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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운동가의 사진 하나, 시 하나

<<이어령의 마지막 수업>> (4)

1872. 인문 운동가의 인문 일기

(2022년 1월 14일)

 

오늘 아침도 시대의 지성 이어령과 '인터스텔라' 김지수의 '라스트 인터뷰' "삶과 죽음에 대한 그 빛나는 이야기"란 부제를 단 <<이어령의 마지막 수업>> 읽기를 이어간다. 다음과 같은 두 가지 화두를 잡고 싶다. (1) 큰 질문을 경계하라. 사실 우리는 너무 큰 질문을 하고 헤맨다. (2) 글을 쓰면 벼랑에서 한 발짝 더 나아갈 수 있다. 그래 나도 아침마다 <인문 일기>를 쓴다. 나를 벼랑에서 한 발짝 더 나아가게 하는 일이다.

영국 철학자 프랜시스 베이컨에 의하면, 인간은 다음 같이 세 부류가 있다.
• 개미처럼 땅만 보고 달리는 부류: 땅만 보고 가면서 눈앞의 먹이를 주워 먹는 현실적인 사람들이다.
• 거미처럼 시스템을 만들어 놓고 사는 부류: 허공에 거미줄을 치고 재수 없는 놈이 걸려들기를 기다리는 사람들이다. 뜬구름 잡고 추상적인 이야기를 하는 학자들이 대표적이다.
• 꿀벌처럼 화분으로 꽃가루를 옮기고 스스로의 힘으로 꿀을 만드는 부류: 여기저기 비정형으로 날아다니며 매일매일 꿀을 따는 벌 같은 사람들이다. 
개미와 거미는 있는 걸 gathering 하지만, 벌은 화분을 tranfer 한다. 그게 창조이다. 작가는 벌처럼 현실의 먹이를 찾아다니는 사람이다.

스승은 큰 질문을 경계하라고 했다. 인터뷰어가 되어 질문을 던질 때가 있다. 어떤 사람들은 어려운 질문에도 거침없이 대답하는 게 참 인상적이었다. 처음에는 '그저 말을 잘하는 사람이구나'라고 생각했는데 시간이 지나니 다른 것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그들은 대개의 사람들이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것에 계속 질문을 던져온 사람들이었다. 더 시간이 흘러 인생의 빅데이터가 쌓이자 ‘위기를 기회로 인식’하는 사람보다 한 단계 고수들을 알게 됐다. 그들은 가장 잘나갈 때 가장 큰 위기의식을 느끼며 최악을 대비한 질문을 가지고 사는 사람들이었다. ‘질문하는 연구소’의 설립자 마릴리 애덤스는 <<질문의 기술>>에서 질문을 ‘심판자의 질문’과 ‘학습자의 질문’으로 나누었다. “누구 탓이지?” “어쩌다 패배했지?” 라는 ‘심판자의 질문’은 사람을 불안과 패배감에 젖어 들게 하는 반면, “이 상황에서 배울 점은 뭘까?” “지금 당장 가능한 일은?” 같은 ‘학습자의 질문’은 긍정적으로 심리적 안정감과 새로운 도전 의식을 준다는 게 책의 논지였다.

소설가 백영옥은 공원을 걷다가 "나이 들어 좋은 것이 있느냐?"는 질문에 한 선배가 “이젠 내 한계를 알아!”라고 대답한 적이 있다고 했다. 그녀는 이 말을 듣고, "이제 못하는 걸 잘하려고 노력하기보다, 잘하는 걸 더 잘하려고 노력하겠다는 게 요지"로 해석하고, 이 질문과 대답이 그녀에게 이후 일에 대한 태도를 크게 바꿨다. 이때의 질문은 또 다른 이름의 ‘지혜’가 된다.

인문 운동가가 추구하는 인문정신을 갖는다는 것, 인문적으로 산다는 것은 보편적으로 완성된 이론을 내면화 하는 것이 아니라, 지금 자기가 처한 상황, 그곳에서 자기 눈으로 발견된 그 문제를 해결하려고 덤비는 인문적 활동으로 일상을 채우는 것을 말한다. 이때 필요한 것은 대답하는 삶에서 질문하는 삶으로 건너가는 일이다. 이론을 숙지하는 삶에서 문제에 빠져드는 삶으로 전환하는 것이어야 한다. 

스승은 글을 쓰면 벼랑에서 한 발짝 더 나아갈 수 있다. 그래 나도 아침마다 <인문 일기>를 쓴다. 나를 벼랑에서 한 발짝 더 나아가게 하는 일이다. 스승에 의하면, 보통 사람은 죽음이 끝이지만, 글 쓰는 사람은 다음이 있다. 죽음에 대해 쓰는 거다. 벼랑 끝에서 한 발짝 더 갈 수 있는 거다. 스승은 '사람이 어떻게 끝나는 가를'를 보고 기록하는 것이 자신의 삶의 마지막 갈증을 채우는 일이라 했다.

글이 길어진다. 여기서 멈춘다. 나머지 이어지는 글이 궁금하시면, 나의 블로그로 따라 오시기 바란다. 나의 블로그 https://pakhanpyo.tistory.com 이나 https://pakhanpyo.blogspot.com 이다. 최근에는 우리마을대학 홈페이지 블로그에도 글을 올린다. https://www.wmcss.net 이다.

오늘 아침 공유하는 시는 경구로만 여겨질 때가 태반이다. 실제 삶에서는 문이 닫힐 때면 안타깝고 불안해 한다. 그러나 그런 절박한 상황에서 우리는 위로를 빨리 찾아야 한다. 어떻게? 다음과 같은 기억에서 위로를 빨리 소환하는 것이다.
(1) 시인의 노래처럼 절망 앞에서 정직할 때 희망의 문이 열렸던 기억
(2) 현명한 이들의 충고
(3) 시와 영화 같은 예술의 일깨움이 주는 위로이다. 특히 예술은 사람들이 서로 소통하려고 하는 메타언어이기 때문이다.

위의 사례들은 뻔하다고 생각되더라도 잊곤 했던 위로를 나누는 힘이 된다. 함께 나누면서 각자의 자리에서 최선을 다할 때 시인의 노래처럼 그 "끝이 참된 시작"이 될 것이다. 


길이 끝나면/박노해

길이 끝나면 거기
새로운 길이 열린다.

한쪽 문이 닫히면 거기
다른 쪽 문이 열린다.

겨울이 깊으면 거기
새 봄이 걸어 나온다

내가 무너지면 거기
더 큰 내가 일어선다.

최선의 끝이 참된 시작이다.
정직한 절망이 희망의 시작이다.


우리의 뇌(특히 좌뇌)는 항상 재잘거린다. 한순간도 쉬지 않고 뭔가를 떠들어 댄다. 그러면서 생각이 사방으로 흩어진다. 그래 우리는 이 산만함에 맞서는 훈련을 해야 한다. 그것이 수렴과 집중이다. 요즈음 자신의 힘을 절제하지 못해, 원심력에 의지하는 사람들이 주변에 많다. 잔뜩 먹기만 하고, 발산하지 못해서 그렇다. "그런 사람은 중독을 유발하여 결국 자신을 파멸시키는 쾌락, 자극, 새로운 것을 항상 하이에나처럼 찾아다닌다. 쉽게 웃음과 울음을 자아내는 촌극을 감동이라 평가하고, 세네카의 구심력 찬양 문구인 ‘카르페 디엠(carpe diem)을 건배사로 착각하고  니체의 고통을 삶의 일부로 수용하라는 혜안인 ‘아모르 파티(amor fati)'를 노래방 춤 쯤으로 여긴다. 원심력에 경도되어 있는 사람은 힘이 없고 불안하고 산만하다."  배철현의 <매일묵상>에서 읽은 것이다. 나도 그렇게 생각한다. 몇 일전부터 나도 산만하다. 

반면, 원심력을 구심력으로 제어하기 위해 하루를 보내는 사람들도 있다, 그들은 힘이 있다. 그런 힘을 가지기 위해서는 원심력의 과시를 희생하여야 한다. 나는 이 구심력과 원심력의 조화를 위해, 아침 마다 <인문 일기>를 쓴다. 자꾸 밖으로만 출렁이는 생각과 본능에 영향을 받는 사람은 무기력하지만, 그것들을 제어하고 조절하여, 그 힘을 비축하는 사람은 강력하고 매력적이기 때문이다. 그 원심력을 제어하고 조절하는 힘은 인문 정신에서 나오기 때문이다. 그 인문 정신은, 벌처럼 현실의 먹이를 찾아다니는 작가에게서 나온다.

스승은 "일상적 존재는  묻혀 있는 존재"라 말했다. 왜냐하면 우리 모두 덮어놓고 살기 때문이다. 덮어놓은 것을 들추는 게 철학이고, 진리이고 예술이다. 우리가 감쪽같이 덮어둔 게 죽음이다. 우리 모두 다 죽는데 말이다. 스승은 "우리가 진짜 살고자 한다면 죽음을 다시 우리 곁으로 불러와야 한다'고 했다. 죽음의 흔적을 없애면 생명의 감가도 희미해 진다. 옛날엔 죽음도 묘지도 가까이에 있었다. 현재는 죽음이 죽어버린 시대이다. 그런 의미에서 코로나가 대단한 일을 한 거다. 팬데믹 앞에서 죽음이 코 앞에 있다는 것을 우리는 깨달었다. 전 인류가 죽음을 잊고 돈, 놀이, 관능적인 감각에만 빠져 있다가, 코로나가 퍼뜩 정신을 들게 해주었다. 

스승은 "죽음이란 주머니 속에 달그락거리는 유리 그릇"이라 했다. 코로나는 바로 그 깨지기 쉬운 유리그릇을 안고 있는 우리 모습을 들춰냈다. 그래 스승은 "진실의 반대말이 망각"이라 했다. 우리가 잊고 있었던 것 속에 진실이 있다는 거다. 경계할 것은 거짓이 아니라 망각이다. 덮어 버리고 잊어버리는 것, 은폐가 거짓이다.

스승은 사람들이 혼밥을 하면서 스마트폰으로 사진을 찍어 올리는 것을 보고, 은폐된 진실을 밝혀냈다. 우리는 함께 먹는 것에 대한 강한 집착이 있다. 축구에서 상대편이 골킷 했을 때도 '한 골 먹었다"고 한다. 재미난 이야기도 있다. 수학 시간에 선생님이 '사과 다섯 개 중 두 개를 먹으면 몇 개가 남지?' 했더니 학생이 '두 개요!' 했다 한다. '왜 그래?' 했더니, '우리 엄마가 먹는 게 남는 거라 했다는 거다. 내 입에 들어가는 게 남는 거란 거다. 배곯던 시절의 슬픈 유머이다.  그러나 스승은 '식욕이 인류의 가장 강한 욕망'이라 했다. 죄의 시작과 끝이 먹는 거란 말이다. 왜 그런 가?   

생각해보지 않았던 것인데, 먹는 것에서 시작해 먹는 것으로 끝나는 게 구약과 신약의 하이라이트이다. 구약을 보면, 선악과를 따먹으면서 인간에 죄가 들어 왔다. 뱀이 이브를 꼬시고, 이브가 아담을 꼬셨다. 너도 한번 먹어보라고, 같이 먹자고 꼬셨다. 신과 같아지려는 그 욕망으로 금지된 열매를 따먹었다. 그게 죄의 시작이다. 그리고 불순종으로 '먹은' 그 죄를 끝낸 이가 바로 예수이다. 예수가 십자가에 달리기 전에 제자들과 그 유명한 최후의 만찬을 한다. 내 몸이 빵이고, 내 피가 포도주이다. 나를 먹으라고 한다. 그게 죄의 종말이다.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를 먹으라는 말씀에 따라 기독교에서는 빵과 포도주를 나눠 먹으며 영적인 공동체로 거듭난다. 사실 사는 게 먹는 거다. 우리는 가족도 식구(食口)라고 한다. 한솥밥을 먹는다는 거다. 서양도 마찬가지이다. 회사를 컴퍼니(company)라 하는데, com이 '함께'이고, pany가 '빵'이다. 회사라는 말도 한솥밥을 먹는 공동체라는 뜻이다.

오늘은 여기서 멈추고, 이어지는 이야기는 내일로 미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