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781. 인문 운동가의 인문 일지
(2026년 8월 8일)
1
어제는 24절기 가운데 열세 번째 절기인 입추(立秋)였다. 입추는 말 그대로 가을이 시작된다는 뜻으로 절기 상 이날부터 입동 전까지를 가을로 본다. 하지만 올해는 전국적으로 폭염과 열대야가 계속 이어지고 있어 계절의 변화는 아직 피부로 느끼기 어렵다. 입추는 대서와 처서 사이에 들며 중복과 말복 사이에 위치한다. 올해 말복은 8월 14일이다. 폭염이 계속되는 올 여름에는 아침저녁으로는 조금씩 선선한 바람이 불기 시작하는 가을을 느끼려면 9월이 되어야 할 듯하다. 기후 위기가 심각하다. 어제 페이스 북에서 <입추>라는 시를 읽었다 공유한다.
입추(立秋)/이춘운
달력 한 장이
가을의 문을 조용히 두드리는 날,
불볕은 아직 들녘을 떠나지 못했지만
바람 끝에는
풀잎 하나 흔드는 서늘함이 숨어 있다.
매미는 마지막 여름을 붙잡으려
더욱 뜨겁게 울고,
하늘은 한 뼘 높아져
구름의 발걸음을 천천히 옮긴다.
계절은 언제나
소리 없이 찾아와
떠날 것을 먼저 가르친다.
오늘의 뜨거움도
내일이면 추억이 되고,
푸르던 잎새도
가을빛을 품으며 익어 간다.
입추는
여름과 가을이 손을 맞잡는 순간.
나는 그 문턱에 서서
한 계절을 보내는 감사와
새로운 계절을 맞는 설렘을
고요히 가슴에 담는다.
예로부터 중국에서는 입추 이후 15일을 세 구간으로 나누어 서늘한 바람이 불고, 이슬이 짙어지며, 쓰르라미가 울기 시작한다고 했다. 농촌에서는 참깨와 옥수수를 수확하고 김장용 배추와 무를 심으며 본격적인 가을 농사를 준비하는 중요한 시기이기도 하다. 이 무렵에는 태풍과 병충해를 막고 벼를 잘 여물게 하는 일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특히 입추부터 처서까지 적절한 햇볕과 맑은 날씨가 이어져야 풍년을 기대할 수 있어 예부터 비가 그치고 맑은 날이 계속되기를 기원하는 기청제(祈晴祭)를 지내기도 했다. 절기는 자연이 계절의 흐름을 알려주는 삶의 이정표다. 비록 폭염은 계속되고 있지만 입추는 무더위 너머에 가을이 한걸음 다가오고 있음을 알리는 반가운 신호다. 뜨거운 여름도 머지않아 한풀 꺾이기를 기대하며 다가올 풍성한 수확의 계절을 차분히 준비할 때다.
어쨌든 가을의 길목이다. 입추를 전후하여 마지막 불볕 더위가 기승을 부린다. 그러니 몇 일만 지나면, 된다. 이 무렵이 되면, 나는 내가 늘 기억하는 '삼통(三通) 중 공자가 말한 "궁즉통"을 소환하며 희망을 가진다. 공자가 말한 '궁즉통'은 궁하면 통한다는 말이다. 이 말은 원래 '궁즉변(窮卽變, 변즉통(變卽通), 통즉구(通卽久)'에서 나온 말이다. 궁하면 변하고, 변하면 통하고, 통하면 오래간다. 세상은 변한다. 자연은 음양이 교차하고, 춘하추동이 순환한다. <<주역>>의 변화 철학으로 '궁즉통'의 4단계가 '궁, 변, 통, 구'이다. 그리고 '극즉반(極卽反)'이란 말도 있다. 세상에 모든 것은 극점에 이르면 반드시 돌아간다. 정점에 도달하면 내려올 일 밖에 남지 않고, 반대로 최저점으로 추락하면 올라갈 일만 남게 된다.
나머지 "이통(二通)"은 다음과 같다.
• 노자의 '허즉통(虛卽通)' - 자신을 비운다. 노자의 "무위자연(無爲自然)"(<<도덕경>>)에서 찾은 것이다. 인간은 자연에 순응하면서 자연의 법칙을 거스르지 않고 살아야 한다. 인생무상, 공수래 공수거이니 모든 것을 비우고 낮추며 섬기면 통하지 않는 곳이 없다. 이루는 것보다 비우는 것이 더 어렵고 위대하다. 이를 '허즉통'이라고 한다.
• 손자의 '변즉통(變卽通)' - 시대에 맞게 변한다. 손자는 만물은 고정된 것이 아니라, 변화하고 발전하는 것이며, 싸우지 않고 이기고, ‘약한 것으로 강한 것을 이긴다’를 이상으로 보았다. 이것이 <손자병법>의 핵심이다. 그리고 그의 주장은 '변즉통'으로 요약된다. 때와 장소를 알고, 흐름의 속도를 맞춰 나갈 수 있어야 된다. 상황에 따라 변화해 나가야 한다.
2
어제는 오랜 만에, 불볕 더위에도 불구하고, 도반들과 주역을 함께 읽으며 마음 근육을 키웠다. 어제 읽은 것은 '하늘의 이치에 순응하라'는 제25괘인 <천뢰무망>괘였다. 괘상을 보면, 위는 하늘이고, 아래는 우레이다. 그래서 '천뢰무망'이라 한다. '무망(无妄)'은 '없을 무(无)'와 '망령 될 망(妄)'이므로 망령됨이 없다는 뜻이다. 하늘 아래 우레가 있어 지공무사(至公無私)인 하늘의 무망을 동(動)하는 우레로 움직여 행하는 것이다.
일상에서는 '무망 중(无妄 中)에'라는 부사를 사용한다. '생각지도 않던 판'이나 '별 생각이 없는 상태' 혹은 '뜻밖의 사이에'를 뜻하는 부사로 쓰인다. 주로 예기치 않게, 또는 무심코 불쑥 어떤 일을 하거나 겪게 될 때 쓰인다. 비슷한 말로 '각 중(不知不覺 中, 부지불각 중)에'도 쓰인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또는 "깨닫지 못하는 동안에' 라는 뜻이다. 주로 어떤 행동이나 변화가 스스로 의식하지 못한 채 자연스럽게 일어났음을 나타낼 때 쓰인다.
우리는 무망 중에, 또는 각중(不知不覺 中)에 망령된 짓을 하여 화를 부른다. 그러므로 이 괘의 <괘사.에 무망은 무망한 하늘의 원형이정(元亨利貞), 네 가지 덕을 갖추었으니 망령된 짓을 하지 말라고 했다. 하늘의 선한 본성으로 성실히 동하기 때문에 무망인데, 그 무망으로 잘 나가다가 각중에 망령되게 잘못 재앙을 취하니 스스로 경계하여 함부로 발동하지 말라고 한다. 욕심으로 동하기 때문에 망(妄)이 되는 것이다. 그래서 오늘 아침은 하늘의 4덕인 '원형지정'에 대한 정리를 해 본다. 하늘의 이치에 순응할 때, 좀 더 구체적으로 어떻게 해야 하는지 가르쳐 준다.
무망은 천부지성(天賦之性) 그대로 움직이는 것이므로 하늘의 사덕인 원형이정을 그대로 갖추고 있다. 크게 형통하고 바름이 이롭다는 거다. 무망이 지성(至誠)한 하늘의 도이고, 진실한 성인의 일이기 때문에 원형(元亨)하고, 이정(利貞)한 것이다. 그런데 각중에 망령된 마음이 생겨 바르지 않게 되면 재앙이 생기게 되므로 가는 바를 두어서는 이롭지 않다는 <괘사>까지 어제 읽었다.
여기서 말하는 "원형이정(元亨利貞)"은 <<주역>>의 <중천 건> 괘에 나오는 것으로,
• '원(元)'은 '으뜸 원'으로, 시작함을 나타내고,
• 형(亨)은 '형통할 형'으로 번창함을 나타나며,
• 이(利)는 '이로울 이'로 유익함을 나타내고,
• 정(貞)은 '곧을 정'으로 바르다는 것을 나타낸다고 한다.
퇴계 이황의 <<천명도설>>을 보면, 나무(木)는 동쪽에 있고, 거기 원(元)이라 적혀 있고, 불(火)은 남쪽에 형(亨), 서쪽에 이(利), 북쪽에 정(貞)이라고 적혀 있다. 나무는 생명이 시작하는 봄의 원기(元)을 상징하고, 여름은 뜨겁게(火) 곡식과 열매가 성장(亨)한다. 가을은 서늘(金)해지면서 수확(利)하는 계절이고, 겨울은 검은(짙은) 물(水)의 긴 잠으로 꿋꿋하게 버티는 계절이다.
"원형이정(元亨利貞)"은 하늘이 갖추고 있는 네 가지 덕 또는 사물의 근본 원리라고 말하기도 한다.
• 원은 착함(=仁, 사랑)이 자라는 것이고,
• 형은 아름다움이 모인 것이고,
• 이는 의로움이 조화를 이룬 것이고,
• 정은 사물의 근간이다.
군자는 사랑(仁)을 체득하여 사람을 자라게 할 수 있고, 아름다움을 모아 예절(禮)에 합치시킬 수 있고, 사물을 이롭게 하여 의로움(正義)과 조화를 이루게 할 수 있고, 곧음을 굳건히 하여 사물의 근간이 되게 할 수 있다.
선비를 꿈꾸는 나는, 이 네가지 덕(德)을 행하며, '원형이정"의 순환을 마음 농사의 도구로 삼고 있다.원형이정(元亨利貞)은 <<주역>>의 '건괘'에서 나오는 것으로, '원(元)'은 '으뜸 원'으로, 시작함을 나타내고, 형(亨)은 '형통할 형'으로 번창함을 나타나며, 이(利)는 '이로울 이'로 유익함을 나타내고, 정(貞)은 '곧을 정'으로 바르다는 것을 나타낸다고 한다. 퇴계 이황의 <<천명도설>>을 보면, 나무(木)는 동쪽에 있고, 거기 원(元)이라 적혀 있고, 불(火)은 남쪽에 형(亨), 서쪽에 이(利), 북쪽에 정(貞)이라고 적혀 있다. 나무는 생명이 시작하는 봄의 원기(元)을 상징하고, 여름은 뜨겁게(火) 곡식과 열매가 성장(亨)한다. 가을은 서늘(金)해지면서 수확(利)하는 계절이고, 겨울은 검은(짙은) 물(水)의 긴 잠으로 꿋꿋하게 버티는 계절이다.
원형이정(元亨利貞)은 우리가 뛰어넘을 수 없는, 반드시 디디며 걸어가게 마련인 단계와 같은 것이다. 봄에 씨를 뿌리고 단숨에 가을을 만나 수확한다는 것은 본래 있을 수 없는 일이다. 하지만 우리 주변에 보면 이른 나이에 성취를 이루는 사람이 적지 않다. 겉으로는 여름을 건너뛴 것 같아도 기간이 짧았을 뿐 그들에게 도 고된 노력의 과정이 없지 않았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기 성취는 형(亨)의 과정을 빠르게 넘어 이(利)의 단계로 건너왔으나 곧 정(貞)의 간계와의 거리도 그만큼 단축된 것과 같다. 성공에 취해 자기 자신을 잃고 쾌락에 빠져 방탕한 생활을 하다가 어이 없이 몰락하는 경우를 흔히 목격하는 이유이다. 지루하고 힘들어도 담담히 밟아갈 때 외부의 잣대로 측정되는 크기에 상관 없이 자신의 성취에 안분지족(安分知足)할 수 있는 힘을 갖게 될 것이다.
3
<단전> 말고도 단사를 해설한 또 하나의 전(傳)이 있다. 그게 <문언(文言)>이다. 이 <문언>은 '건괘'와 '곤괘'에 한정되어 지어졌다. <문언>은 "원형이정"이라는 "사덕(四德)"에 대하여 정의를 내리는 것으로써 문장을 시작한다.
元者 善之長也; 亨者 嘉之會也; 利者 義之和也; 貞者 事之幹也.
(원자 선지장야; 형자 가지회야; 이자 의지화야; 정자 사지간야)
君子 體仁足以長人, 嘉會足以合禮, 利物足以和義, 貞固足以幹事
(군자 체인족이장인 가회 족이합례, 이물족이화의, 정고족이간사)
君子 行此四德者, 故曰: 乾,元,亨,利,貞.
(군자 행차사덕자, 고왈: 건,원,형,이,정.)
위의 원문을 풀이하면, 다음과 같다.
▪ '원'이라고 하는 것은 만물을 생하는 창조적인 좋은 기운의 으뜸이라는 뜻이다.
▪ '형'이라고 하는 것은 좋은 관계를 지니는 인간이나 사물이 모여드는 것이다.
▪ '리'라고 하는 것은 모든 관계에서 발생하는 마땅함의 날카로운 충돌을 조화시키는 것을 의미한다.
▪ '정'이라고 하는 것은 사물의 형성과정에 있어서 그 근간이 완성되는 것을 의미한다.
두 번째 문장을 풀이하면,
▪ 군자는 '인(仁)'을 몸에 체험함으로써 사람들에게 존장(尊長)으로서 대접받을 수 있고('장인(長人)'을 '사람들을 자라나게 해준다'로도 해석 가능)
▪ 좋은 사람과 사물들을 모을 줄 앎으로써 '예(禮)'에 합치되는 삶을 살 수 있고,
▪ 사물을 이롭게 함으로써 정의로움의 충돌을 조화시킬 수 있고,
▪ 지조 있고 단단한 사람의 자세를 취함으로써 사물의 생성을 완결 지을 수 있다.
그 다음 문장을 풀이하면, 군자라면 모름지기 이 네 가지 덕성을 실천하는 자라야만 한다. 그래서 <<주역>>의 첫 머리인 <건괘>의 괘사로써 '건괘'는 '원, 형, 이, 정의 덕성을 모두 지니고 있다'라고 명시한 것이다. <<문언>>의 "원형이정"을 도표로 정리해 본다. 군자(君子)의 네 가지 덕(四德)이라 본다. 어떻게 살아야 할까 혼란스러울 때는, 이 표를 보고, 일상의 삶을 점검해볼 수 있다. 때에 따라 어떻게 처신해야 하는 지를 말해주고 있다.
원(元) 체인(體仁) 선지장(善之長) 장인(長人)
형(亨) 가회(嘉會) 가지회(嘉之會) 합례(合禮)
이(利) 리물(利物) 의지화(義之和) 화의(和義)
정(貞) 정고(貞固) 사지간(事之幹) 간사(幹事)
▪ 일상에서 가장 먼저 할 일이 사랑을 장착("체인")하여, 만나는 사람을 사랑과 친절로 대접하고 환대하는 거다. 그 사랑을 우리는 '황금률'이라 한다. 엄청난 rule(규율)인 것이다. 내가 대접받고 싶은 만큼 다른 이를 대접하라. 내 이웃을 내 몸같이 사랑하라. 다른 이를 나라고 생각하고 환대하라. 그 대접은 상대를 성장하게 하는 거다. 그래 "장인(長人, 사람을 성장하게 해준다)"이라 한 게 아닐까?
▪ 그 다음, 사람들을 만나면 예의를 지키고, 예쁘고 즐겁게 만나라는 거다. 그걸 "가회(嘉會)"라 했다. 에티켓과 매너를 갖추는 거다. 매너는 에티켓과, 엄밀하게 말하면 그 뜻이 다르다. 에티켓이 '인간관계를 원활하게 하는 사회적인 불문율로써 하나의 규범'이라면, 매너는 실제 생활 현장 속에서 그 '에티켓을 바르고 적절하게 사용하는 방법'을 의미한다. 다음의 예를 보면, 우리는 금방 이해 할 수 있다. 우리가 화장실에 들어갈 때 ‘노크를 하여야 한다'는 것은 규범으로서 에티켓이고, ‘노크를 어떻게 하여야 하느냐''하는 방법은 매너에 속한다. 따라서 에티켓만을 가지고 모든 것을 해결 할 수 없다. 에티켓에 맞는 행동이라 해도 매너가 좋지 않으면 그 사람의 행동은 예의를 벗어나게 된다. 이러한 기본적인 '틀'로서의 매너의 기본원칙은 다른 사람을 배려하려는 마음에서부터 나온다. 그리고 진정한 매너는 사람들에게 먼저 손을 내밀 줄 아는 배려심이다. 그 배려심은 자신이 불편을 자초(自招)해야 한다. 난 '자초'란 말을 좋아한다. 수동이 아니라 능동이기 때문이다. 타율이 아니라 자율이기 때문이다.
도올 김용옥 교수는 <<주역>> 유튜브 강의에서 "원형이정(元亨利貞)"의 해석에서 "亨"을 "그대는 천지만물을 생성하는 하느님께 제사를 지낼 수 있다. 제사를 지내 만인, 만물과 형통하고 하느님을 기쁘게 해드려라"는 말로 풀이를 했다. 그래서 "亨'은 '나눔'이라는 거다. 그런 나눔으로 우리는 '만사형통(萬事亨通)하는 것이 아닐까? <문언>에서는 "형"을 "사물을 생성하는 과정의 형통함"으로 풀이했다. "사물이 이 단계에 이르게 되면 아름답지 않을 수가 없다. 그러므로 계절로 말하면 여름이요, 사람으로 말하자면 예(禮)가 되니, 이것은 모든 아름다움이 모여 회통(會通) 하는 것이다." 이런 차원에서, 기독교에서는 일하고, 안식일에 '예배'들이라고 하는 것이 아닐까? 나에게는 매주 가는 '미사'가 아름다움이 모여 회통 하는 시간이라고 생각한다.
▪ 그 다음은 사물을 이롭게 함으로써, 더 나아가 만나는 모두가 이익이 되게 하지만, 그 때 발생하는 갈등은 정의로움으로 해결한다. 그 정의로움의 충돌을 잘 조화시키라는 거다. 그 길은 공정한 분배를 말하는 것이 아닐까? 누가 혼자 그 이익을 독차지 말라는 것이 아닐까? 그걸 "화의(和義)"로 표현했다. 내가 생각하는 정의는 '내가 당해서 싫은 것을 남에게 하지 않는 것'이다. 정의는 옳고 그름의 기준에서 옳은 것이 아니라, 자기중심적 삶에서 벗어나는 것이다. 정의는 수오지심(羞惡之心)으로 잘못한 것에 부끄러워하는 마음이다.
▪ 끝으로 지조 있고 단단한 일상의 자세를 취하여, 하고자 하는 일을 완결 짓는 일이다. 꾸준함으로 시스템을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닐까? 인간은 "되어감의 존재(하이데거)"이다. 이 세상에 던져질 때는 아무도 삶을 선택할 수 없으나, 태어난 자신을 어떤 존재로 가꿀 것이냐는 자기 선택과 결단에 달려 있다. 의지와 열정을 품고 자신을 더 나은 존재로 바꾸어 가는 실천 속에서 우리 삶은 비로소 충만해진다. 인생의 본질은 "자기 존재를 자기 것으로 만들어 나가는 데 달려 있다." 삶의 밀도란 시간 가성비가 아니라 자기 존재의 실현이다. 바란다고 누구나 자신이 될 수 있는 건 아니다. 현재의 나를 되짚으면서 나의 모자람을 돌아볼 마음이 있고, 되고 싶은 존재를 향한 의지가 있고, 될 수 있는 능력이 있고, 되기 위해 해야 할 당위를 지킬 때, 비로소 우리 존재는 완성된다. 따라서 꾸준히 자기 자신과 마주하는 성찰의 시간, 자신이 진짜 원하는 게 무엇인지 차분히 돌아볼 여유, 삶의 방향과 목적에 시간과 노력을 온전히 집중하는 실천 없이 삶의 밀도는 불가능하다. 그런 의미에서 정(貞)은 질문 하는 거다.
4
이번에는 세상을 읽는다. 11월 중간선거를 앞두고 미국 민주당 진보 후보들의 약진이 민주당 우세 지역을 넘어 경합주로 확대되고 있다. 41살의 진보적인 정치 신인이 긴 경력과 막대한 정치자금을 보유한 기성 정치인을 꺾는 사례가 전국 선거의 승부처가 될 수 있는 경합주에서 나타나면서 2028년 대선 경선을 비롯한 향후 민주당 내부 경쟁에 작지 않은 파장이 예상된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이들을 겨냥해 “공산주의자 광인”이라고 비난하는 등 견제에 나섰다.
미시간은 선거 때마다 승패가 뒤바뀌는 중서부 경합 주이다. 엘사예드는 11월 본선에서 공화당의 마이크 로저스 전 하원의원과 맞붙는다. 로저스는 2024년 미시간주 상원의원 선거에서 민주당의 얼리사 슬롯킨에게 약 1만9천표 차로 석패한 바 있다. 엘사예드가 승리하면 미국 역사상 첫 무슬림 연방 상원의원이 된다.
엘사예드는 미시간에서 태어난 이집트계 이민자 2세다. 캠프가 공개한 이력에 따르면, 이집트 출신 아버지 모하메드와 미시간에 오랜 뿌리를 둔 새어머니 재키 밑에서 자랐다. 미시간대를 최우등으로 졸업한 뒤 컬럼비아대에서 의학 학위를 받았고, 로즈 장학생으로 영국 옥스퍼드대에서 박사 학위를 받았다.
의사이자 역학자인 그는 디트로이트 보건국장을 지내며 파산 뒤 사실상 해체됐던 보건국을 재건하고 웨인 카운티 보건·복지 행정을 이끈 공공보건 전문가로 이름을 알렸다. 2018년 미시간 주지사 민주당 경선에 도전했으나 그레천 휘트머 현 주지사에게 21%포인트 차로 패했다. 이후 전 국민 건강보험을 다룬 책을 펴내고 2020년 조 바이든 대선 캠프의 의료정책 통합 태스크포스에도 참여했다.
8년 만의 재도전에서 엘사예드는 ‘정치에서 돈을 빼, 시민의 주머니에 돈을 넣고, 모두를 위한 메디케어를 실현하자’는 구호로 선거운동을 압축했다. 전 국민 건강보험과 의료 부채 탕감, 억만장자 증세, 노동조합 권리 강화, 기업 정치자금 규제를 생활비 위기와 연결했고, 이스라엘에 대한 조건 없는 군사지원 중단도 내걸었다. 자신을 민주사회주의자나 미국민주사회주의자들(DSA·디에스에이) 소속으로 규정하지 않고 “자본주의자”라고 밝혔지만, 버니 샌더스 상원의원과 알렉산드리아 오카시오코르테스 하원의원 등 미 민주사회주의 진영의 전폭적인 지원을 받았다.
반면 4선 연방 하원의원인 스티븐스는 당 주류 핵심 인사들의 지지를 받았다. 워싱턴포스트가 광고 분석업체 애드임팩트 자료를 토대로 집계한 결과, 스티븐스와 지지 단체들이 집행한 텔레비전과 라디오 광고비는 6천만달러(약 857억원)를 넘었다. 엘사예드 진영의 약 9배였다. 엘사예드는 승리 뒤 “우리는 하나의 정치 기계와 맞섰다”며 “수많은 사람의 힘이 그들의 돈보다 강하다는 것을 보여 줬다”고 말했다.
미시간주 연방 하원의원 경선에서도 디에스에이 소속 도너번 매키니 주 하원의원이 현역 슈리 타네다르 의원을 꺾었고, 진보 활동가 윌리엄 로런스도 중도 후보들을 제치고 후보로 선출됐다. 미시간에서 여러 진보 후보가 동시에 승리하면서 반기득권과 진보 흐름이 일부 대도시의 일회성 현상에 그치지 않을 가능성을 보여준 셈이다.
이번 결과가 특히 주목받는 것은 미시간이 뉴욕이나 콜로라도의 진보적인 대도시 지역과 달리 선거 때마다 승패가 뒤바뀌는 경합 주이기 때문이다. 트럼프 대통령은 2016년과 2024년 미시간에서 승리했지만 2020년에는 바이든 전 대통령이 이겼다. 그동안 디에스에이와 저스티스 데모크랫 등 진보 단체가 지원한 후보들의 승리는 민주당 지지가 강한 대도시 지역에 집중됐다.
엘사예드 후보가 11월 본선에서도 승리한다면 경합주에서는 중도 후보가 경쟁력이 있다는 민주당의 오랜 통념이 크게 흔들릴 수 있다. 진보적 경제 의제와 반기득권 메시지로 젊은층과 노동자, 소수인종 유권자의 투표 참여를 끌어올리는 전략이 2028년 대선 경선의 대안으로 부상할 가능성도 있다. 반대로 엘사예드가 본선에서 패한다면 민주당 주류는 진보 후보의 경합주 경쟁력에 한계가 있다는 근거로 활용할 수 있다.
최근 민주당 경선에서 민주사회 진영 도전자들의 승전보가 잇따르고 있다. 지난 6월23일 조란 맘다니 뉴욕 시장이 지원한 브래드 랜더 전 뉴욕시 감사원장, 클레어 밸디즈 뉴욕주 하원의원, 정치 신예 대리얼리자 아빌라 셔발리에 등 3명이 잇따라 하원의원 당내 경선에서 승리했다. 30일에는 변호사 출신 멜라트 키로스가 현직인 다이애나 디겟 하원의원을 상대로 하원의원 경선에서 승리했다. 프란체스카 홍(37) 위스콘신주 하원의원은 오는 11일 위스콘신 주지사 경선에 도전한다. 이들은 모두 ‘돈의 벽’ 넘은 제2의 맘다니들이다. 이 돌풍에서 우리 민주당은 배워야 한다. 미국의 DSA(민주사회주의)현상을. <한겨레 신문>의 김원철 워싱턴 특파원의 기사를 읽고 갈무리 한 것이다.
미국 정치의 지각을 흔들고 있는 민주사회주의(DSA)의 강력한 우군은 밀레니얼들과 Z세대들이다. 이들이 DSA 돌풍의 진원이 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민주당 텃밭에 이은 경합주에서의 승리는 지지층을 넘어 대중을 향해 나아가는 증거인 만큼 더는 이례적 현상으로 넘길 수도 없게 됐다. 미국 사회의 금기였던 ‘사회주의’를 다시 정치의 언어로 끌어낸 DSA는 어떻게 젊은 세대를 파고들며 약진하고 있는 것일까? “그들은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DSA 현상은 미국에서 ‘자유주의 주류 정치’의 퇴조를 예감하게 한다. 민주·공화 양당의 정책적 차이가 희미해져 금권 아니면 추문뿐인 미국 정치판에서 민주당 주류가 설 자리를 잃고 있다는 의미다. 미국 젊은 세대에게 이들의 이미지는 위선과 무기력이다. 압둘 엘사예드는 “민주당의 문제는 옳은 말을 하고 싶어하면서도 쉽게 매수당한다는 점”이라고 비판했다. 2016년 힐러리 클린턴이 기업 후원금 논란 속에 트럼프의 ‘기득권 대 서민’ 프레임에 패배할 때 전조는 확연했다.
미국 젊은 세대와 DSA의 동행을 이해하려면 두 가지를 기억해야 한다. 이들은 10·20대 시절 금융위기(2008년)를 겪었고, 인공지능(AI)이라는 ‘신존재(New Being)’로부터 실존적 위협을 느끼는 첫 인류라는 점이다. 의식 근저에는 높은 주거비와 생활비, 자산 격차, 불안정한 노동시장에 대한 불안이 깊게 자리한다. DSA가 ‘생활물가’(조란 맘다니) 같은 정책공약으로 기존 양당의 ‘무색무취’를 격파할 수 있었던 이유이기도 하다. 기성 정치가 그들 미래의 어떤 등대도 되어주지 못할 때, 그들은 DSA라는 횃불을 들었다.
<경향신문>의 김광호 논설위원의 다음 지적을 받아들여야 한다. "한국의 사정도 다르지 않다. 민주당 계열 정당이 2030세대로부터 ‘내로남불’과 기득권이라는 따가운 시선을 받는 현실은 닮아 있다. 이를 모르지 않는 듯 더불어민주당은 8·17 전당대회에서 청년을 화두로 내세웠지만, 단 한 명 선출직 최고위원 후보도 없는 정치적 치장으로 끝나고 말았다. 이래선 머지않아 '당신들은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는 청년들의 말이 칼이 되어 날아들지 않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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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도미니코 사제 기념일로 말씀은 <마태오 17,14ㄴ-20> "어떤 아이에게서 마귀를 내쫓으시다" 이다.
그때에 어떤 사람이 예수님께 다가와 무릎을 꿇고 말하였다. “주님, 제 아들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간질병에 걸려 몹시 고생하고 있습니다. 자주 불 속으로 떨어지기도 하고 또 자주 물속으로 떨어지기도 합니다. 그래서 주님의 제자들에게 데려가 보았지만 그들은 고치지 못하였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아, 믿음이 없고 비뚤어진 세대야! 내가 언제까지 너희와 함께 있어야 하느냐? 내가 언제까지 너희를 참아 주어야 한다는 말이냐? 아이를 이리 데려오너라.” 하고 이르셨다. 그런 다음 예수님께서 호통을 치시자 아이에게서 마귀가 나갔다. 바로 그 시간에 아이가 나았다. 그때에 제자들이 따로 예수님께 다가와, “어찌하여 저희는 그 마귀를 쫓아내지 못하였습니까?” 하고 물었다. 예수님께서 대답하셨다. “너희의 믿음이 약한 탓이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겨자씨 한 알만 한 믿음이라도 있으면, 이 산더러 ‘여기서 저기로 옮겨 가라.’ 하더라도 그대로 옮겨 갈 것이다. 너희가 못할 일은 하나도 없을 것이다.”
<하느님을 믿는 사람>
“아, 믿음이 없고 비뚤어진 세대야! 내가 언제까지 너희와 함께 있어야 하느냐?”(마태 17,17)
하느님을 믿는 사람은
하느님의 일을 하여
하느님을 믿게 하고
하느님을 믿는 사람은
하느님의 일을 하는
하느님의 사람을 믿으니
하느님을 믿게 하는
하느님을 믿는 사람과
하느님의 사람을 믿는
하느님을 믿는 사람이
하느님의 품에서
갈림 없이 하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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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은 큰 일을 이루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 작은 마음 하나를 다시 건네는 일입니다.
2026/8/8/성 도미니코 사제 기념일
마태오 복음 17장 14ㄴ-20절: “너희가 겨자씨 한 알만 한 믿음이라도 있으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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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마음, 작은 믿음, 큰 움직임
오늘 복음에서 제자들은 아이를 고치지 못합니다. 아마 그들도 당황했을 것입니다. 나름대로 손을 얹고, 기도도 해보는 등 노력했지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을 때, 자신들의 부족함을 느꼈겠지요. 우리도 그렇습니다. 누군 가를 위로하고 싶지만 말이 서투를 때가 있고, 다시 시작하고 싶지만 마음이 따라오지 않을 때가 있습니다. 사랑하고 싶은데 미움이 먼저 올라오고, 믿고 싶은데 걱정이 앞설 때도 있습니다. 그때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겨자씨 한 알만 한 믿음이라도 있으면, 이 산더러….” 믿음은 큰 마음에서 비롯되는 것이 아니라, 그저 오늘 하루를 포기하지 않는 작은 마음, 미안하다는 말을 건네보려는 마음, 다시 기도해 보려는 겨자씨 같은 마음에서 자라나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우리가 산을 단번에 옮기기를 바라지 않으십니다. 다만, 산 앞에서 혼자 주저앉지 말고 당신께 그 작은 마음 하나를 가져오기를 바라십니다. 주님께서는 겨자씨만치 아주 작고 조용한 믿음에서도 ‘큰 기적’을 이루시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박태훈 마르티노 신부(대구대교구)/생활성서 2026년 8월호 '소금항아리'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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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년 8월 8일 성 도미니코 사제 기념일
우리는 살아가면서 우리의 이성으로는 좀처럼 이해하기 힘든 모순과 고통을 마주할 때가 있습니다. "하느님, 왜 선한 이들이 고통받고 악한 이들이 번성합니까?", "제 간절한 기도는 왜 이토록 오랫동안 침묵 속에 묻혀 있습니까?" 하는 깊은 탄식이 우리 안에서 터져 나옵니다. 삶의 풍랑 속에서 하느님마저 멀리 계신 것처럼 느껴질 때, 우리 영혼은 깊은 갈증과 무기력함에 빠지기 쉽습니다. 오늘 성경 말씀은 바로 그런 영적 어둠과 한계 상황 속에서 부르짖는 우리에게, 하느님의 신비로운 시간표를 신뢰하는 ‘참된 믿음’이 무엇인지 강력하게 일깨워 줍니다.
오늘 제1독서인 하바쿡 예언서와 복음은 ‘절망적인 현실’과 ‘믿음의 권능’이라는 주제로 깊이 연결되어 있습니다. 하바쿡 예언자는 유다 사회의 불의와 잔인한 바빌론의 횡포를 보며 하느님께 대담한 질문을 던집니다. “어찌하여 배신자들을 바라보고만 계시며 악인이 자기보다 의로운 이를 집어삼켜도 잠자코 계십니까?”(하바 1,13). 그러나 예언자는 불평에만 머물지 않고, 하느님의 답변을 듣기 위해 파수꾼처럼 초소 위에 서서 묵묵히 기다립니다. 마침내 하느님께서는 파멸의 환시가 늦어지는 것 같더라도 반드시 이루어질 것이니 낙심하지 말고 기다리라고 응답하시며 위대한 말씀을 남기십니다. “보라, 뻔뻔스러운 자를. 그의 정신은 바르지 않다. 그러나 의인은 성실함으로 산다”(하바 2,4). 여기서 ‘성실함’이란 하느님을 향한 꺾이지 않는 ‘신뢰와 믿음’을 뜻합니다.
이 기다림과 신뢰의 신비는 복음에서 제자들의 무기력을 꾸짖으시는 예수님의 말씀으로 이어집니다. 제자들이 고치지 못한 간질 앓는 아이를 예수님께서는 마귀를 쫓아내어 깨끗이 고쳐주셨습니다. 나중에 제자들이 따로 찾아와 자신들은 왜 마귀를 쫓아내지 못했는지 묻자, 주님은 단호하게 답하십니다. “너희의 믿음이 약한 탓이다” (마태 17,20). 그러고는 너희에게 ‘겨자씨 한 알만 한 믿음’이 있다면 산더미 같은 문제 앞에서도 못 할 일이 하나도 없을 것이라고 선포하십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겨자씨 한 알만 한 믿음’은 크기가 아니라 ‘순도와 방향’이 중요합니다. 겨자씨는 눈에 보이지 않을 만큼 작지만, 그 안에 살아있는 ‘생명’이 있기에 나중에 거대한 나무로 자라나게 됩니다. 제자들이 기적을 일으키지 못한 이유는 은연중에 하느님의 권능을 내 힘과 능력인 양 소유하려 했기 때문일지 모릅니다. 참된 믿음이란 내가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을 겸손히 인정하고, 하느님께서 내 삶 안에서 일하시도록 나를 완전히 비워드리는 것입니다. 내 안에 아주 작은 겨자씨만 한 순수한 신뢰가 살아있다면, 내 인생을 가로막고 있는 절망과 불신의 산은 하느님의 권능으로 반드시 옮겨질 것입니다.
오늘은 굳건한 믿음의 지팡이를 짚고 영적 혼란에 빠진 유럽의 영혼들을 구하셨던 성 도미니코 사제를 기억하는 날입니다. 성인이 살던 13세기는 이단 사상과 교회의 타락으로 인해 마치 ‘하바쿡의 밤’처럼 어두운 시기였습니다. 그러나 도미니코 성인은 세상의 위협 앞에서도 낙심하지 않았습니다. 오직 하느님의 말씀만을 무기 삼아 ‘도미니코회’를 창설하고, 밤에는 눈물로 기도하며 낮에는 자비와 진리를 선포했습니다. 성인의 성실한 믿음은 결국 온 유럽을 영적 어둠에서 건져내어 하느님 나라의 푸른 나무로 자라나게 만들었습니다.
이제 조급함을 잠시 내려놓으십시오. 하느님의 응답이 더디게 느껴질지라도 그분의 시간표에는 단 한 순간의 오차도 없습니다. 내 상황이 겨자씨처럼 초라해 보여도 괜찮습니다. "주님, 저는 무력하지만 전능하신 당신께 제 삶을 온전히 맡깁니다"라고 고백하십시오. 그 순수한 신뢰 위에 하느님의 위대한 기적이 시작될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모시는 성체는 세상에서 가장 작은 빵의 형상으로 낮아지신 예수님의 위대한 겸손이자 우리 믿음의 영양분입니다. 이 생명의 양식을 모신 우리는 더 이상 세상의 파도에 흔들리는 나약한 존재가 아닙니다. 도미니코 성인의 전구를 청하며, 눈앞의 거대한 산 앞에서도 두려워하지 말고 당당하게 일상으로 돌아갑시다. 의인은 그의 성실함과 믿음으로 삽니다. 여러분 안에 심어진 그 작은 믿음의 씨앗이 마침내 여러분의 가정과 공동체 안에 하느님 나라의 참된 평화와 기쁨으로 가득 피어나기를 축복합니다. 아멘.
"주님, 저는 무력하지만 전능하신 당신께 제 삶을 온전히 맡깁니다"
의인은 그의 성실함과 믿음으로 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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