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779. 인문 운동가의 인문 일지
(2026년 8월 6일)
1
카프만 부인이 자신의 책 <<광야의 샘>>에서 얻은 거다. "어느 날 그녀는 누에고치에서 번데기가 나방으로 탈바꿈하는 과정을 지켜보았다. 바늘구멍만 한 틈새에서 몸 전체가 비집고 나오려고 한나절을 바둥거리고 있었다. 안쓰러운 생각에 가위로 구멍을 넓혀 주었다. 커진 구멍으로 쉽게 빠져나온 나방은 공중으로 솟아 오르려고 몇 번을 시도하더니 결국 날지 못하고 땅바닥을 맴돌았다. 그녀는 나방이 작은 틈새로 나오려고 애쓰는 시련을 거치면서 날개의 힘이 길러지고 물기가 알맞게 말라 날 수 있다는 사실을 뒤늦게 알았다."
우리는 누구나 편안한 삶을 살기를 원한다. 고통을 싫어하고, 기쁨만 가득하기를 바란다. 그러나 고통이 없고 기쁨만 있다면 인간의 내면은 절대 여물 수 없다. 나방처럼 난관을 헤쳐가는 과정에서 생존의 힘을 기를 수 있다. 아픈 만큼 성숙해지는 법이다. 삶은 휘황찬란한 마법에 있지 않다. 오늘 하루 내 삶을 당당히 살았으면 그것으로 되었다. 달팽이도 자기 속도대로 걸어간다.
우리는 성공 담을 많이 듣는다. 하지만 성공 이후 행복했는지 에 대한 생각은 않는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소중한 일상에 대해선 살피지 않는다. 외적인 기준 만으로 '위너'와 '루저'를 판정한다. 랠프 월도 에머슨의 시 '성공이란 무엇인 가'에서는 성공에 대해 다양한 정의를 내린다. '자주 많이 웃는 것, 현명한 사람들에게 칭송 받고 아이들의 애정을 얻는 것, 아름다운 것에 감사할 줄 알고 남에게서 좋은 장점을 발견하는 것 (…)"이라 했다.
"시골 쥐와 도시 쥐"로 알려진 <이솝우화> 243장의 원래 제목은 <들쥐와 집쥐>이다. 나는 들 쥐처럼 살기로 마음 먹었다. 가난한 시골 쥐가 때깔 좋은 부자 도시 쥐를 부러워한다. 막상 도시 쥐 집을 방문해보니 맛있는 것은 많을 망정 사람이 들어오면 숨느라 바빠 마음 편할 날이 없었다. 시골 쥐는 이를 보고 자기 집이 더 낫다며 돌아간다. "친구여, 잘 있게. 자네나 배 터지게 먹으며 큰 즐거움을 누리시게 나. 많은 위험과 두려움을 감수하면서 말일 세! 가련한 나는 누구의 눈치도 보지 않으면서 아무 두려움 없이 보리와 곡식을 갉아먹으며 살아갈 것이네."
견디다/천양희
울대가 없어 울지 못하는 황새와
눈이 늘 젖어 있어 따로 울지 않는 낙타와
일생에 단 한 번 울다 죽는 가시나무새와
백년에 단 한 번 피우는 용설란과
한 꽃대에 삼천 송이 꽃을 피우다
하루 만에 죽는 호텔펠리니아 꽃과
물 속에서 천 일을 견디다 스물다섯 번 허물 벗고
성충이 된 뒤 하루 만에 죽는 하루살이와
울지 않는 흰띠거품벌레에게
나는 말하네
견디는 자만이 살 수 있다
그러나 누가 그토록 견디는가
중국 고사성어에 '복수불반분(覆水不返盆)'이 있다. ‘한 번 엎은 물은 다시 담을 수 없다’는 뜻이다. 낚시꾼으로 유명한 강태공의 고사에 나오는 내용이다. 강태공은 나이가 칠십이 될 때까지 낚시만 하는 백수였다. 이에 견디다 못한 아내는 남편을 버리고 떠났다. 그 후 강태공이 제후가 되고 아내가 돌아와 같이 살 것을 요청하자, 물 한 바가지를 땅에 쏟고는 다시 그릇에 담을 수 있으면 같이 살겠다고 말한 고사에서 유래했다. 삶은 견디는 거다.
2
부동산 세금 문제로 세상이 시끄럽다. 다 자기 눈으로 본 것만으로 개혁에 대해 말한다. 김병기 서예가로부터 "不患寡而患不均(불환과이환불균)"라는 문장을 알게 되었다. '적은 것을 걱정하지 말고 고르지 못함을 걱정하라'는 뜻이다. 그런데 인간의 탐욕 때문에 그런 청정한 순환이 다 깨져 버렸다. 일용할 양식이 이러 할진대 다른 부(富)는 말할 나위도 없다. 인간과 자연 사이의 불공정은 물론, 인간 사이의 불균형도 극에 달해 있다. 한편에서는 남아서 버리고 다른 한편에서는 모자라서 굶어 죽고, 고루 나누려 들면 지구는 인류가 다투지 않아도 될 만큼 충분한 자원을 내줄 것이다. 탐욕이 지배하는 한 부는 아무리 쌓아도 만족에 이를 수 없고, 게으름이 만연하는 한 고르게 나누는 균배는 독이 되고 만다. 열심히 일하고 일한 만큼 고르게 나누며 살자는 게 공자의 뜻일 것이다.
<지산 겸>괘의 괘사가 "象曰(상왈) 地中有山(지중유산)이 謙(겸)이니 君子(군자) 以(이)하야 裒多益寡(부다익과)하야 稱物平施(칭물평시)하나니라" 이다. 번역하면, '상전에 말하였다. “땅 가운데 산이 있음이 겸(謙)이니, 군자가 이를 본받아 많은 것을 덜어 적은 데에 더해서, 물건을 저울질하여 베풂을 고르게 한다.”
땅 위로 솟아 있어야 할 산이 땅 가운데에 낮게 처하니, 이러한 상을 보고 군자는 많은 것은 덜어내어 적은 데에 더하고, 모든 상황을 잘 저울질해서 사회의 형평(衡平)과 평등(平等)을 구현하여야 한다. 사회정의(社會正義)의 기본 핵심은 형평과 평등에 있다. 사회의 병폐가 되는 ‘부익부(富益富) 빈익빈(貧益貧)’ 현상을 완화하기 위해 누진세(累進稅) 등의 세금정책을 통해 재원(財源)을 마련하고, 그 자금으로 가난한 자에게 복지혜택을 구현하는 것이 가장 대표적인 예이다. 겸(謙)은 사회정의(社會正義)이고 평등(平等)을 구현하는 원리이다. 가진 것이 많다고, 인지도가 높다고, 직급이 높다고, 뽐내거나 까불지 말아야 한다. 대동(大同)과 평등(平等)의 가치를 <<주역>>이 표방하고 있는 것은 그것이 곧 '천지의 도'이기 때문이다.
"부다익과 칭물평시"는 <<도덕경>> 제77장의 "天之道(천지도) 其猶張弓與(기유장궁여) 高者抑之(고자억지) 下者擧之(하자거지) 有餘者損之(유여자손지) 不足者補之(부족자보지): 하늘의 도는 활시위를 당기는 것과 같다. 높은 것은 억누르고, 낮은 것은 들어올린다. 남으면 덜어주고, 모자라면 보태 준다"와 일맥상통한다. 바람이 불고 비가 오면 높은 산을 깎아 낮아지고, 그 덕택으로 낮은 곳은 메워져 높아진다. 위쪽 연못에 물이 차 넘치면 그 물은 자연히 아래쪽 연못으로 흘러 들어 그것을 채운다. 이렇게 남는 쪽에서 덜어내어 모자라는 쪽에 보탬으로 전체적인 균형을 이루는 것이 '하늘의 도'이다. 노자는 당시 불평등한 사회를 비판하며 부자의 부를 덜어서 빈자에게 더해주어야 한다고 강조했던 거다.
그래 이렇게 말했던 것이다. "天之道損有餘而補不足(천지도손유여이보부족) 人之道則不然(인지도즉불연) 損不足以奉有餘(손부족이봉유여): 하늘의 도는 남는 데서 덜어내어 모자라는 데에 보태지만, 사람의 도는 그렇지 않아, 모자라는 데서 덜어내어 남는 데에 바친다." "물이 한번 쓸고 가면 둔 턱은 깎이고 움푹한 곳은 뻘로 채워진다. 이런 것이 자연 현상이다. 불평등 구조를 화해구조로 끊임없이 리벨런싱 하는"(김용옥) 것이 자연의 법칙이다. 그래서 리더는 부자의 여유를 덜어 빈자의 부족함을 메꾸어야 한다. 노자는 이러한 자연의 법칙, 존재의 법칙을 가지고서 인간세의 당위를 요청한다.
'약자를 보호하라"는 거다. 왜냐하면 "남는 데서 덜어내 모자라는 데 보태는 것이 하늘의 도(天地道)"이기 때문이다. 이 장의 키워드는 "보부족(補不足)", '부족한 자에게 나눔을 하라'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베풀라'이다. 베풀어야 할 사람이 베풀기는 커녕 더욱 가지려고 하면 강제로 베풂을 당하는 일이 생긴다. 공자의 충고를 잘 새겨서 겸손을 실천해야 한다. 마음만 겸손하게 한다고 해결되는 것은 아니다. 자신이 현재 가지고 있고 누리고 있는 물질적, 정신적인 모든 것의 높이에 '겸손'을 대입함으로써, 하늘과 땅과 귀신과 사람이 돕고 좋아하는 행동을 할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한다. 겸손은 곧 평등의 실천이다.
3
인내(忍耐)는 '참을 인(忍)'과 '견딜 내(耐)'가 만나 이루어진 단어이다. 여기서 '忍(참을 인)'은 '刃(칼날 인)'과 '心(마음 심)'이 합쳐진 글자로 칼날이 심장을 찌를 듯한 아픈 마음을 견딘다는 의미이다. 또한 '耐(견딜 내)'는 수염의 형상을 본떠서 만든 '而(말이을 이)'와 '寸(마디촌)'이 합쳐진 글자인데 수염을 깎는 형벌을 나타내는 글자로 확장되어 '견디다'는 뜻을 가지고 있다.
인내에는 어쩔 수 없어서 참아야 하는 수동적인 의미의 인내가 있다. 그리고 힘겹고 어려운 상황을 만났을 때 더 열심을 내어 이겨내는 능동적인 인내가 있다. 마치 문이 닫혔다고 참고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다른 문을 두드리고 새로운 방법을 찾는 자세를 말한다. 오늘도 힘겨운 상황 가운데 수없이 찾아오는 인내해야 할 것들이 너무 많이 있다. 하지만, 새로운 것을 향해 나아갈 때 고통과 인내는 항상 따른다.
좋은 삶은 인내 없이 이루어지지 않는다. "참아라, 내 마음이여! 전에는 더 개 같은 일도 참아냈지, 힘을 억제 못 하는 키클롭스가 전우들을 먹어 치우던 그날에도. 너는 굳세게 견뎌냈지, 동굴에서 몰살될 거라 믿었으나 계략으로 끌어낼 때까지 참고 견디지 않았던가!" 영화로 나온 호메로스의 <<오디세이아>>에 나오는 말이다.
<<오디세이야>>는 트로이 전쟁의 영웅 오디세우스의 귀향 과정을 그려낸 것이다. 고난과 위험으로 얼룩진 귀향 길은 우리의 인생 여로를 상징한다. 우리 역시 날마다 위기를 이기고 무사히 귀가하기를 바라지 않던가? 오디세우스는 인생에서 행복과 평화를 손에 쥐려면 우리에게 무엇이 필요한가를 알려준다. 흔히 사람들이 떠올리는 오디세우스의 자질은 '트로이의 목마'로 상징되는 기지와 계략이다. 위기를 맞아 눈앞이 캄캄할 때마다 과연 그는 책략과 임기응변으로 상황을 이겨낸다.
그러나 오디세우스의 진짜 미덕은 인내이다. "참아라, 마음이여!" 그는 개 같은 일이 벌어졌을 때도, 기발한 계략이 떠올랐을 때도, 상황이 무르익어 열매가 떨어질 때까지 참을 줄 안다. 감정에 빠져 섣불리 움직이지 않고, 함부로 행동해 자신을 파멸로 몰지 않는다. 그는 뒷일을 먼저 생각하고 움직이는 사람이다. 키클롭스가 동료를 살해했을 때 격분한 오디세우스는 칼을 빼 드는 대신 훗날을 기약한다. 자기 힘으론 동굴을 막은 바위를 치울 수 없기 때문이다. 때를 무시한 행동은 만용에 불과하다. 성급함은 인간을 미망에 빠뜨리고, 참을성 부족은 판단 착오를 일으킨다. 울분을 참고 견디면서 그는 "고귀한 새벽의 여신이 오기"를 기다린다. 술을 건네 키클롭스를 재우고 말뚝을 깎아 그를 눈 멀게 한 후 키클롭스의 힘을 역이용 해 동굴에서 탈출한다. 좋은 삶은 인내 없이 이뤄지지 않는다.
그러나 인내는 포기나 체념과 다르다. 칸트는 '습관적 견딤'이 고통에 대한 무관심이라고 말한다. 악에 압도되는 건 인간에게 짓밟히는 벌레나 침 없는 벌 같은 무기력한 신세로 전락 시킬 뿐이다. 인내란 반드시 불의와 폭력에 저항해서 힘을 모으는 굳센 마음이어야 한다. 지혜가 없는 기다림은 어리석음이고, 정의가 없는 견딤은 나약함이다. 쓰디 쓴 인내의 열매를 달콤하게 만들려면 무엇을 위해 견디는 가를 놓치면 안 된다. 오디세우스는 말한다. "부부가 한마음 한 뜻이 돼 금실 좋게 살림을 살 때만큼 강력하고 고귀한 것은 없소." 나침반이 있는 삶은 길을 잃지 않는다. 가족과 기쁨과 평화를 누리는 일보다 좋은 게 없음을 알았기에 오디세우스는 숱한 고난을 뚫고 집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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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2026년 7월 5일) 대통령은 “(육군, 해군 그리고 공군 사관학교를 합친) 통합 국군사관학교 설치와 관련해 논란이 있는데, 지금까지 대한민국에 군사 쿠데타가 몇 번 있었나”며 “쿠데타를 무려 세 번이나 한 중심이 육군사관학교(육사)인데, 한 번도 책임을 묻지 않았다”고 말했다. 사실 1961년 5·16 쿠데타는 박정희, 김종필 등 육사 8기, 1979년 12·12 쿠데타는 전두환, 노태우 등 육사 11기, 2024년 12·3 내란은 김용현 등 육사 출신 전·현직 장군들이 주동했다.
그러면서 대통령은 “군별로 따로 떼어서 (장교를) 육성하고, 아주 장기간 특정 군종의 장교들이 군대를 압도적으로 장악하고, 가끔 쿠데타를 일으켜 나라를 절단낸 난 다음 아무런 책임도 지지 않는 경우가 있느냐”며 “통합을 하면 이런 가능성이 좀 줄어들지 않겠나”라고 했다. 군종은 육·해·공군을 뜻하며, 육군이 한국군을 주도한다. 통합사관학교가 육사 선후배로 묶인 카르텔을 해소해 쿠데타 가능성을 줄인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 대통령은 “대다수 장병은 국가에 충성하며 군인의 소명을 다 하고 있는데, 일부가 이런 용서 못 할 짓을 벌인다. 그런 소지를 없애야 하는 것 아닌가”라며 “꼭 사람이 나빠서 가 아니라 기회가 주어지고 유인이 생기면 넘어가는 거다. 그럴 수 없는 합리적인 교육 시스템이 꼭 필요하겠다”고 강조했다. 이어 국방장관에게 국군사관학교 창설을 “신속하게 강력하게 빨리 하라”고 지시했다.
나는 '육, 해, 공 사관학교 통합(국군사관학교 창설)' 중심의 국방 구조 개혁에 동의한다. 그 창설학교가 우리 동네 자운대에서 시작하는 것도 옳다. 이미 부지가 확보되어 있고, 가까운 곳에 카이스트가 있어 시너지 효과를 얻을 수 있다고 본다. 전 카이스트 총장이 한 인터뷰에서 했던 이야기를 공유한다. "미래의, 아니 이미 현재의 국방은 과학 기술에 좌우됩니다.(...) 2022년에 우크라이나 전쟁 양샹을 보면 드론, 위성 통신 등 다 기술로 하였다. (...) 휴전선에서 총 들고 서 있는 게 국방의 전부가 아니고 신 무기 만드는 게 국방이다. 군에서 무기를 개발하고, 나중에 사회에 나와서는 관련 분야로 창업도 하고, 그런 쪽으로 방향을 잡아야 한다."
그런데 보수 기득권과 일부 군 예비역 단체들은 국방장관의 40년 전 방위 병적 기록 논란을 빌미로, 일제히 지휘권 실추"를 주장하며 개혁안 저지에 나서고 있다. 이는 정책의 타당성을 다투는 정공법이 아니다. 장관의 도덕성에 흡집을 내어 논점을 흐리고 대중의 이성적 판단을 마비 시켜 개혁 드라이브 자체를 무력화 하려는 전형적인 "메신저 공격"이다. '저렇게 흠 많은 사람이 어떻게 국방부 장관을 할 수 있냐'라는 프레임을 씌워 기득권 카르텔을 지키려는 조직적 반발이다.
이런 서슬 퍼런 도덕적 잣대는 우리 군 역사의 뿌리를 들여다 보는 순간 기묘한 이중 잣대로 돌변한다.
- 우선 백선엽을 보자. 군 기득권 세력이 '육군의 아버지'이자 '구국의 영웅'으로 신화 화 하여 육사 교정에서 절대적으로 추앙 해 온 백선엽은 일제 강점기 독립군을 전문적으로 토벌하던 악명 높은 친일 '간도특설대' 출신이다. '조선인 독립군을 잡기 위해 친일 조선인 군인을 이용한다'는 일제의 영악한 이이제이(이징제이) 분열 전술의 전면에 섰던 자였다. 그 뿐만 아니라, 해방 후 지리산 공비 소탕 작전, 즉 '쥐잡기 작전'은 토벌 지역을 점거하고 들판의 모든 곡식과 가옥을 불태워 적이 숨을 곳과 보급 처를 차단한다는 전술로 선량한 양민들을 무차별 학살했다. 한겨울에 쫓겨난 노약자와 어린이 부녀 자들은 전염병과 추위, 굶주림으로 길에서 동사 했다. 그럼에도 육사는 '초대명예교수'로 위촉하여 군 교육의 정신적 멘토로 삼았다. 또한 윤석열 정부 하의 군 지휘부는 육사 내 홍범도 장군 흉상을 철거하는 대신, 대전현충원에 백선엽의 대형 동상을 건립하고 육군의 상징으로 각인 시켰다.
- 그리고 군 기득권이 숭상하는 박정희 대통령 역시 대한민국 군 주류가 가진 도덕적 불감증의 결정체이다. 그는 일제 강점기 일본 육사 출신으로 독립군을 탄압하던 간도 특설대 등 친일 군 경력의 연장선에 있었으며, 해방 후에는 군 내 좌익 반 국가 활동(남로당사건) 혐의로 무기징역을 선고 받아 복역했던 이물이다. 이처럼 군의 정체성과 안보를 뒤흔들만한 치명적인 전력이었음에도, 군 기득권 내부에서는 이를 조직적으로 묵인하고 도리어 그를 구국의 영웅으로 추앙해 왔다.
지금 국방 개혁에 반기를 든 한국 군 기득권들은 국가 안보를 자신들의 전유물로 착각한 채, 시대적 흐름인 문민 통제와 구조 개혁을 거부하여 성벽을 높이고 있다. 이번 국방 개혁은 단순한 부대 통폐합이 아니다. 인구 절벽이라는 피할 수 없는 현실 속에서 군 구조를 효율화하고 현대전의 핵심인 육,해,공군의 협동 력을 강화하며, 무엇보다 오랜 세월 군을 지배해 온 특정 사관학교 중심의 순혈 주의와 엘리트 파벌 문화를 해체하려는 절박한 생존 전략인 것이다.
군의 진짜 명예는 기득권 지키기가 아니라 국민의 생명을 수호하고 민주적 가치를 따르는 데서 나온다. 현 정부는 해묵은 프레임과 기득권의 저항에 흔들리지 말고, 군의 민주적 통제와 군구조개혁이라는역사적 과제를 향해 뼈를 깎는 체질 개선을 중단 없이 밀고 나가야 한다. 그것이 진정한 국민의 군대로 거듭나는 유일한 길이다. 이런 측면에서 어제 대통령의 발언은 의미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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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의 거룩한 변모 축일로, 말씀은 <마태오 17,1-9> "영광스러운 모습으로 변모하시다" 이다.
그 무렵 예수님께서 베드로와 야고보와 그의 동생 요한만 따로 데리고 높은 산에 오르셨다. 그리고 그들 앞에서 모습이 변하셨는데, 그분의 얼굴은 해처럼 빛나고 그분의 옷은 빛처럼 하얘졌다. 그때에 모세와 엘리야가 그들 앞에 나타나 예수님과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러자 베드로가 나서서 예수님께 말하였다. “주님, 저희가 여기에서 지내면 좋겠습니다. 원하시면 제가 초막 셋을 지어 하나는 주님께, 하나는 모세께, 또 하나는 엘리야께 드리겠습니다.” 베드로가 말을 채 끝내기도 전에 빛나는 구름이 그들을 덮었다. 그리고 그 구름 속에서, “이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 하는 소리가 났다. 이 소리를 들은 제자들은 얼굴을 땅에 대고 엎드린 채 몹시 두려워하였다. 예수님께서 다가오시어 그들에게 손을 대시며, “일어나라. 그리고 두려워하지 마라.” 하고 이르셨다. 그들이 눈을 들어 보니 예수님 외에는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그들이 산에서 내려올 때에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사람의 아들이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되살아날 때까지, 지금 본 것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마라.” 하고 명령하셨다.
<초막>
“주님, 저희가 여기에서 지내면 좋겠습니다. 원하시면 제가 초막 셋을 지어 하나는 주님께, 하나는 모세께, 또 하나는 엘리야께 드리겠습니다.”(마태 17,4)
산 아래서
벗들을 품어야할
보잘것없는 거친 초막에
지친 당신의 사람들과 함께
산 위에서
하느님께서 함께하시는
빛나는 초막을 맛보이시려
주님께서 올라가시네
산 위에
아쉬울 것 없는
우리만의 초막을 짓자는
들뜬 당신의 사람들과 함께
산 아래에
하느님께서 바라시는
모든 이 깃들 초막을 지으시려
주님께서 내려오시네
6
신앙은 영광의 빛을 붙잡으며 높은 곳에 머무는 일이 아니라, 그 빛을 품고 누군가를 위해 다시 내려가는 일입니다.
2026/8/6/주님의 거룩한 변모 축일
마태오 복음 17장 1-9절: “일어나라. 그리고 두려워하지 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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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려움 없이 일어나 내려가기
오늘 복음이 전하는 예수님의 거룩한 변모는, 영광스러운 주님의 모습을 강조하는 듯 보이지만, 사실은 그 영광의 순간에 머무르려 하지 말아야 한다는 가르침을 담고 있습니다. 베드로는 이렇게 말합니다. “주님, 저희가 여기에서 지내면 좋겠습니다.” 누구나 그런 마음이 있습니다. 상처도 없고, 불안도 없고, 모든 것에 확신이 생길 때, 바로 그 순간을 오래도록 붙들고 싶은 마음. 하지만 예수님은 제자들을 산 위에서의 복된 순간에 취해 있도록 두지 않으십니다. 거룩한 영광을 보여주신 뒤, 다시 산 아래로 데리고 내려가시지요. 이렇듯 신앙은 특별한 빛을 받은 순간에 집중하는 것이 아니라, 그 빛을 내면의 등불로 삼아 평범하고, 때론 어둡기도 한 일상을 살아내는 일입니다. 그러니 오늘 함께 기억하면 좋겠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산 위로 부르시어 빛을 보여주시지만, 다시금 그 빛을 품고 누군가를 위해 산 아래로 내려가게 하시는 분임을 말입니다. 박태훈 마르티노 신부(대구대교구)/생활성서 2026년 8월호 '소금항아리'에서⠀
"공성이불거"라는 말이 소환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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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년 8월 6일 주님의 거룩한 변모 축일
무더위가 절정에 달한 8월의 한복판에서 우리는 ‘주님의 거룩한 변모 축일’을 맞이합니다. 반복되는 일상과 경제적 불안, 사그라지지 않는 가족 간의 갈등으로 우리 마음이 짙은 안개 속에 갇힌 듯 답답할 때, 주님께서는 우리를 ‘높은 산’으로 따로 부르십니다. 그리고 세상의 그 어떤 슬픔도 집어삼키지 못할 하느님의 눈부신 영광을 우리에게 펼쳐 보이십니다.
오늘 제1독서와 복음은 구약의 오랜 기다림이 예수 그리스도의 빛나는 현존 안에서 어떻게 완성되는지 웅장하게 보여줍니다. 다니엘 예언자는 환시를 통해 ‘연로하신 분’의 어좌와 구름을 타고 나타나 영원한 통치권을 받는 ‘사람 아들 같은 이’를 보았습니다. 이는 세상의 모든 악을 이기고 승리할 하느님 나라의 영광을 예고하는 장면입니다. 이 신비로운 천상의 영광은 오늘 복음에서 우리와 똑같은 인간의 몸을 입으신 예수님의 모습 위로 찬란하게 구현됩니다. 제자들 앞에서 변모하신 주님에 대해 성경은 “그분의 얼굴은 해처럼 빛나고 그분의 옷은 빛처럼 하얘졌다”(마태 17,2)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이 영광스러운 사건이 일어난 ‘시점’입니다. 바로 직전에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했다가 부활하셔야 한다는 ‘첫 번째 수난 예고’를 하셨습니다. 스승의 죽음이라는 청천벽력 같은 소식에 절망하던 제자들에게, 주님께서는 앞으로 마주할 십자가의 참혹함에 걸려 넘어지지 않도록 ‘부활과 승리의 영광’을 미리 맛 보여 주신 것입니다.
이 눈부신 광경에 도취된 베드로는 “주님, 저희가 여기에서 지내면 좋겠습니다. 원하시면 제가 초막 셋을 지어 하나는 주님께, 하나는 모세께, 또 하나는 엘리야께 드리겠습니다”(마태 17,4)라고 외칩니다. 우리 역시 은혜를 체험할 때면 시끄러운 세상 밖을 피해 그 순간에만 안주하고 싶어 합니다.
하지만 구름 속에서 들려온 하느님의 목소리는 제자들의 영적 단잠을 깨우십니다. “이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마태 17,5). 이 말씀은 산 위의 영광에 머무르지 말고, 수난과 죽음이 기다리는 ‘저 낮은 땅’으로 예수님과 함께 내려가라는 단호한 명령입니다. 산 위에서의 영광은 안주하기 위한 장소가 아니라, 산 아래의 고통을 견뎌내기 위한 영적인 에너지 충전소였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신앙생활 역시 산 위와 산 아래를 끊임없이 오고 갑니다. 주님의 변모 사건은 내 고통스러운 현실을 당장 마술처럼 없애주는 것이 아니라, 고통 속에서도 무너지지 않도록 고통을 바라보는 ‘우리의 시선’을 변모시켜 주는 사건입니다. 끝이 ‘해피엔딩’이라는 것을 확실히 아는 사람은 영화 중간의 슬픈 장면 때문에 영화 전체를 포기하지 않듯, 우리는 주님의 영광을 기억하며 삶의 십자가를 견뎌낼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영광의 광채를 거두시고 다시 초라한 모습으로 돌아오시어, 무서워 떠는 제자들에게 손을 대며 “일어나라. 그리고 두려워하지 마라” 하고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붙잡아야 할 분은 화려한 기적이 아니라, 내 초라한 현실 한복판에서 나를 어루만지시며 일으켜 주시는 ‘오직 예수님 한 분’이십니다.
이번 한 주간, 여러분이 살아내야 할 구체적인 ‘인생의 산 아래’는 어디입니까?. 낙심하지 마십시오. 성체를 모신 여러분의 영혼 안에는 이미 해보다 밝은 주님의 광채가 머무르고 있습니다. 그 빛을 품고 당당하게 세상으로 나아가, 여러분의 따뜻한 말과 선한 행실로 가정과 일터를 또 하나의 ‘거룩한 산’으로 변화시키시길 축복합니다.
“영광의 주 하느님, 저희가 삶의 십자가 앞에서 낙심할 때마다 오늘 산 위에서 보여주신 찬란한 빛을 기억하게 하소서. 은총의 체험 속에만 안주하려 했던 이기심을 깨뜨려 주시고, 일상의 낮고 고단한 자리로 기쁘게 내려가게 하소서. 오직 예수님 한 분만을 바라보며 저희의 십자가를 사랑으로 껴안고 영원한 부활의 영광에 참여하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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