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765. 인문 운동가의 인문 일지
(2026년 8월 2일)
1
작열하는 태양도, 대지의 열기도 즐기려는 인간의 욕망보다 더 뜨거울 순 없나 보다. 즐길 수 있다면 그것이 곧 피서이다. 덥다 덥다 하면 더 덥고, 춥다 춥다 하면 더 춥다. 하늘과 땅이 신열을 앓는 듯 펄펄 끓는다. 잠을 이룰 수 없을 만큼의 고통을 문명의 힘에 의지해 피하는 것이 나쁠 수는 없다 하지만 인공의 찬바람도 온종일 맞고 있다간 탈이 날 수밖에 없다. 더위를 이기려면 더위와 하나가 되라는 말이 있다. 무엇을 집중하다 보면 더위도 쉽게 잊을 수 있다. 땀을 흘리더라도 견딜 수 있는 만큼의 더위는 벗이라고 여기며 여름을 나는 것도 더위를 이기는 법이다. 자연의 섭리에 순응하는 길이기도 하다.
여름 꽃은 우뚝하다/박노해
세계가 불타고 있다는 듯
때 이른 폭염이 오고
세상이 비관에 휩싸인 듯
기나긴 장마가 오고
먹구름 인 무거운 일상에
천둥이 치고, 바다가 울고,
거센 비바람이 대지를 휩쓸고
언뜻, 빛이 비춰올 때
폭풍우 속에서도 수국 꽃은 우뚝하다
장맛비 속에서도 백일홍은 의연하다
초롱꽃도 꽃댕강도 바늘꽃도
그 가늘고 여린 몸 흔들며 피어나고 있다
장마도 폭풍도 불볕도 지나간다고
그것들이 없이는 강해질 수 없다고
아름답고 고귀한 것들은 다
온몸으로 견뎌내며 태어나는 거라고
난폭한 자들은 악을 쌓으며 자멸해가고
비바람 속에서도 여름 꽃은 우뚝하니
이 아침, 꽃들이 전하는 격려를 담아
그대의 안부를 타전한다
2
나는 틈 나는 대로 다음과 같이 기도를 한다. '내가 원하는 것들로 부터 나를 지켜 주소서(Protect me from what I want).' 정말 '나 자신을 지킨다'는 것은 쉽지 않다. 정말 늘 깨어 있지 않으면 어렵기 때문이다. 그래 정약용은 자신의 방 이름을 "수오실(守吾室)"이라 지었는가 보다. '나를 지키는 방'이란 말이다. 이 이름은 정약용의 형 정약전의 서재 이름에서 따왔다고 한다. 굳이 나를 지킬 필요가 있는가? 항상 나 자신에게 '나'는 찰싹 달라붙어 있는데 말이다. 정약용은 형님의 서재에 붙인 이름에 대해, '유배 생활을 하다 보니 그 깊은 뜻을 깨달었다 한다. '나'라는 것을 지키기가 어렵다는 것을. '나'는 잠시라도 제대로 보살피지 않으면, 출세에 혹하고, 돈에도 혹하며, 미인에게도 혹해 버리기 일쑤이다. '나'라는 존재는 한번 유혹에 휩쓸리면 다시 돌아오기도 어려우니, 붙잡을 수도 머무를 수도 없는 존재임을 깨달었다는 것이다. '나(吾)를 잘 못 간직했다가 나(吾)를 잃은 자'라고 정약용은 고백했다. 그는 욕심과 야망에 이끌려 진정한 자기 자신을 잃어버린 과거를 부끄러워했다.
나는 내 삶의 주인공이 되고 싶다. 그래 일상에서 하는 일이 다음 세 가지이다. 그게 내 방식의 나를 지키는 일이다.
▪ 내 인생의 주도권을 누구에게도 넘겨주지 않는 강인한 뚝심을 기르는 것
▪ 내가 원하는 삶을, 내가 원하는 방식으로, 내가 원하는 사람들과 함께 만들어 갈 수 있는 용기를 한 순간도 잃지 않는 것
▪ 일상 속의 악행에 입을 다물지 않고, 타협하거나 체념하지 않을 것
악행은 타협의 여지가 없다, 부당한 일을 당하고도 아무 말도 못하고 있으면 안 된다. 입을 다물 수밖에 없다는 생각을 버려야 한다. 이는 무법지대를 밝히는 일이다. 우리 인간은 무질서와 혼란은 불안과 긴장을 불러오기 때문에 은연중에 안정 상태, 아니 중지 상태로 되돌아가기를 바란다. 지배 세력이 질서를 강조하는 것은 당연하다. 그들이 누리는 기득권이 흔들려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직도 불의와 차별, 배제가 이루어지고, 억울함과 굴종을 강요 당하고 있다면, 우리는 사회 정의를 계속 요구하여야 한다. 사회 질서보다 사회 정의가 더 중요하다.
생각하고 저항해야 인간이다. 생각하지 않고 저항하지 않는 삶은 주인의 삶이 아니다. 존재를 남에게 맡긴 노예의 삶이다. 알베르 까뮈는 "나는 저항한다. 고로 우리는 존재한다"라 말했다. 저항은 창조이다. 창조는 저항에서 나오고, 그 뿌리는 분노에 있기 때문이다. 내 말이 아니다. <<분노하라>>는 책을 쓴 스테판 에셀이 한 말이다. 불의, 불평등, 전체주의, 비인간화 등에 대한 분노가 사회를 건강하게 만든다. 분노해야 할 일에 의연히 분노해야 한다. 어리석음을 걷어내고 뜨거운 가슴과 차가운 이성으로 세상을 바라봐야 한다. 그게 인문 정신이다.
3
나는 나를 지키는 방법으로 매일 보내주시는 한 신부님의 매일 복음을 묵상하며, 생각의 근육을 키운다. 오늘 말씀은 우리가 너무 잘 아는 '오병이어' 이야기이다. "저녁때가 되자 제자들이 예수님께 다가와 말하였다. “여기는 외딴곳이고 시간도 이미 지났습니다. 그러니 군중을 돌려보내시어, 마을로 가서 스스로 먹을거리를 사게 하십시오.” 예수님께서 “그들을 보낼 필요가 없다. 너희가 그들에게 먹을 것을 주어라.” 하고 이르시니, 제자들이 “저희는 여기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밖에 가진 것이 없습니다.”
이 복음의 장면을 박태훈 신부님이 다음과 같이 잘 그렸다. 군중은 예수님을 따르고자 나섰지만 이미 지칠 대로 지쳐 있었고, 해마저 뉘엿뉘엿 저물고 있다. 설상가상으로 모두 배까지 고픈 상태였다. 이에 제자들은 말한다. “군중을 돌려보내십시오.” 어쩌면 그건 아주 현실적인 말이었다. 우리도 자주 그렇게 말하곤 한다. 내가 줄 수 있는 게 없다고, 내 손에 남은 것이 너무 적다고, 그러니 누군가의 배고픔은 내 일이 아니라고. 그런데 예수님은 “너희가 그들에게 먹을 것을 주어라"라고 말씀하신다. 없는 것을 내놓으라고 하신 게 아니라 우리가 가진 작은 것,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져오라고 하신다.
이렇듯 우리가 건네는 사랑은 크거나 대단하지 않아도 된다.
▪ 지친 사람에게 건네는 말 한 마디,
▪ 밥은 먹었냐는 물음,
▪ 조용히 곁에 머물러 주는 마음이면 충분하다.
너무 작아 보여 아무것도 아니게 느껴질지라도, 하느님 손에 놓이면 그건 누군가의 지친 하루를 살리는 생명의 양식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생명의 양식'에 방점을 찍는다. 오천 명 가량의 장정을 먹인 엄청난 양의 빵처럼 풍성한 양식이었기 때문이다.
카톨릭 사회 교리에서는 이것을 "연대성의 원리"라고 말한다. 모든 사람이 사회 구성원으로써 서로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으니 인류 전체의 행복과 불행에 대해 ‘함께 책임'을 져야 한다는 뜻이다. 나와 이웃은 서로 아무런 연도 없는 남 남 같지만, 이 세상이라는 ‘한 배'를 타고 가는 동료이자 형제들이다.
▪ 세상에 있는 재화에는 한계가 있기에 내가 배불리 먹는 동안 누군가는 굶주릴 수 밖에 없다.
▪ 내가 유행 따라 취향 따라 멀쩡한 옷을 버리고 새 옷을 사 입는 동안 누군가는 제대로 된 옷 한 벌 없이 헐벗게 된다.
▪ 나의 무관심 때문에 아이들이 폭력에 노출되거나 제대로 꽃을 피워보지도 못한 채 짧은 생을 마감하고 있고,
▪ 내가 어른으로서 좋은 본보기를 보이지 못했기 때문에 철 없는 청소년들이 '촉법 소년' 운운하며 당당하게 범죄를 저지르고 있다.
▪ 이 세상이 아름답지 못한 것에는 내 책임도 있으며, 이 세상에 부정과 불의 그리고 불공평이 만연한 것은 내 잘못이기도 하다.
복음에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신다. “너희가 그들에게 먹을 것을 주어라.” 이는 하느님께서 우리 삶에 놀라운 기적을 일으키시기 위해서는 ‘재료'가 필요하다는 뜻이다. 그 재료란 우리가 하느님께 대한 믿음으로, 그리고 이웃에 대한 사랑으로 아낌없이 내어 놓는 봉헌물이다. 무엇을 얼마나 내어 놓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부족할지라도 사랑과 자비를 실천하고자 하는 우리의 마음이 중요한 것이다. 그런 우리의 마음에 하느님의 은총이 더해진다면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 만으로도 온 세상 사람들을 배불리 먹이기에 충분할 것이다.
그런 점을 잘 알고 계셨던 예수님은 제자들이 가지고 있던 음식들을 가져오라고 하신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 아버지의 뜻에 따라 어떤 일을 하실 때 이것저것 재고 따지는 ‘계산’ 같은 건 하지 않으셨다. 장정만도 오천 명이 넘는 군중을 배불리 먹이려면 몇 개의 빵이 필요한지, 그만큼의 빵을 사려면 돈이 얼마나 들겠는지 그런 건 굳이 생각하지 않으신 거다. 예수님께서 세상 이치에 어둡거나 대책 없는 분이어서 가 아니다. 그런 것들을 생각하다 보면 의구심과 걱정이 커져 사랑의 실천을 망설이게 되기 때문이다. 내가 가진 게 많으면 많은 대로, 적으면 적은 대로 이웃과 함께 하는 것이 나눔이다. 또한 어차피 우리 인간의 능력과 조건은 항상 부족하기 마련이다. 그러나 그것을 하느님 앞에 사랑으로 봉헌하면 하느님께서 당신 은총으로 그 부족함을 채워 충만하게 만드신다. 물질적인 ‘음식'에 불과했던 빵과 물고기가 영적 ‘양식'으로 바뀌는 순간이다. 예수님은 이런 거룩한 변화를 이루시기 위해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손에 들고 하늘을 우러러 찬미의 기도를 드리신 거다.
그리고 거룩하게 변화된 양식을 군중에게 나누어 주시는데, 당신께서 직접 나누어 주시지 않고 제자들을 통해서 군중에게 나누어 주게 하신다. “너희가 그들에게 먹을 것을 주어라"라는 예수님의 말씀이 이루어지는 순간이다. 제자들은 이 일을 통해 큰 깨달음을 얻었을 것이다.
▪ 사랑과 자비를 실천함에 있어 ‘양'의 많고 적음은 중요하지 않다는 것을,
▪ 우리 마음 안에 내 것을 기꺼이 나누고자 하는 진심만 있다면 하느님께서 당신 은총으로 우리의 부족함을 채워 충만하게 만들어 주신다는 것을,
▪ 그렇게 모두가 함께 배불리 먹는 기쁨을 누리는 것이 하느님께서 바라시는 뜻이라는 것을.
이것이 빵과 물고기의 기적이 주는 교훈이다. 기적, 즉 하느님의 은총과 사랑은 모든 사람이 함께 누려야 참으로 의미 있는 것이 된다. 우리가 각자 가진 것을 조금씩 만 서로 나눈다면 부족함 없는 세상이 될 것이다. 우리가 다른 사람을 위해 조금씩 만 양보하고 배려한다면 이 세상에는 모두가 앉기에 충분한 자리가 있다. 그러니 나만 생각하는 개인주의나 이기심은 버리고 사랑으로 서로 연대해야 한다. 함승수 신부님의 강론을 갈무리한 것이다.
4
오늘도 <<주역>> 이야기를 좀 더 이어간다. '운명'을 알고, 가고자 하는 바가 분명해야 하늘도 돕는다는 거다. '운(運)'의 어원은 '군대가 가는 것'이다. 군대가 군사 작전에 따라 이동할 때는 약속된 시간에 정해진 장소에 도달하는 것이 절대적인 사명이다. '운'은 이처럼 예정된 시간에 목적지에 도달한다는 의미를 글자에 담고 있다. '운(運)'이 들어간 단어들을 보면, 해운업, 운수업, 운행 등이 있다. 예정된 시간에 목적지에 도달하도록 움직이는 것이다.
'운'이 좋은 경우는 목적을 예정대로 달성한 경우이다. 그러니까 '운'을 정의하면, '목적을 예정대로 달성하는 힘'을 말한다. 그래 '운이 좋다, 나쁘다'보다는 '운이 강하다, 약하다'라는 표현이 보다 부합한다. 운이 강하다는 것은 외부적 상황에도 불구하고 자신에게 예정된 목적을 그대로 수행할 수 있다는 거다. 운이라는 이루고자 하는 일을 예정대로 달성해 내는 힘이다. 그러니 운이 강하다는 것은 그럼 힘이 세다는 말이다.
그러나 이 세상에 좋기만 한 것은 없다. 좋은 것에는 대가가 따르는 것이 세상의 이치이다. 이 세상의 만물은 '기립지물(氣立之物)'과 '신기지물(神機之物)', 이렇게 둘로 나뉜다. '기립지물'은 바위나 나무처럼 '기운에 의해 그저 서 있는 존재'를 말하고, '신기지물'은 곰과 사람처럼 '정신이 기틀(몸) 속에 들어선 존재'를 말한다. 신기지물인 사람은 기껏 100년을 사는데, 기립지물인 나무는 1000년을 산다. 그 이유는 나무가 스트레스를 받지 않기 때문이다. 곰과 사람은 굴러오는 바윗돌을 피할 수 있지만, 대신 언제나 긴장하고 있다. 바윗돌처럼 사방에서 자신을 위협할지 모르는 존재를 경계하느라 스트레스를 받는다. 하지만 나무는 이런 스트레스를 받지 않는다. 이루고자 하는 일을 예정대로 달성해 내는 강한 운을 부여 받은 사람은 그만큼 스트레스에 시달려야 한다. 운이 강할수록 일찍 죽는 이유가 아닐까?
명(命)은 人(삼합 집)과 口(입 구), 卩(병부 절)이 결합한 모습이다.
▪ 人은 '피라미드 모양으로 생긴 고대의 신정'이고,
▪ 口는 '신전에서 들려 오는 하늘의 목소리'를 나타내며
▪ 卩은 원래 모양이 㔾으로 무릎을 꿇고 있는 사람을 그린 것이다.
그러니까 명(命)자는 신전에서 들려오는 하늘의 명령을 무릎을 꿇은 채 귀 기울이는 사람을 그린 것이라 한다. 그러므로 명은 원래 하늘이 내린 천명(天命)을 뜻한다. 또한 사람은 누구나 태어날 때부터 하늘로부터 무언가 받은 명이 있고, 이를 이루라고 주어진 것이 사람의 '목숨'이라는 뜻에서 '목숨 명'자로도 쓰인다.
그럼 운명은 길흉의 질곡을 뚫고 자신에게 부여된 명을 운전해 가는 것이다. 운명의 사전적 정의는 '인간이나 만물의 삶을 지배하는 초인적인 힘 또는 그 힘에 의해 미리 정해진 목숨이나 처지' 이다. 핵심은 '움직임'과 '목숨'의 결합으로, 노력이나 의지에 따라 바뀔 수 있는 '변화하는 운수(運)'와 정해져 있어 바꿀 수 없는 '불변의 목숨(命)이라는 이중적 의미를 지닌다.
운명(運命)과 숙명(宿命)은 다르다. 운명은 움직이고 바뀔 수 있는, 앞에서 날아오는 화살이다. 숙명은 '잠잘 숙(宿)'이 붙어 멈추고 정지된 상태를 뜻하며, 태어난 환경, 부모, 성별, 죽음처럼 바꿀 수 없는 타고난 운명을 의미한다.
어쨌든 운이란 이루고자 하는 목적을 예정대로 달성하는 힘이다. 그러니까 하늘이 내린 명을 이루라고 부여된 힘이 운(運)인 것이다. 사람은 자신에게 부여된 강한 운인 '갑기토운(甲己土運)'의 힘을 발휘해서 길흉을 뚫고 자신의 명(命)을 향해 나가가야 흐는 것이다. 운(運)이 명(命)으로 건너가야 하는 거다.
'갑기토운(甲己土運)'은 동양철학에서 사람에게 부여된 가장 강력한 '운(運)'을 의미한다. 하늘의 기운(甲, 己)이 땅(土)으로 내려와 사람에게 깃든 운으로, 자신의 뜻을 이루고 목적을 달성하게 하는 힘을 상징한다. 이는 하늘과 땅 사이에서 최고로 강한 힘을 가진 존재가 사람이라는 것을 강조하는 개념이다. 다시 말하면, 만물을 길러내는 eowll의 중심 토(토) 기운처럼, 인간이 하늘과 땅 사이에서 가장 강한 생명력과 조화의 힘을 부여 받았음을 의미한다.
아모르 파티(amor fati, 운명을 사랑하라)에는 하나의 조건이 있다. 그건 바로 명(命)이 있음을 아는 것이다. 자신에게 주어진 명이 있음을 알 때 가시밭길을 기꺼이 걸을 수 있는 것이며, 그럼에도 자신의 운명을 사랑할 수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계상 상전>> 제4장은 더 나아간다. "명을 알고, 사람들과 어울리되 휩쓸리지 말고, 명을 즐기되 우려하지 마라"고 한다. 원문은 "방행이불류, 낙천지명 고불우(旁行而不流, 樂天知命 故不憂)"이다. 말 그대로 해석하면, '곁에서 나란히 행하되 휩쓸리지 않는데도 불구하고, 하늘을 즐기고 명을 알고 있으니, 고로 우려하지 않는다'가 된다.
5
연중 제18주일로 말씀은 <마태오 14,13-21>로 "오천 명을 먹이시다" 이다.
그때에 세례자 요한의 죽음에 관한 소식을 들으신 예수님께서는 배를 타시고 따로 외딴곳으로 물러가셨다. 그러나 여러 고을에서 그 소문을 듣고 군중이 육로로 그분을 따라나섰다. 예수님께서는 배에서 내리시어 많은 군중을 보시고 가엾은 마음이 드시어, 그들 가운데에 있는 병자들을 고쳐 주셨다. 저녁때가 되자 제자들이 예수님께 다가와 말하였다. “여기는 외딴곳이고 시간도 이미 지났습니다. 그러니 군중을 돌려보내시어, 마을로 가서 스스로 먹을거리를 사게 하십시오.” 예수님께서 “그들을 보낼 필요가 없다. 너희가 그들에게 먹을 것을 주어라.” 하고 이르시니, 제자들이 “저희는 여기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밖에 가진 것이 없습니다.” 하고 말하였다. 예수님께서는 “그것들을 이리 가져오너라.” 하시고는, 군중에게 풀밭에 자리를 잡으라고 지시하셨다. 그리고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손에 들고 하늘을 우러러 찬미를 드리신 다음 빵을 떼어 제자들에게 주시니, 제자들이 그것을 군중에게 나누어 주었다. 사람들은 모두 배불리 먹었다. 그리고 남은 조각을 모으니 열두 광주리에 가득 찼다. 먹은 사람은 여자들과 아이들 외에 남자만도 오천 명가량이었다.
<밥이 밥에게>
“그들을 보낼 필요가 없다. 너희가 그들에게 먹을 것을 주어라.”(마태 14,16)
내가
먹이는
나의
벗이여
내가
밥이듯
그대가
밥이니
내가
먹이듯
그대가
먹이게나
6
지금 주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네가 가진 작은 마음이면 충분하다.”
2026/8/2/연중 제18주일
마태오 복음 14장 13-21절
⠀
내가 가진 것
오늘 복음의 장면을 그려봅시다. 군중은 예수님을 따르고자 나섰지만 이미 지칠 대로 지쳐 있었고, 해마저 뉘엿뉘엿 저물고 있습니다. 설상가상으로 모두 배까지 고픈 상태였지요. 이에 제자들은 말합니다. “군중을 돌려보내십시오.” 어쩌면 그건 아주 현실적인 말이었습니다. 우리도 자주 그렇게 말하곤 합니다. 내가 줄 수 있는 게 없다고, 내 손에 남은 것이 너무 적다고, 그러니 누군가의 배고픔은 내 일이 아니라고. 그런데 예수님은 “너희가 그들에게 먹을 것을 주어라”라고 말씀하십니다. 없는 것을 내놓으라고 하신 게 아니라 우리가 가진 작은 것,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져오라고 하십니다. 이렇듯 우리가 건네는 사랑은 크거나 대단하지 않아도 됩니다. 지친 사람에게 건네는 말 한 마디, 밥은 먹었냐는 물음, 조용히 곁에 머물러 주는 마음이면 충분합니다. 너무 작아 보여 아무것도 아니게 느껴질지라도, 하느님 손에 놓이면 그건 누군가의 지친 하루를 살리는 생명의 양식이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오천 명가량의 장정을 먹인 엄청난 양의 빵처럼 풍성한 양식 말입니다. 박태훈 마르티노 신부(대구대교구)/생활성서 2026년 8월호 '소금항아리'에서⠀
다른 글들은 블로그에서 볼 수 있다. 네이버에서 '우리마을대학협동조합'를 치시면, 그 곳의 출판부에서 볼 수 있다. 아니면, 나의 블로그 https://pakhanpyo.tistory.com 이나 https://blog.naver.com/pakhan-pyo 또는 https://pakhanpyo.blogspot.com 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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