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778. 인문 운동가의 인문 일지
(2026년 8월 5일)
1
팽이처럼, 인문 정신을 갖추면, 아파도 당당하다. 문제가 있다면, 대충 관념적으로 장난치지 않고 정면으로 맞서는 정신이다. 그래서 인문학의 길은 아프다. 아파야 살아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안 아프면 죽은 것이다. 삶은 원래 아픈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살아 있다는 것은 모든 것이 힘든 데도 버티며 사는 것이다. 삶이 그렇게 아픈 것은 자신이 원하는 삶을 살려고 자꾸 연어처럼 강물을 거슬러 올라가기 때문이다. 힘들다고 해서 힘들지 않은 방향을 선택하면 강물에 휩쓸려 내려간다. 그것은 살아도 죽은 것이다. 왜? 죽은 물고기만 내려가니까. 우리에게는 두 가지 현실이 있다. 극복해야만 하는 현실, 순응해야만 하는 현실. 그런데 순응해야 하는 현실은 다 죽은 것이다. "종소리를 더 멀리 내보내기 위하여/종은 더 아파야 한다." 이것이 인문 정신이다. 인문 정신은 당당한 것이다. “남에게 희생을 당할 만한/충분한 각오를 가진 사람만이/사랑을 한다.”(김수영<죄와 벌>) 진짜 인문 정신을 가져야 누굴 미워하고 사랑할 수도 있다.
자기 스타일로 산다는 것은 힘든 일이다. 그렇게 살려면 고통을 감당하여야 한다. 나 스스로 주인으로 좌우지간 돌아야 한다. 팽이처럼, 나만의 스타일로. 나는 곧 없어질 존재이다. 그러니 자기 삶을 살아야 한다. 그것이 인문 정신이다. 다른 사람들은 할 수 있는 것들을 나는 안 하려고 하는 것도 인문 정신이다. 팽이는 자기 힘으로 돌지 못한다. 그러나 일단 돌면 외부의 힘이 들어오지 못하도록 열심히 돌아야 한다. 그게 내가 꿈꾸는 인문 정신이다. 인문 정신은 당당하다. 모든 인문학은 고유명사의 학문이기 때문에 궁극적으로 인문학자가 지향하는 것은 자신의 학문을 만드는 거다. 그러나 인문 정신은 자신만의 몸짓으로 살아가겠다는 의지를 관철 시키는 것이다. 인문 정신은 세상에 저항하는 것이다. 왜? 그것들은 거대한 팽이 놈이 자기를 중심으로 똑같이 돌라고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돌고 있는 팽이는 모두 자기만의 중심을 가지고 돈다. 팽이는 똑같이 돌다 보면 결국 다 넘어진다.
달나라의 장난/김수영
팽이가 돈다
어린아이이고 어른이고 살아가는 것이 신기로워
물끄러미 보고 있기를 좋아하는 나의 너무 큰 눈 앞에서
아이가 팽이를 돌린다
살림을 사는 아이들도 아름다웁듯이
노는 아이도 아름다워 보인다고 생각하면서
손님으로 온 나는 이 집 주인과의 이야기도 잊어버리고
또 한 번 팽이를 돌려주었으면 하고 원하는 것이다.
도회(都會) 안에서 쫓겨다니는 듯이 사는
나의 일이며
어느 소설(小說)보다도 신기로운 나의 생활(生活)이며
모두 다 내던지고
점잖이 앉은 나의 나이와 나이가 준 나의 무게를 생각하면서
정말 속임 없는 눈으로
지금 팽이가 도는 것을 본다
그러면 팽이가 까맣게 변하여 서서 있는 것이다
누구 집을 가 보아도 나 사는 곳보다는 여유(餘裕)가 있고
바쁘지도 않으니
마치 별세계(別世界)같이 보인다
팽이가 돈다
팽이가 돈다
팽이 밑바닥에 끈을 돌려 매이니 이상하고
손가락 사이에 끈을 한끝 잡고 방바닥에 내어 던지니
소리 없이 회색 빛으로 도는 것이
오래 보지 못한 달나라의 장난 같다
팽이가 돈다
팽이가 돌면서 나를 울린다
제트기(機) 벽화(壁畵) 밑의 나보다 더 뚱뚱한 주인 앞에서
나는 결코 울어야 할 사람은 아니며
영원히 나 자신을 고쳐가야 할 운명(運命)과 사명(使命)에 놓여
있는 이 밤에
나는 한사코 방심(放心)조차 하여서는 아니 될 터인데
팽이는 나를 비웃는 듯이 돌고 있다
비행기 프로펠러보다는 팽이가 기억(記憶)이 멀고
강한 것보다는 약한 것이 더 많은 나의 착한 마음이기에
팽이는 지금 수천 년 전의 성인(聖人)과 같이
내 앞에서 돈다
생각하면 서러운 것인데
너도 나도 스스로 도는 힘을 위하여
공통된 그 무엇을 위하여 울어서는 아니 된다는 듯이
서서 돌고 있는 것인가
팽이가 돈다
팽이가 돈다
2
아침에 페친 민웅기의 글, "돌아오라, 중심 축"으로"를 읽었다. 그래 김수영 시를 오늘 공유한 것이다. 그에 의하면, "삶은 팽팽한 균형 위를 맴도는 팽이와 같다"는 거다. 그의 글은 명쾌하다. 평소 나의 지론이기도 하다. 경계에 서자! 경계에 서는 그 일은 힘들다. 경계에 서는 것은 숭고한 일이다. 숭고를 영어로는 ‘서브라임(sublime)'이라고 부르는데, 그 어원적인 의미는 ‘리멘(limen) 아래서(sub)' 혹은 ‘넘어서(super)'라는 의미다. 새로우면서 낯선 자신을 발견하고 그것에 놀라 불안한 상태를 의미하는 단어가 ‘리멘(limen)'이다. 리멘은 이것도 저것도 아닌 장소인 ‘현관(玄關)’, 우리 식으로 말하면, '문지방'과 같다. 들어갈까 말까 망설이는 경계이다. 그러나 다른 세계로 넘어가려면, 불안하지만 반드시 거쳐야 하는 마음의 상태다. 그런 불안한 자신을 응시하고 자신 안에서 최선을 찾으려 끊임없이 노력하는 사람은 이미 숭고하다. 그는 자신만의 별을 발견하고 묵묵히 걸어가기 때문이다.
숭고는 인간이 인식 가능한 경계를 너머 선 어떤 것, 흔히 ‘위대함'을 우리들에게 바라보게 한다. 숭고는 오감을 통해 그 일부를 느낄 수 있고, 도덕적이거나 이성적으로 인정할 수도 있고, 형이상학적이나 미적으로 감지될 수 있고, 예술적이나 영적으로 매력적인 어떤 것이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숭고는 인간의 숫자와 언어를 통해 측량되거나 표현될 수 없고 더욱이 흉내 낼 수 없는 묘한 것이다.
숭고한 상태인 서브라임이란 문지방 근처에서 머뭇거리다 넘어서는 것이다. 그러니까 숭고함은 자신이 원하지 않았지만 감당하기 힘든 어려운 삶을 경험하면서, 세계를 이끌어 갈 인물로 상장할 수 있도록 하게 하는 작은 디딤돌 아래, 아니 근처 경계에 서는 것이다.
숭고, 서브라임, 경계에 있는 사람의 덕목은 공감 능력과 자비 능력이다. 공감 능력은 다른 사람을 이해하는 능력이고, 자비 능력은 다른 이의 아픔을 자신의 아픔으로 해석하는 능력이다. 이 자비가 연민이다. 연민은 '내 마음 속에 들어온 당신의 슬픔'이다. 연민의 사전적 정의는 '불쌍하고 가련하게 여김'이다. "아프냐?, 나도 아프다"이다. 세상 모든 사람은 각자의 슬픔을 가지고 있다. 타인의 슬픔에 대한 가장 좋은 위로는 나의 슬픔이 너의 슬픔 못지않다고 말해주는 것이다. 너의 어려운 처지가 나의 어려운 처지처럼 느끼는 것이다. 인간은 누구나 어쩔 수 없는 어둠과 이길 수 없는 슬픔을 갖고 있게 마련이다. 사람들은 거울을 보며 얼굴에 묻은 먼지를 닦아내지만, 마음의 얼룩은 걷어내지 못한다.
인문 정신을 갖는다는 것, 인문적으로 산다는 것은 보편적으로 완성된 이론을 내면화 하는 것이 아니라, 지금 자기가 처한 상황, 그곳에서 자기 눈으로 발견된 그 문제를 해결하려고 덤비는 인문적 활동으로 일상을 채우는 것을 말한다. 지금 필요한 것은 대답하는 삶에서 질문하는 삶으로 건너가는 일이다. 이론을 숙지하는 삶에서 문제에 빠져드는 삶으로 전환하는 것이어야 한다.
우리의 뇌(특히 좌뇌)는 항상 재잘거린다. 한순간도 쉬지 않고 뭔가를 떠들어 댄다. 그러면서 생각이 사방으로 흩어진다. 그래 우리는 이 산만함에 맞서는 훈련을 해야 한다. 그것이 수렴과 집중이다. 요즈음 자신의 힘을 절제하지 못해, 원심력에 의지하는 사람들이 주변에 많다. 잔뜩 먹기만 하고, 발산하지 못해서 그렇다. "그런 사람은 중독을 유발하여 결국 자신을 파멸시키는 쾌락, 자극, 새로운 것을 항상 하이에나처럼 찾아다닌다. 쉽게 웃음과 울음을 자아내는 촌극을 감동이라 평가하고, 세네카의 구심력 찬양 문구인 ‘카르페 디엠(carpe diem)을 건배사로 착각하고 니체의 고통을 삶의 일부로 수용하라는 혜안인 ‘아모르 파티(amor fati)'를 노래방 춤 쯤으로 여긴다. 원심력에 경도되어 있는 사람은 힘이 없고 불안하고 산만하다." 배철현의 <매일묵상>에서 읽은 것이다. 나도 그렇게 생각한다. 몇 일전부터 나도 산만하다.
반면, 원심력을 구심력으로 제어하기 위해 하루를 보내는 사람들도 있다, 그들은 힘이 있다. 그런 힘을 가지기 위해서는 원심력의 과시를 희생하여야 한다. 나는 이 구심력과 원심력의 조화를 위해, 아침 마다 <인문 일기>를 쓴다. 자꾸 밖으로만 출렁이는 생각과 본능에 영향을 받는 사람은 무기력하지만, 그것들을 제어하고 조절하여, 그 힘을 비축하는 사람은 강력하고 매력적이기 때문이다. 그 원심력을 제어하고 조절하는 힘은 인문 정신에서 나오기 때문이다.
소설 <노인과 바다>에 이런 문장이 나온다. "매일 매일은 새로운 날이지. 운이 따른다면 더 좋겠지만, 우선은 지금 하려는 일에 집중하겠어. 그러면 운이 찾아 왔을 때 준비가 되어 있을 테니" 매일 매일이 똑같은 일상을 사는 우리들에게 큰 힘이 되는 말이다. "우선은 지금 하려는 일에 집중하겠어." 그게 일상을 지배하는 일이다. '운'은 자신이 자신으로 되어 있는 사람, '운(運)'의 세계에서 '명(命)'의 세계로 건너 온 사람에게만 찾아 오는 선물이다. 그래 현재를 '선물(present)이라는 말과 같이 쓴다. 그러니까 오늘은 자신의 소임, 즉 명을 아는 사람에게 주어지는 선물이다.
3
경계에 서는 일을 구체적으로 어떻게 하는지 페친 민웅기의 글에서 배웠다. 그에 의하면, 삶은 "밖으로 튕겨 나가려는 원심력과 그 운동이 흩어지지 않도록 안으로 수렴하는 구심력 사이의 아슬아슬한 줄타기"라는 거다.
이 글을 읽으며, 아침에 침대에서 내 만트라를 소환했다. "모든 것은 우주 전체의 조화로운 원리와 상호 관계에 따라 순리대로 되어갈 뿐이다." 우주에는 하나의 로고스가 있는데, 그게 조화롭다. 그런데 고지식하게 그 원리에 따라 우주가 조화를 이루는 것이 아니라, 상호 관계가 있다. <<주역>>에서는 이 로고스(이치)를 천지의 뜻, 하늘이 정하고 땅이 받아들이는 상호작용을 통해 만물에 그 이치를 심어 놓은 것이라 했다. 만물의 하나인 인간은 이 이치를 알고 순응할 때 하늘의 이상을 땅이라는 구체적 현실에 구현할 수 있는 바른 주체가 될 수 있다는 거다.
민웅기의 글을 공유한다. "피겨 스케이터가 얼음판 위에서 현란한 공중 회전을 해낼 때도, 지구와 거대한 은하계가 초속 이백 이십 킬로미터의 아득한 속도로 우주를 가로지를 때도 작동하는 원리는 같다.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어마 무시한 속도를 달리면서도 우리가 해체되지 않고 제 자리를 지킬 수 있는 이유는 단 하나, 자신만의 중심축을 붙들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우리는 너무도 쉽게 외곽으로 쏠린다. 탐진치(貪嗔癡)의 파도에 밀려 밖으로 밖으로 쏠릴 때, 일 중독과 스트레스에 지쳐 숨이 가쁠 때, 거창한 성취 뒤에 문득 밀려오는 허무함이 나를 집어삼킬 때. 혹은 자존감이 흔들려 매번 타인의 승인에 징징대며 매달릴 때, 우울과 외로움이 깊어질 때. 바로 그때가 내 삶에 위기 경보가 울리는 순간이다. 중심축으로 돌아오라는 신호"라는 거다. 다시 나를 경계에 올려 놓는 일이다.
그 구체적인 방법을 페친 민웅기의 글에서 배웠다.
▪ 들숨과 날숨을 지켜 보는 거다. 명상가 라즈니시는 그 중심에 닿는 가장 지극한 통로로 힘주어 호흡을 이렇게 말했다는 거다. "들어오는 호흡과 나가는 호흡의 결합 지점이 그 중심축이다."
"나가는 숨과 들어오는 숨이 만나 하나가 되고, 어디서부터가 끝이고 어디서부터가 시작인지 구분할 수 없는 공(空)한 순간. 멈춘 듯 고요한 그 침묵의 정지 간격 속에서, 우리는 비로소 내면의 중심축 가까이에 가 닿는다"는 거다.
▪ 중심축은 비단 호흡에만 있지 않다. 그것은 모든 형태의 자각 그 자체에 있다고 했다.
알아차림의 순간, 깨어 있음의 순간, 당신은 곧바로 중심축에 연결된다는 거다. 인식하는 주관과 인식되는 객관의 경계가 사라지는 합일의 지점, 그것이 바로 중심축이고, 즉각 현존이라는 거다. 멋지게 설명하고 있다.
"그곳은 뭇 묘함이 출입하는 문이다. 있는 것과 없는 것,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 색과 공이 황황홀홀하게 출입하는 불이(不二)의 문이다. 마르지 않는 에너지가 샘솟고, 모든 지혜의 뿌리가 잇닿아 있는 근원이다." 그 곳에서 자신이 하는 자각이 곧 그 중심축이고, 자신의 현존이 곧 그 중심축이라는 거다. 오직 '지금 여기'에 깨어 있는 그 마음이 바로 자신을 지탱하는 가장 단단한 축이라는 거다.
페친 민웅기는 "세상의 원심력에 밀려 마음의 중심이 흐트러질 때마다 기억 하자"고 했다. 호흡의 정지 간격으로, 깊은 자각의 자리로, 고요하고 단단한 중심축으로 돌아 오라는 거다.
4
이 때 필요한 것이 쉼, 아니 멈춤이다. 구심력의 회복을 위해 오늘 아침은 '숨', 즉 호흡 이야기를 좀 다시 하고 싶다. 내 코를 통해 드나드는 숨 말이다. 숨에는 들숨과 날숨이 있다. 들숨을 통해 보이지 않고 느낄 수 없는 공기가 코를 통해 몸 안으로 들어 와 오장육부를 살아있게 만든다. 날숨은 나의 구태의연한 잡념을 제거하는 행위이며, 들숨은 새로운 생각으로 오늘을 시작하게 한다. 이걸 우리는 호흡이라고 한다. 삶의 최소 단위를 '호흡'이라 설정하고 매 순간 자신의 숨을 관찰하고 수련해 기(氣)를 모으는 거다.
우리의 몸을 지탱해 주는 것은 음식을 섭취하는 일과 매 순간 목숨을 지탱해 주는 심장 박동과 호흡하는 일 두가지라 본다. 심장은 하루에 십만 번 정도 박동한다고 말한다. 사람은 최대 30일 정도 먹지 않아도 살 수 있는데, 심장이 1분 이상 작동하지 않으면 죽는다. 그리고 사람은 하루에 약 2만 3천 번 대기 중에 있는 공기를 입과 코를 통해 호흡하는 데, 사람은 숨을 최대 3분 정도는 참을 수 있다고 한다. 그 이상으로 숨을 쉬지 못하면 바로 죽는다.
그러니까 호흡, 즉 숨은 인간을 비롯한 모든 생명체가 자기 보존을 위한 가장 근본적인 활동이다. 우리가 의식적으로 호흡을 해보면, 우리는 들이쉬는 숨이 내쉬는 숨보다 더 길다고 느끼고, 늘 들숨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백영옥 소설가는 요가 선생님의 다음 이야기를 소개하면서 그 편견을 깨도록 해주었다. "요가를 할 때는 의식적으로 날숨에 더 신경 써야 해요. 사람들은 대개 들숨을 생의 기본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반대예요. 날숨이 더 중요합니다. 태어날 때 아기는 '아앙~' 하고 호흡을 터뜨립니다. 죽을 때는 어떻죠? '후흡' 하고 숨을 강하게 들이마시며 죽어요. 아이러니하죠."
호흡 명상을 해보면 감정이 진동을 담고 있음을 알게 된다. 그러므로 명상 호흡법에서 중요한 것은 들숨보다 내보내고 비우는 날숨에 더 신경 써야 한다는 점이다. 왜 그럴까? 매 순간 내가 숨을 들이켜듯 더 많이 얻고, 채우고, 느끼려는 자세로 살아왔기 때문에 우리는 들숨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해왔다. 그러나 날숨으로 속에 있는 관성이나 낡은 습관을 버리고, 동시에 날숨으로 내 몸 안에 빈 공간을 만들어야 새로운 것을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이다. 그러니까 버려야 산다는 거다. 노자의 사유와 같다.
호흡훈련은 정신적이고 영적인 고양의 첫 관문이다. 위에서 말했던 것처럼, 호흡은 잠잘 때, 책을 읽을 때, 산책할 때와 같은 일상에서 무의식적으로 저절로 작동한다. 그런 식으로 일생동안 해야 할 호흡의 총량이 갖고 태어났다가, 그 양을 다 채우면 우리는 죽는 것이 아닐까? 호흡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우리가 분노하거나 두려운 상황에 처할 때, 숨이 가빠지고 심장이 빠르게 뛴다. 그래 총량을 낭비하게 된다. 그러니 화를 내거나 오지 않은 미래를 위해 지나치게 두려워 허는 것은 생명을 단축시키는 일이라고 볼 수 있다. 뿐만 아니라, 숨이 가빠지고 심장 박동이 빨라지면 우리는 감정이며 이성적인 사고에 지대한 영향을 받는다. 현대과학은 느리고 깊은 호흡 습관으로 혈압과 심장 박동수를 줄여 주어야, 우리의 일상 생활에 활력이 더 생긴다고 말한다.
5
<나 당신 믿기에>
2026. 08. 05. 연중 제18주간 수요일
마태오 15,21-28 (가나안 여자의 믿음)
그때에 예수님께서 티로와 시돈 지방으로 물러가셨다. 그런데 그 고장에서 어떤 가나안 부인이 나와, “다윗의 자손이신 주님,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제 딸이 호되게 마귀가 들렸습니다.” 하고 소리 질렀다. 예수님께서는 한마디도 대답하지 않으셨다. 제자들이 다가와 말하였다. “저 여자를 돌려보내십시오. 우리 뒤에서 소리 지르고 있습니다.” 그제야 예수님께서 “나는 오직 이스라엘 집안의 길 잃은 양들에게 파견되었을 뿐이다.” 하고 대답하셨다. 그러나 그 여자는 예수님께 와 엎드려 절하며, “주님, 저를 도와주십시오.” 하고 청하였다. 예수님께서는 “자녀들의 빵을 집어 강아지들에게 던져 주는 것은 좋지 않다.” 하고 말씀하셨다. 그러자 그 여자가 “주님, 그렇습니다. 그러나 강아지들도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는 먹습니다.” 하고 말하였다. 그때에 예수님께서 그 여자에게 말씀하셨다. “아, 여인아! 네 믿음이 참으로 크구나. 네가 바라는 대로 될 것이다.” 바로 그 시간에 그 여자의 딸이 나았다.
<나 당신 믿기에>
“아, 여인아! 네 믿음이 참으로 크구나. 네가 바라는 대로 될 것이다.”(마태 15,28)
당신께서 나에게
마침내 오시리라 믿기에
당신께서 나에게
오실 때까지
다가가고 또 다가갑니다
당신께서 나에게
마침내 들으시리라 믿기에
당신께서 나에게
들으실 때까지
부르짖고 또 부르짖습니다
당신께서 나에게
마침내 여시리라 믿기에
당신께서 나에게
여실 때까지
두드리고 또 두드립니다
당신께서 나를
마침내 품으시리라 믿기에
당신께서 나를
품으실 때까지
안기고 또 안깁니다
당신께서 나에게서
마침내 이루시리라 믿기에
당신께서 나에게서
이루실 때까지
바라고 또 바라나이다
6
침묵의 응답 속에서도 사랑과 희망을 놓지 않는 마음이야말로 참된 믿음입니다.
2026/8/5/연중 제18주간 수요일
마태오 복음 15장 21-28절: “여인아! 네 믿음이 참으로 크구나. 네가 바라는 대로 될 것이다.”
⠀
포기하지 않는 믿음
오늘 복음에서 가나안 여인은 딸을 살려달라고 예수님께 매달립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잠자코 계시지요. 거절처럼 느껴지는 침묵이 감돌지만, 여인은 물러서지 않습니다. 우리도 기도할 때 자주 이러한 순간을 맞닥뜨립니다. 간절히 청하는데 정적만이 나를 감싸는 듯할 때, 하느님께서 내 마음을 듣지 못하시는 듯 혹은 외면하시는 듯 느껴질 때가 있습니다. 하지만 오늘 복음의 여인은 우리에게 믿음이 무엇인지 보여줍니다. 믿음은 신뢰하며 매달리는 데서 더 나아가 하느님께서 침묵하신다고 느껴지는 순간에도 희망을 포기하지 않는 마음이라고 말이죠. 간절한 청이 상처가 되어 돌아올지라도, 끝까지 희망의 끈을 놓지 않은 여인에게 예수님은 결국 “여인아! 네 믿음이 참으로 크구나” 하고 말씀하십니다. 하느님께서 침묵하신다고 느껴질 때마다 우리 역시 기억하면 좋겠습니다. 응답이 늦어지는 것처럼 느껴질 때조차도, 하느님께서는 우리 믿음의 깊은 곳에 함께 머물고 계시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박태훈 마르티노 신부(대구대교구)/생활성서 2026년 8월호 '소금항아리'에서⠀
7
2026년 8월 5일 연중 제18주간 수요일
가장 무더운 8월의 한복판을 지나고 있습니다. 숨이 턱턱 막히는 더위 속에서 우리의 몸도 지치지만, 가정의 불화나 자녀 걱정, 좀처럼 나아지지 않는 경제적 형편 같은 삶의 무게로 인해 우리 영혼은 더 깊은 갈증과 피로를 느낄 때가 많습니다. 때로는 하느님께 간절히 소리쳐 기도해도 그분은 너무나 멀리 계신 것 같고, 내 삶은 마치 외딴섬처럼 고립되어 있다고 느껴 지기도 합니다.
오늘 주님께서는 바로 그런 외로움과 고통 속에 있는 우리를 찾아 오시어, 우리가 결코 혼자가 아님을 상기시켜 주십니다. 주님은 단 한 순간도 우리를 잊으신 적이 없으며, 제1독서의 말씀처럼 “나는 너를 영원한 사랑으로 사랑하였다”(예레 31,3)라고 우리 영혼에 다정하게 속삭이고 계십니다.
하느님의 구원에는 경계가 없으며, 그분의 사랑은 우리의 좁은 선입견보다 훨씬 더 넓고 깊습니다. 예레미야 예언자는 이방 민족들에게 짓밟히고 흩어진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느님의 눈물겨운 귀환 약속을 선포합니다. 하느님께서는 그들이 비록 죄를 짓고 멀리 도망쳤을지라도, 당신의 자비로 다시 불러 모으시어 축제의 춤을 추게 하실 것입니다. 그분은 특정 민족만의 하느님이 아니라, 상처받은 모든 이를 품으시는 진정한 아버지이시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의 이 보편적인 사랑은 오늘 복음에서 한 이방인 여인, 곧 가나안 여인의 절박한 청원을 통해 극적으로 드러납니다. 마귀가 들어 비참하게 고통받는 딸을 살리기 위해 여인은 예수님을 찾아와 외칩니다. “다윗의 자손이신 주님,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그러나 예수님의 반응은 낯설고 차갑기만 합니다. 처음에는 한마디 대답도 없는 침묵으로 일관하시더니, 급기야 도와달라고 애원하는 여인에게 “자녀들의 빵을 집어 강아지들에게 던져 주는 것은 좋지 않다”라는 모욕적인 말씀까지 하십니다. 이는 당시 유다인들이 이방인을 멸시할 때 쓰던 매우 거친 비유였습니다. 주님께서 왜 이토록 잔인할 정도로 여인을 외면하셨을까요? 그것은 결코 차별이 아니었습니다. 주님은 여인의 마음속에 숨겨진 보석 같은 믿음을 세상 밖으로 끌어내어, 곁에 있던 제자들의 좁은 편견을 깨뜨리고 싶으셨던 것입니다.
여인은 주님의 거절에 상처받아 돌아서거나 분노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분의 비유를 겸손하게 받아들이며 이렇게 응수합니다. “주님, 그렇습니다. 그러나 강아지들도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는 먹습니다”(마태 15,27). 이 얼마나 놀라운 겸손입니까? 여인은 자신의 체면보다 딸을 살리겠다는 모성애를 앞세웠고, 무엇보다 ‘이분은 나를 거절하는 듯 말씀하시나, 그 내면에는 나 같은 죄인에게도 흘려주실 자비의 부스러기가 반드시 있는 분’이라는 절대적인 신뢰를 지니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이 고백에 크게 감동하시며 칭찬하십니다. “여인아, 네 믿음이 참으로 크구나! 네가 바라는 대로 될 것이다”(마태 15,28). 주님의 이 말씀과 동시에 여인의 딸은 깨끗이 나았습니다.
우리는 살면서 가나안 여인과 같은 ‘침묵의 밤’을 자주 마주합니다. 눈물로 기도해도 아무런 대답이 없는 것 같아 하느님이 나를 미워하신다고 오해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침묵은 거절이 아니라, 우리의 믿음을 더 깊고 단단하게 만드시는 ‘은총의 유예 기간’입니다. 하느님 앞에서는 알량한 자존심을 고집할 필요가 없습니다. 가나안 여인처럼 주님 앞에 온전히 엎드려, "주님, 당신의 자비 없이는 살 수 없으니 부스러기 은총이라도 베풀어 주십시오" 하고 매달리는 끈질긴 겸손이 필요합니다. 주님은 낮아진 마음에서 나오는 부르짖음에 반드시 귀를 기울이십니다.
8월의 무더위 속에서도 낙심하지 마십시오. 여러분이 흘리는 눈물의 기도와 고독한 부르짖음을 주님은 이미 다 듣고 계십니다. 다만 여러분 안에 더 큰 믿음의 그릇을 준비하시기 위해 잠시 기다리고 계실 뿐입니다. 성모님의 마음과 가나안 여인의 신뢰를 닮아 오늘 다시 한번 기쁘게 나아갑시다. 주님께서 마침내 여러분의 손을 꼭 잡으시며, “사랑하는 내 자녀야, 네 믿음이 참으로 크구나! 네가 바라는 대로 될 것이다” 하고 축복해 주시기를 기원합니다. 아멘.
다른 글들은 블로그에서 볼 수 있다. 네이버에서 '우리마을대학협동조합'를 치시면, 그 곳의 출판부에서 볼 수 있다. 아니면, 나의 블로그 https://pakhanpyo.tistory.com 이나 https://blog.naver.com/pakhan-pyo 또는 https://pakhanpyo.blogspot.com 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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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은 '아무 것도 없다'가 아니다. '끊임없이' 바뀌고 변화 한다'는 말이다. (0) | 2026.08.05 |
| 지금은 '아는 것이 힘'이던 시대로부터 '생각이 힘'인 시대가 되었다. (0) | 2026.08.0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