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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운동가의 사진 하나, 시 하나

자존감은 '자신의 가치에 대한 평가 혹은 믿음'이다.

1941. 인문 운동가의 인문 일기

(2022년 3월 24일)

 

오늘은 와인 강의가 아니라 순수한 인문학 강의를 한밭대 학생들 앞에서 한다. 부담스럽다. 가스라이팅 하지 않고, 한 인문학자의 삶을 통해 인문 정신을 일상의 삶에 어떻게 적용하며 인문 운동을 하는지 그냥 보여줄 생각이다. 학생들이 그걸 엿보고 자신의 일상을 되돌아 보는 이가 10명만 되면 성공이다. 그렇지만 인문적 지식을 소개하지 않을 수는 없다. 그 지식이 있어야 삶의 원칙과 문법을 튼실하게 짤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들의 삶의 안정되려면, 고전이나 경전을 읽으며 성인들이 살아가는 삶의 방식을 따라해 보아야 한다.

자신을 믿어야 한다. 그걸 프랑스어로는 'dignité(디니떼)'라 한다. 한국말로 하면 '자존감(自尊感)'이다. 영어로 디그니티(dignity)라 하는 데, 이 말의 뜻은  한 개인은 가치가 있고, 존중 받고 윤리적인 대우를 받을 권리가 있다는 말이다. 반면 우리 교육은 능력 우선주의이다. 김누리 교수는 이를 '능력주의(meritocracy)'라 했다. 이를 '존엄주의(dignocracy)' 교육으로 바꾸어야 한다. 존엄한 인간을 기르는 것을 교육의 목표로 삼아야 한다는 말이다. 수월성 교육에서 존엄성 교육으로 패러다임을 전환해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우선 독일처럼 경쟁 교육을 완화하거나 없애야 한다. 김누리 교수는 '경쟁교육은 야만'이라고 자주 말했다. 경쟁 없는 교육이 성숙한 시민을 만들 수 있다고 주장한다. 

자존감은 '자신의 가치에 대한 평가 혹은 믿음'이다. 자존감은 다른 이와 비교를 하기 시작하면 떨어진다. 일반적으로 자존감을 높이는 방법으로 지적되는 것들은 이다음과 같다. 
(1) 실력을 쌓는 것, 
(2) 작은 성공을 누적시키는 것, 
(3) 할 수 있는 것과 할 수 없는 것을 제대로 구분하는 것, 
(4) 자신이 하는 일에 의미를 부여하는 것, 
(5) 외부에서 긍정적 피드백을 요청하는 것 등 여러가지가 있다. 

그러나 이런 것보다 자신을 '위대한 존재'로 믿는 것이 더 중요하다. 그러니까 자신의 가치가 더 높은 수준에 있음을 믿는 것이다. 자신의 가치가 높음을 스스로 확고히 믿으면, '자기 효능감'이 생긴다. 자기 효능감은 특정 과제를 수행할 수 있는 자신의 능력에 대한 믿음이다. 능력이 아니라 믿음이라는 것에 방점을 찍는다. 케냐의 마라톤 선수들은 자신의 한계는 없으며, 오늘은 '나의 날'이 될 것이라는 확고한 믿음이 있었다고 한다. 낙관주의자들이다. 높은 자존감은 성숙한 방어기제를 형성하여 실패 속에서도 좌절하지 않으며 고통 속에서도 쓰러지지 않는 힘을 준다. 실패와 고통 속에서 높은 자존감으로 성숙한 방어기제를 통해 또 일어서고 또 일어서게 하는 힘이 자존감이다. 그러면 성공할 것이다. 여기서 말하는 성공이란 자신이 원하는 가치를 얻는 것이라고 본다.

자존감을 잃으면 삶이 추해 진다. 자존감의 반대가 열등감이다. 자존감의 다른 말이 자기를 존중하는 마음으로 품위를 지키는 일이다. 자존감이 높은 사람은 외부 영향을 받지 않는다. 늘 자기 중심이 바로 서 있으면 남이 어쩌든 다 남 사정일 뿐이다. 집중하는 대상이 자신 뿐만 아니라 불필요한 감정 소모 없이 자기 일에 몰입한다. 수련, 내면 훈련은 자존감을 높이는 일이다. 남의 불행과 고통을 보며 느끼는 기쁨을 독일어로 '샤덴프로이데'라고 한다. 사람은 악하고 선한 본성을 모두 가지고 있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선한 속성에 좀 더 초점을 맞추고, 악한 속성을 최대한 멀리하는 것이 행복해 지는 길이라 나는 믿는다. 그건 자존감에서 나온다. 나는 자존감이 흔들리면, 이 문장을 소환한다. '자존감'은 '나는 소중하다'하면서 자신을 존중 하는 마음이다. 반면 '자존심'은 '나는 잘났다'면서 자신을 지키는 마음이다. 자존감과 자존심은 좀 다르다.

이런 이야기를 오늘 할 생각이다. 봄 꽃들이 막 피려 한다. 어리어리하게 뿜어내는 연두 빛이 아름답다. 오늘 아침 사진 처럼, 이건 마술사 같은 요리사의 솜씨다. 한쪽에서는 팡팡거리며 팝콘도 터진다. 풍성한 자연의 식탁이 펼쳐지고, 우리는 그저 수저만 잡으면 된다. 연례행사로 이런 대접 받아왔으니 의례 그러려니 하지만, 이건 기적이 아닌가. 바라보는 풍경에, 코를 간지리는 향기에, 가슴 콩당 콩당 뛰어야 할 감사이며 경외가 아닌가? 이런 시를 공유한다.


봄/반칠환

저 요리사의 솜씨 좀 보게
누가 저걸 냉동 재룐줄 알겠나
푸릇푸릇한 저 싹도
울긋불긋한 저 꽃도
꽝꽝 언 냉장고에서 꺼낸 것이라네
아른아른 김조차 나지 않는가


가스라이팅은 심리적 조종을 통해 타인의 마음에 스스로에 대한 의심을 불러일으키고, 그 사람이 현실감과 판단력을 잃게 만들어 지배력을 행사하는 것을 의미한다. 영화 <가스등>에서는 아내의 재산을 노리고 결혼한 남편이 온갖 속임수와 거짓말로 멀쩡한 아내를 정신증 환자로 만든다. 가스라이팅이 나쁜 이유는 조종 당한 상대가 문제의 책임을 스스로에게 돌리도록 만든다는 것이다. 가장 심각한 점은 가스라이터에게 조종 당한 피해자가 “내가 잘못했나 보다, 나는 왜 이렇지…”라며 자신도 모르게 스스로를 부정하고 자신감을 잃는 것이다. 직장과 가정 등 회피하기 어려운 공간이나 관계 속에서 상습적인 가스라이터를 지속적으로 만난 피해자는 우울감에 빠지는 등 큰 피해를 겪을 우려가 크다. 가스라이팅은 분명 근절되어야 한다. 하지만 요즘 우리 사회의 나르시시즘적인 성향이 강해지면서 가스라이팅 사례는 갈수록 만연해지고 있다. 그렇지만 진심을 담은 악의 없는 조언이나 방법적으로 서툴더라도 새겨들을 만한 충고들까지 싸잡아 가스라이팅으로 호도해선 안 된다는 생각이다. 

인문 운동가는 가르칠 하거나 훈계하지 않는다. 다만 사람들이 인문적 지식을 습득하게 한다. 인문 정신을 깃들게 한다. 인문 정신은 생각의 틀을 만드는 거다. 그 틀로 다른 사람들과 세계와 관계하는 방식을 만들어 주는 거다. 열린 마음으로, 따뜻한 마음이 되게 하는 거다.

글한 인문적 지식으로 인문적 삶을 살도록 유도하는 이가 인문 운동가이다. 인문적 삶을 위해 우리 일상적 삶에 필요한 세 가지 키워드를 제안한다. 고미숙의 유튜브 강의를 듣고 정리한 거다.
(1) '활동을 한다'이다. 태양이 뜨면, 낮에 활동을 하는 거다. 몸을 움직이는 거다. 그 활동하는 곳이 직장일 수도 있고 자기 스스로 활동을 만들어내 어도 된다. 
(2) '누군가 또 무언가와 관계를 맺는 거다.' 다시 말하면 접속이 이루어지는 일이다. 삶은 활동과 접속이라고도 말할 수 있다. 
(3) 새로운 것이 생성되게 하는 거다. 특히 차이가 생성되는 기쁨을 누려야 한다. 이때 발생하는 진정한 차이는 어떤 것을 배우면서 만날 수 있다. 우리는 그 차이를 느낄 때 살아있음을 느낀다. 그건 사람들이 자주 신상품을 찾는 이유이기도 하다. 그러나 신상품은 욕망의 확장이 될 가능성이 크다. '욕망의 동일성'일 수 있다.

좋은 삶은 활동-관계-차이생성의 구조를 만들어야 한다는 거다. 우리는, 알면서도, 일상에서 활동이 아니라, 노동을 하고, 접속을 하지 못한다. 왜냐하면 돈을 벌어야 하기 때문이다. 화폐를 늘려야 하기 때문에 관계가 단절된다는 말이다. 다른 것들과 접속할 시간이 없다. 그러니까 생성이 이루어지지 않고, 감각의 차이만 만들어 낸다. 차이의 생성을 만들어 내는 것이 삶의 큰 즐거움이 된다. 반대로 감각만이 늘어나는 게 중독이다. 이를 피하고, 하루가 재미 있으려면, 다음과 같은 생활의 규칙을 만들어 보는 거다. 
(1) 일상이 리듬을 타야 한다. 리듬을 잃는 이유는 목적에 도달한 다음에 살겠다는 목적론이 문제이다. 목적론이 해체되어야 한다. 그리고 매일의 일상은 리듬을 타야 한다. 일상이 그 목적에 종속이 되면 안 된다. 그러다 보면, 시간의 무상함 앞에서 그냥 주저 앉게 된다. 매일 매일을 하는 과정으로 여겨야 한다. 내가 이루고자 하는 자유, 행복을 오늘의 조건 안에서 어떻게든 구현해 내는 거다. 아프면 아픈 대로, 아픈 상태에서도 할 수 있어야 한다. 그 상태에서 지유와 행복을 위한 액션을 취하는 거다. 그리고 시간에 리듬을 탄다. 이 기술은 노년에 더욱 필요하다. 메 순간을 나 스스로 과정으로써 즐길 수 있어야 하는 거다. 그러다 보면 죽음도 하나의 과정이 될 수 있다.
(2) 그리고 소박하고 단순한 삶을 산다. 그러는 가운데 인간, 자연 그리고 내가 늘 만나는 사물들과 우정을 나누어야 한다. 그래야 상품 소비에서 벗어날 수 있다. 작고 있는 물건을 깨끗하게 하고 변형시켜 나에게 맞는 물건을 고쳐 사용하면, 신상품에 눈길이 가지 않는다. 이를 프랑스에서 '브리콜라주'라 한다. 그러면 물건의 수를 줄일 수 있다. 이게 소박하고 단순하게 사는 거다.
(3) 자기 자신의 이야기를 만들고, 그 이야기를 해야 할 친구를 만난다. 그렇게 친구들을 만나 내 이야기를 하다 보면 우리는 웃는다. 그리고 웃어야 한다. 왜냐하면 웃음은 생명의 권리이기 때문이다. 활동으로써 웃음과 이야기를 연마하고, 내면에서는 어제 몰랐던 것에 대한 깨달음이 있어야 한다. 내적인 충실함과 외적인 활동이 리듬을 타야 한다. 고미숙은 이런 일상을 줄여서 이렇게 말한다. "명랑하고, 지혜로워라!"

나의 블로그 https://pakhanpyo.tistory.com 이나 https://pakhanpyo.blogspot.com 이다. 최근에는 우리마을대학 홈페이지 블로그에도 글을 올린다. https://www.wmcss.net 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