(者)만이(也), 그 타고난 것(形)을 온전히 실현(踐)한다.

천천히 읽어 보면 기본중의 기본인 삶의 지도이다. 이 문장은 자신만을 위한 이기적 욕심에 골몰하여 우주적 가족 공동체의 책임과 의무를 져버리지 말자는 말이다. 일종의 경고이다.
① 違曰悖德(위왈패덕): '우주적 가족 공동체의 소명', 의무와 책임을 저버리는 것을 패덕(悖德)이라 부른다는 말이다.
② 害仁曰賊(해인왈적): 공자와 맹자에게 인(仁)은 완전한 인간성을 의미한다.인은 우주적 가족 공동체의 사랑과 질서, 조화와 평화(仁義禮智)를 총체적으로 의미한다. 그리고 인은 동시에 인간이 자기 수련(수양 修養)을 통해 지향해야할 최고의 이상적 경지이다. 그러니 인간은 타인과 사회만이 아니라 우주적 공동체의 책임을 어깨에 지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 책임을 방기하고, 그 우주적 공동체의 책임을 훼손하는 자는 도적, 즉 도둑이다. 
③ 濟惡者不才(제악자부재): 악을 저지르는 것은 자신의 본성을 훼손하는 자이다. 여기서 재(才)는 타고난 자질을 의미한다.  인간은 우주 건곤(乾坤, 하늘과 땅)의 자식이다. 그러므로 우리 인간은 우주적 자질과 능력을 공유하고 있고, 그것의 발휘를 통해 우주의 창조적 과정에 동참하여야 하는 존재이다. 이를 자각하지 못하고, 내키는 대로 나쁜 짓만 일삼는 자들은 자기 생명의 의미와 가치를 훼손하는 것이다.
④ 其踐形惟肖者也(기천형유초자야): 여기서 '천형(踐形)'은 맹자의 용어란다. 말 그대로 하면, "형체(形)를 구현한다(踐)"는 것이지만, 각자 부단한 노력을 통해 자신을 낳아준 우주의 자랑스런 아들임을 입증하라는 뜻을 담고 있다. 그리고 초자(肖者)란 아버지를 닮은 자란 말이다. 그 아버지가 크게는 우주이고, 작게는 부모이다. 우리가 '불초(不肖)'라고 말하는데, 이는 '아버지를 닮지 못한 못난 자식'이란 의미이다

나의 블로그 https://pakhanpyo.tistory.com 이나 https://pakhanpyo.blogspot.com 이다. 최근에는 우리마을대학 홈페이지 블로그에도 글을 올린다. https://www.wmcss.net 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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