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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운동가의 사진 하나, 시 하나

"대통령 선거는 국가 공동체의 내일을 결정하는 중대사"인데, "고도의 이성적 판단이 요구되는 이 과정이 지금 정상적으로 작동하지 않고 있다."

1910. 인문 운동가의 인문 일기

(2022년 2월 21일)

 

얼마 남지 않은 대통령 선거가 매우 중요한데, 좀 한심하게 어려운 '도'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 같다. 특히 우리는 코로나 이후의 세계를 철저하게 준비해야 할 때이다. 이때 우리는 새로운 정부를 구성할 시기가 겹치고 있다. 좀 불안하다. 우리 사회의 시스템 몇 군데가 잘 작동되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지난 1월 28일에 <한국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은 다음과 같은 의견들을 냈다. "대통령 선거는 국가 공동체의 내일을 결정하는 중대사"인데, "고도의 이성적 판단이 요구되는 이 과정이 지금 정상적으로 작동하지 않고 있다." 그 책임은 언론과 검찰 그리고 법원에 있다고 했다. "시민들은 신문과 방송을 통해서 뉴스를 접하고, 시시비비를 검찰의 기소와 법원의 판결에 의지하여 판단"한다. "그래서 언론과 검찰, 법원은 유권자들의 선택에 직접적으로 영향력을 행사하게 되어 있고, 어떤 집단보다 '상식, 공정과 정의' 그리고 '법과 원칙'에 따라 작동되어야 하는 곳"이다. 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다. 다음과 같이 세 가지를 지적하였다. 나도 동의한다. 아울러 신부님들은 "국민들을 위한 재난 ‘지원금’도 중요하지만 재난 상황에 걸맞은 상식과 이성의 회복이 더 시급하다고 믿으며 특히 언론, 검찰, 법원을 위해 기도"하신다고 했다.

▪ 언론 종사자들이 자신의 양심을 걸고 유권자들의 판단을 돕기 위해 불편 부당한 자세로 보도하고 있는지 의심된다. 
▪ 검찰은 사람에 따라 누구는 조사도 없이 기소하고, 누구에 대해서는 기소는 커녕 조사도 하지 않고, 조사에 불응해도 그냥 놔둔다. 눈 가리고 아웅 하는 일이 너무나 많다. 
▪ 정의의 최종 수호자여야 할 법원의 판결도 귀를 의심할 정도이다. 

아울러 나는, 신부님들의 다음 바람처럼, "한반도의 평화와 번영을 위한 현 정부의 노력이 다음 정부에서도 계승되고 발전되기를" 바라고, "부디 너도 일하고 나도 일하고, 너도 잘 살고 나도 잘 살되 우리 모두 올바로 잘 사는 ‘고루살이’의 꿈을 이루는 민주 공화주의"가 더 활짝 꽃 피는 계기가 되었으면 한다. 내일은 노자 <<도덕경>> 제5장을 읽는다.

오늘 아침 시는 우리 사회의 '불편한' 진실이다. 김정수 시인이 소개한 시이다. 다음과 같은 덧붙임과 함께. "100m 달리기 시합을 하는데 출발선상에 육상선수, 노인, 환자, 어린아이 등이 서 있다고 가정해보자. 특별한 상황이 연출되지 않는 한, 당연히 육상 선수가 1등을 할 것이다. 같은 거리를 동등하게 뛰는 기회와 경쟁이라 할 수 있지만, 이 시합은 정의롭지 못하다. 형식적 기회균등과 경쟁일 뿐이다. 실질적인 공정경쟁을 하려면 우월한 지위에 있는 사람에게 핸디캡을 줘야 한다. 약자를 배려하고, 그에 맞는 지원을 해야 한다. 하지만 지금 우리 경쟁은 정의로운가?" 우리도, 시인처럼, 이런 질문을 하며, 깨어 있는 시민으로 이번 대선에 임해야 한다.


정의/이재훈

수풀에 있었다. 가장 낮은 곳에서 숱한 위험을 만났다. 혐오스러웠고 추했다. 돈과 권세가 있으면 죄가 없단다. 늘 죄인으로 살아야 하는 수풀. 악인들의 말로에 대해. 저 높은 단상의 말로에 대해 어지러운 소문들만 들어야 한다. 수풀은 파괴되지 않는다. 이곳에 오래 있으면 더러운 짐승이 된다. 수풀 속에서 다리를 감싸안고 울었다. 풀잎들이 흔들렸다. 풀잎에 빗방울이 간신히 붙어 있다. 빗방울은 오래 버티지 못하고 곧 흘러내려 사라졌다. 새로운 빗방울이 또 고인다. 퍼도 퍼도 마르지 않는 이 질긴 운명. 피를 머금고 있는 빗방울. 수풀에 있었다. 아침햇살까지 야속한 수풀에 있었다. 금방 고이다 사라지는 수풀에 있었다. 거짓말이 수풀에 가득했다. 


정의는 "가장 낮은" "수풀"에 있다. 그런 “가장 낮은 곳”에서 태어났다면, 우리는 평생 “숱한 위험”을 겪어야 한다. 가난에서 벗어나려 몸부림치지만 애초에 기울어진 운동장이다. 딛고 탈출할 사다리는 이미 부러져 있다. 차별과 혐오를 견디며 “죄인처럼”, “더러운 짐승”처럼 살아야 한다. 반면 “돈과 권세가 있으면 죄가 없”다. 대물림 되는 가난은 사회적 불합리가 아니라 개인의 문제로 치부된다. “저 높은 단상의 말로”에선 독재자의 향기가 난다. 정치적 독재만 독재가 아니다. 우리 사회의 심판은 공정한가? 김정수 시인은 묻는다. 그 심판 일이 이젠 얼마 남지 않았다. 난 '도'를 믿는다. 내일 읽을 제5장은 "천지불인(天地不仁)"이라는 말로 시작된다. 하늘과 땅은 편애(偏愛, 仁)하지 않는다는 말이다. 다시 말하면 도는 모든 인간적 감정에 좌우되어 누구에게 햇빛을 더 주고, 누구에게는 덜 주는 따위이 일을 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모든 것은 우주 전체의 조화로운 원리와 상관 계에 따라 순리대로 되어 갈 뿐이다. '도'를 믿는다.


몇일 동안 계속 읽고 있는 <<도덕경>> 이야기는 나의 블로그로 옮긴다. 나의 블로그는  https://pakhanpyo.tistory.com 이나 https://pakhanpyo.blogspot.com 이다. 최근에는 우리마을대학 홈페이지 블로그에도 글을 올린다. https://www.wmcss.net 이다. 

어제에 이어, 오늘도 노자 <<도덕경>> 제4장을 읽는다. 어제는 다음의 세 문장을 정밀하게 읽었다. "② 淵兮! 似萬物之宗(연혜, 사만물지종) : 심연처럼 그윽하다! 만물의 으뜸 같다. (깊기도 하다! 마치 만물의 근원 같다.) ③ 挫其銳(좌기예) 解其紛(해기분): 예리한 것은 다듬어주고, 맺힌 것은 풀어 주고 ④ 和其光(화기광) 同其塵(동기진): 그 빛이 튀어남이 없게 하고, 그 티끌을 고르게 한다. (또는 눈부신 것은 은은하게 하고, 마침내 먼지와 하나가 된다.)  이 문장은 좀 다르게 두 가지로 해석된다.

오늘은 제4장의 마지막 부분을 다 세밀하게 읽을 생각이다. ⑤ 湛兮! 似或存(담혜, 사혹존): 맑고 또 맑다! 혹 있는 것 같다. (또는 깊디깊어 신비롭기도 하다! 마치 진짜로 있는 것 같다.) ⑥ 吾不知誰之子(오불지수지자) 象帝之先(상제지선) : 나는 그것이 누구의 자식인진 모르겠다. 하느님보다 먼저 있었던 것 같다. (나는 그 실체를 알지는 못한다.  다만 상제보다 먼저 있음은 분명하다.)

이 문장들의 주어도 '도(道)'라고 본다. "湛兮!(담혜!)"에서 '담(湛)'은을 사전에서 찾아 보면, '즐기다, 가득히 차다, 잠기다, 맑다' 등으로 다양하게 쓰인다. 도올은 "담혜'를 "맑고 또 맑도다!"로 해석했고, 최진석 교수는 "신비롭기도 하구나!"로 풀이했다. 어쨌든 "담혜!"는 어제 말했던 "연혜!'와 같은 뜻의 다른 표현으로 이해하면 될 것 같다. 도올은 '담'자를 "물의 맑음(澄淸)"의 뜻이 더 강렬하게 나타난다고 했다. 도올에 의하면, 도는 오묘하고 한 없이 깊은 것이지만, 또 밑바닥이 다 드러나 보이는 듯한 맑음의 찬탄의 대상이 된다는 거다. 그리고 최진석 교수는 "연(淵)은 도가 만물의 성립과 운행에 작용하는 가장 밑바탕이 되는 원칙이라는 의미에서 채택된 용어이고, 담(湛)은 도가 구체적인 모습을 띠고 드러나는 어떤 것이 아님을 나타내는 것으로 보았다. 

"사혹존(似或存, 혹 있는 것 같다)"은 도가 존재론적 규정의 대상이 될 수 없다는 것을 반복적으로 말해주는 거다. 도올은 "한정성의 근원으로서의 무한정자인 도는 '혹 있는 것 같다!'"로 풀이한다. 그리고 도올은 "노자가 얼마나 존재의 문제를 섬세하게 고민하고 있었는지를 알 수 있을 것"이라 말한다. 그러니까 도는 가장 기본적인 원칙으로서의 기능만 있지, 실제로 존재하는 것은 아닌 것이다. 좀 알듯 말듯 하다.

계속 이어진다. "吾不知誰之子(오불지수지자) 象帝之先(상제지선)." "그래서 나는 그것이 누구의 자식인지 모르겠다"는 거다. 도 자체가 어디에서 나왔는지, 왜 나왔는지 알 길은 없다. 그러나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그것이 세상의 온갖 것, 중국에서 최고의 인격신으로 모시는 상제(上帝, 하느님, Deus)보다도 먼저 있었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도는 구체적인 인격신과 차원을 달리하는 무엇이다. '제'를 중국어로 '띠'라 발음하는데, '데우스'의 발음과 비슷하다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다. 그리고 도올은 상(象)을 '~인 것 같다'는 의미로 보며, 앞의 사(似)와 같은 의미의 글자로 본다. 그러나 최진석 교수는 '상'은 그런 이미지로 그렇게 받아들여진다는 의미로 보고 있다.

아무튼 도는 '빈 그릇' 같기도 하고, '심연'처럼 깊어 알 수도 없고, '깊은 물'처럼 가물가물하고 신비스러운 무엇이지만 그것은 모든 것의 존재 근원으로서 실존하면서 모든 것의 존재를 가능하게 해 주는 무엇임을 다시 한번 더 말해주는 제4장이다. 어렵다. 그러나 내가 이해한 것은 이 세계의 모든 것은 그 자체로 변화하며 항상 반대편 것과의 관계 속에서 존재한다. 그러므로 이 세계는 꽉 찬 모습으로 한 순간이나마 정지하거나 배타적으로 존재할 수 없다. 따라서 노자는 도의 이런 텅 비어 있는 모습을 모든 인위적인 가치나 제도들의 모델로 받아들이자고 주장하는 것으로 나는 파악한다. 노자의 메시지는 이런 도의 모습을 본받자는 거다. 노자 철학의 주요한 키워드인 허(虛), 무위(無爲), 유약(柔弱), 무욕(無欲), 무명(無名) 등도 모두 텅 비어 있는 도의 모습을 본떠서 하는 행위 방식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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