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8. 인문 운동가의 인문 일기
(2022년 3월 11일)

오늘 우리 사회가 맞고 있는 위기는 공부에 대한 잘못된 방향에서 나온 것이다. 공부란 무엇인가? 공자는 "옛날 학자는 자신을 위해 공부했고, 요즘 학자는 남에게 보이기 위한 공부를 한다(古之學者爲己, 今之學者爲人고지학자위기, 금지학자위인)"라 말했다. 우리 선비들이 생각했던 공부는 위인지학(爲人之學)과 위기지학(爲己之學)으로 나뉜다. 여기에서 인(人)은 타인을 가리키고, 기(己)는 자기 자신에 해당 한다.
'위인지학'은 다른 사람을 위한 공부이다. 타인에게 보여주고 인정받기 위한 공부이다. 반대로 위기지학은 자신을 위한 공부이다. 자신을 위한다는 것은 자기 욕망을 들여다보고 혼자 있을 때 삼가고 조심하는 공부이다. 이런 각도에서 보자면 '스펙'을 쌓는다는 것은 모두 다 '위인지학'이다. 스펙은 타인에게 보여주기 위한 공부 아닌가? '위기지학'은 자신을 충실히 쌓아가는 공부이고, '위인지학'은 남에게 보이고 과시하기 위한 공부이다. '위기지학'을 하는 사람은 어제보다 더 나은 오늘, 즉 자신의 발전과 성장을 기뻐한다. 당연히 그 한계는 없다. 하지만 '위인지학'을 하는 사람은 다른 사람과 수시로 비교하며 남보다 앞서기 위한 공부를 한다. 남보다 빠른 출세, 더 높은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 공부하는 것이기에 어느 순간 되면 공부를 멈춘다. 왜냐하면 애초에 공부의 진정한 의미를 모르고 올바른 뜻이 없었기 때문이다.
'위기지학' 하는 사람들은 실력을 쌓고 자신을 가다듬어 간다. 이런 사람들은 다른 하찮은 일에 신경 쓸 여유가 없다. 하지만 어느 순간이 되면 그동안 쌓아온 내공과 실력이 자연스럽게 겉으로 배어 나오게 된다. 마치 가득 찬 독에서 물이 넘치듯이, 드러내지 않고 자랑하지 않아도 실력이 드러나고 사람들이 알게 된다. '내공(內供)'은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드러나는 것이다. 순자의 멋진 표현을 다음과 같이 공유한다.
"군자의 학문은 귀로 들어 와 마음에 붙어서 온몸으로 퍼져 행동으로 나타난다. 소인의 학문은 귀로 들어 와 입으로 나온다. 입과 귀 사이는 겨우 네 치에 불과하니, 어찌 일곱 자나 되는 몸을 아름답게 할 수 있겠는가?" 눈으로 보고 귀로 들은 가르침을 마음 속 깊이 간직하는 것이 진정한 공부이다. 그리고 공부의 마지막은 일과 삶 속에서 실천하는 것이다. 따라서 삶이 계속되는 한 공부는 끝이 없다. "인간은 허공에 흩어지는 말이 아니라, 땅에 남기는 발자국으로 스스로를 증명한다"고 했다.
옛 선비들이 생각했던 공부도 위인지학(爲人之學)과 위기지학(爲己之學)으로 나뉘었다. 위에서 말했던 것처럼, 인(人)은 타인을 가리키고, 기(己)는 자기 자신에 해당한다. '위인지학'은 다른 사람을 위한 공부이다. 타인에게 보여주고 인정받기 위한 공부이다. 반대로 '위기지학'은 자신을 위한 공부이다. 자신을 위한다는 것은 자기 욕망을 들여다보고 혼자 있을 때 삼가고 조심하는 공부이다. 이 각도에서 보자면 '스펙'을 쌓는다는 것은 다 '위인지학'이다. 스펙은 타인에게 보여주기 위한 공부 아닌가?
우리 사회를 한 단계 업그레이드 시켰는데, 사회로 지탄 받고 있는 586세대는 '러시아혁명사'와 '사회학적 상상력'을 밤새워 읽었던 사회과학의 세대였는데, 지나고 보니까 위인지학만 열심히 한 셈이었다. 사회과학의 관심은 온통 사회구조적 문제에 있었지 자기 자신의 사욕과 이중성에 대한 성찰은 빠져 있었다. 사회를 분석하고 타인의 흠결을 송곳처럼 지적 질하는 데에는 능숙하지만 자기 오류를 인정하고 허물을 반성하는 공부는 하지 않았다. 모든 게 사회악 탓이었다. '위기지학'은 어려운 공부이다. 이번 대선에서 보여준 우리 사회의 모습을 보면, 위기지학은 커녕 위인지학도 제대로 되지 않았음이 드러난다. 그들을 보면 586을 탓할 때가 아니다. 문제는 소위 '고시' 공부만 했다. 진짜 공부를 하지 않은 자들이 우리 사회의 리더였음이 백일천하에 그대로 드러난 꼴이다.
산업혁명 이전의 공부는 '나로부터 나를 지키기 위한 공부'였다. 19세기 교육에서, 삶의 목적은 개인의 긍정적 잠재력을 개발하여 행복을 성취하고 공동체에 기여하는 것인데, 공부를 하지 않으면 자기 자신을 방치, 학대, 파괴하게 된다는 것이다. '위기지학'이었다. 그런데 산업화 이후 공교육이 인간의 보편적 권리이자 의무가 되면서부터 공부의 성격이 변했다. 이제 공부는 정신적 자기 구원이 아니라 물질적 기반 구축을 위한 것이 되었고, 출세의 사다리에서 상층부에 올라가기 위한 경쟁 수단이 됐다. 이는 '타인으로부터 나를 지키기 위한 공부'라 말할 수 있다. 공자의 표현으로 하면, '위인지학'이다. '억울하면 출세하라'는 말이 보여는 것처럼, 이런 공부는 누구에게도 무시당하지 않겠다는 집념에서 출발한다.
새로운 대안을 제시한다. 그건 나를 위한 공부와 너를 이기기 위한 공부를 넘어, 나의 무지로 타인을 보호하는 공부이다.
- 그 대안 나를 구원하고, 너를 이기는 공부를 하는 동안 내 안에 뿌리내린 맹목과 확증편향에 대한 자기 교정으로 서의 공부,
- 나도 모르는 사이에 그런 폭력의 주체가 될까 두려워하며 자기를 성찰하는 공부,
- 그러니까 '나로부터 타인을 지키기 위한' 공부를 제안한다.
새로 등장한 그는 수많은 학자들과 활동가들이 축적해 놓은 노동인권 담론을 모르고 있고, 또 하나는 개인의 존엄이자 자기 결정권이라는 근대적 인권 담론에 힘입어 개인이 국가에 '충성'한다는 것이 얼마 위험한 발상을 하고 있는지 모른다. 게다가 탈원전을 주장한다. 이들은 원전산업의 경제적 효율성에 대한 공부만 하고, 그로 인해 일어난 또는 일어날 비극에 해한 성찰은 없다. 오로지 돈, 돈, 돈 뿐이다. 사람은 안 중요하다.
무지의 결과이다. 물론 무지가 조롱의 대상은 아니다. 그렇지만 무지가 무시의 결과라면 이야기는 다른 문제가 된다. "역사적 폭력과 그것이 인류에게 가한 상처에 대한 무신경함"(신형철)이 문제인 것이다. 120시간 노동 발언은 노동착취의 역사가 남긴 상처에 대한 무시이고, 국민의례에 대한 자부심은 국가가 개인에게 희생을 강요한 국가주의의 불행한 역사에 대한 무시이며, 탈원전의 문제를 산업적 측면에서만 접근하는 것은 원전 사고로 인해 인류가 겪은 비극에 대한 무시이다. 이런 무시로 서의 무지는 과거와 현재의 모든 피해자들에 대한 폭력이 된다.
깊은 통찰을 하는 아침이다. 무지는 개인의 불행과 사회의 파멸을 초래하는 범죄의 원인이니 일종의 교육 문법을 다시 짜기 시작할 때이다. 빅토르 위고 했다는 말, "무지의 굴을 파괴하면 범죄라는 두더지도 파괴된다"을 기억해야 한다. 그리고 디킨스의 <<크리스마스 캐럴>>(1813)에서 수전노 스크루지의 회개를 돕기 위해 등장하는 유령 중 하나가 기괴한 모습의 소년과 소녀를 데리고 다는 데, 그들의 이름이 각각 "무지(ignorance)"와 "궁핍(want)"였다. 우리 사회의 두 가지 커다란 문제이다. 무지와 욕망. 유령이 더 강조했던 것은 소년, 무지의 위험이었다. 위험하다.
오늘 아침 시는 좀 길지만 재미난 시이다. 시인은 우리 사회 구조의 부조리함을 드러내고자 한다. 우리 사회에는 기득권층이라 불리는 일류들과 거기에 오르고자 하는 이류, 삼류들의 희망 없는 버둥거림이 있다. 어리석은 삼류들은 자신들도 일류가 될 수 있다는 가련한 소망을 품고 오늘도 전쟁터에 나간다. 그리고 일류들이 던져주는 떡고물에 감지덕지한다. 그것이 악한 사회 체제를 더욱 공고히 해주는 줄도, 일류들의 음모인 줄도 눈치 채지 못한다. 삼류는 그래서 삼류다. 그들은 가짜 일류들 앞에 무릎을 꿇고 자발적으로 복종한다.
그들은 니체가 말하는 ‘시장의 파리떼’이고 속물들이다. 세상은 소수의 교활한 일류들과 다수의 어리석은 삼류들로 되어 있다. '사람 위에 사람 없고, 사람 밑에 사람 없다'란 말을 믿고 싶다. 인간을 어찌 일류와 삼류로 나눌 수 있을까마는 그래도 무엇을 생각하고 어떻게 행동하느냐에 따라 사람의 품격은 달라진다. 한 인간의 기품은 많이 배웠다고, 또는 많이 가졌다고 생기는 것도 아니다. 앞서 가려는 것도 좋고, 잘나 보이려고 애쓰는 것도 좋다. 그러나 어느 때, 어느 자리에 있던지 최소한 인간으로서의 품위는 잃지 않고 살아야 한다. 이 아침의 다짐이다. 사진은 주말농장 가늘 길에 찍은 거다. 때를 기다리고 있다.
삼류들/이재무
삼류는 자신이 삼류인 줄 모른다
삼류는 간택해준 일류에게, 그것을 영예로 알고
기꺼이 자발적 헌신과 복종을 실천한다
내용 없는 완장 차고 설치는 삼류는
알고 보면 지독하게 열등의식을 앓아온 자이다
삼류가 가방 끈에 끝없이
유난 떨며 집착하는 것도 그 때문이다
그것이 성희롱인 줄도 모르고
일류가 몸에 대해 던지는 칭찬
곧이곧대로 알아듣고 우쭐대는 삼류
삼류는 모임을 좋아한다 그곳에서 얻을 게 많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일류와 어울려 사진을 박고 일류와 더불어 밥을 먹고
일류와 섞여 농을 주고받으며 스스로 일류가 되어간다고 착각하는 삼류
자신이 소모품인 줄도 모르고 까닭 없이 자만에 빠지는
불쌍한 삼류 사교의 지진아
아 그러나, 껍질 없는 알맹이가 없듯
위대하게 천박한 삼류 없이
어찌 일류의 광휘가 있으랴
노래를 마친 삼류가 무대를 내려서자
박수갈채가 쏟아진다 삼류의 얼굴에 꽃물이 든다
삼류는 남몰래 자신이 여간 대견하고 자랑스럽지가 않은 것이다
사실 열렬한 박수갈채는 노래 솜씨보다 월등한
그녀의 미모에게 보낸 것인데 그 사실을 그녀만 모르고 있다
삼류는 일류들이 앉아 있는 맨 앞줄을 겸손하게 지나서
이류들이 앉아 있는 중간을 우아하게 지나서
삼류들이 뭉쳐 있는 후미에 뽐내듯 어깨 세우고 앉는다
삼류는 생각한다 이렇게 열심히 노래 부르다 보면
언젠가 저 중간을 넘어 저 맨 앞줄에 의젓하게 앉아 있는 날이 올 거야
삼류는 가슴을 내밀어 숨을 크게 마셨다 내뿜는다
그러나 그날은 언제 올 것인가 너무 늦은 것은 아닐까
삼류는 갑자기 가슴이 답답해온다
그녀도 세상은 이미 각본대로 연출되고 있다는 것을
어렴풋이 눈치채 가고 있는 중인 것이다
삼류는 어제 그러하였고 오늘 그러하였듯
내일 또 무대에 올라 노래 부를 것이다
그러다 자신의 자리와 역할이 일류를 위한 영원한 들러리요, 삐에로요,
악세사리라는 것을, 뼈저리게 무슨 회한처럼 문득 깨달을 것이다
다른 글들을 보려면, 나의 블로그 https://pakhanpyo.tistory.com 이나 https://pakhanpyo.blogspot.com 이다. 최근에는 우리마을대학 홈페이지 블로그에도 글을 올린다. https://www.wmcss.net 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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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자가 추구하는 인간은 성인(聖人)이다. 여기서 성인은 자기 구원에 이른 사람이다. 그런 성인은 자신을 하늘에 맡기고 살아가는 사람, 하늘이 알아서 먹여주고 길러 주는데, 일부러 설치면서 허우적거릴 일이 무엇이냐는 것이다. 예수는 새들이나 들꽃들을 보라고 하면서,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또 무엇을 입을까 하고 걱정하지 말라. (…) 하늘에 계산 아버지께서는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것을 잘 알고 계신다. 너희는 먼저 하느님의 나라와 하느님께서 의롭게 여기시는 것을 구하라. 그러면 이 모든 것도 곁들여 받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내일 일은 걱정하지 말아라. 내일 걱정은 내일에 맡겨라. 하루의 괴로움은 그 날에 겪는 것만으로 족하다." (마태, 6:26-33)고 했다.
장자는 하늘이 준 본래의 재질, 본래의 바탕을 일러 재(才-덕-본성)라 하고, 이를 온전히 지키는 것을 재전(才全)이라 했다. 우리의 본바탕을 온전히 지킨다는 것은 한마디로 우리의 마음이 우리에게 주어진 여러 가지 인간의 조건에 흔들리지 않는 것, 그리하여 본마음을 그대로 지킨다는 뜻이다. 우리의 외부의 조건을, 사철이 바뀌듯이 사물의 변화나 운명으로 생각하고 의연히 받아들일 뿐, 안달하거나 초조해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렇게 상황에 따라 일희일비(一喜一悲)하지 않는 마음, 거울 같은 마음으로 마음의 조화와 평정을 유지하여 트인 마음, 즐거운 마음, 봄날처럼 안온하고 느긋한 마음을 지키는 것이 바로 주어진 재질, 우리의 본바탕을 온전히 지키는 일이 재전(才全)이라는 것이다.
자기 구원의 길로 가는 공부는 와이너리 속의 와인이나, 뒤뜰에 묻은 김장독처럼, 보이지 않는 곳에서 자신도 모르게 천천히 익어가야 한다. "물망 물조장"이다. 본성을 잊지 말고, 조장도 말고 말이다. '잊지 말고, 조장도 말 것'이라는 '물망 물조장(勿忘 勿助長)'이란 말을 나는 좋아한다. 이 말은 '필유사언이물정(必有事焉而勿正) 심물망 물조장(心勿忘 勿助長)'이란 말에서 나온 거다. '반드시 해야 할 일을 할 뿐 바로 잡으려고 하지 말며, 마음으로 잊지도 않되 조장하지도 말 것'이라는 뜻이다. 맹자 이야기이다. 동아시아의 유학은 "이목총명(耳目聰明, 귀와 눈의 감각과 기억력이 좋음)"으로 자기 구원을 강조한다. 서판에 새겨진 글씨를 잘 판독하고 그에 따라 사는 것이 본성에 합당한 삶의 길로 보았다. 그래 조선의 선비들은 음풍농월(吟風弄月, 맑은 바람과 밝은 달을 대상으로 시를 짓고, 흥취를 자아내어 즐겁게 시를 짓고 논다)을 즐겼다. 자연을 읊조리고, 늘 자연과의 일체감을 노래하며 생활했다. 조선 선비들은 위기지학(爲己之學)을 중시했다. 주말 농장에 열심히 가고, 자기 구원의 공부를 지금처럼 하다가 생을 마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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