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777. 인문 운동가의 인문 일지
(2026년 8월 4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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찌는 더위에 한 줄기 바람 같은 시를 한 편 우선 읽는다. 어떤 이는 공부하러 학교에 가고, 어떤 이는 놀기 위해 학교로 간다. 공부와 놀이 사이에서 사람은 늙어간다. 시인은 자신을 "늙어 별 볼 일" 없다고 낮추지만 사실 그것은 시인에게 담백한 여유가 생겼다는 말일 것이다. 나와 관계 없이 더울수록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마음의 여지, 아니 여유이다. 그리고 자주 술집 간다는 건 아직 몸과 정신이 팔팔하다는 뜻이다. 이젠 옛 술 친구들이 예전만 못하다. 친구들과 흉이 두려워 집에 못 가는 것도 아닐 것이다. 집이라는 매우 안정된 공간에 갇히고 싶지 않다는 뜻일 거다. 아직은 안보다는 바깥에 머무르고 싶다는 것, 즉 끄덕 없다는 뜻이다. 난 아직 그렇다.
집에 못 가다/정희성
어린 시절 나는 머리가 펄펄 끓어도 애들이 나 없이 저희 끼리 만 공부할까 봐 결석을 못했다 술자리에서 그 이야기를 들은 주인 여자가 어머 저는 애들이 저만 빼놓고 재미있게 놀까 봐 결석을 못했는데요 하고 깔깔댄다 늙어 별 볼일 없는 나는 요즘 그 집에 가서 자주 술을 마시는데 나 없는 사이에 친구들이 내 욕할까 봐 일찍 집에도 못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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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에게 페이스북은 일종의 학교이다. 거기서 많은 통찰을 만난다. 그 중에 하나가 지용(池鎔, 본명 강선주)이라는 이름으로 담벼락에 올라오는 <산중일기>이다. 다음은 거기서 읽은 문장들이다.
사람들은 흔히 파우스트가 젊음을 얻기 위해 영혼을 악마에게 팔았다고 기억한다. 그러나 그것은 작품을 지나치게 단순화한 이해이다. 파우스트가 갈망한 것은 젊음 자체가 아니었다. 그는 평생 학문을 탐구했지만 삶의 진리도 행복도 얻지 못한 채 깊은 절망에 빠졌다. 그때 악마 메피스토펠레스가 나타나 제안한다. "살아 있는 동안 내가 너에게 세상의 모든 경험과 기쁨을 누리게 하겠다. 그러나 네가 어느 순간 '지금 이 순간이여, 멈추어라. 너는 참으로 아름답구나'라고 말할 만큼 완전한 만족에 이르면, 그때 너는 나의 것이다." 젊음은 그 계약의 목적이 아니라 욕망을 실현하기 위한 수단이었다. 악마가 노린 것은 인간의 육체가 아니라 인간의 마음이었다. 인간이 더 이상 추구하지 않고 현재의 만족에 안주하는 순간, 영혼은 이미 자유를 잃는다는 것이 괴테의 통찰이었다.
의학은 몸을 젊게 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영혼까지 젊게 하지는 못한다. 인간은 누구나 늙는다. 세포는 쇠퇴하고 기억은 흐려지며 걸음은 느려진다. 그러나 그것은 실패가 아니라 생명의 질서이다. 중요한 것은 그 질서를 거스르는 일이 아니라, 남은 시간을 어떻게 살아낼 것인가를 묻는 일이다. 괴테가 마지막에 파우스트를 구원한 이유도 여기에 있다. 파우스트는 끝내 젊음을 붙잡았기 때문이 아니라 자기 욕망에 머물지 않고 더 나은 세상과 타인의 삶을 꿈꾸었기 때문이다. 인간은 넘어질 수 있지만 더 높은 선을 향해 끊임없이 나아가는 존재라는 믿음, 그것이 결국 그를 구원했다. 생각해 보면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젊음이 아니라 생명력이다. 주름 없는 얼굴이 아니라 타인을 향한 따뜻한 시선이며, 강한 근육이 아니라 감사할 줄 아는 마음이다. 오래 사는 기술보다 오늘 하루를 의미 있게 살아가는 지혜가 더욱 소중하다.
줄기세포는 세포를 되살릴 수 있을지 모른다. 그러나 영혼을 되살리는 것은 사랑이며 감사이며 희망이다. 몸의 노화는 의학이 늦출 수 있어도 영혼의 노화는 삶의 의미만이 막을 수 있다. 그래서 현대인이 진정 두려워해야 할 것은 늙음이 아니다. 삶의 의미를 잃은 채 영원한 젊음 만을 쫓는 마음이다. 악마와의 거래는 계약서에 서명하는 특별한 사건이 아니라, 욕망을 삶의 주인으로 삼는 순간 이미 시작된다. 결국 인간을 구원하는 것은 젊음이 아니라 늙어가면서도 끝내 희망을 잃지 않는 영혼이다.
저녁이면 산등성이 너머로 해가 천천히 기울고, 나무는 말없이 잎을 내려놓는다. 꽃은 씨앗을 남기기 위해 시듦을 받아들이고, 숲 속을 뛰노는 노루와 토끼도 늙음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자연은 한 번도 젊음을 붙잡으려 애쓴 적이 없다. 다만 자신에게 주어진 시간을 끝까지 살아낼 뿐이다. 언젠가 우리 모두 마지막 시간을 맞이할 것이다. 그때 우리를 구원하는 것은 젊은 세포가 아니라 끝내 젊음을 잃지 않은 영혼일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 영혼은, 어쩌면 오늘 우리가 펼쳐 든 한 권의 책 속에서 다시 깨어날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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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욕망의 억제는 소박함(樸)을 통해 가능하다"는 말이 있다. 그 소박함을 일깨우는 검소한 차실(茶室)이나, 기도하는 작은 골방 같은 구별된 공간을 갖는 일이다. 사람은 영적인 존재이다. 몸 안에 영혼이 있고, 영혼이 우리를 이끌고 간다. 영혼이 메마르면, 몸도 마음도 메말라 버린다. 영혼이 메마르지 않도록, 지치지 않도록 물을 주어야 한다. 묵상이 우리의 영혼에 물을 주는 시간이다. 물을 주는 묵상은 골방에서 홀로 나를 만나는 시간이다. 나는 이렇게 생각한다. 품위는 오랜 세월 자기 자신을 단련하고 꼼꼼하게 경험을 흡수하는 과정에서 그것을 얻는다. 품위를 갖추지 못한 사람이 그것을 갖춰 보려고 애쓰는 것은 못 생긴 여자가 아름다워지려고 애쓰는 것만큼이나 헛된 짓일 것이다. '위대한 개인'은 오랜 세월 자기 자신을 단련하고 꼼꼼하게 경험을 흡수하는 과정에서 그것을 얻는다. 그것이 자기만의 골방을 가지고 묵상하는 것이다.
늘 곁을 떠나지 않는 인생 책인 파커 파머의 <<온전한 삶으로 여행>>의 원제는 <<분리되지 않은 삶으로의 여정>이다. '분리되지 않은 삶'이 무엇일까? 영혼과 분리되지 않은 삶을 온전한 삶이라고 했다.
파커 J. 파머는 분리된 삶이 어떻게 시작되는 지를 다음과 같이 잘 말해주었다.
▪ 어떤 '작고 나지막한 목소리가 나와 내 일 그리고 세상에 대한 진실을 말해주지만 듣지 않는 것처럼 행동한다. 내면의 진실된 작은 소리를 외면한다.
▪ 좋은 일에 도움이 될 수 있는 나의 재능을 억압한다. 아니면 나쁜 일인 줄 알면서도 빠져든다. 일시적인 쾌락이나 중독에 빠져든다.
▪ 스스로 확신을 품고 다루거나 적극적으로 도전해야 하는 문제에 맞닥뜨렸을 때도 침묵한다.
▪ 내면의 어둠을 부정해서 그 어둠이 더 큰 영향을 미치게 하거나, 다른 이들에게 투사 해서 실제로는 존재 않는 '적'을 만들어 낸다.
그러면서 남들을 속이고 있다고 느끼고, 발각될지 모른다고 불안해 하고, 자신의 자아를 부인한다는 사실에 우울해 하면서 터무니 없는 대가를 치른다. 또한 주변의 사람들도 역시 그 대가를 치른다. 무슨 말인 가하면, 영혼과 분리된 단층이 자신의 생의 한가운데를 갈라 놓고 그 단층이 뒤틀리며 벌어질 때마다 내 말과 행동이 영혼의 진실과 단절되면서 주위 사물들이 흔들리고 깨어지기 시작한다는 말이다.
우리는 주변의 자연 속에서 모든 사물 속에 숨겨진 온전함을 알아차리는 기회를 자주 가져야 한다. 자연의 모습에서 온전함을 자주 맛보아야 한다. 나는 가까운 곳에 텃밭을 갖고 그 기회를 누린다. 그리고 나서 쉽게 변하고 불신으로 가득한 인간 세상으로 돌아오면, 자신의 온전성에 새롭게 눈을 뜨고, 우리의 불완전함 마저도 사랑할 수 있는 마음의 근육을 갖게 된다.
온전함은 완전함과는 다르다. 온전함은 깨어진 삶의 불가피한 부분으로 받아들이는 것을 뜻한다. 우리는 의식과 선택이라는 축복이자 저주를 받았기 때문이다. 반면 소나무는 자신의 생각으로 고통을 자초하지 않는다. 우리 인간은 우리를 분리시키면서도 또 온전해지도록 할 수 있는 양날의 칼을 지녔다.
분리된 삶의 다양한 모습을 열거해 본다.
▪ 맡은 일에 온 힘을 다하지 않고, 그 일로 도움을 받게 될 사람들을 외면한 채 자신의 재능과 능력을 발휘하지 않을 때이다.
▪ 꼭 그 일을 해야 살아갈 수 있는 것도 아닌 데도 기본적인 가치를 거스르는 일을 하면서 생계를 영위할 때이다
▪ 영혼을 파괴하는 상황, 관계에 계속 머물러 있을 때이다.
▪ 진실을 감추고서 다른 이들을 희생 시키면서 까지 이득을 얻으려 할 때이다.
▪ 갈등, 도전 그리고 변화를 피하기 위해 자신과 의견이 다른 이들에게 자신의 신념을 숨길 때이다.
▪ 비판 받고, 따돌림을 당하고, 공격받을까 두려워 자신의 진정한 정체성을 감추려 할 때이다.
분리됨은 개개인에게 나타나지만, 곡 그것은 다른 이들의 문제로 이어진다. 예컨대, 정치 지도자들이 '갈라진 혀'로 말하면 그것은 곧 시민들의 문제가 된다. 분리된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이야기들은 끊임없이 뉴스에 등장한다. 이미 시인 루미는 "당신이 부정한 마음으로 여기 우리와 함께한다면/당신은 우리에게 엄청난 손해를 끼치게 될 것이다."
이러한 분리된 삶은 윤리학의 실패로 빚어진 결과가 아니다. 그것은 분리된 삶에서 비롯된 결과이다. 유권자에게 거짓말하는 정치가들은 윤리 의식이나 확신이 부족했던 게 아니다. 그들은 자신의 지식과 믿음을 자신의 삶에서 멀리 떼어 놓는 습관에 빠져 있는 거다. 지식과 믿음이 삶과 분리된 것이다. 왜 이런 일이 벌어지는가?
우리는 십 대와 이십 대를 거치면서 자신의 정체성을 인식하는 것이 인생에서 성공하는 데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걸 배운다.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세상을 조종할 능력을 주는 '객관적인' 지식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배운 윤리학은 위대한 사상가들과 그들의 이론에 대한 '객관적인' 연구가 되고, 우리 내면을 형성하는 데는 아무런 도움도 주지 못하는 자료 수집 훈련이 될 뿐이 것이다.
우리가 성실성이나 지성의 모습을 이해하면, 행동 수칙에 집착하지 않고 온전해지기 위한 발걸음을 내디딜 수 있다고 본다. "선함보다 온전함이 더 낫다는 사실을 깨달은 이는 좁은 문과 좁은 길로 들어선다. 도덕적으로 선하게 살아가는 것은 온전하게 살아가는 것에 비하면 훨씬 쉬운 일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기 때문이다." (존 미들턴 머리)
우리는 의식과 산택이라는 축복이자 저주를 받았다. 즉 우리는 우리를 분리시키면서도 또 온전해지도록 할 수 있는 양날의 칼을 지녔다.온전해지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 좋은 일로 여겨지나, 곧 위험한 일이라는 게 드러난다. 당연히 우리는 위험을 피하길 원하고, 까라서 우리의 결의는 약해진다. 그런 차원에서 사람보다 소나무에게서 온전성이 더 쉽게 드러난다. 소나무는 자신의 생각으로 고통을 자초하지 않기 때문이다. 파커의 말처럼, 소나무보다 더 아름다운 모습은 원래 모습 그대로, 성실성으로 서 있는 한 '분리되지 않은' 삶의 모습을 보여주는 인간의 모습이다. 그들은 내면의 진실을 외부 세계에 실현함으로써 스스로 온전성을 되찾고 아울러 우리 사회가 온전성을 되찾도록 도와준다. 문제는 치루어야 할 대가가 크다는 거다. 그래 혼자 오랫동안 그것을 감당하기는 쉽지 않다. 따라서 분리되지 않은 삶으로 계속 나아가길 원한다면, 믿을 수 있는 관계, 어떤 난관도 같이 헤쳐 나갈 수 있는 커뮤니티가 필요하다. 그 이유는 크게 다음과 같이 두 가지이다.
▪ 온전한 삶을 찾아 여행하다 보면 혼자 가야 할 때도 많지만, 다른 이들의 도움 없이 혼자 힘만으로 가기에는 너무 힘들 때도 있기 때문이다.
▪ 우리는 자기기만 능력이 아주 뛰어나므로 다른 사람들에게 가르침을 받지 않으면 길을 잃을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이런 커뮤니티는 '영혼과 역할을 개결합하기 위해' 서로 격려하는 만들고자 하는 이들과 협력으로 이루어진다. 의외로 어디에 있든 분리되지 않은 삶을 살면서 세상이 필요로 하는 사람이 되길 원하는 사람들이 많다. 오늘 이야기는 여기서 멈추고, 내일은 우리가 어떻게 분리된 사람을 살게 되는 지를 공부할 생각이다.
우리가 '분리된 삶'을 사는 이유는 자신을 보호하려는 본능 때문이다. 그러한 보호 본능은 '인생에 대한 밝은 기대'와 '그늘진 현실' 사이의 간극을 보기 시작한 어린 시절부터 나타난다. 그러나 어린아이일 때 모든 아이의 타고난 선물인 '기쁨의 날개를 단 에너지'를 타고 그 '어두운 심연'을 넘어 갈 수 있다. 이 에너지는, 시인 루미의 말에 따르면, "여기 그 자체의 기쁨을 위한" 순수한 영혼에서 나온다. 아이들이 커다란 곤경에 맞닥뜨려도 쉽게 좌절하지 않고 놀라울 정도로 빨리 회복할 수 있는 건 이 순수한 영혼 덕분이다.
그런 우리가 어른이 되면서, 이 세계에서 살아남고 성공을 거두는 데 몰두하면서 영혼과 접촉을 끊고 역할 속으로 사라진다. 즉 가면을 쓰고, 갑옷을 입은 어른이 된다. 그러면서 다음과 같은 대가들을 치른다.
▪ 삶에서 무언가 잃어버렸다고 느끼지만, 그것이 자기 자신이라는 것을 이해하지 못한 채 그것을 찾아 세상을 헤매고 다닌다.
▪ 자신의 진정한 모습 그대로 세상에 있지 못하는 까닭에 자신이 세상을 속일 수 있다 거나 심지어 세상에서 자신이 보이지 않는다고 느낀다.
▪ 내면의 빛이 세상의 어둠을 비추지 못한다.
▪ 세상의 빛이 내면의 어둠을 비추지 못한다.
▪ 내면의 어둠을 다른 이들에 투사함으로써 그들을 '적'으로 만들고 세상을 위험한 장소로 만든다. 여기서 투사란 자신이 지닌 나쁜 점을 다른 사람 역시 지니고 있다고 보는 심리를 말한다.
▪ 거짓과 투사 때문에 진정한 관계를 맺지 못하므로 고독 해진다.
▪ 세상에 대한 공헌이 이중성에 의해 더럽혀지고, 생명을 주는 잠 자아의 에너지를 빼앗긴다.
이런 것들은 '분리된 삶'에서 비롯된 것인데, 여기에 대중 문화가 더 부추긴다. 예컨대, "속마음을 내비치지 마라", "세상에 믿을 놈 하나 없다"는 말은 우리가 어릴 때부터 "가면을 쓰고, 갑옷을 입고" 살아가는 게 안전하다고 말한다. 그러면서 우리는 사람들을 대할 때, "이 사람의 겉으로 드러난 모습과 속 모습이 과연 같을까" 하고 자문한다. 그 대답이 "예"라면 우리는 자신을 맡겨도 될 만큼 그 관계가 안전하다고 느끼면서 긴장을 푼다. 그러나 대답이 "아니오"라면 우리는 극도로 경계한다. 더 나아가 속과 겉의 불일치는 서로 의욕과 능력을 억압하여 관계가 계속 훼손된다. 그렇지만, 언젠 가는 "가면을 쓰고 갑옷을 입고" 살아가는 게 안전하고 건전한 방식은 아니라는 게 밝혀진다. 그리하여 영혼의 진실이 우리의 역할에 활력을 불어넣어 준다면 우리의 삶이 훨씬 건전해지고, 안전해 질 것이다. 내 안에 아직 남아 있는 아이를 찾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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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에는 성실성(誠實性, integrity-정성스럽고 진실한 품성, integrity)이 중요하다. 성실성은 '온전하고, 이미 갖추어져 있고, 깨어지지 않은 상태나 성질'을 뜻한다. 나뉘지 않고 온전한 상태, 원래의 조건에 일치하고, 손상되지 않고, 섞인 것이 없는 진정한 상태에 있는 어떤 것을 말한다. 프랑스어는 Integrite인데, 생략이나 파손되지 않은 전체로 본래대로의 상태를 말한다. 노자 식으로 말하면 유위(有爲)가 없는 무위(無爲)의 상태가 아닐까?
무위(無爲)는 말 그대로 하면 행위가 없음(non-action)이다. 그러나 가만히 앉아서 무위도식 하거나 빈둥거린다는 뜻이 아니다. 도올 김용옥 교수에 의하면, 여기 '무'를 '없다'라는 명사로 보지 말고, '지운다', '버린다'라고 하는 동사로 보라 한다. 나는 그래 '무'를 그냥 없는 게 아니라, 다른 이를 위해 비우거나 버리는 것으로 보았다. 나는 법정 스님이 말하는 무소유도 아무 것도 갖지 않는 것이 아니라 불필요한 것을 갖지 않는다는 뜻으로 해석한다. 게다가 소유하고 있는 물건의 물성(物性)을 지키는 것으로 본다.
무위의 반대되는 개념이 유위(유위)이다. 보통 인간사에서 발견되는 것들로 무엇인 가를 자꾸 하면 할수록 사태가 엉클어져 가는 상황을 우리는 우리의 삶 속에서 쉽게 느낄 수 있다. 다음 같은 행위들 이다.
▪ 인위적 행위
▪ 과장된 행위
▪ 계산된 행위
▪ 쓸데 없는 행위
▪ 남을 의식하고 남 보라고 하는 행위
▪ 자기 중심적 행위
▪ 부산하게 설치는 행위
▪ 억지로 하는 행위
▪ 남의 일에 간섭하는 행위 등 일체의 부자연스러운 행위를 하지 않는다는 거다.
무위지사(無爲之事) 또는 무위지위(無爲誌爲-무위의 위)는 행동이 너무나 자연스럽고 너무 자발적이어서 자기가 하는 행동이 구태여 행동으로 느껴지지 않는 행동, 그래서 행동이라 이름할 수도 없는 행동으로 '함이 없는 함'이다.
파커가 말하는 "성실성"에서 <<중용>>에서 말하는 "지성(至誠)"이 소환된다. <<중용>> 제23장은 우리가 자신의 변화를 만들어가는 과정을 잘 설명한다. "지성(至誠)"을 잘 해석해야 한다. 다음과 같이 두 단계이다. (1) 작은 일도 무시하지 않고 최선을 다해야 한다. (2) 그런 식으로 작은 일에도 최선을 다할 때, 우리는 그 일을 정성스럽게 하게 된다. 작은 일에 최선과 그 일에 정성을 다하는 것은 동전의 양면이다. <<중용>>의 원문을 읽어 본다.
其次(기차)는 致曲 曲能有誠(치곡 곡능유성)이니
誠則形(성즉형)하고
形則著(형즉저)하고
著則明(저즉명)하고
明則動(명즉동)하고
動則變(동즉변)하고 變則化(변즉화)니
唯天下至誠(유천하지성)이어 爲能化(위능화)니라
이를 해석하면,
숨겨진 진실에 진심을 다해야 한다.
진심을 다하면 정성스럽게 된다.
정성스럽게 되면 형태가 만들어지고,
형태가 만들어지면 겉으로 드러나고,
겉으로 드러나면 명백해지고,
명백해지만 남을 감동시킨다.
남을 감동시키면 변화하게 되고,
변화하면 되어진다.
그러니 오직 세상에서 지극히 정성을 다하는 사람만이 나와 세상을 변하게 할 수 있다.
변화의 완성은 오얏과 복숭아 향기에 취해 많은 사람들이 과수원을 찾아오는 길을 만들어내는 것과 같다. 이는 사마천의 <<사기>>에 ‘도이불언 하자성혜(桃李不言 下自成蹊)’라는 말이다. 오얏(자두)나무와 복숭아나무는 스스로 말하지 않아도 아름다운 꽃과 열매가 있어 사람들이 모이게 하므로 그 밑에 저절로 길이 생긴다는 뜻을 갖고 있다. 말 그대로 하면, '복숭아 나무와 오얏(자두)나무는 말이 없다. 그러나 그 아래 저절로 발자국이 생긴다'는 것이다. 이 나무들은 일 년 내내 자연의 순환에 따라 말없이 조용하게 정진해 왔던 것이다.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안개가 내리나 서리가 내리나, 그 나무에겐 열매를 훌륭하게 맺기 위한 당연한 과정일 뿐이었다. 적당한 시간이 되니, 마침내 탐스런 복숭아와 자두를 맺게 된 것이다. 그랬더니 그 열매를 보고 사람들이 저절로 모이게 되었다.
한문 '혜(蹊)'를 찾아 보면, 의미가 여럿이다. '좁은 길', '지름길', '발자국' 등이다. 혼자 생각해 보았다. 발자국을 남긴 좁은 길이 지름길이다. 지름길은 멀리 돌지 않고 가깝게 질러 통하는 길이다. 비유적으로 말하면, 가장 쉽고 빠른 방법'을 말하기도 한다. 코로나-19로 요즈음 되는 일도 없고, 안 되는 일도 없이 군대에서 보냈던 허송세월을 사는 것 같다. 허(虛)하다. 그러나 복숭아 나무와 자주 나무처럼, 말없이 이런 저런 책들을 많이 읽고, 생각하고 쓰는 일을 하며 보내면, 그 길이 지름길일 것이다.
노자가 말하는 ‘무위’는 아무 것도 안 하는 상태가 아니다. 그것은 오히려 우주의 순환이나 사시사철의 변화와 같이 정교한 원칙의 표현이다. '무위'라는 말은 '일을 하지 않는다'는 말이 아니라, 상대가 과중하게 느낄 정도로 행동하지 않는다는 말이다. 그러니까 지나치지 않는다는 말이다. 그런 의미에서 '무위'는 정교한 '인위(人爲)'이다. 노자가 말하는 "무위무불위(無爲無不爲)"를 이해하여야 '무위'가 이해된다. "무위하면 되지 않는 법이 없다"는 뜻이다. 이 문장을 단지 이렇게 해석하면 부족하다. 세상사에서 어떤 욕망도 품지 않고, 그냥 되는 대로 흘러가게 내버려 두는 것을 '무위'로 보로 보는 것이 아니다. 노자가 말하고 싶었던 것은 '무위'보다도 '되지 않는 일'이 없는 "무불위(無不爲)"의 결과였다고 본다. '무위'라는 지침은 '무불위'라는 효과를 기대할 수 있다는 점에서 의미를 가진다. <<도덕경>> 제22장을 보면 안다. "구부리면 온전해지고, 굽으면 곧아질 수 있고, 덜면 꽉 찬다. 헐리면 새로워지고, 적으면 얻게 되고, 많으면 미혹을 당하게 된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노자를 구부리고, 덜어내는, 헐리는, 적은" 것만으로 받아들이려 한다. 사실 노자는 온전하고 꽉 채워지는 결과를 기대하는 마음이 더 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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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성 요한 마리아 비안네 사제 기념일로 말씀은 <마태오 15,1-2.10-14> "조상들의 전통에 관한 논쟁" 이다.
그때에 예루살렘에서 온 바리사이들과 율법 학자들이 예수님께 다가와 말하였다. “어째서 선생님의 제자들은 조상들의 전통을 어깁니까? 그들은 음식을 먹을 때에 손을 씻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군중을 가까이 불러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는 듣고 깨달아라. 입으로 들어가는 것이 사람을 더럽히지 않는다. 오히려 입에서 나오는 것이 사람을 더럽힌다.” 그때에 제자들이 예수님께 다가와 물었다. “바리사이들이 그 말씀을 듣고 못마땅하게 여기는 것을 아십니까?” 그러자 예수님께서 대답하셨다. “하늘의 내 아버지께서 심지 않으신 초목은 모두 뽑힐 것이다. 그들을 내버려 두어라. 그들은 눈먼 이들의 눈먼 인도자다. 눈먼 이가 눈먼 이를 인도하면 둘 다 구덩이에 빠질 것이다.”
<사람아 그대에게 달렸으니>
“너희는 듣고 깨달아라. 입으로 들어가는 것이 사람을 더럽히지 않는다. 오히려 입에서 나오는 것이 사람을 더럽힌다.”(마태 15,10)
아무 것도
더럽힐 수 없는
그대 사람아
스스로를
더럽히지 말게나
아무 것도
깨끗하게 할 수 없는
그대 사람아
스스로를
깨끗하게 하게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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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은 깨끗한 손을 자랑하는 일이 아니라, 내 마음에서 흘러나온 말 하나로 하느님의 사랑을 전하는 일입니다.
2026/8/4/성 요한 마리아 비안네 사제 기념일
마태오 복음 15장 1-2.10-14절:“입으로 들어가는 것이 사람을 더럽히지 않는다. 오히려 입에서 나오는 것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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겉과 속
“입으로 들어가는 것이 사람을 더럽히지 않는다. 오히려 입에서 나오는 것이 사람을 더럽힌다.” 우리는 자주 겉모습에 신경 쓰며 살아갑니다. 예의 바른 말과 부드러운 표정, 남들에게 흠 잡히지 않을 행동들을 갖추어 좋은 사람으로 보이길 원하지요. 물론 이러한 태도는 삶을 살아가는 데 있어 중요한 것이지만, 예수님은 더 깊은 곳을 보십니다. 우리의 손이 깨끗한가보다 마음이 깨끗한가를 먼저 물으시지요. 누군가를 향해 쉽게 내뱉은 말, 속으로 품은 미움, 상처 주고도 모른 척했던 침묵, 그런 것들이 우리 마음에 조금씩 자국을 만듭니다. 그래서 신앙은 겉으로 완벽해지기보다 내 안에서 흘러나오는 말과 마음이 조금씩 사랑을 닮아가는 일이라 믿습니다. 오늘 하루, 내 입에서 나오는 말이 누군가를 살리는 말이면 좋겠습니다. 내 마음에서 시작된 작은 친절과 다정함이 누군가에게는 하느님의 따뜻한 손길을 느끼는 기회가 되면 좋겠습니다. 박태훈 마르티노 신부(대구대교구)/생활성서 2026년 8월호 '소금항아리'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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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년 8월 4일 성 요한 마리아 비안네 사제 기념일
무더위가 기승을 부리는 8월의 첫 주간입니다. 치열한 일상 속에서 뜻대로 풀리지 않는 관계나 마음의 짐 때문에 우리 영혼이 헐떡일 때가 참 많습니다. 오늘 주님께서는 상처 입은 우리 영혼을 향해 따뜻한 회복의 음성을 들려주시는 동시에, 참된 영적 건강을 위해 마음의 어디를 청소해야 하는지 자비로운 진단을 내려 주십니다.
오늘 제1독서와 복음은 외적인 형식을 넘어선 ‘내면의 온전한 회복’이라는 주제로 깊이 연결되어 있습니다. 제1독서에서 유다 백성들은 죄악으로 인해 나라가 망하고 유배를 떠나는, 인간의 힘으로는 고칠 수 없는 절망적인 상처를 입었습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예레미야 예언자를 통해 눈물겨운 사랑의 선언을 건네십니다. “참으로 내가 너에게 건강을 되돌려주고 너의 상처를 고쳐 주리라”(예레 30,17). 하느님은 우리를 파멸시키시는 분이 아니라, 영혼의 가장 깊은 곳까지 싸매어 당신의 소중한 자녀로 되돌려 놓으시는 분이십니다.
치유의 하느님께서는 오늘 복음에서 외적인 규칙에만 매몰되어 영혼이 시들어가는 이들을 꾸짖으십니다. 바리사이들은 제자들이 음식을 먹기 전 손을 씻지 않았다는 점을 문제 삼으며 예수님을 공격했지만, 그들은 조상의 전통이라는 형식을 하느님의 계명보다 위에 두는 우를 범하고 있었습니다. 이에 예수님께서는 명확한 진리를 선포하십니다. “입으로 들어가는 것이 사람을 더럽히지 않는다. 오히려 입에서 나오는 것이 사람을 더럽힌다”(마태 15,11). 손을 씻지 않는 것은 몸의 위생 문제일 뿐, 영혼을 더럽히지는 못합니다. 정작 우리를 더럽히는 것은 마음속 깊은 곳에서 걸러지지 않고 터져 나오는 악한 생각, 시기, 질투, 비난과 같은 ‘마음의 독소'들 입니다.
우리는 종종 외적으로 드러나는 신앙의 형태에만 온 신경을 쓰곤 합니다. 주일 미사 참례나 헌금, 봉사 직분 같은 외적 형식도 중요하지만, 우리의 내면은 어떠한 지 돌아봐야 합니다. 성당 문을 나서자마자 이웃을 시기하고 가족들에게 상처 주는 말을 쏟아낸다면, 그것이 바로 주님이 아파하시는 ‘영적 눈먼 상태’ 입니다. 하느님께서 정말 고쳐주고 싶어 하시는 진짜 상처는 바로 무너진 마음의 중심입니다.
오늘은 평생 고해소에서 신자들의 무너진 마음을 씻어 주셨던 성 요한 마리아 비안네 사제 기념일이자, 본당 신부님들의 수호성인의 날입니다. 비안네 신부님은 신앙이 황폐해진 아르스 마을 사람들을 겉모습만으로 단죄하지 않으셨습니다. 하루 16시간 넘게 좁은 고해소에 앉아 죄로 얼룩진 영혼들의 이야기를 묵묵히 들어 주셨습니다. “하느님은 우리가 죄를 용서받기도 전에 이미 용서할 준비를 하고 계십니다"라고 말씀하시며, 성인은 마음의 독소 때문에 괴로워하는 양들을 눈물로 안아 주시고 그들의 마음 밭을 옥토로 변화시키셨습니다. 하느님은 형식적인 먼지 털기가 아니라 마음의 중심을 보십니다. 내 안의 미움과 시기심을 숨기려 애쓰지 마십시오. 오늘 제1독서의 약속처럼 “내가 너의 상처를 고쳐 주리라” 하시는 주님 앞에 우리 부끄러운 마음을 솔직히 내어놓읍시다.
오늘 하루, 우리를 위해 늘 희생하시는 본당 신부님들을 위해 따뜻한 화살기도 한 줄 바치시 길 청합니다. 내 마음의 샘을 주님의 자비로 씻어내어, 여러분의 입을 통해 나가는 모든 말이 지친 이웃을 살리는 축복의 통로가 되기를 기원합니다.
“영혼을 치유하시는 주 하느님, 저희가 겉으로 드러나는 형식에만 신경 쓰느라 마음속에 독소를 품고 이웃에게 상처를 주었음을 고백합니다. 성 요한 마리아 비안네 사제의 전구를 청 하오니, 저희의 완고함을 깨뜨려 주시고 마음의 상처를 주님의 자비로 아물게 하소서. 저희의 내면이 온전히 정화되어, 저희의 모든 말과 행동이 당신의 백성다운 사랑의 열매가 되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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