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74. 인문 운동가의 인문 일기
(2022년 1월 16일)

오늘 아침도 시대의 지성 이어령과 '인터스텔라' 김지수의 '라스트 인터뷰' "삶과 죽음에 대한 그 빛나는 이야기"란 부제를 단 <<이어령의 마지막 수업>> 읽기를 이어간다. 오늘 아침은 제5장 "고아의 감각이 우리를 나아가게 한다"는 장을 읽고 여러 가지 사유를 해본다.
맨 먼저, "생각하는 자는 지속적으로 중력을 거슬러 가야 한다. 그러다가 가벼워지면 떠올라야 한다. 떠오르면 시야가 넓어지기 때문이다." 이 문장을 읽고, 곧바로 나는 화이위조(化而爲鳥)" 이야기가 떠올랐다. 장자는 '곤'이라는 물고기가 '붕'이라는 새의 경지에 이른 후 남명(남쪽 바다)에서 노는 사람을 지인, 신인, 성인이라 했다. 사자성어로 물고기가 붕이라는 새가 되는 것을 우리는 ‘화이위조(化而爲鳥)’라 한다. '새로 변하기'로 해석하면 될 것 같다. 이렇게 인간의 잠재력이 변화하는 단계를 장자는 다음과 같이 네 단계로 말하고 있다. 흔히 우리는 이것을 ‘자유의 네 단계’라고도 한다. 이 건 블로그로 옮긴다.
여기서 중요하는 것은 물고기가 새로 변신하자 마자 곧장 남쪽 바다를 향한 비행을 시작하는 게 아니라, 우선 하늘 높이 날아오르는 게 먼저였다는 점이다. 그러나 물고기가 다른 사람 또는 조건의 도움을 받았다. 그게 의존이다. 그러나 물고기가 새로 변신했더라도 날아오르는 건 새 자신의 문제이다. 새 자신의 힘으로 비상해야 한다. 홀로서기이다. 그래서 마지막 4단계에 누리는 진정한 자유란, 결국 의존을 깨닫는 것이다. 그게 지인, 신인, 성인의 모습이다. 그리고 하늘 높이 오른 새는 시선이 바뀐다. "아지랑이나 티끌은 모두 생물이 불어내는 입김이다. 하늘이 저토록 푸른 것은 하늘의 본래 빛깔인가? 멀고 멀어 끝이 없는 까닭인가? 붕새가 나는 구만리의 상공 저 위에서 지상을 내려다보아도 또한 저러할 뿐이다."(<<장자>>, "소요유")
최진석 교수는 "훈련된 지성적 시선의 높이가 그 사람의 철학 수준"이라 주장했다. 그런 사람은 자신의 시선과 활동성을 철학적 높이에서 작동시킨다. 그 때 작동되는 것이 다음의 세 가지이다. (1) 창의력과 상상력 (2) 윤리적 민감성 (3) 예술적인 영감. 인문(人文)은 ‘인간이 그리는 무늬’로 인간의 동선(動線)이다. 인문적 활동이란 인간의 동선을 파악한 후, 그 높이에서 행위를 결정하는 것이다. 상상이나 창의는 인문의 높이에서 튀어나오는 것이기 때문이다. 낮은 단계에서는 실현되지 못한다. 인문적 시야를 가지려면, 시선의 높이를 상승시켜야 한다. 그건 전략적 높이에서 자기 시선으로 세계를 보고 자신이 직접 그 길을 결정하는 일이다. 시선의 높이는 생각의 높이이고, 생각의 높이가 삶의 높이라고 최진석 교수는 자주 말한다.
시선이 바뀌면 보이는 게 달라진다. 땅 위의 아웅다웅하는 삶이 쪼잔해 보이고, 큰 틀에서 오히려 쪼잔한 싸움의 두 당사자 모두에게 귀를 기울이는 여유도 생기고, 혹여 나 자신이 싸움의 당사가 된다면 통 크게 한발 물러설 용기를 주기도 한다. 무엇보다, 더 이상 땅 위의 삶에 집착하지 않게 된다. 지금까지 우리의 삶을 지배해 온 규칙의 구속을 더 이상 받지 않게 되는 것이다. 땅 위의 삶을 하늘에서 바라봤기 때문에 새로운 깨달음을 얻는 거다. 그러다 보면, 내가 옳다고 여겨 온 신념, 나를 가둬온 고정관념을 바로 시선의 높이로 깨어 버릴 수 있다.
오늘 아침도 본격적인 이야기를 하다가, 글이 길어졌다. 여기서 멈춘다. 나머지 이어지는 글이 궁금하시면, 나의 블로그로 따라 오시기 바란다. 나의 블로그 https://pakhanpyo.tistory.com 이나 https://pakhanpyo.blogspot.com 이다. 최근에는 우리마을대학 홈페이지 블로그에도 글을 올린다. https://www.wmcss.net 이다.
오늘 저녁이 기다려진다. 오늘밤 MBC 스트레이트로 세상이 좀 정리되었으면 한다. "우리 국민은 권위주의와 특권의식으로 똘똘 뭉친 자를 지지하지 않습니다. 입만 열면 국민분열을 부추기는 자에게 나라를 맡기지 않을 것입니다. 남북한의 불신과 대결을 조장하는 자에게 민족의 미래를 맡기지 않을 것입니다. 중산층과 서민의 권익을 외면하고 오로지 기득권만 옹호하는 자를 지지 않습니다. 우리국민은 결코 역사를 거꾸로 돌리는 선택을 하지 않을 것이라고 저는 확신합니다. 따라서 (...) 우리는 반드시 승리할 것입니다." 2002년 4월 28일 노무현의 대통령 후보 수락 연설이다. 메시지 간결하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선택이다.
내 마음은 전 서울시 교육감이셨던, 곽노현님의 생각과 같다. "국힘 지지자들은 윤석열이 본.부.장. 비리로 도무지 깜냥이 못 된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아랑곳하지 않고 복수혈전을 잘할 거라는 이유 하나로 대선후보로 뽑아준 댓가를 톡톡히 치루는 중이다. 이제 와서 후회해도 소용없다. 무속의 힘을 빌어 감당할 수 없는 짐을 멘 윤석열도 아뿔사 과욕을 부렸구나 절감하겠지만 때가 늦었다. 이제는 허리가 부러지고 온몸이 바스러져도 일로매진 나아가 야지 도망가면 본.부.장. 비리 추궁과 엄벌이 기다릴 뿐이다. 사면초가가 따로 없지만 박근혜의 7시간처럼 김건희의 7시간도 수습할 방도가 없을 것이다. 욕망의 화신 김건희가 남편 윤석열에 치명타를 날리다니 이 무슨 운명의 장난인가 하겠지만 이것 이야말로 국운을 살릴 무서운 운명의 묘수다. 얼척없는[어처구니 없는] 김건희-윤석열 대권 놀음의 파탄이 임박했다."
오늘 아침 사진은 아침 산책 중에 찍은 거다. "오직 나만 홀로 흔들리는 것은/당신이 내 안에 날아와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당신이 내 안에 집을 짓지 않은 까닭이다." '화이위조'가 되지 못한 까닭이다.
새와 나무/류시화
여기 바람 한 점 없는 산 속에 서면
나무들은 움직임 없이 고요한데
어떤 나뭇가지 하나만 흔들린다
그것은 새가 그 위에
날아와 앉았기 때문이다
별일없이 살아가는 뭇사람들 속에서
오직 나만 홀로 흔들리는 것은
당신이 내 안에 날아와 있었기 때문이다
새는 그 나뭇가지에 집을 짓고
나무는 더 이상 흔들리지 않았지만
나만 홀로 끝없이 흔들리는 것은
당신이 내 안에 집을 짓지 않은 까닭이다
장자가 말하는 ‘자유의 네 단계’는 다음과 같다.
(1) 제1단계: 상식인(常識人)이다. 이런 사람들은 기껏해야 과장, 군수, 장관, 국무총리 따위 사다리를 하나하나 오르는 것을 인생의 유일한 목표로 삼고, 이를 향해 일로매진(一路邁進)하면서 살아가는 사람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렇다. 이들은 인간 한계 밖을 넘보는 것을 부질없는 짓이므로 거들떠보지도 말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메추라기처럼 시야가 좁기 때문에 자기들의 무한한 가능성을 찾지 못할 뿐만 아니라, 그런 가능성을 말하는 사람들과 실현하려는 사람들, 실현한 사람들을 비웃기까지 한다. 메추라기는 붕새보고 이렇게 말한다. “도대체 어디로 저렇게 날아간단 말인가?”
(2) 제2단계: 송영자를 예로 든다. 그는 전쟁을 반대하는 평화주의자로, 전쟁의 근본 원인이 칭찬받기를 좋아하고 비난을 싫어하는 속물(俗物)근성-교양이 없거나 식견이 좁고 세속적인 일에만 급급한 사람- 때문이라는 사실을 간파하고, 그런 것을 초월하라고 가르쳤다. 그리고 자신의 비난이나 칭찬에 “목계(木鷄, 나무 닭)”처럼, “육중한 바위처럼” 움직이지 않고 영광과 치욕을 분별해 세속에 구애(拘礙-거리끼거나 얽매임)되지 않고 초연(超然-세속(世俗)에서 벗어나 있어 현실에 구애되지 않다)한 경지에 도달한 사람이다. 그러나 스스로 칭찬이나 비난에 초연하지만, 아직도 칭찬과 비난을 칭찬과 비난으로 의식하고 칭찬받으려는 사람들을 못마땅하게 여기는 분별의 마음이 있다.
(3) 제3단계: 열자 같은 사람이다. 그는 세상사에 초연할 뿐만 아니라, 바람을 타고 아무데나 마음대로 떠다니며 자유를 누린다. 그러나 15일 지나면 돌아와 새 바람을 기다려야 했다. 이렇게 훨훨 떠다니기 위해서 어쩔 수 없이 바람이라는 외부 요인에 의지했다. 아직도 기대(有待)하는 상태이다. 무언가에 의존하는 상태이다.
(4) 마지막 제4단계: 장자의 궁극적 이상이다. 우주의 원리에 따라 자연과 하나가 되어 무한한 경지에서 노니는 절대자유의 단계이다. 아무 것에도 기대지 않는(無待, 의존하지않는 독립) 완전한 자유를 만끽하고 구가하는 무애(無碍-막히거나 거치는 것이 없음)의 삶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이 '삼무(三無), 무기(無己), 무공(無功), 무명(無名)한 사람이다. 자기가 없고, 공로가 없고, 이름이 없는 것이 아니라, 이런 것들에 집착하거나 연연(緣緣-집착하여 잊지 못하다)해하지 않는 것이다. 자아나 공로나 명예의 굴레에서 완전히 풀려난 사람들이다.
이제서야 <<이어령의 마지막 수업>> 이야기를 한다. 스승 이어령은 숙명적으로 물음표와 느낌표 사이를 오가며 살았다 한다. 그래 그는 인기가 없었다고 한다. 그냥 넘어가는 일이 없이 꼬투리를 잡기 때문이라 했다. 나도 그런 부분이 있다. 너무 따진다.
그래 나는 늘 '나의 신념 체계가 우연히 알게 된 것들 중에 하나"라 생각한다. 그러나 자주 잊는다. 자기가 믿는 신념 체계가 유일하고 정당하고 옳은 체계라고 착각하면 문제가 되기 시작한다. 우리 사회가 다소 그러한 점이 있다. 그런 착각을 하는 사람은 상대방의 신념을 고치려고 충고하고 질책하기까지 한다. 우리가 말하는 좌와 우의 문제도 그렇다. 자신에게 운명적으로 주어진 위치에 따라 자신의 세계관과 그 신념이 형성될 뿐이다. 예컨대, 1에서 10까지의 눈금이 있어, 내가 2에 있다면 1은 좌이고, 나머지 3-10은 우이다. 내가 9에 있다면, 1-8은 좌이고, 10은 우이다. 자신에게 운명적으로 주어진 위치에 따라 자신의 세계관과 그 신념이 형성된다. 그래서 우리는 공부하고 배워야 한다. 왜냐하면 공부나 배움은 자신의 눈금을 객관적으로 보려는 노력이다.
이러한 노력을 통해 우리는 자신의 세계관이 형성된 눈금이 중요한 만큼, 상대방에게도 그의 눈금이 있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 깨달음이다. 깨달은 사람은 자신의 눈금을 깊이 파는 사람이 아니라, 자신에게 그 눈금이 구속시키는 프레임이라면, 그것을 벗어 버리고 상대방 눈금의 위치를 알아차리고 역지사지하는 공감을 지닌 사람이다.
나는 '선량하게 무례한' 사람이 되지 않으려고 노력한다. 한번쯤은 ‘내가 잘못 생각하고 있나?’ 혹은 ‘내가 모르는 뭔가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그렇지 않으면, 자신만의 정의가 앞서면 그만큼 깊은 확신의 함정에 빠지게 된다. 내가 옳고, 이 일은 필요한 일이기 때문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러면 우리는 선량하게 무례한 사람이 된다. 그런 사람의 태도는 무엇이든 너무 쉽게 단순화하고, 내가 생각한 ‘옳음’' 앞세워 판단하고, 비판한다. 다른 사람들과 공감하기 위해 조심해야 할 일이다.
그래 사람은 죽을 때까지 배워야 한다. 배움에 대한 욕구가 사라지는 순간 그 사람의 한계는 딱 거기까지 이다. 성장 한계를 결정하는 게 학습능력인 만큼 이 부분을 간과해선 안 된다. 이 태도가 정말 중요하다. 시대가 워낙 빠르게 변해 기존 지식의 유통기한이 점점 짧아지고 있다. 이젠 불과 1년 전 기술을 지금은 거의 안 쓰기도 한다. 새로운 걸 빠르게 받아들이고 익히는 게 중요한 시점이다. 이런 학습 능력을 위해 우리에게 필요한 태도는 다음과 같이 4 가지이다.
(1) 적극적 수용: 다른 말로 하면 경청이다. 경청을 단순히 열심히 듣는 것으로 착각하는 사람이 많은데 경청은 ‘적극적’으로 듣고 ‘받아들이는 과정’이다. 적극적으로 듣는다는 건 상대방 말에서 중요한 부분과 특이점을 파악하는 것이다. 받아들인다는 건 그걸 자기 통찰로 녹여내는 과정을 뜻한다.
(2) 유연한 소통: 답을 다 정해 놓으면 발전할 여지가 없다. 새로운 지식이 들어갈 수 있게 항상 내가 틀릴 수 있다는 가능성을 열어 놔야 한다. 자기 전문 분야라 할지라도 늘 열린 자세가 필요하다. 이건 협업 능력에서도 중요하다. 고지식하면 교류하기 어렵고 그만큼 좋은 정보를 얻을 기회도 없다.
(3) 자기 객관화: 학습능력이 좋아지려면 자기 객관화가 돼야 한다. 전문 용어로 이걸 ‘메타인지'라 하는데 메타인지는 자신의 위치를 객관적으로 파악할 줄 아는 능력이다. 내가 뭐가 부족하고 어떤 위치에 있는지 정량적으로 분석할 수 있어야 한다. 그걸 통해 어떤 게 더 필요한지 파악하는 것이다.
(4) 지적 겸손함: 이 모든 태도의 시작은 겸손함이다. 지식이 쌓이고 경험이 많아질수록 사람은 자기 확신이 강해지는데 이건 오만함으로 연결되기 쉽다. 오만함은 학습능력에 가장 방해되는 요소 중 하나다. 배움에 있어 겸손함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자신의 부족함을 모르면 발전할 수 없다. “겸손을 배우지 않는 자는 아무것도 배우지 못한다.” 메레디스 윌슨이 말했다.
스승 이어령은 "고분고분 살면 평생 진실을 모르게 된다"고 했다. 그는 평생을 물음표와 느낌표 사이에서 살며 지적 환희와 동시에 외로움이 많았다고 한다. 질문 없는 사회에서 묻고 따지며 생각하며 살면 존경은 받으나, 사랑은 받지 못한다. 사람들은 생각하기를 싫어한다. 그러나 인류는 생각하는 사람들에 의해서 발전하고, 창조되고, 새로운 세계가 열린다. 그러나 질문 없는 사회에서 질문자로 사는 것은 형벌이다. 알아도 모르는 체하고 몰라도 아는 체하며 사는 게 습관이 된 사회에서, 나같은 인문 운동가, 한 치 더 깊게 생각하는 사람은 고통을 겪는다. 특히 인터넷의 발달과 함께 생각이 자랄 틈을 안 주는 사회가 되었다. 인터넷이 아닌 자신의 머리로 생각할 시간을 주지 않는다. 바로 네이버에게 묻는다.
이젠 언어의 문제로 대화가 넘어갔다. 스승은 '우리는 언어를 기반으로 생각한다'고 했다. 물질 그 자체가 언어가 아니라, 차이의 의미가 언어라고 했다. 그리고 이 세상은 자연계, 기호계, 법계로 크게 세 가지로 나뉜다고 했다. 그러니 폭풍우 친다고 바다를 벌하는 어리석은 사람이 나오는 것은 이 세가 세계를 구분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스스은 생각하는 자로 깨어 있으려면, 뜬소문에 속지 않는 연습이 필요하다고 했다. 있지도 않은 것으로 만들어진 풍문의 세계에 속지 말고, 스스로에게 묻고 또 물어 진실에 가까운 것을 찾으려고 노력해야 한다고 했다. 그런 사람을 그는 '싱킹맨(thinking man)'이라 했다. 다시 말하면, 그건 어린아이처럼 세상을 보고, 어린아이처럼 사고하는 거라 했다. 어른들은 머리가 굳어서 '다 안다'고 생각한다.
생각하는 철학은 위에서 말했던 자연계(피지스), 법계(노모스), 기호계(세미오시스)처럼 범주를 구분해서 사고할 줄 아는 거다. 특히 기호 안에서는 정확한 개념을 토대로 사고해야 한다. 이 기호계에서 문학이 나오고, 예술이 나온다. 그래 기호계에서 질문하는 인문 운동가는 타인과는 내내 껄끄럽고 소외되고 외롭다. 다르게 산다는 것은 외로운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외로움에서 ㅣ가 나오고, 창조가 나오고, 정의가 나오는 거다. 관습이나 타성에 의한 움직임은 언젠가 멈추지만, 작더라도 바람개비처럼 자기가 움직일 수 있는 자기만의 동력을 가져야 한다. 스승은 생각이 곡 자기 발전 동력이라 했다.
그 생각 속에서, 우리 인간은 주체적으로 인간의 운명을 어떻게 바꿔가느냐, 그 선택지 속에서 폭넓은 사고를 해야 한다. 어쩌면 그 선택지들 앞에서 우리는 고아이다. 고아는 서글픈데, 고아라는 감각이 또 우리를 한 발 한 발 신세계로 건너가게 한다. 살아 있는 것은 물결을 타고 흘러가지 않고, 물결을 거슬러 올라간다. 물결 따라 떠내려간다면, 사는 게 아니다. 긴 글이 되었다. 코로나-19로 세상과 단절된 채, 게다가 주일이라 길게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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