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766. 인문 운동가의 인문 일지
(2026년 8월 3일)
1
어제는 벌써 17주년이 되는 먼저 하늘나라에 간 처의 기일이었다. 그때도 어제처럼 불볕 더위였다. 어쩌면 어제가 그때보다 좀 더 뜨거웠던 같다. 언젠가 읽었던 <기일>이라는 시를 공유한다.
기일/이돈형
내 기일을 안다면 그날은 혼술을 하겠다
이승의 내가 술을 따르고 저승의 내가 술을 받으며 어려운 걸음 하였다 무릎을 맞대겠다
내 잔도 네 잔도 아닌 술잔을 놓고 힘들다 말하고 견디라 말하겠다
마주 앉게 된 오늘이 길일이라 너스레를 떨며 한 잔 더 드시라 권하고 두 얼굴이 불콰해지겠다
산 척도 죽은 척도 고단하니 산 내가 죽은 내가 되고 죽은 내가 산 내가 되는 일이나 해보자 하겠다
가까스로 만난 우리가 서로 모르는 게 많았다고 끌어안아 보겠다
자정이 지났으니 온 김에 쉬었다 가라 이부자리를 봐두겠다
오늘은 첨잔이 순조로웠다 하겠다
세월이 흐르니, 슬픔이 줄어들었다. 이젠 아내의 죽음을 이야기한다. "이야기 된 불행은 아니라"는 이성복 시인의 말처럼, 지금은 말할 수 있다. 이젠 많이 슬프지 않다. 이야기를 함으로써 어떤 식으로 든지 상실의 상처에 의미를 부여한다. 상처에 의미를 부여할 수 있으면, 상처를 견딜 수 있는 힘을 얻는다. 치유 받지 못한 상처는 '의미'를 부여 받지 못한 고통이다. 상실이 무서운 것은 그것이 '트라우마'로 남을 때이다. 트라우마로부터 빠져나오는 길은 도망치는 것이 아니라, 그것과의 대면을 통해 상처를 어루만져 거기에 의미를 부여하는 것이다. 이 때 그 상처는 어지럽고 모호한 대상에서 구체적인 실체로서 확실하게 파악되는 대상으로 바뀌면서 마침내 우리 스스로를 통제할 수 있게 된다. 그런 과정을 거치면서 프레임이 다시 짜인다.
2
이때 일어나는 어떤 감정도, 어떤 말도 다 종이 위에 쏟아 놓는다. 주저하지 말고, 어떤 판단도 하지 말고, 끝까지, 하나도 남김없이 붙잡아서 종이 위에 단단히 고정시켜 본다. 여기서 중요한 것이 일어나는 감정이나 생각에 그 어떤 가치 판단도 덧붙이지 않아야 한다. 예를 들어 도덕적인 가치 판단이 개입되면 감정과 생각은 억압 된다.
종이 위에 죄다 쏟아 놓으면 후련한 느낌이 든다. 마치 믿음직한 친구에게 속마음을 털어놓고, '있는 그대로'의 자신으로 오롯이 위로 받는 느낌을 갖게 된다. 그리고 그 적은 것을 다시 읽어 보면, 자기 자신과 고통 사이에 틈이 생긴다. 그러면 그 고통이나 상처 또는 상실을 다른 관점에서 바라볼 수 있고, 마침내 자신의 삶에 닥친 고통을 다른 방식으로 이해할 수 있게 된다. 그때 비로소 치유와 성장이 시작된다.
이런 치유는 밖에서 얻는 '아주 잠깐만 괜찮은 위로'와는 차원이 다르다. 그것이 자신의 아픔을 스스로 돌봐 주며 새로운 삶으로 나아가는 성장이 동반되는 '진짜' 힐링이 된다. 여기서 주의할 점이 있다.
▪ 현재 느끼고 있는 고통으로 인한 감정의 세밀한 점을 집요하게 만나고 할 수 있는 한 자세하게 묘사하여야 한다.
▪ 분노, 원한, 슬픔 등의 감정을 억누르거나 아름답게 표현하려고 노력하지 말고 느끼는 대로 정직하게 있는 그대로 표현해야 한다.
▪ 욕설과 비속어 사용을 의식적으로 피하거나 거부하지 말고 마음 속에서 나오는 대로 직설적으로 표현해야 한다.
육체적 고통은 흔히 '하지 않음'의 미덕을 아는 데서 해결된다. 육체적 고통은 때로 훌륭한 스승이 된다. 왜? 질문하게 되기 때문이다. 왜 아픈가? 생각해 보니 평소 건강식품과 영양제 등 몸에 ‘좋은 것'을 찾아 먹어온 성실한 삶이었지만, 정작 “내일부터! 오늘까지 만!”이란 핑계를 대며 ‘나쁜 것'을 멈추는 데는 인색했던 것이다. 의사들이 말하길, 정확한 진단이 내려지면 대부분 몸에 좋은 10가지를 하는 것보다, 몸에 정말 나쁜 한두 가지를 하지 않는 것이 더 근본적인 치료라 했다. 그러면서 의사들은 나쁜 일을 하지 않는 게 결코 쉽지 않은 실천이라고 여러 번 강조한다.
특히 발이 아픈 이유는 흔히 이런 것이다. '내 몸은 너무 무겁고, 내 발은 쉬고 싶다'는 날카로운 통증의 목소리를 무시한 것 때문이다. 끝없는 과부하가 그의 몸을 짓눌렀던 것이다. 언제든 먹고 싶은 것을 먹고, 가고 싶은 곳을 마음껏 걸어 다녔던 삶, 하지만 그 자유는 발에게 족쇄가 됐던 것이다. 몸 무게를 빼야 한다.
혹독한 식단 조절이나 무리한 운동 대신, 천천히 그러나 꾸준히 체중을 줄이고, 발에게 휴식을 주는 거다. 걷고 싶을 때 참고, 오래 서 있고 싶을 때 일부러 앉는다. 그러면 발의 고통은 서서히 줄어든다. 때로 진정한 치유는 외부의 무언가를 더하는 것이 아닌, 내면을 돌아보고 불필요한 것을 덜어내는 데서 시작된다. 우리에겐 ‘하지 않음'의 미덕이 더 중요할 때가 있다.
3
아내를 잃은 후, 몇 년 간 방황을 하다가 <인문 일지>를 쓰면서 내 삶을 살기 시작했다. 내가 매일 <인문 일지>를 쓰는 이유는 나 자신과 또는 이 글을 읽는 사람이 다음 문장을 기억하게 하려는 거였다. "짧은 글 하나가 하루의 생각을 바꾸고, 더 나아가 삶의 방향을 조금 바꿔 놓을 수도 있다"는 거다.
이 말을 성당에서는 '매일 매일 성경 말씀을 대면 하라'고 말한다. 그 '말씀'이 우리의 삶의 방향을 잡아주고, 내 일상에 그 '말씀'이 실현되도록 할 때, 우리는 땅을 보는 것이 아니라 하늘을 보며 사는 일이라는 거다. 무엇이 옳은 지, 그리고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혼란스러운 순간, 필요한 것은 더 많은 정보가 아니라, 삶을 꿰뚫는 지혜의 시선이다.
“아름다운 젊음은 우연한 자연현상이지만, 아름다운 노년은 예술 작품"이다. 루스벨트 대통령의 부인 엘리너 루스벨트의 말이라 한다. 아름다운 노년은 예술 작품이다. 이를 위해 우리는 잘 늙어야 한다. 삶의 희로애락을 담아낸 듯한 얼굴 주름과 자연스러움, 그것은 다른 차원의 ‘아우라’로, 보통 재능을 가진 이가 끝없는 노력으로 자신만의 세계를 서서히 구축해 나가는 성장 서사에 가깝다. 젊은 날 우리는 빨리 인정받고 남들보다 반짝이고 싶어서 조급해 한다. ‘나는 왜 저들처럼 특별하지 않을까?’ ‘언제쯤 내게도 화려한 순간이 올까?’ 하는 초조함에 밤잠을 설친다.
그러나 아름다운 노년이 예술 작품인 거장들의 삶의 궤적은 우리에게 조금 다른 이야기를 들려준다. 삶이라는 긴 무대에서 중요한 건 어쩌면 폭죽처럼 터지는 화려함이 아니라, 은은하지만 오래도록 꺼지지 않는 등불 같은 꾸준한 노력과 체력이라는 지혜 말이다. 젊은 날의 불안과 방황을 지나온 노년이 건네는 삶의 경륜은 그래서 더 깊은 울림이 있다. 청춘이 이들의 삶에서 배워야 할 건 그 과정의 가치다. 꽃의 화려함은 눈부시게 짧고, 봄의 꽃만큼 늦가을의 단풍도 깊고 아름답다. 그렇게 늙고 싶다. 일상의 루틴을 규칙적으로 잘 지키고, 다음 4가지 원칙을 소홀히 하지 않는다. 나는 <4M 건강법>을 늘 기억하고 있다. 이 걸 알게 한 사람은 정희원 교수이다.
그는 "성공적인 나이 듦을 위한 네 가지 기둥"으로 이동성(Mobility), 마음 건강(Mentation), 건강과 질병(Medical issues), 나에게 중요한 것(What Matters)을 선택하여 "4M 건강법"이라 이름 지었다. 그가 주장하는 '한국형 건강 수업'은 내재 역량을 키우자는 거다. 그 내재 역량을 꾸준히 계발해야 한다는 거다.
나에게 흥미를 주었던 것은 모든 내재 역량의 상태가 "AND' 조건으로 유지되어야 전반적 기능을 자연스럽게 윤택하게 유지할 수 있다는 점이다. 그러니까 가능한 한 젊은 시기부터 자연스러운 신체 활동과 운동, 금연, 절주, 절제된 식사, 마음 챙김, 스트레스 관리, 회복 수면, 영적 건강 등으로 만성질환을 예방하고 노화 속도를 늦춰야 한다는 거다. 그러면 70대 중반까지 초기 노년기에 장기 노화가 덜 진행되고 질병과 약의 노출이 적으며 일상생활에서 근육을 사용하게 된다고 덧붙였다. 이렇게 해야 성공적인 노화로 이어지고, 궁극적으로 노쇠를 예방할 수 있다는 거다.
4
마음에도 캘러스가 있다. 즉, 상처를 품어 마디가 되는 삶 말이다. 나무가 상처를 입었을 때 보이는 반응은 참으로 눈부시다. 겉 자리를 잘려 나간 나무는 그 자리를 억지로 메우거나 단숨에 잘라내기 전으로 돌리려 애쓰지 않는다. 대신 상처 입은 경계면 주변에서 ‘캘러스(Callus, 식물의 굳은살)’라 불리는 유상 조직을 묵묵히 밀어 올린다. 말랑말랑하던 세포들은 상처의 외곽에서부터 시작해 중앙을 향해 아주 천천히, 마치 둥그스름한 입술 모양으로 상처를 감싸 안는다.
나무 줄기가 잘린 뒤에 나타난 Callus. 부피 생장을 일으키는 줄기는 원래 가운데 부분이 죽은 세포의 세포벽으로 이루어져 있다. 그 주변으로 부풀어오른 부분이 바로 줄기의 살아있는 세포가 분열하여 만들어진 Callus이다.
이 모습은 인간의 삶과 놀라울 정도로 닮아 있다. 살다 보면 누구나 예상치 못한 지점에서 가지가 꺾이고 잘려 나가는 아픔을 겪는다. 사업의 실패, 가까운 이와의 이별, 혹은 쏟아부은 정성에 미치지 못하는 수많은 자책의 순간들이 그렇다. 흔히 상처가 나면 조급한 마음에 그 흔적을 당장 지우려 하거나, 왜 나에게 이런 일이 생겼는지 소모적인 원망을 되풀이하곤 한다.
하지만 수목학의 'CODIT 이론(수목 상처 구획화 이론)'이 보여주듯, 나무는 상처를 과거로 돌려 '완치'하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벽을 세워 '격리'한다. 고통의 흔적을 무작정 삭제하는 대신, 그 테두리를 따라 자신만의 단단한 방어벽을 새로 길러내는 것이다. 잘려 나간 자리가 둥글떱떱하게 부풀어 오르는 까닭은 고통의 자리를 외면하지 않고 온몸으로 감싸며 견뎌낸 훈장인 셈이다.
인생의 가지치기 역시 마찬가지다. 불필요한 욕심과 지나간 미련을 잘라낸 자리에는 반드시 통증이 따른다. 그러나 그 통증을 견디며 스스로를 다독일 때 내면에는 비로소 마음의 캘러스가 형성된다. 잘려 나간 자리가 아물어 둥글게 변한 나무의 옹이는 더 이상 약점이 아니다. 오히려 거센 태풍 앞에서도 나무를 지탱하는 가장 단단한 마디가 된다.
지금 삶의 한 귀퉁이가 잘려 나가 아파하고 있다면 기억할 필요가 있다. 당신의 마음 가장자리에서도 지금 둥글고 단단한 치유의 조직이 자라나고 있다는 사실을. 인간은 상처가 없어서 아름다운 것이 아니라, 그 상처를 둥글게 감싸 안으며 자라났기에 비로소 깊어지는 존재다. 정용주라는 분의 페북 담벼락에서 얻은 생각이다.
5
오늘은 연중 제18주간 월요일로 말씀은 <마태오 14,22-36> "물 위를 걸으시다" 이다.
군중이 배불리 먹은 다음, 예수님께서는 곧 제자들을 재촉하시어 배를 타고 건너편으로 먼저 가게 하시고, 그동안에 당신께서는 군중을 돌려보내셨다. 군중을 돌려보내신 뒤, 예수님께서는 따로 기도하시려고 산에 오르셨다. 그리고 저녁때가 되었는데도 혼자 거기에 계셨다. 배는 이미 뭍에서 여러 스타디온 떨어져 있었는데, 마침 맞바람이 불어 파도에 시달리고 있었다. 예수님께서는 새벽에 호수 위를 걸으시어 그들 쪽으로 가셨다.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호수 위를 걸으시는 것을 보고 겁에 질려 “유령이다!” 하며 두려워 소리를 질러 댔다. 예수님께서는 곧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용기를 내어라. 나다. 두려워하지 마라.” 그러자 베드로가 말하였다. “주님, 주님이시거든 저더러 물 위를 걸어오라고 명령하십시오.” 예수님께서 “오너라.” 하시자, 베드로가 배에서 내려 물 위를 걸어 예수님께 갔다. 그러나 거센 바람을 보고서는 그만 두려워졌다. 그래서 물에 빠져들기 시작하자, “주님, 저를 구해 주십시오.” 하고 소리를 질렀다. 예수님께서 곧 손을 내밀어 그를 붙잡으시고, “이 믿음이 약한 자야, 왜 의심하였느냐?” 하고 말씀하셨다. 그러고 나서 그들이 배에 오르자 바람이 그쳤다. 그러자 배 안에 있던 사람들이 그분께 엎드려 절하며, “스승님은 참으로 하느님의 아드님이십니다.” 하고 말하였다. 그들은 호수를 건너 겐네사렛 땅에 이르렀다. 그러자 그곳 사람들이 그분을 알아보고 그 주변 모든 지방으로 사람들을 보내어, 병든 이들을 모두 그분께 데려왔다. 그리고 그 옷자락 술에 그들이 손이라도 대게 해 주십사고 청하였다. 과연 그것에 손을 댄 사람마다 구원을 받았다.
<당신처럼 나 그러하기를>
“예수님께서는 새벽에 호수 위를 걸으시어 그들 쪽으로 가셨다.”(마태 14,25)
불신
거슬러
믿음이신
당신처럼
나 그러하기를
절망
거슬러
희망이신
당신처럼
나 그러하기를
무정
거슬러
사랑이신
당신처럼
나 그러하기를
홀로
거슬러
함께이신
당신처럼
나 그러하기를
죽임
거슬러
살림이신
당신처럼
나 그러하기를
6
믿음으로 우리는 풍랑을 피하게 해달라고 청하기보다, 가라앉는 순간에도 나를 향해 걸어오시는 주님을 부르게 됩니다.
2026/8/3/연중 제18주간 월요일
마태오 복음 14장 22-36절: “주님, 저를 구해 주십시오.” … “이 믿음이 약한 자야, 왜 의심하였느냐?”
⠀
신앙의 위로
오늘 복음의 제자들은 밤바다 위에 있습니다. 예수님 말씀을 따라 배에 올랐으면 평온할 법도 한데, 그들이 만난 건 거친 풍랑이었습니다. 이처럼 옳은 길을 걷고 있다 생각할 때에도 마음이 흔들리고, 기도하는 중에도 삶이 출렁인다 느낄 때가 있습니다. 그때마다 믿음이 무엇일까 질문을 던지는 우리를 향하여 예수님께서는 새벽녘의 물 위를 걸어오십니다. 풍랑이 지나간 뒤가 아니라, 풍랑 한가운데로 오십니다. 주님께서 건네시는 위로는 이러합니다. 주님은 우리의 불안을 멀리서 바라보시는 분이 아니라, 그 불안 속으로 들어오시는 분이십니다. 베드로는 그런 예수님을 보고 물 위를 걸어보지만, 바람을 보자 이내 두려움에 사로잡혀 다시 가라앉습니다. 우리도 그렇습니다. 다시 용기를 내보지만 주님의 음성보다 현실의 소음이 더 크게 들릴 때, 마음은 금세 물속으로 내려앉지요. 그때 베드로가 외칩니다. “주님, 저를 구해 주십시오.” 어쩌면 믿음은 가라앉지 않는 능력이 아니라, 가라앉는 순간에도 주님을 부를 수 있는 마음에 닻을 내리지 않을까요. 주님은 그 부르짖음 앞에 다가와 늘 먼저 손을 내미십니다. 박태훈 마르티노 신부(대구대교구)/생활성서 2026년 8월호 '소금항아리'에서⠀
7
2026년 8월 3일 연중 제18주간 월요일
우리는 살아가면서 수많은 ‘불안’과 마주합니다. 미래에 대한 불확실성, 건강에 대한 염려, 삶의 무게가 주는 중압감 속에서 우리는 늘 “모든 것이 다 잘될 것이다”라는 따뜻한 위로의 말을 갈망하곤 합니다. 하지만 오늘 성경 말씀은 우리에게 중요한 영적 분별력을 요구합니다. 참된 위로는 내 귀에 달콤한 인간의 말이 아니라, 비록 거칠고 아플지라도 하느님의 진리 안에 머물며 그분의 손을 잡는 것에 있음을 일깨워 줍니다.
오늘 제1독서에서는 두 예언자의 격렬한 충돌이 그려집니다. 예레미야 예언자는 유다 백성이 자신들의 죄악 때문에 바빌론 유배라는 하느님의 징벌을 겸손히 받아들이고 회개해야 한다고 선포해 왔습니다. 이를 ‘나무 멍에’에 비유했습니다.
그런데 하난야라는 거짓 예언자가 나타나 백성들 앞에서 “하느님께서 바빌론 왕의 멍에를 부수셨으니 2년 안에 평화가 찾아올 것”이라며 호기롭게 외칩니다. 그러고는 예레미야가 메고 있던 나무 멍에를 빼앗아 부수어 버립니다. 고통에 신음하던 백성들에게 이보다 달콤한 복음은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뜻을 거스른 인간적인 낙관론의 결과는 참혹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예레미야를 통해 엄중히 말씀하십니다. “너는 나무 멍에를 부수고, 오히려 그 대신에 쇠 멍에를 만들었다”(예레 28,13). 하느님의 징벌을 성찰과 회개의 기회로 삼지 않고 당장의 불편함만 피하려 했던 이들에게는, 이제 결코 벗어날 수 없는 단단한 ‘쇠 멍에’가 기다릴 뿐이었습니다.
복음에서는 인생의 거친 폭풍우 한가운데서 인간적인 계산으로 흔들리는 제자들의 모습이 등장합니다. 오병이어의 기적을 방금 체험했음에도 불구하고, 제자들은 호수 위 맞바람에 배가 출렁이자 극심한 공포에 휩싸입니다. 새벽녘에 예수님께서 물 위를 걸어오시자, 그들은 유령이라며 비명을 지릅니다. 그런 제자들을 향해 주님은 다정하게 외치십니다. “용기를 내어라. 나다. 두려워하지 마라”(마태 14,27).
이때 베드로는 주님께 자신도 물 위를 걷게 해달라고 청합니다. 주님께서 “이리 오너라” 하시자, 베드로는 실제로 물 위를 걷는 기적을 체험합니다. 오직 주님의 시선에만 눈을 맞추었을 때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베드로가 주님 대신 ‘거센 바람을 보고’ 두려워하기 시작하자, 그의 몸은 이내 물속으로 빠져듭니다. 비명을 지르는 베드로의 손을 즉시 붙잡아 끌어올리시며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이 믿음이 약한 자야, 왜 의심하였느냐?”(마태 14,31).
오늘 말씀 속 유다 백성들과 베드로는 서로 닮아 있습니다. 유다 백성들은 바빌론이라는 거센 시련의 바람 앞에서 하느님의 약속 대신 달콤한 거짓말에 눈을 돌렸고, 베드로 역시 곁에 계신 주님 대신 몰아치는 풍랑을 바라보았을 때 두려움의 바다에 빠져버렸습니다. 우리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삶의 자리에 경제적 위기나 가정의 불화, 건강의 적신호라는 거센 바람이 불어올 때, 우리는 너무나 쉽게 주님을 향했던 시선을 거두어 세상의 풍랑에 빼앗겨 버립니다. 그리고 '어떻게든 다 잘될 거야'라는 세상의 달콤한 위로를 찾아 헤맵니다. 하지만 본질적인 회개와 주님을 향한 신뢰가 없다면, 우리 영혼은 일시적인 안도감을 넘어 더 깊은 불안의 ‘쇠 멍에’에 갇히게 될 뿐입니다.
예수님은 오늘 폭풍우가 치는 여러분의 삶 한가운데로 걸어오고 계십니다. 세상의 바람이 아무리 거세도 시선을 주님께 고정하십시오. 내 힘으로 파도를 이기려 버둥거리지 말고, 물에 빠져가는 순간에라도 “주님, 저를 구해 주십시오!” 하고 주님의 손을 잡으십시오. 주님께서 우리 인생의 배에 오르시는 순간, 여러분을 괴롭히던 거센 바람은 멎고 세상이 줄 수 없는 참된 평화가 가득하게 될 것입니다.
“풍랑 속의 구원자이신 주님, 저희가 삶의 시련 앞에서 당신의 현존을 의심하고 세상의 달콤한 거짓 위로에 눈을 돌렸던 유약함을 용서하소서. 베드로처럼 거센 바람을 보며 두려워 떨 때, 저희 손을 즉시 붙잡아 주시는 당신의 자비로운 손길을 신뢰하게 하소서. 오늘 저희가 어떤 처지에서도 시선을 오직 당신께만 고정하여, 인생의 모든 바다를 두려움 없이 건너가는 굳건한 믿음의 자녀가 되게 하소서. 아멘.”
다른 글들은 블로그에서 볼 수 있다. 네이버에서 '우리마을대학협동조합'를 치시면, 그 곳의 출판부에서 볼 수 있다. 아니면, 나의 블로그 https://pakhanpyo.tistory.com 이나 https://blog.naver.com/pakhan-pyo 또는 https://pakhanpyo.blogspot.com 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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