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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운동가의 사진 하나, 시 하나

성인은 몸을 뒤에 두기에 앞설 수 있고, 몸을 밖에 둠으로써 몸을 보존한다.

1927. 인문 운동가의 인문 일기

(2022년 3월 10일)

 

어둠은 빛을 이길 수 없다. 곧 '그날'은 온다. 세상이 예전과는 다르다. 초연결 되어 있고, SNS가 있기 때문이다. 아니다. SNS 때문에 진실이 왜곡되는 부분도 있다. 그건 잘 모르겠다. 어쨌든 다음 세 문장으로 슬픈 마음을 달랜다. 
1) 거짓은 참을 이길 수 없다.
2) 진실은 침몰하지 않는다.
3) 나는 포기하지 않는다.

지금 읽고 있는 도올 김용옥 선생의 책, <<노자가 옳았다>>>를 빨리 일고, <<동경대전>>을 읽으며 수련을 더 할 생각이다. 차분하게 한국철학을 정리하여, 새로운 세상에 대한 생각을 다른 이들과 공유할 준비를 하고, 나 자신도 노자적 삶으로 더 나를 단련시켜, 내가 살고 있는 동네에서 동네 사람들과 좀 더 행복하게 살 생각이다. 노자가 옳았다고 믿는다.  남은 삶을 노자처럼 살 생각이다. 비우고, '무위', 즉 '함이 없는 함'으로 살 생각이다. 

마침 나는 노자의 <<도덕경>> 제7장을 읽고 있다. 이 장은 '도는 자기를 내세우지 않는다'는 도의 모습을 말하고 있는데, 우리는 그걸 '성공하려면, 몸을 앞세우지 말라'고 읽는다. 이 장은 우리의 일상적 삶에 구체적 교훈을 주는 내용이다. 그 교훈은 스스로를 위해 살지 않는 것이다. 우선 전문을 공유한다.

1) 天長地久(천장지구) : 하늘은 높고 땅은 끝이 없다. 
2) 天地所以能長且久者(천지소이능장차구자) 以其不自生(이기부자생) 故能長生(고능장생) : 하늘이 높고 땅이 끝이 없는 까닭은 스스로를 드러내려고 굳이 애쓰지 않기 때문이다.(자기가 모든 삶의 주체라는 의식없이 살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오래 갈 수 있는 것이다. 
3) 是以聖人後其身而身先(시이성인후기신이신선) 外其身而身存(외기신이신존): 그러므로 성인은 몸을 뒤에 두기에 앞설 수 있고, 몸을 밖에 둠으로써 몸을 보존한다. (몸을 밖으로 내던지기에 그 몸이 존한다.)
4) 非以其無私邪(비이기무사야) 故能成其私(고능성기사): 사사로운 마음을 앞세우지 않기에, 능히 자신을 이룰 수 있다. (그 성인의 경지의 사사로움을 이루게 되는 것이다.)

어제에 이어 오늘은 때마침 3)을 깊게 읽는다. 성인(聖人)은 내가 추구 하는 인간 상이다. 성인은 남 탓하지 않는다. 내 뜻대로 세상이 돌아가지 않아도, 세상 탓하지 않는다. 다 "도(道)"의 움직임으로 받아들인다. "천지불인(天地不仁)"이라 하지 않았는가? 는는 "천지불인"을 천지의 운행이나 활동, 그 모든 것이 인간을 위해서 있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정감이나 바램과 무관하게 그 나름대로의 생성법칙과 조화에 따라 이행되는 것이기 때문에 인간의 입장에서 보면 좀 야속하고 때로는 무자비하게 느껴진다. 그러나 우리는 하늘과 땅 그리고 성인들로 대표되는 도(道)를 인간적 감정에 좌우되어 누구에게는 햇빛을 더 주고, 누구에게는 덜 주는 따위의 일을 하지 않는다는 뜻으로 해석한다. 톨스토이는 "신은 진실을 알고 있다.. 하지만 기다린다"고 했다.

자꾸 나도 모르게 내 감정이 글에 실린다. 노자가 말하는 성인은 보통 사람이 아니라 도를 구현한 이상적인 치자(治者), 자유인, 내 방식대로 말하면, 자신의 삶을 리더하는 자이다. 그러므로 성인은 자기 몸을 내세우면서 남보다 앞서가면 안 된다. 항상 그 몸을 뒤로 해야 한다. 노자는 그걸 이렇게 말한다. "是以聖人後其身而身先(시이성인후기신이신선) " 해석하면 '그러므로 성인은 몸을 뒤에 두기에 앞설 수 있다'이다.

여기서 "후기신"의 "후"는 "신(신, 몸)"을 목적으로 하는 타동사로 보면 이해가 쉽다. "그 몸을 뒤로 한다"는 뜻이다. 그런데 '이(而)" 다음에 있는 "신선(身先)"에 있어서는 "신"이 타동사가 아니라 자동사로 보는 거다. 자연스럽게 그 몸이 앞서게 된다는 뜻이다. 자기 몸을 뒤로 하기 때문에 그 결과로서 그 몸이 자연스럽게 앞서게 된다는 것이다. 

노자적 삶은 소극적이고 모든 자신의 이익을 포기하는 태도가 아니라, 자신의 몸을 앞서게 하기 위하여 그 몸을 뒤로 하는 적극적인 삶의 자세이다. 노자가 말하는 "무위무불위(無爲無不爲)"를 이해하여야 이런 삶의 자세가 이해된다. "무위하면 되지 않는 법이 없다"는 뜻이다. 이 문장을 단지 이렇게 해석하면 부족하다. 세상사에서 어떤 욕망도 품지 않고, 그냥 되는 대로 흘러가게 내버려 두는 것을 '무위'로 보로 보는 것이 아니다. 노자가 말하고 싶었던 것은 '무위'보다도 '되지 않는 일'이 없는 "무불위(無不爲)"의 결과였다고 본다. '무위'라는 지침은 '무불위'라는 효과를 기대할 수 있다는 점에서 의미를 가진다. <<도덕경>> 제22장을 보면 안다. "구부리면 온전해지고, 굽으면 곧아질 수 있고, 덜면 꽉 찬다. 헐리면 새로워지고, 적으면 얻게 되고, 많으면 미혹을 당하게 된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노자를 구부리고, 덜어내는, 헐리는, 적은" 것만으로 받아들이려 한다. 사실 노자는 온전하고 꽉 채워지는 결과를 기대하는 마음이 더 컸다. <<도덕경>> 제3장에 나오는 "위무위 칙무불치(爲無爲 則無不治)"에서, ‘무위’는 아무 것도 안 하는 상태가 아니다. 그것은 오히려 우주의 순환이나 사시사철의 변화와 같이 정교한 원칙의 표현이다. '무위'라는 말은 '일을 하지 않는다'는 말이 아니라, 상대가 과중하게 느낄 정도로 행동하지 않는다는 말이다. 그러니까 지나치지 않는다는 말이다. 그런 의미에서 '무위'는 정교한 '인위(人爲)'이다.

다음 "外其身而身存(외기신이신존)"도 문법 구조는 동일하다. "외(外)"가 타동사이고, "존(存)"이 타동사이다. "외기신(外其身)"에 대한 해석은 다양하다. 말 그대로 하면, "그 몸을 밖으로 한다"이다. 오강남은 "자기를 버리기에 자기를 보존합니다"로 읽었고, 도올은  죽음 불사하고 자기 몸을 자기 밖으로 내던지다"로 해석하였다. 죽음을 불사하고 자기를 내던질 줄 알기 때문에 오히려 그 몸이 보존될 수 있다는 거다. 성인이 된다고 하는 것은 무조건 대의를 위하여 소아적 생명을 버릴 줄 아는 희생물이 된다고 하는 각오를 의미하는 거로 보았다. 그리하여 이 장의 결론은 "무사(無私)하기 때문에 성사(成私)할 수 있다"는 거다. 이를 "非以其無私邪(비이기무사야) 故能成其私(고능성기사)"라 했다. '사사로운 마음을 앞세우지 않기에, 능히 자신을 이룰 수 있다'는 거다. 다시 말하면, 사사로움이 없기 때문에 오히려 사사로움을 이룰 수 있게 된다는 뜻이다. 이것은 결국 부자생(不自生) 하기 때문에 장생9장생)하는 천지의 모습과 상통하게 된다.

오늘 기분이 꿀꿀하여 매일 한 편식 공유하는 시 대신에 <<도덕경>> 제7장을 오강남은 한 편의 시처럼 번역한 것으로 대체한다. 아침 사진은 어제 심은 치커리와 상추이다. 너희들 만이 나의 희망이다.


하늘과 땅은 영원하네(天長地久, 천장지구)
하늘과 땅이  영원한 까닭은(天地所以能長且久者, 천지소이능장차구자) 
자기 스스로를 위해 살지 않기 때문입니다(以其不自生, 이기부자생) .
그러기에 참 삶을 사는 것입니다(故能長生, 고능장생).

성인도 마찬가지. 
자기를 앞세우지 않기에 앞서게 되고(是以聖人後其身而身先, 시이성인후기신이신선), 
자기를 버리기에 자기를 보존합니다外其身而身存, 외기신이신존).

나를 비우는 것이(非以其無私邪, 비이기무사야) 
진정으로 나를 완성하는 것 아니겠습니까(故能成其私, 고능성기사)?

 
글이 길어지서, 여기서 멈춘다. 나머지 이어지는 글이 궁금하시면, 나의 블로그로 따라 오시기 바란다. 나의 블로그 https://pakhanpyo.tistory.com 이나 https://pakhanpyo.blogspot.com 이다. 최근에는 우리마을대학 홈페이지 블로그에도 글을 올린다. https://www.wmcss.net 이다.

오강남의 해석 중에 인상적인 것은 '장생(長生)"을 '참 삶'으로 풀이한 것이다. 오강남에 의하면, 하늘과 땅 그리고 성인은 영원한 삶을 산다는 거다. 원문에는 "장구(長久), 즉 길고 오랜" 삶 그리고 "장생(長生), 즉 오랜 삶"이라 되어 있지만, 장생이나 영생이나 하면 육체적인 생명이 오래 계속되는 것으로 오해라 소지가 있기 때문에, 그는 "참 삶"이라 옮겼다 한다. 진정한 의미의 영원한 삶이란 시간적으로 무한히 연장되는 생물학적 삶이 아니라, 질적으로 새롭게 된 참 삶을 뜻하기 때문이라는 거다.

그러한 참 삶은 자기를 사는 삶을 그만둘 때 가능 해진다는 거다. 오강남은 "자기 부정의 길이 곧 긍정의 길"라는 표현을 사용했다.  즉 자기 부정을 통해 참 자기가 새롭게 탄생한다는 것이다. 자기를 위해 살지 않고, 자기를 앞세우지 않고, 자기를 버리고, 자기를 비우는 것이 진정으로 자기를 완성하고 영원히 존재하게 길임을 말하는 거라 한다.

오강남은 종교학자로써 이 구절을 "죽음과 부활"의 종교적 역설의 논리로 읽었다. 부정하고, 버리고, 비울 대상으로서의 자아란 '작은 자아(self)', '자의식이 도사리고 있는 자아', '이기적인 자기'라 보고 이런 자아를 부정하고, 버리고, 비울 때 발견하게 되는 새로운 자아란 '큰 자아(Self)', '자기라는 의식마저도 없는 활달한 자아', '남을 위한 존재로서의 자아'라고 보면 이해가 쉬워진다는 거다. '작은 자아'를 진정한 자아라고 착각하고 거기에 집착해서 그 꿈을 키워 보려 하다 가는 '큰 자아'를 잃어버리게 되고, 반대로 이런 '작은 자아'를 부정하고 비우면 큰 자아를 찾게 된다는 거다. 비본래적인 작은 자아를 죽이면, 본래적인 큰 자아가 되살아난다는 거다. 그러면서 오강남은 마태복음 6장 24-25절을 소개하며 이런 종교적 역설은 다른 여러 종교에서도 공통적으로 발견된다고 했다. 예수도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코자 하면 잃을 것이요.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찾으리라"고 했다.

오강남의 설명에 따르면, 예수를 따른다는 것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것처럼 이 세상에서 복 많이 받아 남보란 듯이 잘 살고, 내세에서도 죽지 않고 오래 살기 위한 것, 말하자면 "제목숨", 지금의 '작은 자기'가 잘 되고 영속되게 하려는 것이 아니라는 거다. 예수의 가르침은 이런 작은 자기를 구원코자 하면 참 자기를 잃을 수밖에 없고, 작은 자기를 버릴 때 큰 자기를 찾게 된다는 거다. 예수를 따르는 것은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를 십자가에 못박는 것이다. 이렇게 자기를 부인하고 십자가에서 죽음으로 진정한 제 목숨으로 부활하게 된다는 역설의 공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