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786. 인문 운동가의 인문 일지
(2026년 8월 13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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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년 8얼 중순은 3대 우주 쇼 중 하나인 페르세우스자리 유성우(별똥별)가 밤하늘을 수놓는 시기로 잘 알려져 있다. 시간 당 최대 100개의 별똥별이 떨어진다고 한다. 2026년 올해는 달빛이 거의 없어 관측하기에 최적의 조건이라고 해 어젯밤은 딸과 동네 운동장으로 나갔다. 이미 자리를 잡고 있던 고화백 일행의 자리에 끼었다. 난 별똥별을 겨우 한 번 보았다. 딸은 다섯 번 보았다고 했다.
유성(流星; 문화어: 류성, 별찌, meteorite)은 별똥 또는 별똥별이라고도 하며, 유성체(문화어: 별찌)가 지구 대기권으로 매우 빠른 속도로 돌입하여 밝은 빛줄기를 형성하는 것이다. 유성은 지구 대기에서 일어나는 현상이며, 스스로 빛을 내는 항성과는 다른 것이다. 유성은 혜성에서 떨어져 나온 돌가루라고 생각할 수 있으며, 유성이 되는 유성체는 대부분 굵은 모래알 정도로 작은 것들이다.
한국천문연구원에 따르면, 비슷한 시간 지구 반대편에서는 달이 태양을 완전히 가리는 개기 일식이 펼쳐진다. 한국 시간 기준 13일 새벽 진행되는 이번 일식은 그린란드, 아이슬란드, 스페인 등 일부 지역에서만 관측할 수 있으며 국내에서는 볼 수 없다. 아울러 12일 새벽 국내 하늘에서는 수성, 목성, 화성, 천왕성, 토성, 해왕성 등 6개 행성이 한 하늘 지평선 위에 늘어서는 ‘행성 퍼레이드’ 현상이 나타나는 등 8월 중순 다채로운 천문 이벤트가 있다 한다. 오늘 아침 <인문 일지>를 쓰면서, 언젠가 적어 두었던 류시화 시인의 <별>을 찾아 공유한다.
별/류시화
별은 어디서 반짝임을 얻는 걸까
별은 어떻게 진흙을 목숨으로 바꾸는 걸까
별은 왜 존재하는 걸까
과학자가 말했다. 그것은 원자들의 핵융합 때문이라고
목사가 말했다. 그것은 거부할 수 없는 하나님의 증거라고
점성학자가 말했다. 그것은 수레바퀴 같은 내 운명의 계시라고
시인은 말했다. 별은 내 눈물이라고
마지막으로 나는 신비주의자에게 가서 물었다
신비주의자는 별 따위는 아예 쳐다보지도 않았다
그는 뭉툭한 손가락으로 내 가슴을 툭툭 치며 말했다 차라리
네 안에 있는 별에나 관심을 가지라고
그 설명들을 듣는 동안에
어느새 나는 나이를 먹었다
나는 더욱 알 수 없는 눈으로
별들을 바라본다
이제 내가 바라는 것은
인도의 어느 노인처럼
명상할 때의 고요함과 빵 한 조각만으로
만족하는 것
내가 가장 싫어하는 것은 그 노인처럼
밤에 먼 하늘을 향해 앉아서
별들을 바라보는 것을 방해 받는 일
이 시를 소개한 분[먼산 바라기]은 덧붙임에서 다음 질문을 했다.
▪ 별들의 후손인 우리는 왜 이렇게 조무래기가 되었나?
▪ 한 생을 아등바등 거리기 만 하다가 살기엔 우리의 출신은 너무 고귀한 게 아닌가?
눈이 퇴화한 지렁이처럼 우리는 고향을 잊었다. 아예 별을 바라볼 줄 모른다. 질문할 줄도 모른다. 우리는 과학자와 목사와 신비주의자가 가리키는 길을 비틀거리며 걸어 여기까지 왔다. 손에 잡힌 건 아무것도 없다. 이젠 기대하지 않는다. 앞으로의 바람도 마찬가지, "이제 내가 바라는 것은 명상 할 때의 고요함과 빵 한 조각으로 만족하는 것" 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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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을 보려면 어둠이 필요하듯 우리 삶은 괴로움을 통해 한 번 더 단단해 질 수 있다. 입에 쓴 것이 약이 되듯 괴로움 속에는 아직 드러나지 못한 행복의 보물이 있다. 괴로울 때는 빨리 벗어나고 싶지만 피하지 말고 있는 그대로 들여다보아 괴로움의 원인이 무엇인지 알 아야 행복의 보물을 찾을 수 있다. 내 마음을 자세히 지켜보자. 원인이 없는 결과가 없듯이 괴로움 안 에는 괴로움을 가져오는 내 심신의 습관들이 있다. 비워내고 내려놓아야 가려진 온전함이 나온다. 그래서 다음 세 가지를 오늘 아침 다시 소환한다.
(1) 가장 먼저, '지금-여기'에 온전한 나와 함께하는 거다.
(2) 그 다음, 원하는 것은 <지금 여기에> 다 있다고 믿는다.
(3) 그리고 온전한 나를 발견하고 소통한다.
가장 먼저, 지금-여기'에 온전한 나와 함께하는 거다. 사람들의 성정이 날이 갈수록 거칠어지고 폭력적이 되어가고 있는 요즘이다. 문명이 눈부시게 발전하고 정보는 바다를 이룰 정도가 되었지만, 그 넘치는 풍요로움과 방대한 지식이 사람들의 마음을 자유롭고 여유롭고 행복하게 해주기는 커녕 더 강퍅한 심성이 되도록 몰아붙이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그 이유가 뭘 까? 아마도 가장 큰 이유는 서로의 다름을 인정하려 하지 않고 나아가 자신과 타인을 존중하는 마음이 없는 데서 빚어지는 갈등과 상처에 있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누구 할 것 없이 살아 있는 자체 만으로 이미 온전한 존재다. 스스로 자신이 온전한 존재임을 깨달을 수 있다면 타인도 온전한 존재로 바라 봐주게 될 것이고, 자신은 물론 타인도 존중하는 마음을 갖게 될 것이다. 그리고 자신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받아주고 존중하는 것이 사랑의 바탕이다. 자신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받아줄 수 있으면 상대의 모습도 있는 그대로 존중할 수 있게 된다. 이는 이미 온전한 존재인 나와 함께하며 지금-여기에서 의 행복과 자유로움, 평화로움을 누리는 사람에게는 자연스러움 삶의 방식이다.
그 다음, 원하는 것이 지금-여기'에 다 있다고 믿는다. 지금-여기를 살아간다는 것은 지금-여기에 마음이 있는 것이며, 지금-여기를 온전하게 살아가는 것이다. 오롯이 지금-여기에 집중하면 나 자신을 찾아가는 보물 지도가 보이고, 소중하지만 보이지 않았던 것들이 들리고 느껴지며, 지금, 나 자신, 함께하는 사람 등 지금-여기를 잘 만날 수 있게 된다. 내가 숨을 쉬고 살아 있는 곳은 지금-여기, 내가 어찌할 수 있는 것도 지금-여기다. 지금이 진짜 살아 있는 삶이고, 살아 있는 지금의 일상을 살아가는 것이 제대로 살아가는 것이다. 어제의 그 일이 아니라, 내일 해야 할 일의 무게가 아니라 지금-여기를 내가 원하는 행복한 모습으로 마음을 모아 살아가는 것이 온전한 나를 발견하고 소통하는 방법이다.
그리고 온전한 나를 발견하고 소통한다. 인생의 목적은 소유에 있는 것이 아니다. 살아가는 과정에서 의 경험과 온전한 자신을 발견하여 스스로 원하는 삶을 살아가는 데 있다. 삶의 행복을 만드는 재료는 이미 내 안에, 지금-여기에 다 있다. 지혜롭지 못한 방법으로 행복을 찾아 달려나가거나 만족을 모르고 채우고 성취하기 만을 기대한다면 지금-여기의 소소한 행복은 보지 못하게 된다. 내 생각은 도외시한 채 사회의 성공과 행복 만을 따라간다면 지치고 힘겨운 삶을 살아갈 수밖에 없다. 좀 못하면 어떤가? 언제나 잘해야 한다는 무거운 짐은 내려놓자. 기준을 맞추려고 애쓰기보다는 여러 관점으로 생각해 보고 나에게 맞는 것을 알아차려 지금 여기를 살아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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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은 두 종류로 나뉜다. 목표를 갖고 사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 목표는 '네비게이션'과 같다. 잘 모르는 길을 갈 때, 네비게이션이 없으면, 재앙이다. 재앙을 영어로 '디재스터(disaster)'라 한다. 이 단어는 '사라지다'라는 'dis'와 '별'이란 뜻의 'aster'의 합성어이다. 그러니까 재앙이란 '별이 사라지는 것'이다. 나침반이 없던 옛 시절에는 항해할 때 북극성을 보고 방향을 정했다고 한다. 그런데 별이 보이지 않으면 재앙인 것이다. 마찬가지로 살면서 목표가 없다는 것도 재앙이다.
목표는
▪ 삶에 동기를 부여해 주는 최고의 수단이다. 목표가 있으면 흔들리지 않고, 그 목표를 위해 일을 하게 하기 때문이다.
▪ 목표는 사람을 성장하게 한다.
▪ 목표는 우리 자신을 지켜 준다. 우리 주변에 부정적인 정보가 넘쳐나지만, 목표가 명확하면 그런 것에 흔들리지 않기 때문이다. 목표는 우리들의 잠재력을 발휘하게 한다. 우리들의 가능성을 실현하게 한다. 나는 지금 어떤 목표를 가지고 있는가? 그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어떤 노력을 하고 있는가? 이런 질문을 나에게 해보니, 내 목표가 희미하다. 구체적이지 않다. 오늘은 하루 종일 이 질문에 답을 해보아야 겠다.
그리고 좋은 질문을 하려면, 세상을 보는 관점이 중요하다. 나는 다양하고 유연한 관점으로 세상과 사람들을 보는가? 아니면, 나는 한 가지 관점으로 모든 것을 보고 판단하는가? 세상에 좋은 관점과 나쁜 관점은 존재하지 않는다. 경직된 관점과 유연한 관점, 한 가지 관점과 다양한 관점만이 존재한다. 기왕이면, 우리는 유연하고 다양한 관점을 갖는 것이 좋다. 왜냐하면 자유자재로 관점을 바꿀 수 있으면 삶이 충만해지기 때문이다. 어린아이와 시인들이 그렇다. 나는 그 말에 전적으로 동의한다. 창의적인 새로운 것을 얻으려면 질문에 관점을 바꾸어야 한다.
칼 포퍼에 의하면, 삶은 문제해결의 연속이라 했다. 문제 없는 삶은 없기 때문이다. 문제해결을 위한 문제들은 답을 요구한다. 답은 어디에 있으며, 어떻게 찾나? 그 답을 찾으려면 질문을 해야 한다. 질문이 중요한 이유를 네 가지 경우로 나누어 본다.
▪ 질문이 없으면 답이 없고,
▪ 질문이 잘못되어도 답이 없다.
▪ 게다가 잘 보이지 않던 답도 질문을 바꾸면 길이 보이고,
▪ 같은 듯 보이는 문제도 어떤 질문을 던지는가에 따라 다른 답에 이른다.
좋은 질문은 관점을 전환시킬 수 있는 질문이다. 나 만을 위한 질문에서 벗어나 상대가 뭘 원하는지 생각하게 만드는 질문이다. 우리는 살면서 수많은 선택 앞에서 결정을 하여야 한다. 인생은 의사결정의 연속이다. 이런 선택의 기로에서 좋은 질문은 시간의 축을 바꾸어 보는 것이다. 우리는 늘 현재 지점에서 고민하고 결정을 한다. 그런데 대부분의 결정은 현재를 기준으로 내려지지만, 그 결과는 오랜 세월에 걸쳐 영향을 미친다. 그러므로 미래 시점에서 지금의 결정을 바라보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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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잘 모른다면 매일 '감정 일기'를 써보는 것이 좋다. 하루 있었던 일 중 기억에 남는 감정 경험들을 기록해 보는 거다. 내 마음에 어떤 갈등이 있었는지 기록해 보는 거다. 그리고 자신을 돌보는 개인적인 시간을 확보하고 일에 우선순위를 둔다. 목표 지향적인 사람은 자신에게 무리한 요구를 하게 된다. 동시에 많은 일을 해낼 수 없어서 조바심이 날 때는 마음속으로 이렇게 외쳐본다.
▪ 한 번에 한 가지 씩만 하자. 그리고 천천히 해보자.
▪ 어떤 일에 성공하거나 잘 끝내면 자신에게 상을 준다. 맛있는 것을 먹어도 좋고 평소에 갖고 싶었던 물건을 사는 것도 좋다.
▪ 어린 시절 상처 받을 정도로 패배한 경험이 있는지 떠올리며 조용히 자신을 성찰하고 분석할 필요도 있다.
세상에 완벽한 사람은 없다. 부족한 부분을 노력으로 채운다면 그것이 건강한 인생이 아닐까? 별 이야기를 하면, <<어린 왕자>>가 소환된다. 어느 날, 어린 왕자가 사는 작은 별에 씨앗 하나가 날아왔고 꽃을 피웠다. 장미꽃은 어린 왕자를 길들이려고 했지만, 어린 왕자는 장미꽃의 행동을 이해할 수 없었고, 그것이 사랑이라 고는 더더욱 눈치채지 못했다. 장미꽃도 어린 왕자를 길들여 소유하려고 했지만, 그것을 깨닫기에는 그가 너무 어렸다. 그리고 서로에 대해 잘 몰랐으며 바라는 바도 달라 마침내 헤어지고 만다.
실제로 어린 왕자는 장미꽃 씨앗이 처음 날아온 그날부터 장미를 잘 돌보았다. 호기심 어린 눈으로 봐주었고, 정성껏 물과 바람막이를 제공해주었다. 장미 역시 갓 세상에 고개를 내밀었기 때문인지 표현과 방법이 상당히 서툴렀다. 그래서 둘, 어린 왕자와 장미는 마음이 서로 통하지 못하고 차츰 어긋나 버리고 만다. 꽃들은 원래 자기 마음을 정직하게 말하지 않는데, 어린 왕자는 너무 어려서 그 꽃을 사랑할 줄 몰랐고, 꽃을 사랑하지만 또 마음의 한 구석에서는 꽃도 나를 사랑하는지 의심을 했다. 또한 장미꽃은 어린 왕자가 떠나던 날에게 당신을 사랑했다고 고백했다. 그리고 자존심이 강한 장미는 자신이 우는 모습을 어린 왕자에게 보이기 싫어 빨리 가라고 했다.
떠난 후, 어린 왕자는 후회한다. 꽃은 그냥 바라보고 향기를 맡는 것으로 만족해야 했으며, 꽃이 하는 말로 판단할 게 아니라, 꽃의 행동으로 판단 했어야 했다고 아쉬워했다. 그리고 장미가 자신에게 투정부린 것은 좋아하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을 깨닫지 못했다고 후회를 했다. 어린 왕자는 자신의 평온하고 안정된 삶에 불현듯 찾아와 마음을 어지럽힌 장미 꽃 한 송이 때문에 자신의 소중하고 자그마한 별을 떠나 머나먼 지구까지 오게 된 것이다.
그렇지만, <<어린 왕자>>의 저자 쎙떽쥐뻬리는 서로 길들여지려면, 서로 노력해야 한다고 말한다. '길들여 짐'은 서로 관계를 맺는 거다. 어떻게 해야 하는지 다음과 같이 말해 준다. "우선 참을성이 많아야 해. 처음에는 나랑 좀 멀리 떨어져서 이렇게 풀밭에 앉아 있어. 그러면 내 널 곁눈질로 힐끗 보겠지. 넌 아무 말도 하지 마. 말이란 오해를 낳기도 하니까. 그러다가 매일 조금씩 더 가까이 앉는 거야."
길들이며 관계를 맺는다는 것은 경계를 풀고 서로에 대해 알아는 시간만큼 '거리'가 조금씩 가까워지는 거다. 어린 왕자는 조급했다. 자신이 원하는 만큼 관계가 가까워 지기를 원했다. 그는 더딘 속도의 의미를 알지 못해서, 서로를 알아가는 과정 속에서 상처를 받았던 것이다. 그러나 어린 왕자는 후에 여우를 만나 진정한 의미의 '관계'를 배웠다.
여우는 어린 왕자가 오는 날을 손꼽으며 그를 기다렸다. "네가 오후 4시에 온다면 나는 3시부터 행복해지기 시작할 거야. 시간이 갈수록 난 점점 더 행복해지겠지. 4시에는 흥분해서 안절부절 못할 일상이 이상일상이 이일 거야. 그래서 행복이 얼마나 갑진 것인지 알게 되겠지." 하루는 '함께 여서' 특별해 졌다. 헤어지는 날짜가 다가올수록 눈물이 날 만큼 그들을 가까워졌다. 여우의 눈물에 어린 왕자는 마음을 아프게 할 생각이 없었다며 괴로워한다. 그리고 여우는 어린 왕자에게 진정한 '장미'의 존재에 대해 전한다. 수백 개의 장미가 피어 있어도 결국 어린 왕자에게 소중한 '특별한 장미'는 소행성에 두고 온 장미라는 사실을 말이다. 여우의 조언을 통해 어린 왕자는 비로소 장미를 있는 그대로 볼 수 있게 되었다.
작별을 앞둔 여우는 어린 왕자에게 중요한 비밀을 하나 가르쳐 준다. "오직 마음으로 보아야 잘 보인다는 거야. 가장 중요한 건 눈에 보이지 않아." 그리고 여우는 말한다.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일은 사람이 사람의 마음을 얻는 일이 란다. 각각의 얼굴만큼 다양한 각양각색의 마음을 순간에도 수만 가지의 생각이 떠오르는데 그 바람 같은 마음을 머물게 한다는 건 정말 어려운 거 란다." 정말 그렇다.
그렇지만 누군가에게 길들여진다는 것은 눈물을 흘릴 일이 생긴다는 거다. 그러니까 누군가와 관계를 맺는다는 것은 힘든 일이다. 특히 지금은 내 공간, 내 시간, 내 취향이 중요해진 시대이기 때문에 더하다. 하지만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것은 내가 아닌 '너'를 위해, '나'를 바꾸겠다는 의지의 표명이어야 한다. 그러면 사랑의 역설이 이루어진다. 생전 먹지 않던 음식을, 고치지 않던 습관을 바꾸게 하는 게 사랑이기 때문이다. 사랑은 헌신을 통해 내 변화를 목격하고, 내가 가진 한계를 확장해가는 과정이기 때문이다. 그것이 사랑의 가장 큰 역설이며 기적이 아닐까? 이때, 우리의 일상은 이상, 특별한 것이 되는 것이다. 새벽까지 별똥별을 보고 오는 길에 어린왕자를 만났다.
5
연중 제19주간 목요일로 <마태오 18,21–19,1> "형제가 죄를 지으면 몇 번이고 용서하여라, 매정한 종의 비유" 이다.
그때에 베드로가 예수님께 다가와, “주님, 제 형제가 저에게 죄를 지으면 몇 번이나 용서해 주어야 합니까? 일곱 번까지 해야 합니까?” 하고 물었다. 예수님께서 그에게 대답하셨다. “내가 너에게 말한다. 일곱 번이 아니라 일흔일곱 번까지라도 용서해야 한다. 그러므로 하늘 나라는 자기 종들과 셈을 하려는 어떤 임금에게 비길 수 있다. 임금이 셈을 하기 시작하자 만 탈렌트를 빚진 사람 하나가 끌려왔다. 그런데 그가 빚을 갚을 길이 없으므로, 주인은 그 종에게 자신과 아내와 자식과 그 밖에 가진 것을 다 팔아서 갚으라고 명령하였다. 그러자 그 종이 엎드려 절하며, ‘제발 참아 주십시오. 제가 다 갚겠습니다.’ 하고 말하였다. 그 종의 주인은 가엾은 마음이 들어, 그를 놓아주고 부채도 탕감해 주었다. 그런데 그 종이 나가서 자기에게 백 데나리온을 빚진 동료 하나를 만났다. 그러자 그를 붙들어 멱살을 잡고 ‘빚진 것을 갚아라.’ 하고 말하였다. 그의 동료는 엎드려서, ‘제발 참아 주게. 내가 갚겠네.’ 하고 청하였다. 그러나 그는 들어주려고 하지 않았다. 그리고 가서 그 동료가 빚진 것을 다 갚을 때까지 감옥에 가두었다. 동료들이 그렇게 벌어진 일을 보고 너무 안타까운 나머지, 주인에게 가서 그 일을 죄다 일렀다. 그러자 주인이 그 종을 불러들여 말하였다. ‘이 악한 종아, 네가 청하기에 나는 너에게 빚을 다 탕감해 주었다. 내가 너에게 자비를 베푼 것처럼 너도 네 동료에게 자비를 베풀었어야 하지 않느냐?’ 그러고 나서 화가 난 주인은 그를 고문 형리에게 넘겨 빚진 것을 다 갚게 하였다. 너희가 저마다 자기 형제를 마음으로부터 용서하지 않으면, 하늘의 내 아버지께서도 너희에게 그와 같이 하실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이 말씀들을 마치시고 갈릴래아를 떠나, 요르단 건너편 유다 지방으로 가셨다.
<하느님처럼>
“이 악한 종아, 네가 청하기에 나는 너에게 빚을 다 탕감해 주었다. 내가 너에게 자비를 베푼 것처럼 너도 네 동료에게 자비를 베풀었어야 하지 않느냐?”(마태 18,32)
하느님께서
나를 있게 하시니
나도
스스로뿐만 아니라
나 너머 벗을 있게 합니다
하느님께서
나에게 너그러우시니
나도
스스로뿐만 아니라
나 너머 벗에게 너그럽습니다
하느님께서
나에게 부드러우시니
나도
스스로뿐만 아니라
나 너머 벗에게 부드럽습니다
하느님께서
나를 품으시니
나도
스스로뿐만 아니라
나 너머 벗을 품습니다
하느님께서
나를 씻으시니
나도
스스로뿐만 아니라
나 너머 벗을 씻습니다
하느님께서
나를 일으키시니
나도
스스로뿐만 아니라
나 너머 벗을 일으킵니다
하느님께서
나를 살리시니
나도
스스로뿐만 아니라
나 너머 벗을 살립니다
6
나를 사랑하시고 자비를 베푸시는 하느님을 기억합시다.
2026/8/13/연중 제19주간 목요일
마태오 복음 18장 21절-19장 1절: “일곱 번이 아니라 일흔일곱 번까지라도 용서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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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의 기억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을 닮은 자비로운 사람이 되라고 우리를 초대하십니다. 우리가 누군가를 사랑하고 자비를 베풀 수 있는 것은, 먼저 사랑받고 자비를 체험했기 때문입니다. 사랑으로 우리를 창조하신 하느님,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 우리를 구원하신 자비로운 하느님을 만났기에, 우리도 그분처럼 누군가를 사랑하고 용서할 수 있다는 말이지요. 주님께서는 이를 비유로 설명해 주십니다. 만 탈렌트를 빚진 사람을 어떤 임금이 탕감해 주었다고 하는데, 이는 오늘날 돈으로 환산하면 자그마치 5조 원이나 되는 어마어마한 액수입니다. 반면에 종이 동료에게 빌려준 백 데나리온은 천만 원이 조금 안 되는 정도입니다. 천만 원도 적은 돈은 아니지만, 탕감받은 돈에 비하면 아주 적은 액수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우리도 하느님께 감히 돈으로 환산할 수 없는 큰 선물인 사랑과 자비를 받았습니다. 거저 생명을 받았고, 죄를 용서받았으며, 영원한 생명으로 초대받았습니다. 이를 기억할 때, 우리 역시 다른 사람에게 인색해질 수 없습니다. 그렇기에 기억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내가 어떻게 사랑받고 용서받았는지, 그리고 어떤 선물을 믿음과 희망 가운데 기다리고 있는지 말이지요. 그 사랑의 기억이 우리를 너그럽고 자비로운 사람이 되도록 이끌어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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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재형 미카엘 신부(글라렛선교수도회)⠀
생활성서 2026년 8월호 '소금항아리'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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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년 8월 13일 연중 제19주간 목요일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며, 혹은 인간관계를 맺으며 살아가는 동안 가장 하기 힘든 숙제는 무엇일까요? 바로 ‘용서’입니다. 내게 깊은 상처를 주고 가슴에 대못을 박은 사람을 용서하기란 결코 쉽지 않습니다. 머리로는 이해하려 해도 막상 그 얼굴이 떠오르면 다시금 분노와 억울함이 치밀어 오르는 것이 우리 인간의 솔직한 모습입니다. 오늘 복음의 베드로 사도 역시 우리와 똑같은 고민을 안고 주님께 묻습니다. “주님, 제 형제가 저에게 죄를 지으면 몇 번이나 용서해야 합니까? 일곱 번까지 해야 합니까?”(마태 18,21).
오늘 제1독서와 복음은 ‘완고한 마음의 감옥에서 벗어나 하느님의 자비로 걸어 나오는 삶’이라는 주제로 깊이 연결되어 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에제키엘 예언자에게 대낮에 이삿짐을 꾸리고 밤에는 벽을 뚫고 길을 떠나는 기이한 행동을 명하십니다. 이는 하느님의 말씀을 듣지도 보지도 않는 ‘반항아들의 집안’인 이스라엘이 완고함 때문에 결국 바빌론 유배라는 비극적인 짐을 짊어지게 될 것임을 온몸으로 예고한 것입니다. 죄를 깨닫지 못하고 마음을 닫아거는 완고함은 결국 스스로를 고통의 유배지로 몰아넣는 결과를 초래합니다.
완고함의 사슬을 끊어내는 하늘나라의 방식은 예수님의 파격적인 선포로 드러납니다. 당시 유다 사회의 기준을 훨씬 뛰어넘는 ‘일곱 번’이라는 숫자를 제시하며 스스로 대견해했을 베드로에게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일곱 번이 아니라 일흔일곱 번까지라도 용서해야 한다”(마태 18,22). 이는 용서에 숫자의 제한을 두지 말고, 끝없이 무한하게 자비를 베풀라는 명령입니다. 이어지는 ‘매정한 종의 비유’는 우리가 왜 용서해야 하는지를 명확히 보여줍니다. 도저히 갚을 수 없는 ‘만 탈렌트’의 빚을 단번에 탕감받고도, 정작 자신에게 작은 빚을 진 동료를 용서하지 못한 종은 결국 다시 감옥에 갇히게 됩니다.
우리가 형제를 용서하지 못하는 이유는 내가 하느님께 받은 자비의 크기를 잊어버렸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미 예수님의 십자가 희생을 통해 도저히 갚을 수 없는 거대한 죄의 빚을 조건 없이 탕감받은 사람들입니다. 내 힘과 의로움으로 상대를 용서하려 하면 억울함만 남지만, “주님, 제가 이토록 큰 용서를 받았는데 어찌 형제를 제 마음의 감옥에 가두겠습니까?” 하고 고백할 때 참된 용서가 시작됩니다. 용서하지 않는 마음은 스스로 분노와 미움이라는 ‘유배의 짐’을 지고 자기 마음의 감옥에 갇히는 완고함과 같습니다.
오늘날 우리는 분노가 가득한 사회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겉으로는 미사를 드려도 마음 한구석에는 수십 년 전의 앙금을 품은 채 "그 사람만은 절대 용서 못 해"라며 형제를 가두어 두기도 합니다. 하지만 누군가를 미워할 때 가장 먼저 피폐해지는 것은 바로 내 영혼입니다. 미움의 짐을 지고 밤잠을 설치는 우리 자신이야말로 매정한 종의 감옥에 갇힌 가련한 영혼인 것입니다. 주님께서 용서하라고 하신 것은 상대방을 위한 것이기도 하지만, 궁극적으로는 우리 자신을 미움의 감옥에서 해방시켜 자유롭게 하시기 위한 사랑의 조치입니다.
에제키엘이 예고한 완고한 반항의 짐을 지고 가지 말고, 주님이 주시는 용서의 열쇠로 내 마음의 감옥 문을 열고 걸어 나옵시다. 오늘 내 마음에 묶여 있는 이들을 풀어줌으로써 미움의 짐을 던져버리고, 하느님 아버지가 주시는 참된 자유와 평화를 마음껏 누리시기를 축복합니다.
“자비의 주 하느님, 저희가 당신께 도저히 갚을 수 없는 무한한 죄의 빚을 탕감받았으면서도, 정작 이웃이 제게 준 작은 상처와 허물은 용서하지 못한 채 미움의 감옥에 가두어 두었음을 고백하며 뉘우치나이다. 오늘 에제키엘 예언자가 경고한 완고한 마음의 짐을 벗어버리게 하시고, 일흔일곱 번까지라도 조건 없이 용서하라 하신 예수님의 말씀을 삶으로 살아내게 하소서. 제 힘과 의지로는 용서할 수 없사오니, 오늘 모시는 성체의 은총으로 저희의 굳어버린 마음을 녹여주시고, 미움에서 해방된 참된 평화의 기쁨을 보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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