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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운동가의 사진 하나, 시 하나

<<이어령의 마지막 수업>> (3)

오늘 아침도 시대의 지성 이어령과 '인터스텔라' 김지수의 '라스트 인터뷰' "삶과 죽음에 대한 그 빛나는 이야기"란 부제를 단 <<이어령의 마지막 수업>> 읽기를 이어간다. 다음과 같은 두 가지 화두를 잡고 싶다. (1) 가장 중요한 것은 비어 있다. (2) 풀을 뜯어 먹는 소처럼 독서하라. 어쨌든 책을 읽는 것이 중요하다.

이목구비 중에서 귀가 가장 복잡하고 특이하다. 눈, 코, 입은 성형 수술하면 다 똑같아진다. 그러나 귀는 그렇게 할 수 없다. 귀가 얼굴의 지문이다. 사람의 인체는 모든 게 정돈되어 있는데, 귀와 배꼽만 정돈이 되어 있지 않다. 우리가 어머니 뱃속에서 나온 날을 '귀 빠진 날'이라 한다. 그리고 어머니 몸에서 끊어낸 탯줄의 똬리가 배꼽이다. 배꼽은 몸의 중심에 있다. 시체를 해부하는 검시관들에 의하면,  시체를 해부할 때 반드시 배꼽 중심을 배를 가른다고 한다. 그리고 세상에 똑같은 배꼽은 없다고 한다. 가장 흥미로운 것은 배꼽은 내가 타인의 몸과 연결되어 있었다는 유일한 증거물이라는 거다. 배꼽은 비어 있는 중심이다. 가장 중요한 것은 비어 있다. 생명의 중심은 비어 있다. 다른 기관들은 바쁘게 일하지만, 오직 배꼽만이 태연하게 비어 있다. 비어서 웃고 있다.

비움의 철학자 하면 노자이다. <<도덕경>> 제11장을 소환한다. "서른 개 바퀴살이 한 군데로 모여 바퀴통을 만드는데 그 가운데가 비어 있음으로 수레의 쓸모가 생겨납니다. 흙을 빚어 그릇을 만드는데 그 가운데가 비어 있음으로 그릇의 쓸모가 생겨납니다. 문과 창을 뚫어 방을 만드는데 그 가운데가 비어 있음으로 방의 쓸모가 생겨납니다. 그러므로 있음은 이로움을 위한 것이지만 없음(비어 있음)은 쓸모가 생겨나게 하는 것입니다.' 그 다음 내가 가장 좋아하는 <<도덕경>> 구절이다. 제16장에 나온다. "완전한 비움에 이르십시오. 참된 고요를 지키십시오, 온갖 것 어울려 생겨날 때 나는 그들의 되돌아감을 눈여겨봅니다”라고 한다. 원문은 이렇다 “致虛極, 守靜篤, 萬物竝作, 吾以觀復(치허극 수정독 만물병작, 오이관복)” 이다.

나는 이 문장을 만날 때마다 "되돌아 감"을 나는 늘 주목한다. 도(道)의 핵심 내용은 반대 방향을 지향하는 운동력, 즉 반反이다. 어떤 것도 변화하지 않거나 독립적으로 존재할 수 없다. 이것이 동양철학이고, 이를 '음양오행(陰陽五行)'으로 해석한다. 이를  "반자도지동(反者道之動)"(<도덕경> 40장)라 한다. 나는 오늘 아침도 '되돌감'을 되새긴다. 달도 차면 기울고, 낮이 밤이 되고 밤이 낮이 된다. 아주 더운 여름이 되면 다시 추운 겨울로 이동하고, 심지어 온 우주도 팽창과 수축을 반복한다. 이 모든 것은 어느 한 쪽으로 가다가 극에 도달하면 다른 쪽으로 가는 '도'의 원리에 따르는 운동이라는 것이다. 너무 그리워하지 말자. 때는 기다리면 온다.

끝으로 비움을 강조하고 있는 <<도덕경>> 제48장도 그냥 지나칠 수 없다. "학문의 길은 하루하루 쌓아가는 것. 도의 길은 하루하루 비워가는 것. 비우고 또 비워 함이 없는 지경[無爲]에 이르십시오. 함이 없는 지경에 이르면 되지 않는 일이 없습니다.' 원문은 이렇다. '爲學日益, 爲道日損. 損之又損, 以至於無爲. 無爲而無不爲(위학일익, 위도일손. 손지우손, 이지어무위, 무위이무불위)." 여기서도 내가 좋아하는 것이 "덜어내고 덜어내면 무위에 이르고, 무위하면 이루지 못하는 것이 없다(無爲而無不爲)"는 말이다. 여기서 무위를 아무 것도 하지 않거나 무슨 일이건 그냥 되어가는 대로 내버려주는 것이 아니다. 그리고 노자가 하고 싶었던 말은 무위가 아니라 무불위(되지 않는 일)라는 효과를 기대하는 거였다. 어쨌든 비우고 덜어내 텅 빈 고요함에 이르면, 늘 물 흐르듯 일상이 자연스러워진다. 그런 사람은 자신을 있는 그대로 드러낼 뿐 포장하지 않으며, 순리에 따를 뿐 자기 주관이나 욕심을 고집하지 않는다. 그 결과 그의 모든 행위는 그물에 걸리지 않는 바람처럼 항상 자유롭고 여유롭다. 샘이 자꾸 비워야 맑고 깨끗한 물이 샘 솟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만약 비우지 않고, 가득 채우고 있으면 그 샘은 썩어간다. 그러다 결국은 더 이상 맑은 물이 샘솟지 않게 된다. 우리 마음도 마찬가지이다. 마음을 자꾸 비워야 영혼이 맑아진다.

글이 길어진다. 여기서 멈춘다. 나머지 이어지는 글이 궁금하시면, 나의 블로그로 따라 오시기 바란다. 나의 블로그 https://pakhanpyo.tistory.com 이나 https://pakhanpyo.blogspot.com 이다. 최근에는 우리마을대학 홈페이지 블로그에도 글을 올린다. https://www.wmcss.net 이다. 오늘 아침 공유하는 시는 공광규 시인의 <속빈 것들>이다. 오늘의 화두에 닿는 시이다. 


속 빈 것들/공광규

아름다운 소리를 내는 것들은 다 속이 비어 있다

줄기에서 슬픈 숨소리가 흘러나와
피리를 만들어 불게 되었다는 갈대도 그렇고
시골집 뒤란에 총총히 서 있는 대나무도 그렇고
가수 김태곤이 힐링 프로그램에 들고 나와 켜는 해금과 대금도 그렇고
프란치스코 회관에서 회의 마치고 나오다가 정동 길거리에서 산 오카리나도 그렇고

나도 속 빈 놈이 되어야겠다
속 빈 것들과 놀아야겠다


도가(道家)에서는 비움(허, 虛)를 숭상한다. 수레바퀴의 가운데가 둥그렇게 비어 있어야만 바퀴살을 수십 개 꿸 수 있다는 거다. 상선약수(上善若水), 무위자연(無爲自然)이라는 표현도 모두 '비움'을 말하고 있는 거다. 골프채를 잡을 때에도 '힘 빼라'는 이야기를 코치에게 듣고, 기타를 배울 때도 '힘 빼라'는 이야기를 듣는다. 그러나 실제로는 힘이 잘 빠지는 게 아니다. 힘을 빼고 무심한 듯한 상태로 있는 비움을 몸으로 체득하기가 그만큼 어렵다.

스승은 책을 의무감으로 읽지 않는다고 한다. 눈에 띄고 재미 있는 곳만 찾아 읽는다고 한다. 나비가 꿀을 딸 때처럼 말이다. 나비는 이 꽃 저 꽃 가서 따지, 1번 2번 순서대로 돌지 않는다. 목장에서 소가 풀을 뜯는 것을 봐도, 여기저기 드문드문 뜯는다. 풀 난 순서대로 가지런히 뜯어먹지 않는다. 스승은 풀을 뜯어 먹는 소처럼 독서한다고 했다. 

어쨌든 독서는 필요하다. 그 이유를 정리해 본다. 인간이 신체적 조건은 보잘 것 없더라도 다른 동물들에 비해 강점은 가진 것을 최대한 효율적으로 활용하다는 점이다. 대표적인 것이 던지기이다. 인간과 신체구조가 유사한 침팬지의 공 던지는 속도가 시속 30Km 밖에 안 된다고 한다. 그 정도는 우리 초등학생 수준 정도란다. 메이저 리그 투구의 구속은 시속 160km를 오간다. 진화론을 처음 주장했던 찰스 다윈에 따르면, 인간은 직립 보행으로 손이 자유로워지면서 독특한 던지기 능력을 얻었다. 효과적 사냥이 가능해진 건 그 덕분이다. 인간의 던지기는 팔 뿐만 아니라 어깨까지 활용하는 것이 특징이다. 이때 어깨를 감싼 인대와 힘줄이 새총의 고무줄처럼 탄성에너지를 응축했다 던지는 순간 풀어 놓는다. 

뿐만 아니라, 동물들과 달리 인간들은 인체 내에 내장된 최고의 기술이 '읽고, 쓰기'이다. 스마트폰 같은 기술처럼, 인간 몸에 내장된 기술도 많다. 예를 들어 각종 예체능 분야 고수들의 고난도 기량을 보면 알 수 있다. 개별적으로 특화된 기술 외에 인류 범용으로 확립된 기술이 바로 읽고 쓰는 능력이다. 인간은 언어를 통해 마음을 길들이고 보다 정교한 생각을 할 수 있게 되었던 것은 5만년 전으로 본다. 언어의 발명은 인류 입장에서 기적 같은 일이다. 언어는 집단 내 의사소통과 집단 구성원 간 협동을 도왔다. 인간이 개념을 통해 자문자답할 수 있게 되고 그 결과, 학습, 창작 요구를 불태울 수 있게 된 데도 언어의 역할이 컸다.

뒤이어 언어를 담은 문자가 발명되면서 인류는 또 한 번 높이 도약했다. 흥미로운 것은 말의 시대에서 글의 시대로 넘어올 때 저항이 만만찮았다는 점이다. 요즈음은 문자와 글이 물과 공기처럼 익숙하지만, 그 천하의 소크라테스가 문자에 반대했다. 소크라테스는 문자의 발명은 "학습자의 정신을 나태하게 만들 것이다. 학습자는 더 이상 자신의 기억을 사용하지 않을 테고, 스스로 생각하려 하기보다 문자로 쓰인 외부 자료를 보다 신뢰할 것이기 때문이다"고 말했다. 그러나 이후 장장 4000년간 인류는 글의 혜택 속에 살고 있다.

문명(文明)이란 말 그대로 '글로 밝아진다'는 것이다. 문화, 인문학 등 문(文)자가 들어가는 곳은 다 문자, 즉 글로 이루어지는 것이다. 종교, 과학 등도 마찬가지이다. 호모 사피엔스의 모든 위업은 이 문자, 즉 글 위에 쌓이고 전수됐다. 게다가 인쇄술의 발명은 여기에 터보 엔진 같은 역할을 했다. 프랑스 인지 심리학자 스타니슬라스 드앤(Stanislas Dehaene)은 "종이 위 점과 선이 눈을 거쳐 인간 의식에 심상으로 떠오르고 의미로 이해되는 과정은 경이 그 자체"라 말했다. 정말 그렇다.

실제로 인간은 한눈에 단어를 이해한다고 생각하지만 뇌는 글꼴에서 의미를 곧바로 얻지 않는다고 한다. 문자열을 부분으로  쪼개고, 그것들을 다시 문자, 음절, 형태소 등의 위계로 재구성하는 작업을 거친다고 한다. 이 같은 분해와 재결합이 모두 자동으로, 무의식적으로 이뤄지기 때문에 모를 뿐이라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읽기는 뇌신경에 길을 내고 닦은 결과물인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독서는 새로운 능력을 학습, 지능을 어떻게 확대하는지 명확이 보여준다. 던지기가 사냥을 위한 고도의 신체 기술이었 듯이 읽기는 뇌 속 소프트웨어의 성능을 향상시키는 신생 기술이다. 따라서 우리는 '부의 양극화'보다 두려운 것이 '지(知)의 양극화'이다. 많은 사람이 자동화로 인한 인간의 위기와 부의 양극화를 걱정한다. 그런데 실상 그 못지않게 우려해야 할 게 '지의 양극화'이다. 오늘날처럼 대중이 짧고 쉬우며 직관적인 이미지에만 반응하면, 자칫 사고마저 얕고 단순해질 수 있으며, 이를 방치하면 획일적 대중과 창의적인 소수 간의 격차는 점점 더 벌어질 수 있다.

그럴 경우, 가짜 뉴스와 선동을 앞세운 포퓰리즘의 위험도 커질 것이다. 대중은 말할 것도 없고 창의적인 소수도 안심할 수 없다. 그런 양상은 이미 지식 생산 영역을 중심으로 조금씩 표면화되고 있다. 예컨대, 과학 시대의 지식은 인프라와 인력을 갖춘 곳에서 격차를 벌려간다.

독서는 인간이 딛고 심연으로 돌진해 들어갈 수도, 하늘로 날아오를 수도 있는 도약대이다. 하지만 이 마법의 기술은 얕고 가벼운 공짜 오락물을 앞세운 또 다른 기술들의 파상 공격으로 주춤거리는 중이다. 어떤 신기술도, 그 기술이 만들 새 세상도 인간이 생각하는 능력을 잃는다면 사상누각일 수밖에 없다. 인류가 꿈꾸는 미래는 '그 너머'를 생각하는 능력에 좌우될 것이기 때문이다.

최 진석교수는 "지적 인식을 위해 지금까지 개발 된 것으로 독서가 최고"라 말했다. 책이나 좋은 글을 읽는 것이다. 그는 "지식과 내공을 동시에 잘 닦을 수 있는 것이 독서"라고 강조했다. 문제는 펼친 책을 끝까지 읽는 일이나 산 책을 정말로 읽는 일은 다 인내를 요구한다는 점이다. 시간을 들여야 한다 것이다. 그리고 그 내용을 요약하거나 마음에 닿는 글을 적으면서 읽어야 한다는 점이다. 그런 것을 최 교수는 '인격적인 단련'이라 한다. 이 번 달에는 그걸 '수련'이라 표현했다. 나는 그냥 '사는 훈련'이라 말하고 싶다. 그 훈련은 우선 시간을 들이고, 인내심을 가지고  지적인 수고를 하는 것이다. 프랑스 작가 파스칼 키나르( Pascal Quinard)는 독서는 시공간을 넘나들며 아직 경험하지 않고 이해되지 않은 어떤 곳으로 데려다 주는 마법을 부린다는 뜻에서, 독서를 "마법의 양탄자"에 비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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