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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운동가의 사진 하나, 시 하나

세계를 여행하면 대한민국처럼 현수막이 많은 곳을 찾기 어렵다.

3780. 인문 운동가의 인문 일지 
(2026년 8월 7일)

1
안도현 시인처럼, 나도 메 꽃과 나팔꽃을 구별하지 못하는 사람을 나는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나팔꽃은 외국에서 들여온 꽃이지만, 메 꽃은 우리나라 산천 어디에서나 스스로 자란다. 나팔꽃 잎사귀는 둥근 하트 모양이지만, 메 꽃 잎사귀는 길쭉한 쟁기처럼 생겼다.

들길에서 나팔꽃과 비슷한 연분홍 꽃을 만났다면 메 꽃이라고 보면 된다. 시집살이로 고생하는 며느리를 “기름진 밭에 메 꽃 같은 며느리"로 위로하는 조선시대 시조도 있다. 유홍준 교수는 <<나의 문화유산답사기>>에서 가장 좋아하는 꽃으로 메 꽃과 호박꽃을 들기도 했다. 키 큰 명아주 줄기를 타고 메 꽃이 한 송이 불을 밝혔다. 그 존재는 있어도 좋고 없어도 무방한, 참으로 아득한 것이다. 무욕 무취의 세계는 메 꽃을 닮았다. 있는 듯 없는 듯 사랑하기란 쉽지 않다. 오늘 아침 사진은 어제 아침 산책 길에서 만난 거다. 

메 꽃/이안
 
뒤뜰 푸섶
몇 발짝 앞의 아득한
초록을 밟고
키다리 명아주 목덜미에 핀
메 꽃 한 점
건너다보다
  
문득  
저렇게,
있어도 좋고
없어도 무방한
것이
  
내 안에 또한 아득하여,
  
키다리 명아주 목덜미를 한번쯤
없는 듯 꽃 밝히기를

바래어 보는 것이다


메 꽃은 넝쿨 식물이다. 자연계에는 많은 넝쿨 식물들이 있는데 그 습성이 뚜렷하다. 칡, 나팔꽃, 메 꽃, 박주가리, 새삼, 마 등은 우측으로 도는 우파(右派)이고, 등나무나 인동초, 환삼덩굴은 좌측으로 도는 좌파(左派)이지만 더덕처럼 중도(中道 양손잡이)도 있다. 이렇듯 넝쿨식물은 종류마다 정해진 방향으로 칭칭 처매니 방향을 일부러 바꿔 놓아도 다시 원래 제 방향대로 자리를 잡는다.

얽혀진 칡과 등나무도 정해진 방향으로 돌다 보니 서로 짓누르게 된다. 그래서 두 식물은 자연 상태에서는 대부분 함께 있지 않고 한자리에 있더라도 서로 죽이지 않고 각자 제 몫을 다하며 살아가고 있다. 칡을 오른손잡이라 치면 등나무는 왼손잡이가 된다. 이처럼 식물의 줄기 감기 말고 사람도 오른손잡이와 왼손잡이가 있다. 전체적으로 오른손잡이가 90%로 남짓이지만 왼손잡이를 보면 여자보다 남자가 더 많으며, 일란성 쌍둥이는 왼손잡이가 될 확률이 더 크다고 한다.

그렇듯 연체동물의 고둥이나 달팽이도 우파(右派)가 대부분이며, 원자(原子)·분자(分子)도 오른쪽으로 휘말려 있고, 이중나선(二重螺旋)구조인 DNA도 97%가 오른쪽으로 감는 우파(右派)이다. 이렇게 세상은 온통 오른손잡이 차지이다. 왜 오른손잡이가 많은 가에 대해서는 아직 그 이유를 잘 모르고 있다. 아마도 무서운 유전자의 명령 탓이 아닐까? 그래서 과학에는 아직 밝혀지지 않은 신비가 너무 많이 있는지도 모르겠다.

싸우되 척(慼) 지지 아니하고 다투되 서로 공존하는 지혜가 칡넝쿨과 등나무에는 있다. 부부도 칡넝쿨과 등나무처럼 서로 얽히고 설키며 산다. 그래서 갈등을 빚기도 하지만 서로 이해하고 어우르며 합체(合體) 하고 살아간다. 그러나 요즘 우리 사회를 보면 서로 갈등이 너무 심하다 못해 척(慼) 지고 사는 사람들이 너무 많다. 이 어려운 시국에 국론을 한 곳으로 모아도 극복하기가 힘든 법인데 오히려 서로 갈등을 부채질하고 있으니 한심하기 이를 데 없다.

2
세계를 여행하면 대한민국처럼 현수막이 많은 곳을 찾기 어렵다. 각자 알려야 할 게 너무 많은 탓이다. 좋게 보면 활력이고, 나쁘게 보면 억울한 갈등이 많은 나라다. 최근 우리 사회에 눈을 돌리면 숨이 막혀온다. 극단으로 치 달아 서로를 악마화 하기 바쁜 정치판의 막말, 부푼 기대와 절망이 교차하는 주식 시장 과열까지. 공론장은 차분한 토론의 장이 아니라 상대를 무너뜨리려는 전쟁터가 되어버렸다. 진영 논리에 갇힌 사람들의 진흙탕 싸움을 지켜 보노라면 깊은 염 오(厭惡)와 피로감만 남는다. 담론의 품격이 사라진 자리에 남은 건 끝없이 증폭되는 욕망의 잔여물 뿐이다. 자연에서 배워야 한다. 공존하는 기술을.

사람들은 자신이 믿는 것만이 절대적으로 옳으며, 다른 입장은 제거해야 할 악이라고 확신한다. 복잡한 현실을 견디기보다 단순한 구호와 적대의 언어가 모든 것을 덮어버린다. 모두가 정의를 외치지만, 정작 정의를 가능하게 하는 절제는 점점 사라진다. 말은 상대를 이해하기 위한 다리가 아니라 상대를 공격하는 무기가 되고 있다.

문명을 지탱해 온 건 맹목적 열정이 아니라 스스로를 경계하는 절제의 힘이다. 내가 옳다는 확신이 단단해 질수록 정의가 들어설 공간은 좁아진다. 정의가 폭력이 되지 않기 위해 필요한 것은 상대를 굴복시킬 정교한 논리나 뜨거운 신념이 아니다. 자신의 한계를 인정하는 겸손, 진실을 담담하게 말하는 용기, 내가 틀릴 수도 있다는 가능성을 끝내 포기하지 않는 절제다. 서로의 정당성을 끝까지 경청하려는 인내와 자기 확신을 절제할 줄 아는 시민들 사이에서 비로소 정의는 공동체를 살리는 질서가 된다.

‘갈등’은 칡을 뜻하는 ‘갈(葛)’과 등나무를 뜻하는 ‘등(藤)’ 덩굴이 엉망으로 뒤엉킨 상태를 말한다. 갈등이 쾌도난마로 단칼에 해결되기는 어렵다. 여기서 갈등(葛藤)에 숨어있는 의미를 공유한다. 

들판에 나가면 흔히 볼 수 있는 것이 칡넝쿨(葛)이다. 이 칡은 다년생 콩과 넝쿨 식물로 풀처럼 생겼지만 줄기가 해마다 굵어져 나무로 분류되고 있다. 뿌리는 약용으로 쓰이는데 칡뿌리 또는 갈근(葛根)이라 부르며 칡차로 먹기도 하고 발한에 해열, 해독에 쓰이고 갈증을 없애는 효능이 있으며 설사 치료의 약(藥)으로 쓰인다.

그리고 이와 비슷한 종류 중에 등나무(藤)가 있는데 등나무는 콩 과로 분류되는 콩과 넝쿨 나무이다. 등나무는 한더위에 그늘을 주고 줄기로 지팡이나 의자를 만들며, 등꽃은 말려 부부 금실에 좋으라고 신혼금침(新婚衾枕)에 넣어 주기도 하는데, 봄철에 새순을 나물로 먹기도 하고 해열에 좋으며 변비에도 탁월하다.

그런데 이 두 식물은 모두가 넝쿨 식물이며 넝쿨 식물의 특성은 혼자 서지 못하고 남을 의지해야만 일어설 수 있다. 또 다른 것을 의지하면서도 빙글빙글 돌면서 올라간다. 그런데 이 두 식물은 서로 다른 습성(習性)을 가지고 있다. 칡넝쿨은 반드시 우측으로 돌면서 올라가고,  등나무는 반드시 좌측으로 돌면서 올라간다.

성질이 다른 두 식물이 서로 만나게 되면 서로 잘 났다고 우기며 싸우게 된다. 그래서 이를 보고 칡 갈(葛) 자에 등나무 등(藤) 자를 써서 '갈등(葛藤)'이라 했다. 그러니까 갈등이란 의미는 칡 나무와 등나무를 가리키는 말이다.

그런데 '갈등(葛藤)'의 사전적 의미를 찾아보면 "의지를 지닌 두 성격의 대립 현상이며, 그 성질에 따라 외적 갈등과 내적 갈등으로 크게 나뉜다. 그래서 이를 바탕으로 하여 분쟁(紛爭)이라고 한다. 분쟁의 뜻이 갈라져 다투는 거다. 여기서 외적 갈등은 사람과 사람, 또는 사람과 환경 사이의 갈등을 말하며 내적 갈등은 한 인물의 심리적 갈등을 말함이다.  그러나 갈등(葛藤)이라는 단어가 만들어진 동기는 두 식물의 습성 때문이다. 칡넝쿨은 위에서 보아 시계 반대 방향으로 타래처럼 말아 꼬니 우파(右派·오른돌이)이고, 등나무는 시계 방향으로 외틀어 오르니 좌파(左派, 왼 돌이)이다. 

식물의 혈투 또한 동물계 못지않다. 이렇게 칡과 등나무는 죽살이 치면서 서로 엇갈리게 뒤틀려 상대를 거침없이 짓누르고 얼기 설기 똬리틀어 자리 다툼을 한다. 그러나 서로 헐뜯고 싸우기는 해도 어느 한편으로는 항상 공존하고 있다. 자연에서 배워야 한다.

3
다행히 기술의 발달로 모든 과정이 시스템적으로 투명해지고 있다. 이런 세상에서 나의 무능과 과오를 숨길 곳은 빠르게 사라지고 있다. 폭력을 저지르고도 선한 척 살거나, 일 잘하는 사람에게 묻어가던 '얌체 시대'가 저물고 있다. 그렇지만 정치권은 사회 정의가 사라진 지 오래고 너를 밟아야 내가 산다는 일념으로 부정한 자 부패한 자를 서슴없이 옹호하며 오로지 권력에만 몰두하고 있다. 옛말에 '사필귀정(事必歸正)'이란 말이 있다. 정의는 잠시 가려질 수는 있어도 반드시 이긴다는 뜻이다. 어서 빨리 갈등의 고리를 풀어 끊고, 화합,  조화, 협력하며 갈등(葛藤)에서 벗어나 상생(相生) 하는 지혜(智慧)를 배워야 한다.

같이 고민해야 할 미래는 생각보다 심각하다. 요즈음 날씨만 봐도 그렇다. 언젠가 적어 두었던 15가지 정책 방향을 공유한다. 이제 그만 싸우고, 다음 문제들을 해결해야 한다. 3년 전에 정리한 것인데, 아직도 요원하다. 전 정부가 3년의 세월을 까먹어서 그렇다. 그때의 정치인들은 후안무치 하게 아직도 등장하여 헛소리를 한다.

해결해야 할 15가지 정책 방향
 불평등 문제  해결
1) 사회에서 가장 부유한 사람 10%에 대한 세금을 늘려서 국민소득의 40% 이상을 가져가지 못하도록 제한해야 한다. 오늘날의 세계에서는 강력한 누진세 제도가 필요하다. 불안을 일으키는 불평등 문제를 해결하고 사치스러운 탄소 소비와 생물 권 소비 문제를 처리하려면 국제 사회에 존재하는 허점을 제거해야 한다.
2) 노동자의 권리를 강화하기 위한 법을 제정해야 한다. 심층 전환의 시대를 맞이한 노동자에게는 경제적 보호가 필요하다.
3) 시민기금을 도입하여 사용료와 배당금 제도를 통해 국민소득, 부, 지구 공유지를 모든 시민에게 공정하게 분배해야 한다.

에너지 문제 해결
4) 화석연료 사용을 즉시 퇴출시키는 대신 에너지 효율성을 개선하고 재생에너지를 확대해야 한다. 신재생에너지에 대한 투자를 지금 당장 3배 늘려 연간 1조 달러 이상을 투자해야 한다.
5) 모든 것을 전기화해야 한다.
6) 대규모 에너지 저장 기술에 투자해야 한다.

식량 문제 해결
7) 관련 법을 제정하여 식량 손실과 낭비를 줄여야 한다.
8) 재생농업과 지속 가능한 생산력 증대에 대해 경제적 인센티브를 확대해야 한다.
9) 지구 한계를 존중하고 건강에 좋은 식단을 장려해야 한다.

빈곤(가난) 문제 해결
10) IMF가 녹색 일자리를 위해, 저소득 국가들에 연간 1조 달러 이상을 할당하도록 허용해야 한다. 바로 이것이 이른바 '특별 인출권을 통한 투자 창출'이다.
11) (1인당 소득 1만 달러 미만의) 저소득 국가가 지고 있는 모든 부채를 탕감해야 한다.
12) 저소득 국가의 신생 산업을 보호하고 저소득 국가 간에 이루어지는 남반구-남반구 무역을 촉진해야 한다. 지식재산권 제약을 비롯하여 기술 이전에 걸림돌이 되는 장애물을 제거하여 재생에너지와 보건의료 기술에 대한 접근성을 개선해야 한다.

젠더 평등 문제 해결
13) 모든 소녀와 여성에게 교육 받을 기회를 제공해야 한다.
14) 직업과 지도력에서 젠더 평등을 달성해야 한다.
15) 적절한 연금을 제공해야 한다.

4
어제 조란 맘다니는 2040년까지 뉴욕시 면적의 30%에 나무를 심겠다고 발표했다. 뉴욕시 최초의 도시숲 조성 프로그램이라고 한다. 

당파 싸움과 지들 밥그릇 개선밖에 모르는 정치인들을 보다가 우울해지면 조란 맘다니를 검색한다. 거의 매일 하루에 하나씩 정책을 발표한다. 배달노동자의 처우 개선에서부터 시 운영의 식료품점에 이르기까지, 모든 정책이 시민들의 '생활 개선'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그러다 보니 지금 미국에서 가장 인기 높은 인물로 부상했다. 

몇일 전 발표 내용은 시장 당선 전부터 캠프가 공언해 온 것이었다. 조란 맘다니는 빈틈없이 자신의 공약들을 해치우고 있다. 뉴욕 시민들은 조란 맘다니를 통해 시민들을 위해 일하는 정치인이 실제 가능하구나를 체험하는 중이다. 조란 맘다니 같은 사회주의자가 시장이 되면 사람들이 뉴욕을 떠날 거라던 극우들의 하찮은 협박과 달리, 최근 구글 트랜드에는 '뉴욕 이주'가 계속 올라오고 있다. 

어쨌거나, 뉴욕시의 면적 30%를 나무로 덮고 그늘을 드리워 도시 열 섬을 줄이고, 시민들이 시원하고 쾌적한 삶을 누리게 하자는 계획. 도시를 푸르게 하는 것은 당연히 폭염 완화, 삶의 질 향상, 환경 정의 증진, 정서적 안정에 큰 도움이 된다.

레거시 언론이 빨리 개혁되어야 한다. 이런 류의 보도는 드물다. 보는 정보보다 보여주는 정보가 훨씬 더 많아지고 있는 세상이다. 비판 정신이나 분별 능력이 부족한 상태에서 접하는 정보는 해석 과정에 오류가 발생할 확률이 높다. 그 확률을 낮추는 데에는 꽤 큰 에너지가 필요하다. 현대인은 편리와 편의 그리고 빠름에 젖어버린 본성을 발휘해 검증이라는 필터를 사용하지 않으려고 한다. 아니면 말고 식이다. 그래서 뭐 어쩌라고 식이기도 하다. 거기에 더해 니가 무슨 상관인데? 라는 식으로 까지 넘어가게 되면 지적 사유를 포기한 단세포적 인간으로 전락하게 된다. 

저널리즘은 메말라 가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펜의 양심이 아니라 양심의 펜이 필요한 시대는 저물어가는 것처럼 보인다. 수익과 연결돼 고결한 비판 정신과 엿 바꿔 먹고 말았다. 광고에 여성의 가슴을 드러내 보이고 자극적인 문구를 내걸며 돈벌이를 하는 언론사들은 이제 거의 법인 화된 디지털 거렁뱅이와 같다.

누군 가를 무너뜨리는 데에 누구보다 앞장서면서도 누군가를 살려내는 데에는 인색한 언론은 그 형벌로 레거시라는 게토 화된 영역 안에서 고사하는 중이다. 차라리 잘못을 인정하는 데에 더 빠르고 정확하고 예민한 유튜브와 같은 오픈 플랫폼이 훨씬 양심적이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미디어 언론 등이 던져주는 개밥을 헐떡이면서 받아먹는 동물적 본능을 거부할 줄 아는 사람이다. 그래서 인문 운동가로서 <인문 일지>에 정치 이야기를 많이 할애한다. 

5
연중 제18주간 금요일로  말씀은 <마태오 16,24-28> "예수님을 어떻게 따라야 하는가" 이다.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 정녕 자기 목숨을 구하려는 사람은 목숨을 잃을 것이고, 나 때문에 자기 목숨을 잃는 사람은 목숨을 얻을 것이다. 사람이 온 세상을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 사람이 제 목숨을 무엇과 바꿀 수 있겠느냐? 사람의 아들이 아버지의 영광에 싸여 천사들과 함께 올 터인데, 그때에 각자에게 그 행실대로 갚을 것이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여기에 서 있는 이들 가운데에는 죽기 전에 사람의 아들이 자기 나라에 오는 것을 볼 사람들이 더러 있다.”

<당신 때문에>
“정녕 자기 목숨을 구하려는 사람은 목숨을 잃을 것이고, 나 때문에 자기 목숨을 잃는 사람은 목숨을 얻을 것이다.”(마태 16,25)

당신 때문에

당신 닮으니
나는 당신입니다
있음 때문에

있으니
나는 있음입니다
지음 때문에

지으니
나는 지음입니다
믿음 때문에

믿으니
나는 믿음입니다
희망 때문에

희망하니
나는 희망입니다
사랑 때문에

사랑하니
나는 사랑입니다
섬김 때문에

섬기니
나는 섬김입니다
살림 때문에

살리니
나는 살림입니다
이룸 때문에

이루니
나는 이룸입니다
당신 때문에

당신 닮으니
나는 당신입니다

6
사랑 때문에 나를 내려놓을 때, 나를 잃어버리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더 충만해집니다.
2026/8/7/연중 제18주간 금요일/입추
마태오 복음 16장 24-28절: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

십자가를 진다는 건
우리의 신앙에서 ‘십자가’는 떼려야 뗄 수 없는 표징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주님을 따라 늘 일상의 십자가를 지고 살아가지요. 그런데 때로는 이 십자가가 너무 무겁게 느껴지기도 합니다. 마치 큰 고통을 참고, 모든 것을 포기해야 하는 것처럼 말이지요. 하지만 우리의 일상에서 십자가는 의외로 구체적이고 작은 일로 찾아옵니다. 하고 싶은 말을 한 번 참고, 미운 사람을 위해 기도하고, 귀찮지만 누군가의 이야기를 끝까지 듣고, 내 자존심보다 사랑을 먼저 선택하고…. 이런 작은 선택들이 우리가 지고 가야 할 십자가인 것이지요. 예수님께서 “제 목숨을 얻으려는 사람은 목숨을 잃을 것이고, 나 때문에 자기 목숨을 잃는 사람은 목숨을 얻을 것이다”라고 말씀하신 것처럼, 사랑은 늘 조금의 손해를 요구합니다. 내 시간, 내 편안함, 내 고집을 조금 내려놓게 만들지요. 그런데 그렇게 조금씩 비워낼 때 우리는 더 충만해집니다. 결국 신앙은 나를 없애는 일이 아니라, 나만 붙잡고 살던 마음에서 벗어나 사랑 안에서 더 충만해지는 나를 발견하는 일입니다. 오늘 하루, 우리에게 주어진 작은 십자가를 피하지 않으면 좋겠습니다. 그 십자가 끝에서 주님은 우리를 무너뜨리시는 게 아니라, 더 사랑할 수 있는 사람으로 다시 세우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박태훈 마르티노 신부(대구대교구)/생활성서 2026년 8월호 '소금항아리'에서⠀

7
2026년 8월 7일 연중 제18주간 금요일
뜨거운 한여름의 태양이 내리쬐는 8월의 첫 주간을 마무리하는 금요일입니다. 무더위 속에서 일상을 꾸려가다 보면 몸의 피로와 함께 마음의 무게도 부쩍 무겁게 느껴지곤 합니다. 먹고사는 문제, 직장에서의 스트레스, 가족 간의 해소되지 않는 응어리 등 저마다의 어깨에 놓인 삶의 무게가 때로는 숨을 턱턱 막히게 합니다. 오늘 주님께서는 고단한 발걸음으로 당신을 찾아온 우리에게 신앙의 핵심이자, 참된 자유로 나아가는 지름길을 선포하십니다.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마태 16,24).

오늘 제1독서인 나훔서와 복음은 ‘세상 중심적인 삶의 허무함’과 ‘하느님 중심적인 십자가 삶의 영원함’을 극적으로 대비시킵니다. 나훔 예언자는 폭력으로 세상을 지배하던 아시리아의 수도 니네베를 향해 하느님의 준엄한 심판을 선포합니다. 그들이 쌓아 올린 부와 권력은 ‘피의 도성’ 위에 세워진 신기루일 뿐이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그들의 교만을 꺾으시고 흩어졌던 당신 백성에게는 "평화를 알리는 이의 발이 산을 넘어온다”며 해방의 기쁜 소식을 전하십니다. 이는 하느님을 배제한 채 쌓아 올린 세상의 화려함은 결국 먼지처럼 사라진다는 역사적 진실을 말해줍니다.

이 진리는 오늘 복음에서 더욱 명확해집니다. 주님은 스승의 수난을 가로막으려던 베드로를 꾸짖으신 후, 제자들에게 진짜 생명의 길을 가르쳐 주십니다. “사람이 온 세상을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 (마태 16,26). 니네베처럼 온 세상을 손에 쥐려 허덕이는 삶은 결국 영원한 생명을 잃어버리는 가장 어리석은 선택입니다. 오히려 주님을 위해 이기심과 탐욕을 기쁘게 비우는 사람만이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됩니다.

우리는 “자신을 버리고 십자가를 지라”는 말씀에 본능적으로 두려움을 느끼곤 합니다. 신앙생활이 나를 억누르고 고통을 참아내야만 하는 억울한 일이라고 오해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주님이 말씀하시는 ‘자신을 버림’은 존재의 파괴가 아니라, 내 삶의 주인 자리를 ‘거짓된 나’(이기심, 집착)에게서 ‘참된 생명이신 하느님’께로 양보하는 영적 전환을 의미합니다. 내 인생을 혼자 다 책임지려 할 때는 늘 불안하지만, 고집을 버리고 주님께 삶의 운전대를 맡겨드릴 때 비로소 참된 자유가 시작됩니다.

또한 ‘제 십자가’를 진다는 것은 도망치고 싶은 현실(성격의 결함, 가난, 변하지 않는 가족의 약점 등)을 외면하지 않고, 주님의 도우심을 믿으며 묵묵히 책임감 있게 껴안는 사랑의 결단입니다. 무언가를 꽉 움켜쥐고 있는 손으로는 주님이 주시는 영원한 생명을 받을 수 없습니다. 자존심, 돈에 대한 불안, 자녀를 내 뜻대로 바꾸려는 욕심의 손을 기쁘게 펴서 주님께 내어맡기십시오. 그때 주님은 여러분의 가벼워진 어깨 위에 거룩한 은총을 채워주실 것입니다. 주님과 함께 지는 십자가는 더 이상 파멸의 무게가 아니라, 부활로 건너가는 축복의 열쇠가 됩니다.

8월의 뜨거운 태양 아래서 지치지 마십시오. 오늘 우리가 견딘 작은 희생과 겸손의 순간들은 하느님의 셈판에 가장 아름다운 보석으로 기록될 것입니다. 세상의 헛된 니네베 성을 쌓기보다 내 십자가를 사랑으로 지고 주님을 따릅시다. 마침내 영광 속에 오시는 주님 앞에서 우리 모두가 영원한 생명의 승리자가 되기를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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