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4. 인문 운동가의 인문 일기
(2022년 3월 7일)

어제에 이어 노자 <<도덕경>> 제6장 이야기를 이어간다. 어제 마지막에 '노자는 자신의 우주론을 구성하는 데 있어서 남성성보다 여성성을 보다 근원적인 것, 보다 더 본질적인 것으로 보았다'는 말을 했다. 노자가 말하는 여성성이란 사회적 요청에 의하여 규정된 여성의 권리나 평등에 관한 주장이 아니라, 여성이라는 현존재의 특성을 우주론적으로 예찬한 것이다. 도올이 자신의 강의에서 이렇게 주장하였다.
노자는 제2장에서 "故有無相生, 難易相成, 長短相較, 高下相傾, 音聲相和, 前後相隨(고유무상생, 난이상성, 장단상교, 고하상경, 음성상화, 전후상수)"을 말했다. 이를 번역하면, "그러므로 있음과 없음은 서로 생성하고, 어려움과 쉬움은 서로 이루며, 긺과 짧음은 서로 겨루며, 음과 소리는 서로 어울리며, 앞과 뒤는 서로 따른다"이다. 오강남은 이렇게 번역했다. "그러므로 가지고 못 가짐은 서로의 관계에서 생기는 것, 어려움과 쉬움도 서로의 관계에서 성립되는 것, 길고 짧음도 서로의 관계에서 나오는 것, 높고 낮음도 서로의 관계에서 비롯되는 것, 악기 소리와 목소리도 서로의 관계에서 어울리는 것, 앞과 뒤도 서로의 관계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유무상생"은 노자가 말하는 세상의 원리이다. 없음과 있음은 대립의 개념이 아니고, 없음이 있기에, 있음이 존재한다는 거다. "유무상생"은 두 줄로 꼬인 새끼줄을 이 세계, 아니 우주의 원리라고 보는 거다. 우리는 타인, 환경 등 객체와 분리된 개념이 아닌, 함께 할 때, 그 존재가 무엇인지 이름을 가진 언어로 말할 수 있는 거다. 상호 보완, 상생의 존재로 보아야 한다. 말 그대로 모든 것은 인간이 만들고, 이름을 붙여서 존재하게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우리가 알고 있는 모든 가치의 세계는 유와 무, 난과 이, 장과 단, 고와 하와 같이 상대적인 개념으로 이루어져 있다. 여자와 남자, 유와 강, 음과 양도 마찬가지이다. 그런데 노자의 상(常)의 세계에서는 이러한 상대적 가치들이 실체성을 갖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이들의 관계는 실로 상대적(相對的, 서로 대적적)인 관계가 아닌, 상대적(商待的, 서로를 기다리고, 서로에게 의지하는)인 관계이다. '대'자의 한문이 다르다. 유가 있기 때문에 무가 있는 것이고, 무가 있기 때문에 유가 있는 것이다. 유는 무를 예상하고 무는 유를 예상한다. 그런 의미에서 상호적으로 대자(對者)를 생(生)하는 것이다. 이를 노자는 "유무상생"이라 했다. 도올이 강의에서 주장하는 것이다.
어려움과 쉬움, 긺과 짧음, 높음과 낮음도 마찬가지이다. 서로가 서로에 의지하여 존재하는 것이다. 이러한 상대(相對)가 아닌 상대(相待)를 가능하게 하는 것이 바로 빔(虛)라는 것이다. 빔 속에서 상대하는 것들은 상호적으로 대자(對者)를 파악하고 감지하고 포섭한다. 그런 의미에서, 도올은 "허(虛)는 감(感)의 여백"이라 주장하는 거다. 중요한 것은 상대적인 가치는 그 나름대로 절대적인 실체성을 갖지 아니한다는 점이다. 그러므로 모든 대립하는 것들은 대자(對者)로 건너간다. 이러한 '건너가기'를 거치면서 새로움의 요소를 포함하는 통일이 이루어진다. 이러한 통일 연속성을 보장 하는 이법적(理法的) 근거가 바로 '도'라는 거다. 도올의 멋진 설명이다.
그야말로 대통령 선거가 코 앞에 놓였다. 내일 모레이다. 나는 그 수요일이 진정으로 이 땅에서 정의가 실현되길 '도'에게 바라고 또 바란다. 도는 자연을 따른다. 그래 "도법자연(道法自然)"이라고 말한다. 위에서 본 것처럼 도, 자연은 시비(是非)를 따지지 않는다. 시비를 따지는 병폐를 고치려면 밝음(明, 명)이 있어야 한다. 대통령 선거 이후에 우리에게 절대적으로 필요한 거다. 이분법적 사고 방식에서 나오는 일방적 편견을 버리라는 것이다. 사물을 한쪽에서만 보는 편견을 버리고, 전체적으로 보면, 동일한 사물이 이것도 되면서 저것도 된다는 것을 안다. '이것이냐 저것이냐'가 아니라, '이거도 저것도' 본다는 말이다. 우리에게 사물을 전체적으로 볼 수 있는 안목이 조금이라도 있으면, 우리는 이것 만이라며 고집하고 그것을 절대 화하지 않는다.
'이것이 없으면 저것이 없고, 저것이 없으면 이것도 없다.' 이 말은 이것이라는 말은 저것이라는 말이 없을 때는 의미가 없다는 거다. 이것이라는 말은 반드시 저것이라는 말을 전제로 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것이라는 말 속에는 저것이라는 말이 이미 내포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것은 저것을 낳고, 저것은 이것을 낳는 셈 이다. 예컨대, 아버지만 아들을 낳는 것이 아니라, 아들 없이는 아버지도 있을 수 없으므로 아들도 아버지를 낳는 셈이다. 아버지도 원인인 동시에 결과이고, 아들도 결과인 동시에 원인이다. 이렇게 서로를 가능하게 하는 것을 우리는 "방생(放生)"이라고 한다. 도의 작용이다. 이를 영어로 말하면, 'mutual production', 'Interdependence'이다.
그러니 언뜻 보기에 대립하고 모순 하는 것 같은 개념들, 죽음과 삶, 됨과 안 됨, 옳음과 그름, <<도덕경>> 제2장에 열거한 선악, 미추, 고저, 장단 같은 것들이, 결국 독립한 절대 개념이 아니라 빙글빙글 돌며 어울려 서로 의존하는 상관 개념이라는 사실을 깨달어야 한다. 우리가 진정으로 자유로 울려면, 사물의 한 단면만을 보고 거기에 집착하는 옹고집과 다툼을 버려야 한다. 사물을 통째로 보는 것이 '하늘의 빛에 비추어 보는 것, 즉 '조지어천(照之於天)'이고, 도의 지도리(도추, 道樞, pivot, still point)에서 보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실재를 있는 그대로 그렇다 함(인시, 因是)'이다. 모든 것을 꿰뚫어 보는 마음(명, 明)이다.
중세의 한철학자가 말한 바에 따르면, '반대의 일치', '양극의 조화(coincidentia oppositorun)'이다. '실재를 있는 그대로 그렇다 함'이란 '실재를 있는 그대로 인정하고 그대로 놓아두는 것'이다. 정말 '그런 것', '실재 그대로 그렇다 함'이란 영어로' reality', 산스크리트어의 taahta(정말 그러함, 진여), 영어의 let it be 같은 단어들이 연상된다. 모두 실재를 있는 그대로 보았기에 그것을 '인위적으로 좌지우지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한마디로 무위자연(無爲自然)과 통하는 마음의 태도이다. 3월 9일이 이런 세상이 시작되는 날이었으면 한다.
그대에게 가고 싶다/안도현
해 뜨는 아침에는
나도 맑은 사람이 되어
그대에게 가고 싶다
그대 보고 싶은 마음 때문에
밤새 퍼부어 대던 눈발이 그치고
오늘은 하늘도 맨 처음인 듯 열리는 날
나도 금방 헹구어 낸 햇살이 되어
그대에게 가고 싶다
그대 창가에 오랜만에 볕이 들거든
긴 밤 어둠 속에서 캄캄하게 띄워 보낸
내 그리움으로 여겨다오
사랑에 빠진 사람보다 더 행복한 사람은
그리움 하나로 무장무장
가슴이 타는 사람 아니냐
진정 내가 그대를 생각하는 만큼
새날이 밝아오고
진정 내가 그대 가까이 다가서는 만큼
이 세상이 아름다워질 수 있다면
그리하여 마침내 그대와 내가
하나되어 우리라고 이름 부를 수 있는
그날이 온다면
봄이 올 때 까지는 저 들에 쌓인 눈이
우리를 덮어줄 따스한 이불이라는 것도
나는 잊지 않으리
사랑이란
또 다른 길을 찾아 두리번거리지 않고
그리고 혼자서는 가지 않는 것
지치고 상처입고 구멍 난 삶을 데리고
그대에게 가고 싶다
우리가 함께 만들어야 할 신천지
우리가 더불어 세워야 할 나
사시사철 푸른 풀밭으로 불러다오
나도 한 마리 튼튼하고 착한 양이 되어
그대에게 가고 싶다
글이 길어질 것 같아, 여기서 멈춘다. 나머지 이어지는 글이 궁금하시면, 나의 블로그로 따라 오시기 바란다. 나의 블로그 https://pakhanpyo.tistory.com 이나 https://pakhanpyo.blogspot.com 이다. 최근에는 우리마을대학 홈페이지 블로그에도 글을 올린다. https://www.wmcss.net 이다.
같은 생각으로 유약(柔弱)과 강강(剛强)도 상대(相待)적이다. 부드러움은 강함으로 인하여 존재하고, 강함은 부드러움으로 인하여 존재한다. 그러므로 부드러움은 강함으로 건너가고 강함은 부드러움으로 건너간다. 유약과 강강은 결국 도의 세계에서 통일된다. 남자는 여자가 있기 때문에 남자일 수가 있고, 여자는 남자가 있기 때문에 여자일 수가 있는 것이다. 여자는 유약하며 포섭적이고, 남자는 강강하며 지배적이다. 그러나 여자 속에 남자가 잇고, 남자 속에 여자가 있다. 여자는 남자로 건너가고, 남자는 여자로 건너간다. 이러한 건너가기를 통해 온전한 도의 인간이 이루어진다.
우리가 여기서 특히 주목해야 할 것은 노자가 유약과 강강의 상생상성(相生相成)을 말하지만, 그 상대적(상대적) 통합의 과정에서 강강보다는 유약, 즉 남성적 가치보다는 여성적 가치가 훨씬 더 주체적이고 본질적이며 지속적이라고 말하는 점이다. 한마디로 말하면, 유약은 강강을 이긴다는 거다(柔弱勝剛强, 유약승강강). 부드러움과 유약함이 결국 강하고 센 것을 이긴다는 거다. 이게 노자의 주된 생각이다. 공격적인 사나움 대신 부드러운 감성을 키우라는 거다. 여자의 유약함이 궁극적으로 남자의 강강함을 이긴다는 거다. "가도지도(可道之道)"의 허세를 극복하는 길이다. 여성성의 남성성에 대한 우위를 논구하는 가장 근원적인 이유는 여성성이 갖는 생명력, 창조력, 생산성 그리고 모험성을 간파하고 잇기 때문이라는 거다. 도올의 강의 내용이다.
내가 늘 건너가려고 하는 세계는 "결(缺), 충(沖), 굴(屈), 졸(拙), 눌(訥)의 세계"이다.
1. 대성(大成)의 세계에서 결(缺)의 세계로 건너가기: 대성약결(大成若缺) - 'Big ME'에서 'Little ME'로
2. 대영(大盈)의 세계에서 충(沖)의 세계로 건너가기: 대영약충(大盈若沖) = 가득함에서 비움으로
3. 대직(大直)의 세계에서 굴(窟)의 세계로 건너가기: 대직약굴(大直若窟) - 직진, 바른 길에서 곡선, 구부러진 길로
4. 대교(大巧)의 세계에서 졸(拙)의 세게로 건너가기: 대교약졸(大巧若拙) - 화려와 정교함에서 질박과 서투름으로
5. 대변(大辯)의 세계에서 눌(訥)의 세계로 건너가기: 대변약눌(大辯若訥) - 웅변에서 눌변으로
<<도덕경>> 제45장을 내 나름대로 번역하면 이렇다. "다 완성된 것도 빈틈이 있어야 그걸 쓰는 데 불편함이 없고, 가득 채웠더라도 빈 곳이 있어야 언제라도 쓸 수 있다. 구불구불한 길이 바른 길이며, 질박하고 서툴러 보인 것이 화려하고 정교한 것이며, 어눌한 눌변이 곤 완벽한 말 솜씨인 것이다. 고요함은 시끄러움을 극복하고, 냉정함은 날뜀을 극복한다. 맑고 고요함이 세상의 표준(천하의 정도)이다."
인간이 꾸리는 무대는 자연과 문명이라는 두 개의 세계로 구성되어 있다. 자연은 인간의 의지와 상관 없이 내장되어 있어 스스로의 법칙에 따르는 저절로(自) 그러한(然) 세계이고, 문명은 인간이 그려 넣은(文)의 세계이다. 문명이란 인간이 그린 세계이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인간이 의도를 개입시켜 제조한 세계라고 할 수 있다. 여기서 문명을 제조하는 의도를 생각이라고 하면, 각자 누리는 문명의 수준이나 내용은 각자 지니고 있는 생각의 그것들에 좌우된다. 그래 시선의 높이가 삶의 높이이다. 그러니까 생각의 높이가 삶의 높이이다.
그리고 먼저 생각을 하여 문명의 새 길을 내는 일이 창조이고, 창조의 의지가 발휘되는 일이 바로 창의이다. 창의를 통해서 새로운 길을 열러 흐름을 만들면, 그것을 우리는 선진이라 하고, 일류라고 하며, 선도력을 가졌다고 한다. 이미 있는 길을 가는 것이 아니라, 없는 길을 열어서 새로운 흐름을 만들었다는 뜻이다. 이로써 창의는 '건너 가기'를 통해 결국 삶의 영토를 확장하는 셈이다. 따라서 창의적인 인간은 영토를 확장해주는 일을 하기 때문에 언제나 높은 자리에 올려 진다.
문제는 생각이 들쑥날쑥하고 들락날락하는 것이다. 그래 생각의 높이와 초점을 맞춘 생각을 시선이라 한다. 왜 시선이 중요한가? 사람은 자신이 가진 시선의 높이 이상을 살 수 없기 때문이다. 시선은 삶과 사회의 전체 수준을 결정한다. 시선의 높이가 삶의 높이이다. 여기 있던 시선이 한 단계 더 높이 저 시선으로 상승하여 이루는 구체적 결과가 바로 발전인 것이다. 그런데 이 발전을 경험하기 위해서는 우선 자기를 지배하는 정해진 틀을 벗어나는 도전이 감행되어야 한다. 익숙함과의 결별이다.
우리는 보통 익숙한 생각에 갇힌다. 갇힌 생각은 갇힌 세계를 조성한다. 세계를 일정한 틀로 가두어 버린다. 사실 이미 있는 익숙한 생각을 가지고 살면서 우리는 부단히 새로운 환경을 접한다. 인간의 역할은 새로운 세계를 맞닥뜨렸을 때 적절한 대응방안을 찾느냐 찾지 못하느냐로 수준이 결정된다. 이를 우리는 적응이라고 한다. 인간은 습관의 동물인지라 살아온 관성에 저항하는 것이 참 어렵다. 강한 존재가 아니라 새로운 상황에 적응하는 자가 생존한다. 그러니까 생존한다는 말에는 적응을 위한 변화가 강함보다 어렵다는 뜻이 들어있다. 최진석 교수가 주장하는 내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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