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 운동가의 시 하나, 사진 하나

봐야 될 것을 보는 것과 보고 싶은 것을 보는 것의 차이는 크다. 읽는 것도 마찬가지이다. 내가 읽어서 힘이 안 드는 것, 읽어서 재미있는 것, 읽어서 편하게 나한 테 들어 오는 것을 읽으며 살고 싶다. 사는 것도 마찬가지이다. 만나야 할 사람을 만나는 것과 만나고 싶은 사람을 만나는 것의 차이도 크다. 내가 만나서 힘이 안 되는 사람, 재미가 없는 사람은, 나를 불편하게 하는 사람은 안 만난다.
그래서 심심하다. 우리가 흔히 공부하는 이유가 심심해서이다. 삶이 지루하지 않기 위해서이다. 재미를 찾기 위해서이다. 좋아하는 어떤 것에 자신을 맡기기 위해서이다. 좋아하는 일을 계속하다 보면, 사랑하게 되고, 사랑하다 보면, 또 그 일을 계속하게 된다. 그러니 재미를 찾으려는 갈망에서 모든 탁월함은 비로소 싹을 틔운다. 공부를 하는 이유는 진리를 찾으려고, 당장 필요한 문제를 해결하려고, 남보다 잘난 사람이 되고 싶어 서가 아니다. 우리가 좋은 일보다는 좋아하는 일을 해야 하는 이유이다. 심심함은 마음의 상태이다. 심심함이나 지루함을 느끼고 재미를 찾기 위해서 하지 않으면 그 행위가 처리해야 할 하나의 일이 되어 버린다. 심심하다, 즐겁고 싶다, 이런 것들은 내 마음의 활동이다. 그냥 마음 따라 읽는 것이지, 거기서 무언가를 얻어내냐 한다고 생각하면, 자신이 그 책의 지배자가 된다.
문제는 재미를 느끼다가, 그 일이 재미 없어지는 경우가 있다. 재미가 심심함으로 바뀌면서 우리는 그 심심함을 또 재미로 바꾸려 노력할 것이다. 이러면서 인간은 성장한다. 그리고 인간은 점점 더 커진다. 송나라의 철학자 장횡거는 이렇게 말한다. 책을 읽음으로써 우리는 '유지차심(維持此心)', 즉 마음을 유지한다고 했다. 내 마음을 지킨다고 말이다. 심심하면, 그냥 읽는다. 그러다 거기서 재미를 찾으면 된다. 심심함을 벗어나려고 찾은 것이 즐거운 일이 되는데, 그 즐겁게 하는 일 혹은 좋아서 하는 일이 모든 탁월함의 원천이 된다. 그래서 일상에서 심심함을 느낄 정도의 리듬을 유지하는 일이 그래서 중요하다. 그러니까 삶의 리듬을 가끔씩 심심하도록 만들어야 한다는 말이다.
프랑스 천재 시인 랭보는 시인을 '견자(見者, voyant)'라 한다. 한국의 시인 중에 가장 잘 관찰하고, 잘 묘사하는 시인인 손택수의 <멸치>라는 시를 알게 되었다. 매일 지나다니는 길도 자세히 살펴보면 어제와 달라져 있다. 그 차이를 발견하려는 태도와 발견했을 때의 즐거움은 우리의 일상에 생기를 가져다 준다. 오늘은 좋은 날인지, 저녁 약속이 4개나 겹친다.
멸치/김기택
굳어지기 전까지 저 딱딱한 것들은 물결이었다
파도와 해일이 쉬고 있는 바닷속
지느러미의 물결 사이에 끼어
유유히 흘러 다니던 무수한 갈래의 길이었다
그물이 물결 속에서 멸치들을 떼어냈던 것이다
햇빛의 꼿꼿한 직선들 틈에 끼이자마자
부드러운 물결은 팔딱거리다 길을 잃었을 것이다
바람과 햇볕이 달라붙어 물기를 빨아들이는 동안
바다의 무늬는 뼈다귀처럼 남아
멸치의 등과 지느러미 위에서 딱딱하게 굳어갔던 것이다
모래 더미처럼 길거리에 쌓이고
건어물집의 푸석한 공기에 풀리다가
기름에 튀겨지고 접시에 담겨졌던 것이다
지금 젓가락 끝에 깍두기처럼 딱딱하게 집히는 이 멸치에는
두껍고 뻣뻣한 공기를 뚫고 흘러가는
바다가 있다 그 바다에는 아직도
지느러미가 있고 지느러미를 흔드는 물결이 있다
이 작은 물결이
지금도 멸치의 몸통을 뒤틀고 있는 이 작은 무늬가
파도를 만들고 해일을 부르고
고깃배를 부수고 그물을 찢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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